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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오늘날 우익 포퓰리즘의 부흥을 이끈 것은 ‘억압된 발화의 욕망’입니다. 들뢰즈의 언어를 빌리면, 이는 ‘억압의 탈코드화’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본질적인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하는가”, “이민자들은 일자리를 빼앗고 범죄를 저지르는가”와 같은 물음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사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질문의 구조 자체가 편향되어 있을 수도 있지요.

실제로 학계는 대체로 후자의 입장을 취합니다. 젠더 이분법은 근대 이후 형성된 사회적 구성물이며, 이민자들은 통계적으로 범죄나 일자리 측면에서 과장된 위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과학적 근거와 실증 자료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왜 ‘이민’이 서구 사회의 핵심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는지, 왜 “성별이 둘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자연 질서를 거스르는 일” 같은 주장에 대중적 공감이 형성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현대 민주주의가 이런 주장에 ‘토론’이 아니라 ‘검열’로 대응했다는 점입니다. 학문과 공론의 장이 충분히 열리지 못한 것입니다. 예컨대 성차(sex differences)에 관한 연구는 정치적 올바름에 위배될 우려로 자기검열을 낳았고, 인종·정체성 연구는 ‘색맹(color-blind)’적 태도를 표준으로 삼으면서 오히려 실재하는 차이를 은폐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제약은 사회적 해악을 방지하기 위한 윤리적 장치로서 정당화됩니다. ‘민주적 가치’를 위배하는 연구는 인간의 존엄을 침해할 위험이 있으니 규제되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진정으로 신뢰하는 체제라면, 비판을 봉쇄하기보다 그것을 견뎌내는 힘으로 자신을 증명했어야 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진리가 진리라면 논쟁 속에서 그 우월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체제는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지 못 했기 때문에, 실제 민주주의는 철학적 이상보다는 불안을 관리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적’을 무찌르는 것은 외부의 위협을 상정하고 억압함으로써 내부의 결속을 확인하려는 일종의 의례 행위로 기능했습니다.

상대에게 ‘혐오’나 ‘차별’의 프레임을 씌우는 순간, 공론장은 닫히고, 그 빈자리는 감정이 채웁니다. 이때 감정은 단순한 비이성이 아니라, 배제된 주체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반지성주의는 무지의 결과가 아니라, 배제된 주체가 품은 복수심의 언어적 형태로 읽어야 합니다.

진실은 언제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구성되며, 특정 제도나 시스템이 독점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진실이 제도화되는 순간, 그것은 권력이 되고, 권력은 언제나 대항 신화를 낳습니다. 오늘날의 우익 포퓰리즘은 바로 그 대항 신화의 정치적 형식입니다.

사람들은 논리보다 감정적으로 일관된 서사 속에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행동경제학과 인지과학은 이러한 정서적 판단 구조를 실증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유, 평등, 인권, 존엄 같은 말이 ‘자명한 진리’로만 기능하고 그 반대편의 언어가 ‘소음’으로 간주될 때, ‘보편적 가치’는 더 이상 논박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 불가능한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감춰진 진실’이라는 구원 서사가 다시 작동합니다.

공적 언어가 지나치게 완결된 체계로 정착하면서, 새로운 상처와 분노를 담을 공간은 사라졌습니다. 우익 포퓰리즘은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그것은 논리의 혁명이 아니라 정서의 복원이었습니다. 기존 정치가 감정의 언어를 “비이성적”이라 배제했을 때, 포퓰리즘은 그 감정을 자기 언어로 재번역했습니다. “옳은 말”보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말”이 정치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트럼프를 지지한 이들이 모두 음모론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진지하게 그들이 모두 큐아논이나 딥스테이트 같은 이야기를 신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금지된 언어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고, 음모론은 ‘은폐된 진실의 언어’로 기능하며 흡입력을 발휘합니다.

이제 정치는 합리의 장이 아니라 정동의 투쟁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대 민주주의가 직면한 새로운 풍경입니다.

和而不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