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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라는 말은 현대에 매우 당연하게 쓰입니다. 대한민국 중학교·고등학교의 도덕·사회 교과서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주제가 바로 인권이기도 하고요. 요컨대 인권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기본적인 권리’를 뜻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누구도 침해할 수 없으며, 천부성, 불가분성, 양도 불가능성이라는 성질을 가집니다.

‘모든 인간이 법 이전에 이미 존엄하다’라는 것이 바로 인권 사상을 꿰뚫는 가장 중요한 명제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짚어볼 것은 ‘모든 인간’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이라 말할 때, 우리는 누구를 포함시키고, 누구를 제외하는가? ‘인간’이라는 단어는 진정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주제입니다.

먼저 ‘인간’이라는 언어부터 해체해보겠습니다. 자크 데리다는 언어를 깊이 파고들어, 그 의미의 구조가 단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은 다른 개념과의 차이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선’은 ‘악’이 있을 때만 의미를 갖고, ‘법’은 ‘무법’을 전제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모든 단어는 그것이 아닌 다른 단어에 의해, 즉 단어들간의 '차이'에 따라 정의되고, 그러한 정의는 의미의 가능성에 한계를 가지게 한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한한 자기복제가 될 뿐, 의미를 규정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의미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지연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그와 다른 단어에 의해서만 정의되는데, 그 다른 단어 역시 또 그와 또다른 단어로 이루어진 정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차이가 구별되는 방식은 바로 차연(différance)—즉, 차이이면서 동시에 의미가 끊임없이 미뤄지는 운동—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어떤 개념도 결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모든 의미는 다른 의미와의 관계 속에서 잠정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는 항상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연되어 차이 속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을 정의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이 아닌 것’을 상정하지 않고는 ‘인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타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타자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자신을 세우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인간’을 논한다는 것은 그저 허구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언어적 구조를 정치적 현실로 옮겨 놓은 인물이 바로 카를 슈미트입니다. 그는 모든 공동체가 스스로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어떤 경계를 세워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선 ‘우리가 누가 아닌지’를 알아야 하고, 결국 ‘우리’라는 정체성이 존재하기 위해선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언제나 배제의 논리를 함축하며, 정치의 본질은 대립과 차이의 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타자의 생성은 인간 사회의 필연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법 이전에 이미 존엄하다’라는 명제에 대해 다시 한번 되짚어보겠습니다. 여기서 ‘인간’이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인간’이 무엇이며, 더욱 근본적으로는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인권의 모태가 된 서양 형이상학은 데카르트적 인간관—즉, 인간을 “사유하는 주체(Cogito)”로 중심에 놓는 세계관—에서 기원합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은 인간을 존재에서 초월한 세계의 ‘주인’으로 만들었고, 칸트는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보는 동시에 인간의 존엄이 이성의 자율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결과적으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근거로 삼는 존재라고 상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도대체 인간이 ‘근거’가 될 수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는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주체(정신)와 객체(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것을 거부하고, 인간 존재는 언제나 이미 ‘세계와 얽혀 있음’을 강조하며, 주체와 객체의 외적 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인간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입니다.

데카르트 이후 철학은 인간을 ‘자기 안에서 완결된 주체’로 보았습니다. 즉, “나는 세상을 보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나의 인식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한다”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세계가 마치 인간의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대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던져진 존재(Geworfenheit)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왜’, ‘언제’, ‘어디에’ 태어날지 선택하지 않고, 다만 던져진 채로 ‘언어’, ‘문화’, ‘사회’ 등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즉, 인간의 존재는 세계로부터 독립적인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세계에 의존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얻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의 주인이 아니라,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은 의미를 ‘생산’하는 자가 아니라, 의미 앞에서 ‘열려 있는’ 자입니다. ‘인간’은 세계와의 얽힘 속에서 순간적으로 ‘드러난’ 존재에 불과하므로 ‘법 이전의 존엄’이라는 것은 존재 이전의 인간을 상상하는 오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 담론은 법 이전의 존엄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보장할 제도를 법 안에서 찾습니다. 결국 ‘법 이전의 존엄’은 법을 통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내적 모순을 품게 됩니다. 근대국가가 ‘법 이전의 인권’을 보장한다고 말할 때, 그 권리는 언제나 시민이라는 정치적 조건 안에서만 유효한데, 이는 인간이 언제나 법적·사회적 구조 안에서 인식되고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앞선 두 철학자의 논의를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슈미트는 ‘정치란 친구와 적의 구분’이라고 봤습니다. 정치는 언제나 경계를 세우고, 그 경계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확보합니다. “우리”를 정의하기 위해 반드시 “그들”이 필요하고, 이때 “그들”은 법과 권리의 바깥에 놓인 존재, 즉 배제된 자로서 정치의 조건이 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항상 역사적·언어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나타나므로, 법과 제도 밖에서 ‘순수하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기에 “법 이전의 존엄”이라는 인권 담론의 핵심은 성립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인간은 세계로부터 분리된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이미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슈미트와 하이데거의 사유를 가로지르며 탄생한 정치철학적 장치가 바로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입니다. 호모 사케르는 로마법에서 ‘죽일 수는 있지만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자’, 즉 법의 보호로부터 배제되었으면서도 동시에 법의 논리 안에 포섭된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는 법의 경계선 위에 놓인, 슈미트가 말한 “적”과 유사한 존재지만,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정치질서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으로 기능합니다.

또, 인간은 세계 속에서 던져진 존재(Dasein)이므로, 법이 인간을 규정함과 동시에, 인간은 법을 통해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호모 사케르는 바로 이 모순이 구체화된 형상입니다. 그는 존재하지만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자, “살아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죽은 자(Nuda vita)”입니다. 다시 말해, “법의 보호 밖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법의 질서 안에 묶여 있는 사람”입니다. 법 바깥으로 던져지되, 바로 그 배제를 통해 법에 붙들려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공동체는 어떤 대상을 바깥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그 대상을 자신의 질서를 확인하는 경계표로서 안에 묶어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외 상태의 일반화’야말로 공동체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원천입니다. “위험한 타자”—범죄자, 테러리스트, 난민, 외국인—를 설정하며 제재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법이 작동하는 매커니즘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법 이전에 이미 존엄하다”는 자유주의적 명제는, ‘누구를 시민으로 인정할 것인가’라는 정치적 결단을 은폐하며 ‘중립’이라는 환상을 강화합니다. 근대적 주권국가의 정상적인 통치기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인권’은 본래 인간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입니다. ‘인권’은 더 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연속적인 투쟁과 재정의의 장이며, ‘타자’는 단순히 배제된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거울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혐오’를 영원히 연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근본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혐오를 정당화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혐오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 인간의 질서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냐는 물음입니다.

和而不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