17~18세기 충청 지역 소론계 서원과 魯岡書院魯岡書院은 파평윤씨가의 尹煌, 尹文擧, 尹宣擧, 尹拯을 제향한 서원으로 1675년 윤황의 위패를 모시며 창건을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1600년대 후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윤증이 소론계를 주도하게 되자 노강서원은 소론의 首院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노강서원 건립 후 충청지역 곳곳에 우계 성혼의 학맥을 이은 사족들에 의해 소론계 서원이 건립되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윤증, 崔錫鼎, 南九萬, 李世龜, 趙克善 등 당대 소론계 명유들이 머물며 재지사족에게 영향을 끼친 곳, 노소분열 이전 영남계(북인 남인) 사족의 존재가 확인되는 곳이란 공통점이 있다. 즉, 애초에 서인 일색의 정체성을 가진 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계의 주도권을 노론이 잡게 되면서 노강서원은 점차 파평윤씨와 니산 사족들의 활동 공간으로 위축되어 갔다. 노론이 충청지역 서원에 영향력을 강화하며 정치색이 없는 서원까지 포섭해 비노론계 서원을 압박하자 소론 서원은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니산 인근에 노론 서원이 경쟁적으로 세워졌고, 청주와 진천에서는 향전이 벌어졌으며, 제향인의 관작 추탈・철액 논의 등 정치적 견제 속에서 점차 약화되어갔다.이런 가운데 노강서원이 명맥을 유지하며 고종 대에 대대적인 서원 훼철까지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파평윤씨가에서 자제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계속해서 관료를 배출함으로서 중앙정계 내의 지지기반을 유지하고 소론의 수원이라는 상징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다른 모든 소론계 서원은 훼철을 피할 수 없었다.노론의 충청 소론 탄압

17~18세기 충청 지역 소론계 서원과 魯岡書院


노론과 소론의 분화

서인의 분파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미 단초를 보였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보수파인 송시열을 비판하는 분파가 일어났다.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으로 불화를 일으킨 윤증을 비롯하여, 남구만, 박세채가 중심이었다. 그리고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 중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노론과, 타협적 온건론을 주장한 분파가 대립했는데 이를 소론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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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이란 붕당을 좋지 않게 보는데, 이는 남인이나 북인에 비해 너무 손속이 잔인하고 매정했기 때문이야. 일례로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은 서인을 축출했음에도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그저 유배 보내는 정도였지. 그러나 경신환국에서 승리한 서인은 곧바로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시작했어. 물론, 남인 축출의 계기가 ‘역모’가 원인이긴 했지만 어차피 사정 다 알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정쟁에서 그 정도로 잔혹했을 필요가 있었냐 이거지.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 송시열을 비롯해서 2차 예송논쟁에서 패해 유배를 다녀온 중진들은 남인을 잔인하게 숙청하길 원했어. 반면 전편에서 언급했던 윤선거의 아들 윤증은 어차피 다 같은 사림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며 화해노선을 가길 원했지. 결국 송시열을 비롯한 노장 서인들이 윤휴, 오정창 등을 죽음으로 몰아넣자 윤증을 비롯한 젊은 서인들은 실망과 더불어 분노를 느끼게 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 박세채를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서인은 거의 분열을 확정짓게 돼. 숙종 20년, 갑술환국을 단행되자 이제 남은 일은 남인의 처리였지. 이 남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 수위를 두고 서인이 둘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는데,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이 이 일로 크게 척을 지게 돼. 노론은 남인을 뿌리까지 뽑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소론은 아무리 정적관계라 할지라도 그렇게 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

장희빈 처리 문제와 서인의 분열,<노론(남인을 강력하게 탄압하려는 세력:우두머리 송시열)과 소론(노론에 반대하는 세력) ><폄> : 네이버 블로



노론의 영남 침투 막으려다 경주권 남인들 대거 치죄된 사건


당시 영남 남인의 처지는 영조 9년(1733) 소론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의 말에 역력하다. “영남은 조정이 버려둔지 거의 40여년에 이르러 명현의 후예라도 향촌의 품관으로 떨어져 농부 되기를 달게 여깁니다. 모두 말하기를, ‘우리가 당론에 치우치면 역적이라 하고, 과거를 보면 조정에서 버리니, 차라리 농부가 되어 땅이나 파먹고 사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영남 남인들은 당론을 내세우면 역적으로 몰리고, 과거를 보면 노론이 독식하여 탈락하니 농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형편이었다. 조현명은 영조 초기에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적이 있으니, 영남의 사정을 직접 견문한 바를 아뢴 것이다. 그는 소론이지만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남인과도 넓게 교유한 인물이어서 서슴없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림사화는 ‘계림(경주)의 사림이 화를 당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경주는 퇴계가 존숭한 회재 이언적의 본향으로 영남 경주문화권의 중심이다. 계림사화는 경종 2년(1722)에 바로 이 경주권 남인 유생들이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宋時烈) 영당을 훼철했다가 대거 치죄된 사건을 말한다. 이 영당은 인산영당(仁山影堂)인데, 숙종 45년(1719)에 경주와 가까운 장기의 죽림서원에 있던 우암의 영정을 경주에 옮겨 봉안한 곳이다. 

이를 세운 것은 노론정권이 경주권 유생을 앞세워 영남지역에 친(親)서인 세력을 부식하려는 서세동점(西勢東漸) 책동이었다. 숙종 이후 영남에 이이·김장생·송준길 등 기호학파의 거물들을 제향하는 서원이 상당수 건립되었으니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이러한 책동을 경주권 남인이 간과할 리 없었다.


◇계림사화의 전말

소론이 정권을 잡고있던 경종 2년에 노론파 유생들이 경주에 송시열의 인산영당을 세웠다. 이때 소론인 경주부윤 권세항과 울산부사 홍상빈이 경주권 남인 유생 1백여 명을 동원하여 훼철해 버렸다. 노론파 유생들이 저항했지만, 권세항은 50여명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군사와 승도 1천여 명을 풀어 단번에 철거해버렸다. 이 와중에 노론파 유생 한시유가 혹심한 장형(杖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정권이 확립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노론이 이 사건을 간과할 리 없었다. 영조 원년(1725)에 채명보 등 경주의 노론파 유생들이 사건의 전말을 상소했고, 이에 따라 조정은 권세항과 홍상빈을 삭탈관직하고, 남인 유생들을 대거 형벌을 가하고 유배형에 처했다. 남인 유생들은 경주 육영재(育英齋)의 하과(夏課)에 참가한 영천·경주·울산의 28명이었다.


이처럼 계림사화는 노론정권이 남인의 근거지 영남에 친서인 세력을 부식시키려는데 대한 남인 유생들의 반발이었다. 영조가 노론의 공작과 추대에 의해 즉위했으므로 이후에도 남인은 등용되지 못하고 노론이 소론과 대립하면서 정국을 주도하였다. 노론정권이 계속되면서 영남 차대는 계속되었고, 계림사화는 남인세력의 근거지 안동으로 파급되어 커다란 분란을 야기하였다. 영조 14년(1738) 김상헌(金尙憲, 1570~1562)을 제향하는 서원 훼철사건이 그것이다. 

서원은 안동의 서인 동조자가 가담하고 노론계 유생이 지원하여 건립되었다. 그러나 예견한대로 안동의 남인 유생들이 묵과할 리 없었고, 이들은 준공된 서원을 훼철해 버렸다. 노론계의 경상도관찰사 유척기, 안동부사 어유룡이 관권을 동원하여 치죄했지만 이 사건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커다란 분쟁을 야기하였다. 이처럼 계림사화는, 울산 사림 이광희가 참여한, 경주문화권 유생들이 노론세력의 영남 침투 공작을 타파하려 한 거사였던 것이다. 

[울산史 에세이]노론의 영남 침투 막으려다 경주권 남인들 대거 치죄된 사건 < 울산史 에세이 < 경상기획특집 < 기사본문 - 경상일보


중앙집권세력들인 노론은 남인의 정계 진출 기도를 하면서, 영남지역을 자기 당파의 정치적 기반으로 만들기 위하여 회유와 탄압의 정책을 병행하였다. 영조년간 노론이 정국 주도권을 잡으면서 노론계 감사나 수령 등을 부임시키면서 영남 남인의 향권에 대한 진압과 침탈을 본격화하였다. 노론의 영남에 대한 이같은 시책 결과 향촌사회에서 지금까지 서원이나 향교를 중심으로 향론을 주도해 왔던 전통 남인세력에 대항하는 세력의 입지를 넓히게 되었고 양자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노론의 영남 침투시도

17~18세기 영남지역 노론의 동향 - 송시열 문인가문을 중심으로- - 자유 게시판 - 의성김 원동파


국힘에 한동훈 이준석 밀어넣는 시도 원조격

영남 병신 취급하고 한동훈 통해서 쓰레기들 공천하고 비례 뿌리는 것도 노론이 원조

우연히도 한동훈은 청주 노론 계열이고, 윤석열은 논산 소론 계열


죽음을 동반한 숙청 반대하는 소론 정치도 義를 중시했기 때문이고 

소론에서 양명학 같은 실용 학문, 강화학파 나온 것도 높게 평가

은근 북인·남인 계열과 비슷한 게 소론·북인·남인이 각 마한·변한·진한에 대응되는 것 아닌지 

확실히 삼한이 비슷한 느낌


반면 노론은 유독 강경하고 똥고집으로 비타협적인 게 이북 느낌

청주의 오송분기 깽판도 영남이나 유들한 충남에선 있을 수 없는 일

결국 오송분기가 이긴 것처럼, 조선에서도 NL 노론이 이긴 것으로 보이고

충북에서 충북동지회 나온 것도 우연 아닌 것 아닌지


하여간 노론이 충청 소론이고 영남 남인이고 전국에 어그로 끌고 다니다가 망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