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고, 또 생각 없이 불리며 일컬어지는 단어다.
그러나 조국이라는 이 두 글자처럼 각 민족에게 제 각기 강력한 작용과 위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시 없으리라 본다.
그렇게 믿는 것이 옳은 내 견해이고, 내 체험의 소산이다.
- 이범석 장군 회고록 『우둥불』 中
하나인 민족으로서 무엇이고 또 어느때이고 둘이 있을수가 없다.
헤치면 죽고 뭉치면 산다.
나누어지는데서 죽고 하나에서 산다.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유사이래 금일처럼 우리 민족의 자각과 결의와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시대는 없었으며 그리고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과거에 범한 과오를 지금 우리들이 보상하고 있는데 불과한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준엄하고도 가차함이 없는 것이다. 한 민족의 안일함과 태만함의 결과는 조만간 그 후손들이 고역과 희생으로서 보상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민족국가의 건설이야말로 선조에 대한 보상이요, 자손에 대한 의무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먼저 동족끼리의 협조를 도모하여야 할것이다. 언어, 풍속, 감정, 토지, 혈통, 생활을 같이하는 동족 협조를 쉽사리 단념하는 것을 민족 운동의 첩경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정치상의 이상과 주의를 흡수하고 채용한다는 것은 이를 흡수하고 채용하는 주체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주체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상과 주위는 곧 정신적인 침략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하고 있는 침략보다도 의식하지 못하는 침략이 더 무서운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주의자였다.
"가까운 곳의 책무는 이행하기 싫어하면서, 책 속에서 억지로 먼 의무를 찾아 헤매는 세계시민(Cosmopolite)를 경계하라. 이러한 철학자는 단지 자기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 타타르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장 자크 루소가 말한 이 경고는 오늘날 세계주의적 공산주의자에게 대한 경고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민족을 사랑하는 대신에 세계를 사랑한다고 한다. 세계를 사랑하기 위하여서 민족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를 사랑하기 전에 민족을 사랑하라 하였다.
이웃 사람을 사랑하는것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요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 대통령은 민족을 사랑할수있는 공산주의는 용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조국을 사랑할 수 있는 공산주의자는 포옹하고 같이 일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 대한민족은 어떠한 전통과 역사를 통해 형성되었고 발전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민족의 개념적인 정의를 우선 밝힌다면, 그것은 단일한 기원을 가지며 단일한 풍속과 문화를 가지고 단일한 영토의 위에서 생활하는 인민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초기에는 씨족과 부족 단위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이지만, 이 여러 부족들이 한데 모여 터전을 짓고 나라를 세우고 밭을 갈며 투쟁한 결과 이들의 집단은 단일한 피와 문화와 정신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여러 부족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풍속이 얽혀 통일성을 획득하지 못한 공동체가 동질적인 투쟁과 건설의 연속된 체험을 통하여 이제 하나의 전일적인 존재로서 그 자체의 독특한 요구와 의지를 지닌 하나의 종적인 생명체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유기적 조직체로 발전한 민족은 사회와 역사 발전의 기본 단위로서 자신의 의지와 이상을 세계에 선양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안으로는 민족의 의지에 부합하는 사회와 인간을 형성하고, 밖으로는 주변의 민족들과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투쟁하며 자연과 세계를 개척해 나간다.
우리 민족은 환웅이 신시에 개천해 첫 국가를 건설한 그때에 그 시원을 보았으며 단군의 개국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민족으로서 역사에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고조선이 한나라와의 투쟁 끝에 몰락하면서 우리 민족은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삼국시대의 혼란을 겪게 되었지만, 신라의 삼국통일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유전적으로 단일민족으로서 존립해 왔다.
특히나 고려조에 이르면 우리는 단군 이래 하나의 핏줄과 운명을 가진 한 민족이라는 단일민족의식과, 또 한족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고 북방의 오랑캐에게 기대할 것도 없으니 우리가 동방문화의 중심이 된다는 강렬한 민족 주체의식이 발양하여, 오늘날 말하는 민족주의의 기초가 형성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식이 조선조에 들어와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외적의 침입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민족의식으로 변화 발전하였고, 구한말 서구 민족주의 사상의 유입에 의해 근대적인 형태로 변화된 것이 한국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민족이 개인과 개인 사이의 계약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하며,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 국가의 형성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 민족이란 결코 자유계약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요, 부르주아 국가 형성에 의해 시작된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민족이란 본능과 운명에 의해 결합하여 장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생성되고, 발전된, 개인과 국가형성의 기초가 되는 유기적인 운명공동체인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 민족 형성의 역사가 오천 년이며, 또 민족의식이 발생한 것은 벌써 천년이 가까운 시대가 지났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다.
우리는 대륙과 해양의 양쪽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공격을 받으며 살아왔으며 그러한 위기에 맞서는 공동의 체험 속에서 민족의식과 투쟁 정신은 점점 단련되고 강화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 ‘민족’이란 우리 각자의 운명과 떼어 낼래야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하고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성이나 합리성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우리의 유전자 속에 각인 된 하나의 종교적 신념이다.
자유주의가 전면적으로 우리의 국가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다국적 자본주의의 하수인들이 다문화주의를 명분으로 자신의 민족을 그 뿌리로부터 뽑아내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도, 민중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대지와 굳건히 결속된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심장 속에 낙인처럼 새겨진 혈통의 명령은 다시 한번 이 민족을 위한 새로운 활로를 열어 줄 것이라 믿는다.
인간에 대해 추상적인 견해만을 가진 서구인들은 종종 민족이나 문화를 초월한 보편적 인간에 대해 떠들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민족도, 국가도 없는 회색분자로서의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한국인도 중국인도 독일인도 아닌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인가?
서구의 계몽주의적 인간관이란 한 개의 공허한 학설일 뿐 땅 위에 발 딛고 사는 구체적, 현실적 인간에 대해 어떠한 해답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인류 공통의 보편성 역시 특정한 국토에 현현한 이상 그 민족의 풍토와 전통에 매개되어 그 형태와 내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동양 고전에 도를 도라 하는 것은 도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도라는 것은 분명 보편적, 영구적, 무한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진리를 표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도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진리는 이미 구체적 현실, 즉 언어적으로는 한자문화, 지역적으로는 동아시아 문명이라는 틀에 한정된다.
심지어 도를 진리를 표상하는 언어로 삼은 동양의 각 민족에 있어서도 도의 관념은 자신의 독특한 신념과 믿음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는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로 이름 붙인 도는, 도의 본래 의미를 온전히 함의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는 진리가 아니다.
각 민족은 자신의 우주를 가지고 있으며 각 민족에게 있어서 보편적 진리는 그 자체의 특수한 철학적 세계관을 매개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존재도 결국 민족이 가진 특수한 정신, 주관적 정신세계를 무시하고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민족은 인간이 세계를 보는 창이며, 인간 의식의 심층에서 그 세계관과 행동을 결정짓는 운명적인 힘이다.
인간이 자신의 민족 집단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그는 그 자신이 속한 민족공동체의 언어와, 역사와, 핏줄에 의해 강하게 예속된다.
인간의 인간성을 규정하는 척도가 결국 그 민족의 규범이기 때문에, 인간은 민족의 피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자기 민족의 전통과 역사에 환원됨으로써 진실로 자신의 인격적 본질을 자각하고, 또 인간으로서 진실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을 논할 때 문제되는 것은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 속의 인간, 특정한 전통과 문화에 결속되어 있는 인간이지 금일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국적과도 전통과도 문화와도 무관한, 선험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것이다.
고향도 조국도 부모도 형제도 없는 인간들이 무책임한 방종에 더 가까운 "자유"를 부르짖으며 날뛰는 사회, 이것이 오늘날 저들이 열린 사회라고 부르는 체제의 실상이다.
물론 인간이 일면적으로 민족공동체의 오래된 전통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되는 존재라는 것은 편협한 발상일것이다.
인간은 민족공동체의 역사와 전통에 규정되는 존재인 동시에, 민족공동체를 생성하고 창조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근대 이후 개체의식과 자아의식이 발전된 현대인에게 있어서, 개인을 돌봄이 없이 곧바로 공동체로 직접 연결되었던 고대적인 정신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금일 개체의 자율성에 대한 신뢰와 보장은, 민족적 전체의 존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과거 공산주의의 신봉자들은 맑스주의의 이론으로 현실의 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하여 인간을 오래전에 관짝 속에 들간 맑스의 경전과 교리 속에 묶어놓았다.
그 결과 현실에 살아있는 구체적인 개별적 존재의 생의 체험은 무시되거나 맑스 레닌의 딱딱한 교리 안에 흡수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과거를 극복하는 우수한 개인이 나올 수 없을 것이며, 그런 개인이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민족의 특수성과 주체성을 긍정하는 만큼 민족에 속한 동포 각자의 고유한 자질과 의미를 인정한다.
그러나 민족을 발전시키는 각 인간의 문화적 창조력과 투쟁적 기질, 개척적 정신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이것은 역시 그 개개인이 발 딛고 있는 민족적 토대 없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수한 인간은 결국 건실한 민족적 기초 위에서만 탄생할 수 있으며, 그러한 뿌리를 가지지 않는 인간 위에서 가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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