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철학적 유물론은 논리적 내용을 구성하는 여러 계기와 요소를 반드시 객관적 실재와 연관을 이루는 것으로 다룬다. 눈에 전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추상적 제 개념들, 여러 추상적 지칭 표현 역시 객관적인 것을 그 계기로 지닌다는 것을 유물론적 세계관은 승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승인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데, 심리학·언어학적으로 인간에 의해 구사되는 모든 낱말, 문장은 항상 외부 조건을 반영한다는 것이 계속하여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비고츠키는 이와 같은 언어적 개념의 활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어린이는 게임과 말에 있어 상징과 그 가치의 연결에 어떠한 조건성과 자의성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 실험을 통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이 나타내는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낱말은 지정된 대상의 자질에 의존해야 한다. 어린이의 게임에서는 어떤 것이 아무것이나 다 될 수는 없다. 사물의 실제 성질과 그 상징적 의미가 복잡하게 구조적으로 얽혀 있음이 게임에서 드러난다. 어린이는 낱말을 사물의 특성에 따라 사물과 연관 지으며, 이 사물의 특성은 그것이 가진 보편적 구조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실험에 참가한 어린이는 바닥을 유리창(그 위로 걸을 수 없어요!)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게임 과정 중에 그 성질이 바뀐 의자(마치 기차인 것처럼 취급된)는 기차가 될 수 있다. “램프 위에다는 쓸 수가 없고 탁자로는 불을 켤 수가 없어요”라며 어린이는 ‘탁자’와 ‘램프’의 의미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대상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성질을 바꾸는 것이다. 말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어린이가 기호와 그 가치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하며 매우 오랫동안 이 관계를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없다. 진전된 실험들 역시 단 한 번의 발견을 통해 명명의 기능이 나타나지 않으며, 이 또한 그 자신의 자연적 역사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린이가 말을 형성할 때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개별의 사물에 각각의 이름이 있다는 발견이 아니라 사물을 조작하는 새로운 방법, 즉 이름을 통해 사물을 조작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외부적 기호들이 기능적으로 비슷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기호와 그 가치의 연결이 성인에 의해 만들어진 상응하는 연결과 일찍부터 닮기 시작하지만 그 연결들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심리적 형성물이다.”10
언어철학을 전개함에서 인간의 언어적 활동을 외부 대상에 대한 반영이라는 사실과 완전히 무관한 것임을 전제하는 현대 주관적 관념론자들의 망동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언어적 활동을 설명함에서 단편적 문구에 대한 의미론과 통사론적 ‘분석’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시도는 불가피하게 낱말, 문장, 문법적 요소의 토대를 해명함에서 조잡한 형태의 순환논증을 반복하는 데에 그칠 수밖에 없거나, 일상언어학파의 극단적인 유아론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건전한 존재론적 견해〉라는 것 역시 이 두 경향 사이에 걸쳐 있는 주관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언어 활동에서 개념적 연관 고리를 부정하는 콰인은 이제 모든 언어적 활동에서 문장이 갖는 의미는 그것의 논의 형식이 “어떤 존재론에 개입하고 있는가”11에 따라 그것의 계기와는 하등 무연고하게 ‘전환’할 뿐이며, 이 ‘전환된’ 외적 실천 형태는 “그 이론의 속박 변항12이 지칭할 수 있어야만 하는 실재에 그리고 그 실재에만 개입”4한다. 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존재론’이란 이러한 ‘개입’이 요구하는 주관적 체계로서의 실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물리적 대상이란 유전하는 경험에 대한 해명을 마무리짓고 단순화하기 위해 요청된 실재”14에 불과하다. 각자의 의미는 각자의 속박 변항에 한해서만 의미를 지니기에, “내가 McX의 존재론에 반대하면서 나의 존재론을 고수하는 한, 나는 McX의 존재론에는 속하면서 내 존재론에는 속하지 않는 실재들을 내 속박 변항들로 하여금 지칭하도록 허용할 수는 없다.”15
콰인의 이러한 주장은 형이상학의 전형이며, 그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유아론과 다르지 않다. 콰인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설정된 속박 변항에 제한된 의미만을 지니며, 그것은 다른 속박 변항 및 그 변항의 토대와 그 어떠한 연관을 이루어 통일된 체계로 나아갈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총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의식 외부에 독립해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그래서 그는 또한 『독단』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한 사람의 경험주의자로서 과학의 개념적 틀을 궁극적으로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서 미래의 경험을 예측하는 도구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물리적 대상이란 편리한 매개물로서 개념적으로 상황에 맞게 도입된다. 이것들은 경험에 의한 정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호메로스의 신들에 비견되는 환원 불가능한 설정물들이다. 나는 비전문적인 물리학자로서 물리적 대상들은 믿고 호메로스의 신들은 믿지 않는다. 또한 나는 그와 다르게 믿는 것을 과학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물리적 대상과 신들은 정도만 다르지 종류는 다르지 않다. 두 종류의 실재들 모두는 오직 문화적 설정물으로서 우리의 개념 작용 내에 들어온다(Both sorts of entities enter our conception only as cultural posits). 물리적 대상의 신화는 경험의 흐름을 다루기 쉬운 구조로 파악하는 장치로서 다른 신화들보다 더 효과적임을 증명해 왔다는 점에서 다른 대부분의 것들에 비해 인식론적으로 우월하다. 설정물은 거시적 물리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원자적 차원의 대상들은 거시적 대상에 대한 법칙들과 최종적으로는 경험의 법칙들을 더 단순하고 다루기 쉽게 만들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 과학은 상식의 연장이며, 이론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존재론을 부풀리는 상식적인 조치를 계속한다.”16
이것이 〈건전한 존재론적 견해〉의 실질이다. 그렇다면 콰인의 기획은 주관주의적 소여론이나 갖가지 대응론의 극복인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유의미한 용어는 감각 자료의 이름이거나 그런 이름들의 복합어이거나 또는 그런 복합어의 약어이다. 이렇게 진술함으로써 이 이론에는 감각 사건으로서의 감각 자료와 감각적 성질로서의 감각 자료 간 애매함이 남게 된다. 그리고 허용될 수 있는 결합 방식들도 모호하게 남게 된다. … 우리는 더 그럴듯하면서도 극단적 환원주의라는 것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완전한 진술들의 의미 있는 단위들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진술들이 감각 자료 언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하긴 하지만, 용어 대 용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환원주의의 독단은 더 세련되고 섬세한 형태로 경험주의자들의 사상에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관념은 각 진술에 혹은 각 종합적 진술에 가능한 감각 사건들의 고유 영역이 결합되어 있어서 그중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든지 그 진술의 진리에 그럴듯함을 더해 줄 것이고, 또한 각 진술에 가능한 감각 사건들의 다른 고유 영역에 결합되어 있어서 그것들의 발생함으로 인해 그 진술의 그럴듯함이 감소될 것이라는 생각이 남아 있다. 물론 이런 관념은 검증 이론에서는 절대적이다.”17
이 서술에서 핵심이 될 “전체로서의 진술”의 구체적 내용에 관해 콰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만약 우리가 경험주의자라면, 사실적 구성 요소는 마땅히 확증 가능한 경험의 영역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또한 문제되는 것이 언어적 요소뿐인 극단적인 경우에서 참인 진술은 분석적이다. … 현재 나의 제안은 어떤 개별 진술에서든지 언어적 구성 요소와 사실적 구성 요소에 관해 말하는 일이 무의미하며, 또한 이것이 많은 무의미함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과학은 언어와 경험에 이중으로 의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성은 개별적으로 취해진 과학적 진술로는 의미 있게 추적될 수 없다. … 균형 있는 고려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체 장에 영향을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개별 경험들도 그 장 내에 속해 있는 어떤 개별 진술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18
콰인의 주장은 소여된 것만을 취급할 수 있다는 주관적 관념론의 전형이다. 이러한 주장은 전혀 새롭지 않다. 이는 레닌의 비판 대상이었던 주관주의자 보그다노프의 주장과 그 본질에서 단 한 치의 차이점도 없다:
“『경험일원론』의 제1권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객관성의 기초는 집단적 경험의 영역 내에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나 동일한 생활상의 의의가 있는 경험의 소여, 즉 우리가 모순 없이 우리의 활동을 그것에 입각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확신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도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그것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러한 경험의 소여를 객관적이라고 부른다. 물리적 세계의 객관적 성격은 그 세계나 나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인을 위해서 존재하며[거짓말이다! 물리적 세계는 "만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 레닌] 또 만인에 대하여 일정한 의의, 나의 확신에 의하면 나에 대해서와 똑같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있다. 물리적 계열의 객관성은 그 보편 타당성이다."(25쪽, 보그다노프의 강조).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서 마주치는 물리적 물체의 객관성은 결국 각이한 사람들의 발언의 상호 검증 및 합치를 기초로 하여 확립된다. 일반적으로 물리적 세계란 사회적으로 동의되고 사회적으로 조화된,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적으로 조직된 경험이다."(36쪽, 보그다노프의 강조)”19
“관념론은 말한다: 물리적 자연은 생물의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20 콰인의 주장과 이전 분석철학자들의 주장에는 아주 지엽적인 차이 빼고는 없다. 그는 소여된 감각 요소를 기존 경험주의의 방식으로 ‘분해’─러셀이나 무어로부터 유래한 방법으로서─하여 ‘사실적 구성 요소’에 대응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콰인이 택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실제로 완강히 저항하는 경험에 직면해서 한 진술을 다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할 경우, 그것은 우리 선택의 상대적 그럴듯함을 반영하는 느슨한 연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엘름가의 벽돌집이 있다는 바로 그 진술을 같은 주제에 관해 그에 관련된 진술들과 함께 재평가함으로써, 분명히 우리의 체계를 조정하게 될 완강한 경험들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켄타우로스가 없다는 바로 그 진술을 동종의 진술들과 더불어 재평가함으로써, 우리의 체계를 조정하게 될 완강한 경험들도 상상할 수 있다. 완강히 저항하는 경험은 전체 체계의 서로 다른 선택 가능한 부분들 내에서 대안이 되는 서로 다른 재평가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조정될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상상한 예들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전체 체계를 혼란시키지 않으려는 자연적인 경향으로 인해, 우리는 수정의 초점을 벽돌집과 켄타우로스에 관한 이들 특수한 진술들에 맞추어도 될 것이다.”21
콰인은 “완강히 저항하는 경험”이 드러날 때마다 ‘조정’되는 진술만 취급되어야 한다는 ‘대안’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은 대응 개념을 부정한다기보단, 오히려 대응 개념을 전제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이 “(기존 경험적 사실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경험”이 그 자신의 의미를 진술에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 “완강히 저항하는 경험”이 조정을 유발함에 선차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전제이며, 이러한 부여 역시 대응─“우리의 체계를 조정하게 될 완강한 경험들”과의 대응─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결론은 "물리학이나 논리학이나 존재론의 고도로 이론적인 진술보다는 더 분명한 경험적 지칭체를 갖는 것"22을 승인하는 것이며, 감각 자료와의 대응 자체가 부정됨을 전제하기보단 조정 행위에 "[조정에 전제되는 의미론적 요소가] 감각 자료와의 우선적 연관성 탓에 간섭당하는 경우가 거의 없음을 의미할 뿐"4이다. 대응이 개별적이고 즉각적·원자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긍정─러셀의 관점─하는가, 아니면 대응이 항시 ‘전체’적이며 지연─조정 과정으로 인한─을 포함하는 것으로서만 성립함을 긍정하는가, 이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줄 요약점 ㅠㅠ
언어철학을 전개함에서 인간의 언어적 활동을 외부 대상에 대한 반영이라는 사실과 완전히 무관한 것임을 전제하는 현대 주관적 관념론자들의 망동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언어적 활동을 설명함에서 단편적 문구에 대한 의미론과 통사론적 ‘분석’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시도는 불가피하게 낱말, 문장, 문법적 요소의 토대를 해명함에서 조잡한 형태의
순환논증을 반복하는 데에 그칠 수밖에 없거나, 일상언어학파의 극단적인 유아론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