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로 해방적 결론으로 귀결되지 않고, 오히려 보수주의를 강화하는 사상적 자원이 될 수 있음

예를 들어, 주디스 버틀러가 이야기하는 ‘젠더 수행성’은 경우에 따라 오히려 보수적 페미니즘을 정당화하고 논증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적 모델이 됨. 이 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것

(‘젠더 수행성’이란 젠더의 성격을 ‘타고나는 정체성이나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반복되는 행위와 규범의 수행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정의하는 이론을 의미하는데, 이게 왜 보수적 페미니즘에 유리하게 작동하는지는 후술할 예정임)

가장 널리 퍼진 오해를 바로잡고 시작하자면, 젠더 수행성은 규범의 해체를 ‘당위’로 요구하지 않음. “젠더는 이렇게 작동한다”는 설명일 뿐, “젠더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처방을 내리는 게 아니라는 말임. 이 차이는 결정적임

수행성의 부정이 곧 해방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는데, 이건 리버럴적 독해에 가까울 뿐이고, 페미니즘 이론의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가면 ‘남성과 여성을 동일한 주체로 환원하려는 경향’은 오히려 강하게 부정되고 비판된다는 걸 알 수 있음

설명을 위해, 인간을 ‘성별을 지운 추상적 개인’으로 규정하는 탈젠더 사회가 도래한다고 가정해보겠음

근대의 지식과 담론을 꾸준히 생산해온 건 남성이었으므로(또한 근대성 자체가 ‘주체성’과 ‘합리성’ 등의 남성적인 가치를 정당화해왔으므로), 포스트젠더는 필연적으로 남성만의 경험을 비가시화된 ‘보편적 인간성’으로 자연화할 거임

그러면 젠더 문제는 ‘개인의 정체성’ 차원으로 환원될 가고, 이는 성별의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 한 상태에서 억압의 형식만 재배치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음. 이 때 미소지니는 약화되는 게 아니라 발화 불가능해지게 될 뿐임

또 한 가지 정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퀴어 이론은 젠더를 일종의 거짓의식이나 오인으로만 규정하지 않고(만약 그렇게 규정한다면 트랜스젠더의 서사와 자기인식이 정면으로 부정되는 결과를 낳으니), 강제와 자율, 외부 규범과 내부 욕망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음

예를 들어, 충분히 교육받고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생활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춘 여성이라도,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전통적인 역할에 순종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때 자율성과 타율성의 경계는 허물어진다는 거고, 이걸 임의로 재단하려면 외부의 일방적인 가치판단이 강제된다는 거임

수행이 반복되어 내면화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외부에서 강요된 역할’과 ‘개인의 자발적 의지’를 유의미하게 구분할 수 없는 상태가 되니까. 예컨대 청소년이 성장기에 겪는 사회화도 개인의 자아와 사회의 기대가 불완전하게 갈등하고 타협하는 과정이지만 시간이 지나 망각하게 되는 것과 같음

근데 중요한 건, 개인은 언제나 어떤 범주(성별, 계급, 직업, 세대 등)에 의해 사회적으로 분절되고, 그 분절은 곧 이해관계와 가치, 상징 자원의 비대칭적 배분을 낳게 된다는 거임. 그러면 갈등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차이가 존재하는 한 상시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적 조건에 가까움

젠더를 포함한 어떤 정체성도 “갈등 없는 순수한 자기 동일성”으로 존재할 수 없음. 수행이 가능한 조건 자체가 이미 사회적 차이의 장(field)이기 때문이고, 여기서 중요한 건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적 적대에서 관리 가능한 대립으로 전환하는 거임. 아니면 어느 한쪽의 전면적인 패배가 되어야만 하는데, 상호대립하는 두 규범은 불공약성을 가지기 때문임

(그리고 서구가 그걸 몰라서 ‘문화전쟁’을 낳음)

현대의 좌파적 담론이 추구하는 “젠더 갈등의 종결” 혹은 “차이의 소거”는 이론적으로 과도한 기대를 내포하고 있음. 정체성이 남아 있는 한 갈등은 존재하고, 정체성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항상 오히려 새로운 보편 주체를 설정하거나, 기존 권력을 비가시화한 채 재편성하는 방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지배적이기 때문임

이 때 고려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처음부터 성별을 포함한 정체성의 분리를 인정하고 제도화하는 방식임. 이럴 경우 아예 갈등의 발생 지점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충돌의 언어와 규칙을 정교화하며, 최소한 갈등이 ‘자연적 오해’나 ‘개인적 결함’으로 환원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효과를 가짐

그렇다면 여기서 보수적 페미니즘을 점검해볼 수 있음

보수적 페미니즘은 주로 여성이 지난 수 세대동안 수행해온 ‘모성과 헌신으로서의 여성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젠더를 추상적이거나 탈맥락적인 ‘가치’로 정의하는 대신 구체적이고 맥락적인 ‘역할’로 구성함으로써 여성에게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경로를 제공함. 이는 여성이 자기 의미를 구성하고 사회적 인격을 형성함으로써 내면적 효용을 증진하는 것에도 이로움

(‘젠더 수행성’에 따르면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은 분리 불가능하므로, 전통적인 성 역할을 체현하는 것이야말로 일반적인 여성성의 가장 기본적인 구현이 될 것이기 때문임. 또한 남성과 여성이 가진 비대칭적 격차가 꼭 해소되어야 한다고 볼 수는 없는데, 이는 남성성과 보편성의 경계가 사실상 부재하기 때문임)

갈등의 궁극적 해소를 목표로 삼는 정치보다, 갈등의 항구성을 전제로 한 관리와 조정의 정치가 더 현실적이고, 이런 점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위의 문제의식을 가시화하는 초기 단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 보수적 페미니즘의 이론적 정당화가 있다는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