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
자본주의(Anarcho-Capitalism, 이하 안캡)은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경제적·윤리적 혼란의 근본 원인을
국가주의(statism)에서 찾는다. 안캡에 따르면 국가는 본질적으로 강제력을 독점하는 폭력적 장치이며, 법·조세·규제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교환과 소규모 공동체의 자율성을 침해해 왔다. 시장은 자발적 계약과 상호 이익의 네트워크인 반면, 국가는
비자발적 복종을 강요하는 구조라는 것이 이들의 기본 인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안캡은 현대 사회의 병폐—권력 집중, 감시, 관료주의, 비효율—를 “국가의 과잉 개입”이라는 단일 원인으로 환원한다.
문제는 자본주의도, 기술도 아니며, 그것들을 국가가 왜곡되게 운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기술이나
시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를 제거함으로써 기술과 시장을 본래의 ‘자유로운 상태’로 되돌리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안캡 사상은 중대한 한계를 드러낸다. 안캡은 현대 기술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 기술을 가치중립적 도구로 간주하며, 기술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고, 단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라고 본다. 감시 기술, 자동화, 인공지능(AI), 대규모 정보 인프라 역시 국가주의적 통제 하에서 악용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을 뿐, 국가가 제거된다면 이러한 기술들은 시장과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기술 중립성 가정이 안캡의 가장 근본적인 결함이다.
오늘날 AI가 야기하는 문제들은 단순히 국가의 악용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AI를 작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알고리즘만이 아니라, 막대한 전력 소비를 수반하는 대규모 데이터센터, 희토류 채굴,
세계적 공급망,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자연 생태계의 비가역적 파괴이다. 이러한 파괴는 특정 국가 정책 하나로 환원될 수 없으며,
시장 경쟁 그 자체—더 빠르고, 더 효율적이며, 더 자동화된 시스템을 향한 압력—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대량 실업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AI에 의한 자동화는 고용 계약을
‘위반’하지 않는다. 기업은 계약이 종료되면 더 이상 인간 노동을 고용하지 않을 자유를 행사할 뿐이다. 안캡의 언어로 보자면,
이는 강제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이며, 시장의 자연스러운 재조정 과정이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결과’는 수백만 명의 생계 기반을
붕괴시키고, 소규모 공동체를 해체하며, 인간을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이 국가의 직접적 강제 없이도 충분히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AWS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감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SpaceX와 계약을 거부했다고 해서 무력이
행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 인프라에 접근하지 못할 경우, 개인과 조직은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된다. 이는 법적 강제가
아닌 구조적 강제이며, 총과 감옥이 없는 권력 행사다. 안캡은 이 형태의 권력을 ‘자발적 교환’이라는 말로 지워버리지만, 현실에서
이는 선택의 여지를 박탈하는 지배에 가깝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 기술이 과연 가치중립적인 도구인지, 그리고 안캡이 상정하는 안캡적 사회가 실제로 지속 가능한지를 사고실험을 통해 검토해보자.
가령 전 세계적으로 자발적인 국가주의의 폐기가 이루어지고, 인류가 안캡적
공동체들로 회귀했다고 가정해보자. 국가는 해체되었고, 모든 사회 질서는 자발적 계약과 비침해성 공리(non-aggression
principle)에 기반해 운영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인간 집단 간의 갈등과 경쟁 자체를 소멸시킬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원, 기술, 영향력, 그리고 무엇보다 집단의 생존과 증식을 둘러싼 경쟁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오히려 이를 조정하던 제도적 장치가 사라진 만큼 그 경쟁은 더욱 직접적이고 가혹해질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결정적인 요인은 도덕적 정합성이나 이념적 일관성이 아니라, 자연선택적 압력이다.
안캡적 공동체는 오직 하나의 조건, 즉 기술 진보와 경제성장이 안캡의 비침해성 공리와 충돌하지 않을 경우에만 존속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안캡은 기술 진보와 경제성장이 “우연히” 자유와 양립할 때만 유지 가능한 사회 질서이다.
그러나 인간 집단은 도덕적으로 일관되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더 잘 적응하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만약 특정 기술 단계에서, 혹은 특정 생존 환경에서 국가주의적 개입—중앙집중적 계획, 강제적 자원 동원, 인구 및 노동의
조직화, 대규모 인프라 통합—이 집단의 생존 확률과 증식 능력을 유의미하게 향상시킨다면, 그러한 방식을 채택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을 압도하게 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이 선택이 반드시 이념적 배신이나 도덕적 타락의 결과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집단적 생존을 위한 합리적 적응으로
나타난다. 외부 위협, 자원 부족, 기술 격차, 군사적 열세 앞에서 안캡의 비침해성 공리는 점점 사치가 된다. 살아남기 위해, 더
효율적으로 상대를 앞지르기 위해, 어떤 공동체는 ‘임시적’이고 ‘부분적인’ 국가주의적 장치를 도입하게 된다.
그 결과는 구조적으로 예측 가능하다. 국가주의적 장치를 도입한 집단은 단기적으로 더 빠른 기술 축적, 더 집중된 자원 배분, 더 강력한 군사·산업 역량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우위는 단순히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증식과 모방을 통해 확산된다. 살아남은 체제는 정당화되고, 패배한 체제는 사라진다. 이는 정치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 압력의 문제다.
결국 순수한 안캡 공동체들은 경쟁에서 도태되거나,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킨다. 이 변형의 방향은 거의 예외 없이 중앙집중화, 강제력의 제도화, 국가적 조직 형태로의 회귀다. 즉, 안캡이 꿈꾸는
세계는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균형 상태가 아니라, 국가주의가 다시 출현하기 전의 불안정한 전이 상태에 불과하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현대 기술이다. 현대 기술은 인간의
선택을 중립적으로 기다리는 수동적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규모, 속도, 통합, 표준화, 중앙집중적 통제를 요구하며,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사회 형태만을 선택적으로 살아남게 만드는 선별 장치에 가깝다. 안캡은 이 기술의 선택 압력을 과소평가하거나, 아예 보지 못한다.
결국 안캡은 AI로 인한 생태계 파괴와 대량 실업을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현대 기술이 왜 반복적으로 국가주의를 재생산하는지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자연은 소유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도덕적 고려에서 배제되고, 인간 삶의 기반이 붕괴되는 과정은 시장의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현대 기술은 인간 사회를
재구성하는 자율적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립적인 도구로만 취급된다. 이러한 근본적 결함으로 인해, 안캡은 AI에 의한
위협이 이미 현실화된 오늘날 더 이상 유효한 사상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반기술적(anti-tech), 나아가 원시주의적 성찰의 필요성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기술을 “덜
쓰자”는 제안이 아니다. 개인과 소규모 공동체의 자율성, 자연생태계, 그리고 삶의 의미 자체가 기술 진보와 경제성장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재사유하자는 요구다. 국가 이후의 자유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문명 그 자체에서 벗어난 인간, 다시 말해 야생적 인간의 가능성을 사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 없는 세계는 자유의 낙원이 아니라, 자유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인간과 자연생태계를 압착하는 또 다른 형태의 지옥이 될 뿐이다.
물론 여기서 하나의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설령 현대 문명이 붕괴하고 원시적 생활 양식으로 회귀하더라도, 인간은 본성적으로 도구를 만들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존재이므로, 언젠가는 다시 문명으로 회귀하지 않겠느냐는 의문이다. 즉, 원시주의는 결국 일시적인 퇴행일 뿐, 기술 문명의 재등장을 막을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원시주의자들은 이 반론이 현대 문명의 성립 조건을 오해하고 있다고
본다. 현대 산업 문명과 고도 기술 사회는 단순히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기술적 호기심만으로 성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질학적으로 예외적인 조건—쉽게 채굴 가능한 고농도의 화석 연료와 희귀 자원의 대규모 매장—위에서만 가능했던 일회적 사건에
가깝다. 석탄, 석유, 천연가스와 같은 에너지원은 원시적 기술로도 접근 가능했기 때문에 산업혁명의 기폭제가 될 수 있었지만,
오늘날 그러한 자원들은 이미 거의 고갈되었거나, 고도로 진보한 현대 기술 없이는 채굴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다.
따라서 문명 붕괴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 집단들이 제한적인 도구 제작이나
소규모 기술 발전을 이루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오늘날과 같은 수준의 고도로 진보한 기술 문명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원시주의의 판단이다. 다시 말해, 기술은 언제나 발전한다는 믿음 자체가 이미 산업 문명의 경험에 깊이 오염된
사고이며, 자연적 조건과 물질적 기반을 무시한 신화에 가깝다.
이 관점에서 원시주의는 “문명을 없애도 다시 생겨난다”는 숙명론을 거부한다.
오히려 그것은, 한 번 출현했다가 지질학적·생태학적 조건의 소진과 함께 스스로 붕괴하는 문명 이후의 세계를 상정한다. 그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문명에 지배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태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자연이 허용하는 선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국가 없는 세계가 자동적으로 자유를 보장하지 않듯이, 기술 없는 세계 역시 자동적으로 낙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곳에서는, 인간이 다시금 기술 진보와 경제성장의 논리에 의해 압착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구조적
조건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반기술적·원시주의적 성찰은 퇴행적 공상 혹은 낭만이 아니라, 문명의
불가역적 붕괴 이후에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현실주의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기술 체제가 인간을 부품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세계에서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자유를 꿈꾸는 대신, 우리는 이제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기술 문명 그 자체가 인간에게 남길 것은 끝없는 경쟁과 피로감, 그리고 조용한 멸종뿐일
것이다.
https://antitechkorea.com/essays/338
버몬트 기만책을 잘 아는구만
안캡은 기만적인 해체주의자이자 리버럴이 랩틸리언 나체를 숨기기 위해 두른 인간의 외피이다.
Antitechkorea= 시애틀 백인창녀 사먹은 성매매범 한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