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고싶어서 쓰는 똥글이라 지루하고 현학적일거다

자본주의 비판

1776년의 산업혁명 이래 발생한 자본주의는 그 압도적인 생산성으로 기존의 모든 질서를 가히 폭력적이라 할 수 있을 속도로 짓밟고서 그 위에 금융—중세부터 유대인들이 주로 종사한 산업—과 자본투자, 즉 돈의 움직임이 지배하는 새 질서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불행히도 자본주의의 몰락보다 세계의 몰락을 상상하는게 쉬운 상황에 놓여있다.

자본주의가 그 무수히 많은 내재적 모순들을 가지고서도 지금껏 유지되어온 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다. 바로 노동자 즉 근대의 노예들을 갈아넣어 만든 압도적 생산효율이다.

1
그렇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연료에 불과하며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권과 복지는 단지 노동자 폭동을 진압하는 것보다 저렴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이 존엄해질 수 있는 최선은 배부른 돼지에 불과하다.

또한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이고 창조적인 경향을 짓밟는다. 그리고 그 위에 관료 체제와 상인들의 문법—돈, 돈, 돈—으로 쌓은 생산성을 올린다. 우습게도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유일한 의의인 생산효율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 관료들을 자본가의 바로 밑 또는 자본가와 동등한 격으로 대하는 것이다. 생산의 첫째는 자본투자요 둘째는 노동력이거늘 생산에 집중된 체제가 생산에 기여한지 않는 기생충의 편을 든다니 어찌 이런 모순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자본주의는 필시 반민족적인데 이는 자본주의의 장점인 생산효율을 이익으로 연결짓기 위한 국제무역이 민족주의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민족적 자본주의란 마치 요르문간드처럼 스스로를 갉아먹게 되어 탈민족적으로 변질되거나 붕괴한다.

2

사회주의

1919년에 교리로써의 사회주의는 죽고 원한만이 남았다. - 베니토 무솔리니

그렇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는 교리로써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의 진보성이 잠재한 자본주의적 성격 때문이라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린 반동적인 사회질서 하에서 노동자계급에 의해 그 무엇보다도 급진화된 사회주의를 구현하여야 한다. 그 주변부가 반동적이지 않고서야 혁명성을 상실해버리는 아이러니지만 기능한다면 그것을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당은 관료적이다. 나는 이따위 관료조직으로 사회주의를 부활시키지 못하리라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노동조합—비록 부르주아 어용 집단으로 전락한 예가 있으나 그것은 교조적 반자본주의를 추종하지 못한 과한 온건성 때문이다—을 사회주의달성의 유일무이한 도구로 여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형태의 노동조합이 아니다. 중세의 직능 길드를 부활시켜야한다. 현재의 노동조합은 이미 과하게 관료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모든 경제활동을 통제하는 강한 계획경제체제가 필요하다. 시장경제의 경쟁은 사회경제적 갈등이 되고 이것은 사회주의체제가 자본주의로 퇴보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전사회구성체의 총의를 결속시키지 못하면 사회주의를 유지하지 못하게된다.


지루하고 현학적인 경제 얘기 그만하고 신학 얘기를 잠깐 하겠다. 우선, 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절대적으로 전지전능한 신을 광신한다. 그리고 나는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아니, 사실 난 신이 존재하는지에 관해선 별 관심이 없다. 어차피 신보다 중요한것은 민족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난 신의 존재여부에 무관히 신을 믿는다. 그것은 무신론이 지나치게 근대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민족혁명에 투신하는 십자군이 되어야한다. 우린 이성 대신 영성과 광기에 모든 것을 떠맡길 필요가 있다. 인간 이성의 불완전성을 의심하고 경멸하라. 광기는 신께서 내려주시니 완전하다. 그 누가 존재하지 않는 신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겠는가?

민족

신에 대해서 솔직히 많이 아는 것이 없어 그만 얘기하겠다.

나는 분명히 민족주의자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글로벌리스트, 신자유주의자, 유대금융자본가, 신좌파, 어용 사민주의자, 그 밖의 무수히 많은 기성 권력들이 민족주의를 반대하고 세계주의와 국제주의의 자유주의적이고 위선적인 질서를 주창하기 때문이요 자유주의라는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가장 혁명적인 수단이 민족주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민족주의자가 되기 위하여 민족이란 개념이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한다. 그렇기에 중요한것은 민족이란 허구적 개념에 인종과 문화적 동질성이라는 실존을 덧대는 것이다. 인종적이지 않은 모든 민족주의는 백일몽이다.

민족의 총의는 노동자계급의 일반의지요 이는 초헌법적 영도자의 권위로 실현되니 곧 결단주의로 이어진다. 정해진 헌정질서 없이 노동자의 일반의지의 집합을 영도자(군주)의 권위로 실현하는 유기적 국가는 사회계약론 기반의 자유주의 질서에 대항하는 사회유기체론 기반의 민족주의 국가가 되어 그 자체로 전위조직이 된다.

노동자

노동자는 생산과 경제의 기틀이고, 사회주의의 초석이다. 또한, 노동자는 군부와 더불어 관료계급권력에 대항하는 전사계급의 기능을 현대에 수행할 수 있는 둘 뿐인 존재다. 군부를 선택한 결과는 다들 알테니 노동자를 선택해야한다. 현실사회주의의 패배는 관료권력의 자본주의 관료권력에 대한 패배니 관료성에 그 원인이 있다.

관료와 중간계급의 약탈적 권력, 자본가의 국제주의성은 모두 분쇄하여야 한다. 그리고서 노동자 질서를 건립하여야하며 반관료주의를 위한 끝없는 혁명적 숙청이 필요하다. 노동자 권력은 노동자 개인-노동조합-지방정부-중앙정부로 연결되어 그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어야하며 연방의 기초가 되어야한다.

정치

우선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즉 가톨릭 보수주의의 무신론적 해석,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다’를 인용하겠다. 자유주의자들이 토론과 타협, 협치, 대화를 외칠때 우린 우적구분과 폭력으로 대답하여야하며 그것이 가능한 최선의 정치다.

정치는 행정적 관리의 대상도 윤리를 실천하는 일도 아니다. 정치는 오로지 주권 행사와 결단으로 행해지는 예외적 폭력이며 이는 반드시 주권자에 의해 실행되어야한다. 주권자는 곧 질서이며, 국가이고, 노동자의 대변자인 군주여야하며 이러한 형태의 군주주의적 결단주의는 자유주의와의 투쟁을 위한 무기이다.

개량주의 비판

개량주의자들 즉 자유주의 질서가 허용한 변화로 목적을 달성 가능하다 말하는 자들은, 사실 누구보다도 변혁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기득권인 부머 자유주의 체제를 유지하고픈 늙고 배 나온 권력자들이며 혁명정신 따윈 애진작에 잃어버린 자들이다.

역사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가 달성된 사례는 소련, 중국, 쿠바, 리비아 등 다양하지만 개량주의가 사회주의를 달성한 사례는 안타깝게도 전무하다. 역사가 개량주의의 불가능함을 증명하였는데 이를 보고도 개량주의를 주장한다면 그는 아마 생각이 없거나 부르주아 쁘락치일 것이다.

파라소셜

파라소셜, 유사사회관계. 이는 자본주의의 폭발적 과잉 하에서 우리 주위에 자연스레 녹아들어있다. 당장에 우리가 정치인을 지지하는것도 파라소셜이다. 우리가 지지하는 정치인은 우리의 존재도 모르니 지극히 일방적이고 끔찍한 파라소셜이라 할 수 있다. 후원하면 반응이라도 해주는 버튜버보다도 더 파라소셜하다! 물론 그렇다고 버튜버가 딱히 파라소셜하지 않게 되는건 아니다....

이러한 파라소셜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간다. 예를 들어 진짜 사회적인 관계라던가. 그러나 파라소셜이 우리에게 준 것은 겨우 며칠이면 사라져버릴 도파민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우린 한줌의 도파민이 고파 또다시 파라소셜한 관계에 빠져든다.

반자유주의

한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늘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다. - 칼 맑스

우리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 즉 자유주의는 지배계급, 관료와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다. 그렇기에 모든 저항적•혁명적 운동은 반자유주의적 성격을 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을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두는데 이는 민족주의와도 사회주의와도 반대된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라면 자유주의를 수용하기란 불가능하며 자유주의자들과 글로벌리스트들이 손을 잡는 것은 필연이다. 

자유주의는 스스로가 인류의 이름으로 싸운다 주장하곤 하는데, 인류의 이름으로 싸우는 것은 극히 반인륜적이다. 왜나하면 그것은 그 적을 인간 미달로 격하하고 인류의 적으로 만들어 증오의 씨앗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인류는 애초에 하나의 공동체가 되기엔 너무 크며 인류의 적이란 허상일 뿐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나치스와 같은 그들의 반대자를 인류의 적이라 한다면 나는 자유주의를 인류의 적이라 하겠다. 물론, 나치스도 자유주의도 인류의 적이 아니다. 

또한 자유주의는 우파적 형태와 좌파적 형태 모두 비대한 국가를 낳게 되는데 이는 자유주의와 국가주의가 한 몸임을 입증한다. 따라서, 본래의 목적인 개인의 자유 실현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이다.

대의민주정 비판

자본가들의 체제인 대의민주정,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인민주권을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는 주권자는 대의민주정에서도 인민이 아닌 국가원수다. 국가적 예외상태를 국민투표로 정한다면 대의민주정이 아니라 직접민주정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실질적 지배층이 부르주아 및 관료인 이 체제는 스스로를 마치 국민이 지배하는 체제인 양 날조하고선 부르주아와 관료가 책임질 일을 국민 전체의 책임으로 떠넘긴다. 권력은 가지고 책임은 지지 않는 파렴치한 짓이다. 심지어 부르주아에게 착취당할 자유나 있는 한심한 체제를 자유롭다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 대의민주정에서 거짓말이 아닌 것을 찾는게 거짓말인 것을 찾기 보다 한참 더 어려울 것처럼 느껴진다.

보수주의

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체제와 자유의 수호자로써의 보수주의를 절대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 대신 반자유주의와 가부장주의로써의 보수주의를 말한다.

1. 보수라는 것

보수. 명사. 보존하여 지킴. - 표준국어대사전

그런데...도대체 무엇을 보전하여 지킨다는 것이지? 한국은 군주국도 반자유주의 체제도 아니며 자유주의 87체제는 그저 외세로부터 전이된 껍데기에 불과한데? 그리하여 나는 딘정한 보수주의자라면 정녕 ‘보수’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5공이나 3/4공으로의 회귀는 원치 않는다. 어찌 보수주의자가 되어 ‘공화국’으로 돌아가자 하겠는가. 

2. 군주

군주는 결단하는 자다. 군주는 국가의 예외상태를 결단지음으로써 보통 상태와 예외 상태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자다. 즉, 군주란 유일한 주권자이며 민족의 총의를 신성한 왕권으로 실현시키는 가장 민족적인 형태의 지도자다. 또한 군주는 권위로 관료를 짓뭉개는 망치고 국가의 중앙이 되는 기둥이다.

3. 관념

보수주의는 관념적이다. 즉 보수주의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정신적 가치를 추종하며, 무형적이다. 이는 물질중짐적인 근대성과 정면으로 춘돌하는데 따라서 자연히 보수주의는 근대 이후의 역사를 퇴보와 타락으로 규정짓고 비관하게 되는것이다.

그렇기에 보수주의는 관념과 정신의 재건을 원하고 이를 위해 근대성에 저항하는 반동적 성질을 띄게 되는것이다. 이것이 근대 이성주의에 기반을 둔 진보주의자 및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을 가르는 가장 주요한 특징이며, 근대성을 수용하고 이성과 합리적 인간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보수주의라 할 수 없을것이다.

4. 지역

근대적 강력한 중앙집권 관료국가에 반대하기 위해, 나는 지방분권적 국가를 옹호한다. 지역적이고 분권적인 형태지만 조직화되어 연결된 국가는 덜 관료적으로 가동 가능하기 때문에, 치안•법률과 같은 대부분의 행정업무는 지방에 맡겨져야 하며 산업구조상으로도 지역적 분리와 유기적 연결이 필요하다. 중앙권력은 늘 스스로의 비대함으로 인해 부당한 이익을 얻는 자들을 낳기에 중앙권력은 전민족적인 일과 주권 행사, 외교를 비롯한 소수의 업무만을 담당하는 것이 옳다. 이는 지나친 중앙화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 2세계의 수정주의, 나치스와 같은 관리관료국가로 향하는 역사적 경향성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기술

3

미래주의. 과거의 전통을 부정하고 근대문명이 낳은 속도와 기계를 찬미하는 예술 사조.

4
그리고 기욤 파이의 고고미래주의. 프랑스 신우익 운동의 일파로 고대의 정신과 현대의 기술을 융합하려는 이념.

5
독일 보수혁명 운동가이자 <강철 폭풍 속에서>의 작가 에른스트 윙거. 전쟁으로 기술과 노동이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보았으며 그로인해 군국주의자로써 기술을 찬미하였다.

나는 근대의 기술만능주의에는 회의적이나, 분명히 기술을 찬양한다. 그것은 기술문명이 가진 폭력적 에너지가 노동자계급의 전사화 즉 국민의 군인화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 폭력적 에너지로 혁명을 무한히 이어가야하기 때문이다. 기술은 속도를, 속도는 폭력을, 폭력은 파괴를, 파괴는 피를, 피는 신화를, 신화는 혁명을 만들어내기에, 기술을 연료로 전진하는 혁명적 유기체 국가가 세워진다면 그 국가는 그 자체로 전위대가 된다. 그렇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전위주의자들 그리고 혁명의 기관장들은 기술의 파괴적인 면모를 예찬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에는 유의해야할 점이 한가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기술이 인간을 대체한다면 영혼을 상실하게 되어 혁명정신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지 않고 강화하여야하며 이는 인간 이상의 인간이 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공동체윤리

민족은 공동체이고, 사회도 공동체이며, 국가도 공동체이기에 나는 공동체를 부정할 수 없는데, 따라서 공동체윤리와 공공선은 중요하다 말할 수 있을것이다. 개인의 집합인 공동체가 각 개인보다 상위에 있음은 자명하며 공공선이 실현하는 이익이 개인선이 실현하는 이익보다 일반적으로 크다는 것 또한 자명할 것이다. 공동체윤리는 유기적이고 능동적인 규범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작동하며 이는 문제점을 야기할 수 있겠으나 보편적으로 그 이득이 문제점보다 크다고 보아 나는 공동체윤리를 옹호한다. 공동체윤리는 훼손되면 복원시키기 어렵고 오랜 시간에 걸려 축적된 것이므로 이를 해하는 것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는 일이기에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윤리의 지속가능함을 위한 내부적 자기비판•보강을 위하여 공동체 내의 개인은 공동체윤리를 의심하고 비판 및 보완함으로써 공동체윤리에 이바지할 필요가 있다. 즉 공동체윤리는 계속 고정되어 있는것이 아니라 세상과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되고 개선되면서도 그 기저에 있는 정신인 공공선과 유기적 공동체의 보존은 지켜나가야 올바르고 의미있는 공동체윤리를 실현한다고 할 수 있게 될것이다.

실존 그리고 영웅
우리는 실존한다. 우리는 세계 ‘내부’에 실존한다. 즉 우리는 세계-내-존재이며 그렇기에 우리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있는 존재자이며 매순간 행동으로 자기 자신의 본질을 창조하는 자다. 우리의 본질 즉 고유속성은 이러한 실존을 통해 내부에서부터 정의내려지며 이로써 내부가 외부에 우선한다는 사실 즉 관념론을 증명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존재란 어떠한 형태로든 분명 고통의 연속이며 이러한 고통은 존재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 즉, 고통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끊어낼 수 없기에 우리는 고통을 버텨내고 고통 속에서 우리의 존엄함을 찾아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고통을 회피하려 해봤자 그저 도피에 불과할테니 단지 수용하고—이기려 하지도 말고 ‘그래도 버티는’ 정신— 우리가 그럼에도 분명히 존엄하다는 진실에 도달하여야한다. 이러한 영웅적 정신은 사회와 민족을 영도하는 모든 원리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유기적 사회론

사회는 작은 세포가 모여 만들어진 조직으로써 일종의 집합이며 이는 유기체의 성격을 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회의 구조는 유기체이며 이는 사회 또한 우리와 같이 실존함을 말한다. 그렇기에 사회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하며 파편화된 사회는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이것은 지나치게 파편화되고 사회 정의의 이름으로 온갖 종류의 비사회적이고 반공동체적인 다양성이 범람하여 거의 마비상태에 다다른 오늘날의 유럽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이며 또한 과거부터 제기되어온 합당한 이론이다. 개인은 세포로써 사회에 공헌하는 의무를 다하며 사회와 함께 이익을 공유하는 권리—이해관계자이자 경제적 주체로써 사회에 참여하는 권리—를 얻게 되는데, 이는 사회 공공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에 직결시킨다. 따라서 사회와 개인은 분리될 수도 분리되어서도 안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며 이로써 유기적 사회는 개인에 기반해 작동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끝. 대충 나쁘지 않게 나온듯?

이걸 무슨 탭에 올려야하나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