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대한민국의 국민의례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문구가 삭제되었다. 행정적 이유는 간단했다. 시대 변화에 맞춰 표현을 완화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언어의 수정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스스로를 세계 속에서 어떻게 드러내는가, 즉 어떤 존재방식을 택하는가를 보여주는 징후였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를 빌리자면,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며,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을 역사적으로 드러낸다. 국민의례의 문구는 바로 그 드러남의 형식, 우리 시대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규정하는가의 상징이었다.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말은 단순한 충성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세계와 맺는 실존적 관계를 말한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존재로서, 자신이 속한 세계의 운명에 함께 참여한다는 자각이다. 하이데거가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상태였다.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투신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문장은 그 투신의 언어였다.
이 문구가 사라졌다는 것은, 근대적 자유주의의 언어가 전통적 공동체의 언어를 대체한 사건이었다. ‘바친다’는 말은 헌신을, 헌신은 책임을, 책임은 공동의 실존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대의 언어는 이를 ‘참여’나 ‘존중’ 같은 무해한 단어로 바꾸었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이상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계약과 감정의 균형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계산하는 주체로 변했다. 국민의례의 변화는 바로 그 변형의 상징이었다.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문구가 빠진 자리에는, 이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인간형이 서 있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이는 존재의 ‘은폐’다. 본래 공동체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함께 있음의 결단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존재의 진리 대신 표현의 자유가, 실존의 무게 대신 감정의 안전이 중시되면서,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공허해졌다. 몸과 마음을 함께 바친다는 행위는,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열어 보이는 방식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진실에 닿으려는 의지였다.
규범적으로 보자면, 한 사회가 존속하려면 구성원은 법적 시민을 넘어 ‘존재론적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문구는 그 참여의 규범적 표현이었다. 그것은 국가주의의 선동이 아니라, 세계 속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실천의 요청이었다. 몸을 내던지지 않는 신념은 공허하고, 마음만으로는 세계를 세울 수 없다.
이 문구의 삭제는 그 요청을 회피한 결과였다. 현대인은 공동체에 속하기보다 거리를 두려 하고, 그 거리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존재는 거리에서가 아니라, 속함 속에서 드러난다. 속함은 불편하고, 때로는 위험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존재의 진실이다.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말은 그 불편함을 감내하는 실존적 용기의 표현이었다.
국민의례의 언어는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과거의 향수로서가 아니라, 존재의 회복으로서.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에 내던지는 행위이며, 그 속에서만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적 존재로 선다. 국가가 단순한 행정 단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던져져 있는 세계의 형식이라면, 그 세계를 지탱하는 헌신은 다시 불러와야 할 덕목이다.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말이 사라졌을 때 사라진 것은 단지 문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양식이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시대에, 그 둘을 하나로 묶어 바친다는 말은 가장 인간적인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적 진정성이야말로, 우리가 여전히 하나의 세계 속에서 함께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는 마지막 언어다.
和而不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