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은 온갖 희귀 광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최빈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불행의 기원은 벨기에의 식민 통치와 독립 직후 일어난 콩고 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은 면적이 남한의 23배에 인구가 1억명에 달하는 대국이다. 이 나라는 예로부터 상아와 고무는 물론이고 구리와 우라늄, 콜탄과 코발트의 매장지로 유명했고, 이런 풍부한 자원 덕분에 기대치가 컸다. 그러나 오늘날의 콩고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다.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다. 독립 직전 콩고는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식민지들 중에서는 잘 살고 미래가 밝은 편이었다. 그러나 식민 시대의 부정적인 유산과 정치인들의 잔인한 왕좌의 게임(한 명은 진짜로 군주를 자칭했다), 옛 주인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이 맞물려 거대한 정치 위기를 탄생시켰고, 이는 끔찍한 결말로 끝났다.
오늘날 콩고의 기원은 1885년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에서 출발한다. 탐욕스러운 군주였던 그는 거의 서유럽만큼 거대한 콩고 땅을 정식 국가도 아니라 자신의 사유지인 '콩고 자유국'으로 삼았다. 레오폴드는 처음에는 상아와 목재 같은 자원을 수탈했고, 나중에는 더 수익성이 좋던 고무 산업에 집중했다. 현지인들은 노예나 다름없이 다뤄졌으며, 노동 할당량을 못 채울 시 손목이 잘려나가기도 했다. 레오폴드의 폭정으로 최대 수백만명의 콩고인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레오폴드의 만행은 결국 세상 밖에 알려졌다. 유럽인들은 야만적인 콩고 통치에 대해 경악을 감추지 못했고, 콩고 자유국을 배경 삼은 조지프 콘래드의 유명한 소설 ‘어둠의 심연’은 당시 유럽인들이 받은 충격을 보여준다. 국제적 비난을 견디지 못한 레오폴드는 콩고 자유국을 포기했고, 입헌군주제던 벨기에의 민간 정부가 콩고를 자국의 국왕에게서 구매해 대신 경영했다.
벨기에 정부는 레오폴드보단 나을지언정 여전히 동시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보다 끔찍한 식민지 운영력을 선보였다. 정부가 행정과 공권력을, 교회가 교육과 사소한 복지를, 채광 회사가 경제를 도맡았다. 일반 콩고인들은 정치적 권한은 물론이고 토지 소유나 자유로운 이동의 권리마저 없었으며 각종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대학 교육은 신학을 제외하면 금지되었고, 본국 유학마저 불가능했다. 흡사 중세 유럽을 방불케 하는 사회가 돌연히 20세기 콩고에서 부활했다.
그러나 벨기에 콩고 정책은 후반기에 들어서 변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벨기에는 본격적으로 식민지 개발에 나섰다. 이 당시 콩고 동남부의 카탕가 지역에서 구리와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각종 광물이 발견되었고, 광산업이 콩고 경제 개발을 견인했다. 1950년대 콩고 경제는 매년 평균적으로 5.2% 성장했고, 제조업 역시 아프리카에서 제일가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흑백격차와 빈부격차는 컸지만, 콩고인들은 평균적으로 타국 흑인들보다 생활 수준이 높았다.
이런 경제 발전의 과실로 소수의 흑인 엘리트층이 탄생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그저 체제에 순응하면서 벨기에인에게 인정 받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 엘리트층처럼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자치와 독립 담론이 오가면서 콩고 사회가 요동치고 있었다.
이 시기 가장 두각을 드러낸 세 인물이 있었다. 조제프 카사부부는 서부의 수도 레오폴드빌(현 킨샤사)을 중심으로 콩고 자치 운동을 벌였다. 북동부의 스탠리빌(현 키상가니)에서는 파트리스 루뭄바가 완전 독립을 요구하며 인기세를 몰았다. 동남부 카탕가의 엘리자베스빌(현 루붐바시)에서는 지역 토호 모이즈 촘베가 카탕가 자치를 요구하면서도 벨기에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지지했다.
콩고인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반식민 운동이 활발해졌다. 콩고 전역에서 시위와 폭동이 발생했고, 종족 간의 분쟁도 덩달아 일어났다. 벨기에는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여력이 부족했다. 벨기에는 콩고가 무정부 상태로 치닫거나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킬까 우려했고, 결국 식민지 정책을 전면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루뭄바와 카사부부, 촘베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과의 회의 끝에, 콩고는 1960년 6월 30일에 독립하기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벨기에 정부는 순순히 콩고의 지배권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콩고의 정치인들 중 선거를 경험하거나 의정 활동을 해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1400명의 고위 관료 중 콩고인은 겨우 두 명이었고, 콩고 전체를 이 잡듯이 뒤져봐도 흑인 공학자는 4명, 의사는 3명, 변호사는 1명에 군 장교는 한 명도 없었다. 벨기에의 우민화 정책은 콩고의 완전한 자립 가능성을 매우 희박하게 만들었다.
벨기에는 콩고가 외형적 독립을 쟁취하더라도 여전히 자국의 수중에서 놀아나도록 조종할 생각이었다. 총선에서 친벨기에 온건파들을 지원해 당선시키고, 전문직을 차지하고 있는 벨기에 백인들도 이용해 콩고인들에게 지배력을 계속 행사할 작전이었다. 벨기에 내부에서는 이 책략을 콩고 내기라고 불렀다.
하지만 콩고 내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벨기에 강경파던 파트리스 루뭄바는 뛰어난 연설력과 반벨기에 정서, 그리고 국민 통합 촉구를 통해 여러 콩고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그의 거점 스탠리빌 일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루뭄바의 정당은 총선에서 전체 의석의 4분의 1을 얻었고, 기타 정당들과의 연합을 통해 정부를 꾸리는데 성공했다. 카사부부는 실권 없는 대통령으로 추대되었고, 루뭄바가 행정부의 수반인 총리에 임명되었다.
콩고 독립 당일이던 6월 30일, 벨기에의 보두앵 왕은 독립 축하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는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사실상 모욕적인 훈계에 가까웠다. 벨기에 국왕은 자신의 조상인 레오폴드 2세의 업적을 찬양했고, 콩고인들의 국정 운영 능력을 의심하면서 밸기에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게 확실할 때까지 개혁을 자제하라고 말했다.
격노한 루뭄바는 자신의 연설에서 즉석으로 벨기에의 식민 통치를 비난하는 내용을 추가해 큰 호응을 얻었다. 모욕당했다고 느낀 보두앵 역시 분노했고, 이것은 이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의 전조곡이었다.
독립 5일 차인 7월 5일, ‘콩고 위기’의 신호탄이 터졌다. 콩고군의 일반 사병들이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자신들을 여전히 하대하는 백인 장교단과 벼락 출세한 흑인 정치인들에게 분노해 있었다. 공격 대상은 주로 백인 거주민들과 흑인 엘리트층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루뭄바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화살을 백인 장교진에게 돌렸다. 그는 모든 백인 장교들을 해임한 다음 일반 흑인 병사들을 그 자리로 진급시켜줬다. 특히 참모총장 자리에는 콩고인이 진급 가능한 최대 계급이던 선일하사관 출신 조제프 모부투를 임명했다. 폭동의 열기는 점차 식었으나, 백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계속되었다. 수백명의 백인들이 죽거나 강간당했고, 수많은 이들이 콩고를 탈출했다.
벨기에는 백인들을 보호하겠다면서 군사 파병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앙심을 품고 있고 이들의 의도를 의심한 루뭄바는 거절했다. 그러자 벨기에는 그를 무시한 채 병력을 보내 레오폴드빌 공항을 점거하고는 백인들의 탈출을 지원했다.
문제는 이들은 더 나아가 콩고 병사들의 무장을 제멋대로 해제시키고, 주요 요충지를 확보했으며, 일부 콩고 병사들에게 공습을 가했고, 심지어 한 해안 도시를 해군력을 동원해 포격했다. 명백한 주권 침해 행태에 격노한 루뭄바는 단교를 선언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콩고와 벨기에는 이미 전쟁 상태라고 선포했다.
독립 12일 차인 7월 11일, 위기가 완전히 폭발했다. 카탕가의 모이즈 촘베가 이 지역 경제를 지탱하던 벨기에 광업 회사 우니옹 미니에르(현 유미코아) 및 다른 유럽 사업가들의 부추김을 받아 카탕가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벨기에는 이 사실을 처음에 몰랐으나 곧 자신들의 이익에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브뤼셀 정부는 카탕가의 광업 자산을 지키는 한편 카탕가를 이용해서 콩고에 친-벨기에 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 해임되거나 폭동으로 탈출한 수많은 백인 장교와 관료들이 카탕가에 합류해 힘을 더했고, 반식민 세력 억제를 노리던 포르투갈과 로디지아 그리고 남아공의 백인 정권들도 촘베를 지원했다.
자국 세입의 60%를 내는 지역의 독립을 용납할 수 없던 루뭄바는 UN에게 사태를 안정시키기 위해 개입하라고 요청했다. UN이 치안 유지와 행정력 지원 등의 활동은 몰라도 벨기에와의 대립은 힘들 것 같다고 답하자, 루뭄바는 분노하면서 UN이 벨기에를 몰아내지 못할 경우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UN 콩고 작전의 책임자는 루뭄바와의 회동 직후 그가 애새끼처럼 구는 미치광이였다고 평가했다.
콩고 위기 및 전반적인 국가 운영에 있어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던 루뭄바의 방미 일정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방미 직전에서야 방문 사실을 통보했고, 덕분에 최소한의 예우만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당대회 일정이 있던 아이젠하워를 만나지도 못했다. 그와 보좌관들은 서구권의 문화에 무지해 여러 사소한 실수와 결례를 범했다. 설상가상으로 루뭄바는 황당하게도 미국 국무부에 전화해 ‘금발의 백인’ 접대부를 요구했다. CIA는 적당한 여성을 잠자리로 들여보냈고, 루뭄바는 대만족이었다고 평가를 내렸다.
루뭄바는 국무부 인사들과 만날 수 있었으나, 회동은 결국 별 소득 없이 끝났다. 그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갈렸다. 언론에 유출된 내용에 따르면, 루뭄바는 일각의 우려와 달리 차분하고 합리적이며 명석한 지도자로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국무부 차관은 훗날 루뭄바가 허공만을 응시한 채 헛소리만 늘어놓는, 합리적인 면이 전혀 없으며 정신이상자에 싸이코패스와도 같은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 둘 중 어느게 더 진실에 가까운지는 몰라도, 미국은 점차 후자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며 루뭄바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독립 한 달 차인 8월 8일, 또다른 세력이 분리주의를 요구했다.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유명한 카사이 지역에서 앨버트 칼론지가 발루바족을 이끌고는 남카사이, 일명 다이아몬드국의 ‘고도의 자치'를 선언했다. 칼론지 또한 벨기에 이해관계자들의 부추김과 지원을 받았다. 무장이 빈약한 발루바족 병사들은 중앙 정부는 물론이고 옆동네 카탕가와도 마찰이 있었다.
상황을 더는 두고 볼 수만 없던 루뭄바는 마침내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소련의 승무원과 장교진, 군사장비를 획득해서 먼저 다이아몬드국을 제압한 다음 그대로 엘리자베스빌까지 진격해 카탕가도 무너뜨리기로 했다. 그러나 소련과의 협력은 루뭄바가 공산주의자라는 미국의 편집증적인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미국이 콩고 위기에 신경 쓸 요인은 충분했다. 이 거대한 나라는 무려 아홉 개의 다른 나라와 인접해 있어 전략적 발판으로 쓰기 안성맞춤이었다. 더 큰 문제는 우라늄이었다. 콩고 카탕가의 우라늄은 높은 순도 덕분에 일본에 투하된 최초의 핵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우라늄 채광 기술의 발달로 이 광산의 중요성은 점차 하락했고, 콩고 독립 직전에는 완전히 폐쇄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이나 그 동맹들이 몰래 카탕가 우라늄을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미국은 루뭄바가 공산주의자와 거리가 멀었음에도 그가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다는 이유 만으로 제2의 카스트로가 될 것이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마침내 루뭄바를 위험한 공산주의자로 규정했고, 그를 제거할 권한을 CIA에게 부여했다. 이는 기념비적인 미국 사상 최초의 타국 지도자 암살 작전이었다.
벨기에와 미국의 모략이 진행될 동안, 수도 레오폴드빌에서도 루뭄바에 대항하는 여론이 점점 일어났다. 루뭄바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카사이에 병력을 투입했으나, 직전 폭동과 그 여파인 숙련 장교진의 부재로 기강이 해이해진 병사들은 통제를 벗어난 약탈 집단으로 변신했다. 발루바족 민간인 수천 명이 사망하고 30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하자, 모부투 참모총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루뭄바의 지도력을 비판했다.
루뭄바를 없애려는 각종 세력들은 점차 한 인물에 관심을 집중했다. 카사부부 대통령은 실권을 잃은 후 실의에 빠져 국정에 대한 관심을 상실했고, 자신이 아끼던 군복을 입은 채 조용히 은거하며 향락을 누리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을 이용하라는 대내외적인 부추김을 받자, 그는 마침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독립 두 달 차인 9월 5일, 카사부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루뭄바가 독단적 정책으로 콩고를 내전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파면한다고 선포했다. 그 대신 보다 온건한 조지프 아일레오가 총리에 임명되었다. 자신의 행동에 흡족한 카사부부는 곧바로 잠자리에 들러 갔다. 그러나 루뭄바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반격에 나섰다.
독립 두 달 차인 9월 5일, 루뭄바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카사부부가 외세와 협력하는 반국가 세력의 일원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를 파면한다고 선포했다. 나이가 65일인 콩고에는 벌써 두 개의 서로 다른 분리주의 세력이 날뛰고, 대통령과 총리가 서로를 해임하는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었다.
헌정 위기가 발발하자 루뭄바와 카사부부의 지지자들은 서로 길거리에서 경쟁을 벌였다. 콩고 의회는 두 인물의 주장을 모두 기각시켰다. 거리에서 쌍방 구금 사태가 일어났다. 미국과 서구권은 카사부부를, 소련과 동구권은 루뭄바를 지지했다.
승패는 9월 14일 결정되었다. 모부투 참모총장은 미국의 사주를 받아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켰다. 모든 정치인의 활동이 일시 금지된 와중에 카사부부는 여전히 대통령 직을 유지했으나, 루뭄바는 파면되고 총리 관저에서 자택 연금 처지에 놓였다. UN군이 그의 자택을 둘러싸 경호를 맡았다. 카사이와 카탕가를 겨냥한 군사작전은 중단되며 두 분리주의 세력과 임시 휴전이 성사되었다. 공산권 국가들의 외교관들은 전부 추방당했다.
그러나 루뭄바는 여전히 그의 적들에게 존재 자체로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의 지지자들은 특히 거점인 스탠리빌 일대를 중심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루뭄바 정부의 각료들도 레오폴드빌에서 빠져나와 스탠리빌로 향했다. 미국은 루뭄바를 영구적으로 없애기 위해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가 담긴 독극물을 그에게 주입하려고 했으나, 작전 직전 바이러스가 소멸되면서 황당하게도 실패했다. 벨기에 역시 미국과 독자적으로 암살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루뭄바와 UN 직원들 역시 그의 주변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눈치챘다. UN 관리들은 그에게 관저에 틀어박혀 있는게 안전하다고 말했지만, UN에 대한 미국의 입김이 강한 것을 아는 루뭄바 입장에서는 신뢰하기 힘들었다. 그는 마침내 스탠리빌로 도피해 전직 부하들과 함께 대항 정부를 세울 것을 계획했다. 루뭄바는 탈출에 성공했으나, 도주 중에도 길가에 멈춰서 연설을 늘어놓는 버릇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2월 1일 그는 모부투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감금당했다.
루뭄바의 지지자들은 분개했다. 곧 루뭄바의 전직 각료들이 앙투안 지장가를 중심으로 스탠리빌에 콩고자유공화국이라는 이름의 대항 정권을 세웠다. 이들은 레오폴드빌 정권과 카탕가를 모두 공격했고, 모부투의 반격마저 격퇴하며 금새 콩고 동부 지역을 장악했다.
독립 반 년 차인 12월, 콩고는 이제 네 개의 정부가 세워진 아사리판이 되어 있었다. 서부 레오폴드빌의 모부투와 카사부부 정권은 공산주의 위협을 우려한 미국과 서방 세계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동부 스탠리빌의 콩고자유공화국은 반대로 소련과 이집트 등 제2세계의 지지를 얻어냈다. 동남부 카탕가는 벨기에와 남아공 같은 식민 세력을 뒷배로 두었다. 카사이에 세워진 칼론지의 허약한 다이아몬드국 역시 벨기에와 다이아몬드 광산 이해관계자들이 보조했다.
루뭄바가 여전히 옥에 갇혀있던 도중, 그의 교도소를 지키던 일부 콩고 병사들이 폭동을 위협했다. 모부투와 카사부부는 직접 날아가 봉급 인상을 통해 겨우 불만을 잠재웠다. 루뭄바를 영구적으로 제거할 필요를 느낀 레오폴드빌은 대립 관계인 엘리자베스빌과 임시 협력하기로 결심했다. 벨기에가 제작해둔 각본에 따라, 루뭄바는 카탕가로 이송되었다.
루뭄바와 그 동료들은 촘베와 카탕가 각료들에게 격한 환영을 받았다. 수 시간 동안 이어진 고문에는 촘베 본인이 직접 참여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후 루뭄바는 콩고의 밀림 깊숙히 끌려들어가 벨기에 장교들에게 총살당했다. 그의 시체는 황산에 담궈져 분해되었고 뼛조각은 정글 곳곳에 유기됐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유일한 유해는 금니 한 개다.
루뭄바의 죽음은 한 달 뒤에 가서야 알려졌다. 벨기에와 카탕가는 루뭄바가 또다시 도주하다가 ‘애국적인’ 콩고인들에게 사살당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콩고인, 그리고 세계적 지지자들은 분노하면서 카탕가를 저주했고, 촘베와 카탕가는 따돌림 당했다. 벨기에는 40년간 자국의 역할을 은폐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진실은 뒤늦게 밝혀졌다. 루뭄바의 죽음은 콩고 위기의 절정으로 알려져 있지만, 반 년간 이어진 이 위기는 실제로는 두 개의 막을 더 거쳐 약 5년 후에야 종결된다.
1961년의 전반기에 주요 세력들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레오폴드빌이었다. 카사부부 정권은 약 1만 5천 명의 정규 병력과 백인 장교들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더해 프랑스령 식민지에서 온 수천 명의 지원 병력과 서방, 그리고 UN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다. 모이즈 촘베도 휘하에 400여명의 벨기에 장교들의 지휘를 받는 7천명의 흑인 병력과 약 300명의 백인 용병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공군력도 막강했다. 카탕가는 내륙국이었으나 식민 시대 철도를 통해서 남부의 포르투갈과 로디지아, 남아공 백인들의 지원을 확보했다.
이에 비해 스탠리빌의 콩고자유공화국은 비록 영토와 인구는 레오폴드빌보다도 많았으나, 훈련과 무장이 빈약한 5천~7천명의 군대를 분산 배치하는 처지에 놓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2세계의 실질적 도움도 미미했다. 실효 지배 영토와 인구가 얼마 되지 않던 남카사이는 3천명의 전사들을 겨우 모집했지만, 발루바족 전사들 중 적잖은 수는 정글도를 휘두르고 독화살을 쏘아대는 원시적 토인들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 분열된 나라에서 평화로운 해결책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미국은 공산주의에 제대로 맞서기 위해서는 콩고가 최소한의 잡음만으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판단해 콩고의 평화적 안정을 꾀했다. 소련 역시 스탠리빌 정권의 전략적 열세를 잘 알았고, 특히 루뭄바가 사망한 현재 콩고 전체를 완벽히 손아귀에 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레오폴드빌과 스탠리빌 그리고 엘리자베스빌이 모두 잠시 싸움을 멈추고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한편 이 와중에 카사이의 칼론지는 귀족 혈통을 가진 스스로를 옛 루바 제국의 후계자로 선언하며 다이아몬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자체적 군사력이 허약해 사실상 레오폴드빌과 엘리자베스빌의 완충 지대로 연명하던 나라에서 그리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칼론지의 황제 등극은 카사이 내부에 반대 세력들이 고개를 들게 만드는 자충수였다.
1961년 8월, 마침내 레오폴드빌과 스탠리빌이 합의에 도달했다. 노동조합원 출신 중도 성향 총리가 양측 모두 합류한 거국 정부를 이끌기로 되었다. 지장가와 그의 부하들이 다시 중앙 정부에 합류했고, 협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칼론지 역시 자치를 누리면서 의회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촘베는 협상 도중 감금 당하는 일을 겪으면서 결국 독립 포기를 거부했다.
촘베의 태도에 분개한 미국은 벨기에에 카탕가 지원 중단을 요구했다. 거대한 동맹국에 맞설 수 없던 벨기에는 꼬리를 내렸고, 정부 차원의 지원은 서서히 끊겼다. 카탕가는 더 많은 백인 용병들을 고용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헤쳐나가고자 했다.
콩고 신정부는 UN군의 힘을 빌려 카탕가를 제압하기로 결심했다. 미국 정부의 압박을 받은 UN군은 콩고 정부의 요구 사항에 따라 엘리자베스빌을 비롯한 일부 대도시를 신속하게 장악했고, 촘베는 로디지아로 달아났다. 하지만 카탕가 영토의 대부분은 여전히 카탕가국 병력의 수중에 있었고, UN군의 이 작전 도중 나름 유명세가 있는 자도빌 전투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 와중에 UN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는 촘베와의 교섭을 위해 비행기를 타다가 비행기가 미스테리한 이유로 추락하면서 사망했다. 이 사건이 카탕가 백인 용병 부대의 격추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결정적인 근거가 부족해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어찌 되었던 간에 후임 UN 사무총장 우 탄트는 UN군 병력을 8천에서 2만명으로 대폭 증강했고, 이는 촘베에게 안 좋은 소식이었다.
1961년 12월 21일, UN군과 카탕가는 정전 협의를 맺었다. 촘베는 카탕가 독립을 그만두고 점진적인 통합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카탕가 곳곳에서는 산발적인 충돌이 계속되었고, 촘베도 순순히 독립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통합 프로세스를 지속적으로 미뤄댔다.
이 즈음 북부의 스탠리빌에서도 다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지장가는 당초의 합의와 달리 머지않아 스탠리빌로 귀환했고, 이후 병력을 증강하고 지방 행정관들을 충성파로 교체하면서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카사부부 정권은 격분했고, 수도로 귀환해 중앙 정부 활동을 재개한 지장가의 동지들마저 태반이 독립 지방 정권을 유지하려는 그의 행보에 의문을 표했다.
앙투안 지장가는 먼저 카탕가를 무찌른 다음에 통합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지장가의 군대는 자체적으로 카탕가를 공격했으나 머지않아 패퇴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토 장악력을 확대하는 지장가의 움직임은 본인의 주장과 상충되어 보였다. 그 누구도 지장가의 변명을 믿지 않았다
스탠리빌이 레오폴드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독자적으로 움직이자, 콩고 신정부는 사태가 전면전으로 번지기 전에 해결하고자 했다. 그들은 스탠리빌 소속이지만 지장가의 독단적 행보에 반기를 들던 군인들에게 지장가의 체포를 촉구했다. 1962년 1월 12일, 스탠리빌 시가지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중앙정부에 회유된 병사들이 승리했다. 지장가는 체포되었고, 스탠리빌 정권은 그렇게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비슷한 시기 중앙 정계에 복귀해 있던 남카사이의 칼론지 폐하 역시 고초를 겪고 있었다. 한 공산주의자가 칼론지의 고문 행각을 고발했고, 발루바의 황제는 불체포특권이 박탈되고 징역 5년을 선고 받은 채 옥에 갇혔다. 그를 지지하는 발루바 원로 400명이 레오폴드빌로 향해 탄원을 요청했지만, 그들마저 일시적으로 구금당했다.
1962년 전반기는 지지부진한 통일 협상으로 흘러갔다. 콩고 정부와 UN군은 머지않아 촘베가 또다시 사기를 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카탕가 군대의 게릴라 공격이 심화되었고, 곳곳에 기지와 진지가 건설되고 있었다. 용병 부대가 충원되고 공군력이 회복될 동안 촘베는 계속해서 시간을 끌 뿐이었다. 미국과 UN 그리고 레오폴드빌은 물리적 토벌만이 해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와중에 칼론지는 9월 7일 탈옥에 성공해 옥좌에 복귀했다. 그러나 남카사이 내부에 암약하고 있던 그의 적들은 이미 중앙정부와 결탁한 상황이었다. 자리를 보전해주겠다는 약속에 넘어간 공화주의자 폭도들이 9월 29일 밤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카사이의 황제는 자택에 구금당했으나 머지않아 또다시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폭도들이 다이아몬드국을 장악한 상황에서 그에겐 망명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칼론지는 카탕가로 도주했으나, 촘베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다이아몬드국의 군주는 최종적으로 온갖 망명자들의 화개장터였던 프랑코의 스페인으로 향했다.
콩고 위기는 돌고 돌아 다시 레오폴드빌과 엘리자베스빌의 대치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승패는 명확했다. 12월 말 UN군은 마침내 카탕가에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2주 동안 이어진 대공세 끝에 모이즈 촘베는 역시나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으로 달아났고, 카탕가군 잔당들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콩고는 마침내 2년 반 만에 다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위기는 아직도 종식 단계가 아니었다. 카사이와 카탕가는 서서히 통합되고 있었지만, 레오폴드빌 정권의 좌우파가 서로 다투면서 정부가 흔들렸다. 정치 위기의 지속으로 경제가 망가져 인플레이션이 만연한데 구매할 상품마저 부족했다. 상당수의 콩고 민중은 독립 이후 엘리트층이 잘 나갈 동안 자신들의 처지는 나빠진 것에 분노했다. 카탕가국의 잔당들은 여전히 게릴라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강경 루뭄바 추종자들도 암약 중이었다. 콩고 통일을 가능케한 UN군마저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루뭄바의 측근이던 피에르 물렐레가 본인의 근거지인 퀼루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현재의 콩고가 아직도 식민지 시절의 망령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으며, 이제는 이 토착 통치 계급을 무너뜨리는 제2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중국에서 훈련을 받은 물렐레는 마오주의 사상과 전술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고, 1963년 하반기부터 퀼루 지역 곳곳에서 반란군을 모집하고 다녔다. 가난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지역 주민 여러명이 물렐레에 합류했고, 곧 일종의 군대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곳곳에 비밀 거점을 만들고 주민들을 포섭하며 밑작업을 이어나갔다.
1964년 1월 이들은 마침내 대대적으로 봉기해 곧 수많은 마을들을 함락했다. 반란군의 초기 기세는 좋았으나, 얼마 후 부족한 자원과 고립된 위치, 행정적 무능과 정부군의 초토화전술 등이 발목을 잡았다. 퀼루 반란은 약 4달 만에 사실상 소강 상태가 되었고, 물렐레는 해외로 망명을 떠났다.
퀼루의 반란이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스탠리빌의 차례였다. 루뭄바와 지장가에 공감하던 지지자들이 퀼루 반란에 자극 받아 옛 지장가 정권의 영토에서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분노한 소년과 청년들이 주축이 된 이들은 스스로를 사자처럼 용맹하다는 뜻의 심바 반란군으로 지칭했다.
퀼루와 심바 반란군은 모두 공산주의 이념에 기반해 있었지만, 동시에 주술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 물렐레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주술을 이용해 총알을 맞고도 멀쩡하다는 마술적 사기를 쳤고, 병사들에게 똑같은 ‘축복’을 내렸다. 주술사를 자청하는 이들이 장교가 되어 군대를 전투에서 이끌었다. 이들을 믿은 병사들은 보다 용감하게 싸웠고, 총알을 맞아 전사한 이들은 복잡한 마법적 규정을 어겨서 죽었다는 식으로 합리화 되었다.
인접국들인 수단과 우간다의 지원을 받은 반란 세력은 약 3달 간의 전투에서 스탠리빌을 포함한 나라의 동쪽 절반을 함락시켰다. 머지않아 사회주의 성향의 콩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콩고 정규군은 반군의 초기 기세에 짓눌려 패퇴를 거듭했다. 설상가상으로 심바들이 마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는 믿음이 콩고군 사이에서도 퍼졌다.
콩고인민공화국은 즉각 부자들을 수거하고 외국인들을 인질로 잡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망하고 재산이 재분배되었다. 중국과 소련, 이집트와 알제리를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콩고인민공화국을 인정하며 지원을 재개했다. 순식간에 나라 절반을 빼앗긴 레오폴드빌에는 당혹감과 공포감이 돌았다. 격노한 카사부부는 다시 한번 그의 총리 해임권을 발동했고, 콩고 정치 사상 가장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 한 인물이 새롭게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랬다. 바로 그였다. 모이즈 촘베가 불과 1년 반 만에 내란 수괴에서 정부 수반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심지어 앨버트 칼론지마저 정부 장관으로 복직할 수 있었다. 카사부부는 친서방 성향이던 촘베가 보다 폭넓은 대외 지원을 확보하는 한편, 카탕가 지역의 강대한 힘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촘베는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촘베가 화려하게 귀환하자 아직까지 남아있던 카탕가군 잔당이 콩고 정권에 합류했고, 그가 고용했던 수많은 (주술에 ‘면역’인) 백인 용병들도 이제는 중앙 정부에 재고용되었다. 미국은 쿠바에서 공산주의를 피해 탈출한 파일럿들을 세계대전기에 사용되던 전술기들과 함께 파병했고, 벨기에 역시 자국의 군사고문단과 소수의 병력을 파견했다.
반란군 역시 자체적으로 약점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심바 전사들은 처음부터 무기가 부족해 종종 나이프와 독화살, 몽둥이로 싸웠다. 이들은 새로운 마오주의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포부와는 다르게 제대로 된 통치를 할 능력이 없어 점차 지역 주민들에 실망을 안겼다. 씨족과 종족 분쟁이 전력을 내부에서부터 갉아먹었고, 초기에 용맹했던 병사들의 기강도 갈수록 엉망이 되었다.
촘베의 노력으로 전력이 대폭 보강된 정부군은 1964년 말부터 차근차근 반격에 나섰다. 백인 용병들이 충격 부대로 앞장섰고, 미국이 지원한 공군력과 벨기에인들이 이를 보좌했다. 심바 반군은 9월 중순부터 연전연패를 기록했다. 자신들을 보호하는 요술이 폭우에 씻겨나가서 패배했다는 괴이한 주장이 유행했다.
자신감을 얻은 정부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했다. 촘베의 군대는 11월 말까지 스탠리빌을 탈환했고, 이는 반군의 조직적 작전 수행 능력을 무력화시켰다. 벨기에 코만도들이 백인 인질 구출 작전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300여명의 백인 인질이 학살당했다. 콩고군과 용병들은 보복 학살로 맞대응했다.
위기의 심바 반군을 구원하기 위해 전설적인 인물이 대서양의 건너편에서 도착했다. 새로운 모험을 위해 몸이 근질거리던 체 게바라가 1965년 4월 120명의 흑인 쿠바인들을 데리고 탄자니아를 통해서 ‘콩고 혁명’의 완수를 위해 도착했다. 게바라는 심바 반군의 유력 지도자였던 로랑 데지레 카빌라의 부대를 전문적으로 훈련시키고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정부군은 스탠리빌을 비롯한 광활한 영토를 탈환했지만, 역시나 문제를 겪고 있었다. 촘베가 처음 고용한 용병들이 계약 만료로 떠나갔고, 벨기에군도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아 철수했다. 이를 메꾸기 위한 신규 용병들의 충원량은 레오폴드빌의 희망보다 턱없이 부족했다. 콩고군은 백인들이 없으면 자체적인 전투를 하기 힘든 상태였다. 심바 반란군이 이런 약점을 이용한다면 전세가 다시 뒤집힐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체는 머지않아 당혹감과 절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카빌라를 비롯한 심바 반군의 지도층은 전투와 혁명보다 술과 여자에 더 관심이 많았다. 병사들은 겁쟁이들로 가득했고, 장교들은 그런 병사들보다 먼저 달아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사회주의 사상에 지식이 있는 이들조차 마오주의를 따르는 자신들과 소련에 가까웠던 쿠바의 노선 차이를 두고 시비를 털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부 반란군은 미신에 현혹되어 식인을 저지르며 쿠바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심바 반군은 여전히 인접국들을 통해서 중국 등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기를 사용할 사람들의 정신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쿠바인들의 조력에도 불구하고 정부군은 1965년 내내 반군의 자금줄과 보급선, 연결로를 하나둘씩 차단했다. 사분오열된 반란군은 각개격파를 당했다.
1965년 11월, 카빌라 휘하의 병력들이 점령하던 마지막 영토가 정부군에게 공격 받았다. 성과를 거두지 못한 쿠바군은 더이상의 투쟁을 포기한 채 왔던 길 그대로 탄자니아를 향해 탈출했다. 체 게바라는 탄자니아 쿠바 대사관에서 7달 간의 회고록을 집필하는데 열중했다. 이 글은 솔직하게도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은 실패를 기록한 역사다”
권력을 공고히한 조제프 모부투는 스스로의 이름을 매우 위대한 전사라는 뜻의 모부투 세세 세코로 개명했다. 콩고의 국명도 자이르로 바뀌었고, 주요 도시들의 이름도 서양식에서 아프리카식으로 바뀌었다. 모부투 집권의 처음 몇 년은 물가 안정과 경제 성장이 이뤄졌고, 그는 반공 독재자로써 서방 지도자들의 칭송을 받았다. 콩고를 갈기갈기 찢어놓던 종족 분쟁 역시 그의 재임기 도중 상당히 완화되었다.
머지않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 실험 중 하나가 일어났다. 자이르는 미국과 서방의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갈수록 가난해졌다. 모부투 정권은 현대 인류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는 국고를 말 그대로 개인 통장처럼 사용했고, 사회의 모든 면에서 부정부패가 끊이지를 않았다. 자이르 정부는 곳곳에서 완전히 작동을 중단했고, 이런 파탄난 모습을 두고 도둑 정치라는 말이 대중화되었다.
그는 결국 그가 끝내 처리하지 못한 마지막 정적에 의해 쫓겨났다. 콩고 동부의 산골짜기에서 산적질을 하며 악착같이 살아남은 로랑 데지레 카빌라는 마침내 30년 만에 자신들에 적대적이던 모부투를 무너뜨리려는 해외 지도자들의 간택을 받았다. 1997년 우간다와 르완다군이 카빌라를 앞세워 자이르를 침공했고, 파탄난 모부투 정권은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30년 전의 적에게 허망하게 쫓겨난 모부투는 머지않아 망명지에서 사망한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콩고민주공화국은 가난과 폭력,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간다와 르완다는 30년째 콩고 동부를 유린하고 있고, 이들의 지원을 받는 각종 반란군이 여전히 중앙 정부를 괴롭히고 있다. 부패한 정치인들은 권위주의적 정치를 선보이며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고, 국민들의 실질 1인당 GDP는 독립 직후의 절반이 채 안된다.
이 모든 비극은 누구의 탓인가? 벨기에는 콩고에 자립이 불가능한 식민지를 만들었으며 이후에도 훼방을 놓았다. 각양각색의 콩고 정치가들은 잔혹한 권력 다툼을 반복하면서 나라를 파멸로 이끌었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외세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콩고인들의 내전을 부추겼다. 모두가 콩고 위기의 공범이었고, 모두가 손에 피를 묻혔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콩고 위기가 끝난지 60주년인 오늘날, 어둠의 심연은 아직도 그 후폭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고 자료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Congo: The Epic History of a People: David Van Reybrouck
Crisis in the Heart of Darkness: Navigating the Complexities of the Congo Crisis 1960-1961 Jaxon Stutz
Imbalance of Power: The Soviet Union and the Congo Crisis, 1960–1961
Alessandro Iandolo
"The Second Independence": A Case Study of the Kwilu Rebellion in the Congo
Renée C. Fox, Willy de Craemer, Jean-Marie Ribeaucourt
THE CONGO: A CASE STUDY OF MERCENARY EMPLOYMENT
George H. Dodenhoff

차라리 콩고가 하나로 통합된 식민지가 아니었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듯하네요
ㄹㅇ 나라가 너무 큰데 억지로 우겨넣은게 문제인듯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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