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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5년 전인 2011년 1월 14일, 튀니지의 독재자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가 망명길에 올랐다. 정권 타도를 외치던 시위가 발생한지 약 한 달 만이었다. 벤 알리의 몰락은 튀니지에 사상 최초로 민주주의가 도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민주주의는 이후 놀랍게도 중동권에서 가장 선진적인 체제로 거론되며 서구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15년 후인 2026년 1월 14일, 튀니지의 민주주의는 다시 짓밟힌 상태다.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은 의회를 무시한 채 대통령령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있고, 그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감옥에 투옥되며 탄압 받고 있다. 중동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로 호평 받던 튀니지에서는 어쩌다가 새로운 독재자가 들어서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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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찬란한 카르타고 문명을 배출한 적이 있는 튀니지는 근대에 들어 프랑스의 식민 통치기를 겪다 1956년 독립에 성공했다. 튀니지의 신임 지도자는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이었다. 부르기바는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교육과 의료에 신경쓰는 지도자였다. 그의 치하에서 튀니지는 안정적인 성장과 사회 개혁을 거치며 현대화 되었다.



그러나 부르기바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더니 끝내 종신 대통령 직에 오르는 무리수를 두었다. 게다가 1980년대 들어서 튀니지의 경제는 부채 문제로 침체되었다. 부르기바에 대한 튀니지인들의 피로감은 갈수록 커졌고, 이는 정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르기바 본인의 건강 악화는 결정타나 다름없었다. 결국 1987년 부르기바의 측근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가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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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알리는 집권 직후 종신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이슬람주의자들을 포함한 야권 세력이 참여 가능한 공정 선거를 약속했다. 벤 알리는 동시에 국가의 통제력이 강하던 경제에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도입해 국가 경제에 활력을 되살렸다. 



벤 알리는 머지않아 본색을 드러냈다. 짧은 민주화 실험은 이슬람주의 억제를 명목으로 이뤄진 대대적인 야권 탄압 및 부정선거와 함께 막을 내렸다. 그가 종신 대통령 직을 다시 창조하고 또 그 위치에 오르면서, 튀니지 정치판은 부르기바 시절로 돌아갔다. 벤 알리와 친한 소수의 인사들이 대부분의 돈과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부정부패가 고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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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의 1인 당 GDP는 벤 알리 임기 시작 직후인 1987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3.2% 성장했다. 객관적으로 나쁜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 성장은 양질의 고용을 창출하는데 실패했다. 튀니지 중산층들은 제 자식들을 저임금 일자리에 취직시켜야 했다. 튀니스 수도권 바깥의 국민들 중 다수는 여전히 열악한 삶을 살고 있었다. 튀니지인들의 불만은 다시 커져만 갔다.



균열이 가던 벤 알리의 정권은 2008년 금융위기로 마침내 결정타를 입게 되었다. 빵을 비롯한 생필품의 가격이 폭등했고, 민생이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튀니지 전체 실업률은 15%, 청년 실업률은 30%에 달했다. 국민들의 불만은 기폭제만 있으면 터져나오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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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의 한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공부하며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였지만, 튀니지에는 부아지지에게 맞는 일자리가 별로 없었다. 결국 그는 길거리에서 허가 없이 과일을 파는 무허가 노점상으로 전락했다. 경찰들은 무허가 장사에 대해 눈을 감는 대신 그에게서 뇌물을 뜯어갔다.



그러나 그 날, 경찰은 미처 뇌물을 준비하지 못한 부아지지의 과일과 손수레를 압류하고 그 과정에서 폭력을 썼다. 부아지지는 즉각 지역 정부 청사에 난입해 경찰에 대해서 항의했으나, 군수는 그를 만나기를 거부했다. 절망에 빠진 부아지지는 온몸에 석유를 뒤집어쓰더니 "나 보고 어떻게 살라는거야!"라고 절규했다. 그리고 그는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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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화상을 입은 부아지지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월 4일 끝내 사망했다. 그의 분신 사건은 튀니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분노한 튀니지인들은 마침내 거리로 나와 벤 알리의 타도를 외쳤다. 당황한 벤 알리는 부아지지의 병실에 방문하는 등 시위를 진정 시키려 했으나, 국민들은 이런 위선에 더욱 분노했다. 내각 사퇴, 주지사 교체, 일자리 창출 약속 등의 조치도 전부 소용이 없었다.



벤 알리는 경찰을 동원해 강경 진압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 시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군 병력까지 투입하려 했지만, 군부는 놀랍게도 유혈 진압을 거부했다. 궁지에 몰린 벤 알리는 결국 망명을 택했다. 2011년 1월 14일, 시위 발생 한 달도 안돼서,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했다. 튀니지 혁명의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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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의 벤 알리의 몰락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튀니지와 비슷한 문제를 겪던 중동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이 연쇄적인 소요 사태는 아랍의 봄이라고 불리며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아랍의 봄은 결과적으로 기존 정권들의 생존이나 내전 같은 혼란으로 이어지면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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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에서는 사건 전개 양상이 다른 듯 했다. 벤 알리의 망명 직후 군부는 혁명 완수를 위해 개입한다고 선언했다. 튀니지군은 욕심을 부리는 대신 실제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감독하며 민의를 배신하지 않았다. 2011년 10월 총선이 치루어졌고, 사상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튀니지에서 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로의 급작스러운 이행은 수많은 정당들이 난립하게 만드는 동시에 정치적 갈등을 점화했다. 특히 세속주의 정당들과 이슬람주의 정당들 간의 갈등이 극심했다. 이들은 경제와 민생보다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 여성 인권과 가부장제, 간통과 동성애 같은 사회 문제를 두고 격렬 싸우면서 사회의 분열을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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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튀니지인들은 이 갈등을 극복할 수 있었다. 2013년 말, 이념 대립이 최고조에 달하고 암살 사건까지 터지면서 내전의 소문마저 솔솔 피어나올 무렵, 튀니지인들은 분열을 봉합하기 위해 나섰다. 노동조합과 상공협의회, 인권연맹과 법조연맹 네 개의 단체가 모여서 튀니지 국민을 대표하는 국민4자대화기구를 창설해 토의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민간의 노력은 정치권까지 번졌다. 튀니지의 정당들은 치열한 대립을 그만두고 타협의 정치를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정치가들은 연합 정부 수립에 집중했고, 승자가 패자에게 정부 요직과 권력을 보장하면서 승자독식제를 극복했다. 격하게 대립하던 주요 정당들이 힘을 합치면서, 연립 정부가 차지하는 의석은 전체 의석의 82%까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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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의 정치가 튀니지에 안착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예멘과 리비아 등의 다른 역내 국가들과 달리, 정치적 갈등은 완화되었고 폭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중동에서 가장 선진적인 헌법이 도입되었다. 아랍 세계에서 혼란이 지속될 동안 이런 자생적 민주주의 체제가 탄생했다는 사실에 서방 세계는 감탄했고, 튀니지 국민4자대회기구는 그 공로를 인정 받아 2015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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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초중반 튀니지의 민주주의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민중은 독재자를 몰아냈고, 군부는 이에 협조하며 민주주의 안착을 지원했다. 정치적 갈등과 혼란은 곧 정치인들과 시민 사회의 노력 덕분에 안정되었으며, 여러 선진국들을 뺨치는 타협의 정치가 뿌리를 내렸다.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대체 왜 다시 권위주의로 대체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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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알리의 몰락과 튀니지 혁명의 계기는 결국 민생 악화였다. 그러나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이런 경제적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심화되었다. 벤 알리의 마지막 10년 동안 튀니지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3.5%였으나, 민주화 이후 2011년에서 2019년까지는 1.7%로 두 배나 둔화되었다. 고용 시장의 사정 역시 벤 알리 시절에서 변화하지 않았다.



이런 튀니지의 경제 실패에는 복합적 원인이 있다. 2000년대의 호황이 끝나고 아랍권이 혼란에 빠지면서 해외 투자가 감소한 것도 있다. 그러나 경제 개혁의 부진이 더욱 큰 역할을 했다. 포괄적인 경제 개혁이 실시되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일자리와 산업의 부재 같은 고질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했다. 벤 알리 시절 여러 분야에서 특권을 누리던 소수의 부호들은 그 지위를 꾸준히 누리면서 경제적 비효율과 국민들의 박탈감을 증폭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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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국가적 구조 개혁 실패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벤 알리 정권의 경제적 엘리트는 자신들의 부와 위치를 계속해서 보전했다. 비대하고 비효율적이며 부패한 정부 기관들은 대다수가 그 관행을 유지해 국가 역량을 계속해서 소모했다. 특히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악명 높던 내무부는 민주화 이후에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경찰력을 강화하며 원성을 샀다. 독재 청산 작업은 매우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제기된 사건 중 극소수만이 제대로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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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문제는 놀랍게도 서구가 극찬하고 긍정적으로만 보였던 바로 그 타협의 정치에서 비롯되었다. 튀니지 정치인들은 지나치게 갈등을 회피한 나머지 오히려 국민들이 필요하다고 느낀 최소한의 대립마저 꺼렸다. 벤 알리 정권 인사들까지 포함된 각종 정치인들이 서로 타협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경제는 물론이고 투명성과 자유민주주의의 추가적 발전에 필수적인 정치적, 사회적 구조 개혁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논쟁적인 사안들은 뒷전으로 밀려나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공약을 이행하려는 시도가 가져올 정치적 파장을 두려워하면서 이를 묻어두었다. 정당들의 이념적 색채가 약해지면서 정치적 이적도 자유로워졌고, 공통된 뜻을 추구한다는 정당의 구조도 약화되었다. 정부에 불만을 가진 국민들은 대부분 자신들을 대변할 세력을 찾는데 실패했다. 정치인들은 민중의 의사와 갈수록 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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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 정당들이 서로 손을 잡고 타협의 정치를 무리하게 추구한 결과, 정치는 오히려 제 본래 목적인 갈등 조정의 의미를 상실했다. 정치가들이 갈등이 일어날만한 사안 자체를 다루지 않다 보니 당연히 그 어떤 조정도 일어날 수 없던 것이다. 이는 국민들 사이에서 갈등을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회의 80%가 연립 여당에 속하고 뚜렷한 반대의 목소리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튀니지 국민들에게 선진적, 통합적 정치가 아니라 부패한 정치가들의 야합으로 여겨졌다. 



국민이 선출한 정치인들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자, 효능감을 잃은 튀니지인 사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불붙었다. 2019년 9월 19일 벤 알리가 망명지에서 사망하자 차라리 그의 집권기가 나았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2013년 튀니지인의 71%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지했으나, 5년 후 그 수치는 46%까지 떨어졌다. 동시에 모든 정당이 자신과 동떨어졌다고 느끼는 국민의 비율은 81%나 되었다. 튀니지의 민주주의는 외형적으로는 선진적이었지만, 실상은 그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국민들에게 외면 받으며 내부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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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레 누군가는 타인의 실망을 마시고 자라나기 마련이다. 정치 경험이 없던 헌법학자 카이스 사이에드는 타협의 정치를 무시한 채 부패한 사회와 정치권을 비판하면서 돌풍을 일으켰고, 2019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대통령이 되었다. 동시에 치뤄진 총선에서는 기성 정당들의 득표율이 하락하고 오히려 극단주의 정당들이 기승을 부리며 의회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타협의 정치마저 다시 버린 채 민생과 동떨어진 이데올로기적 논쟁을 재개했다.



튀니지는 머지않아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하며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휘청이던 경제는 수십 만 명을 고용하던 관광업이 무너지면서 2020년 -9%의 역성장을 기록했다. 수많은 실직자들과 사망자들이 발생하고 빈곤이 치솟았으나, 분열된 의회와 비효율적인 정부 조직은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은 절정에 달했다.



2021년 4월, 사이에드의 일부 측근들이 의회를 제압하고 권력을 독차지하는 계획이 담긴 문건을 사이에드에게 넘겼다는 사실이 유출되었다. 사이에드는 이 문건을 받았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싸움을 재개한 정치인들은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시민 사회도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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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7월 25일, 사이에드는 코로나 사태를 핑계 삼아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한 다음 의회를 폐쇄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언론에는 재갈이 물려졌고 대통령이 검찰총장을 겸하게 되었으며 다른 사법 기관들도 해체되거나 무력화되면서 대통령의 손아귀에 완전히 떨어졌다. 사이에드는 헌법마저 자신에게 유리하게 새로 쓰면서 약 1년의 시간 동안 절대 권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상당수의 튀니지인들은 친위쿠데타 직후 길거리에 나섰다. 사이에드를 규탄하는게 아니라 대통령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무능한 정치가들을 심판하고 직접 문제 해결에 나섰다며 환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머지의 튀니지인들도 대부분 정치인들에 실망해 침묵을 유지했다. 심지어 여러 정치인들마저 초기에는 사이에드의 친위 쿠데타가 개혁의 기회라며 옹호할 지경이었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민주주의는 그렇게 우레 같은 갈채와 함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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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사이에드는 자신이 적대한 민주주의 정치가들처럼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소수의 공권력 기관에 의존하면서 판사와 정치인, 언론인을 가리지 않고 반대 세력을 투옥하며 폭압적 정치를 하는 중이다.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도 수시로 교체되고, 국가의 행정 역량도 답보 상태이다. 사이에드가 척결을 약속한 부패 문제도 아직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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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의 민생은 역시나 나아지지 않았다. 튀니지의 경제는 여전히 저성장을 기록하고 있고, 실업 문제도 답보 상태다. 물가상승률은 두자릿수를 기록하면서 생활고를 가중시키고 있으며, 정부 부채는 GDP 대비 90%에 육박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런 위기를 타개할 총체적인 청사진이 보이지 않는다. 



사이에드는 인기를 유지하기 위한 선심성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고 있다. 정부는 국민들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확대했지만, 이는 비효율적이고 재정만 악화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는 IMF와의 구제금융 협상도 구조조정 우려로 파토내며 재정적 여력을 스스로 제한했다. 계약직 일자리들의 계약을 무기한 연장하는 정책은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고, 기득권을 해체해서 공정한 경제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강경한 언행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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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사이에드를 지지하던 국민들은 점차 무능력한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사이에드는 2024년 대통령선거에서 압승했으나, 투표율은 27%에 불과해 그 정당성을 의심케했다. 심지어 한 지역의 선거의 3%에 불과한 투표율이 나오며 정권의 정통성을 더욱 갉아먹었다. 대통령의 열정적인 지지자들은 여전히 그를 기득권에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 간주하며 옹호하고 있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피로감을 느끼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에드는 당장은 권력을 계속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튀니지 야권은 여전히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사이에드에 맞선 공동 전선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조합 같은 단체들이 반정부 활동을 강화하고 있으나, 아직은 정권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는 않고 있다. 사이에드의 일인 독재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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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정치적 갈등과 양극화가 심해지는 오늘날, 튀니지의 사례는 그 정반대도 결코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는 반드시 제대로 된 반대의 목소리가 필요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국가적 기능이 도리어 저하된다. 그 결과 일어나는 민생 악화와 정치에 대한 반감은 결국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세력이 부상하는 것을 초래한다. 대립과 타협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 그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과제이자 튀니지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튀니지 민주주의란 결국 국민들이 지탱하는 체제이며, 그 국민들이 저버린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과연 튀니지는 민주주의를 되찾고, 이번에는 기존의 실패에서 배울 수 있을까.







참고자료


The dark side of consensus in Tunisia: Lessons from 2015-2019 
Sharan Grewal, Shadi Ham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