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교회 장로, 어머니는 권사인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에요. 특히 아버지는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부터 3대째 기독교인 집안이었어요. 아버지는 북한에서 내려온 분이었어요. 젊었을 때 장사를 했대요. 만주 지방을 오가면서 보부상 같은 걸 하셨는데 아오지 탄광 쪽에서 나무를 하다가 떨어져서 발꿈치 쪽에 푹 패인 상처가 있었어요. 분단될 때 월남해서 서울로 왔어요. 북한은 종교를 탄압했으니까 교회 장로인 아버지를 가만 놔두지 않았겠죠.


아버지는 전형적인 장사꾼. 장사꾼이라 하면 좀 비하되는 것 같으니까 상업가라고 할게요. 실 장사를 하셨어요. 대구의 주된 산업이 섬유였는데, 아버지는 염색공장을 운영하시면서 거기서 만든 실을 파는 점포를 서문시장에 세 개 갖고 있었어요. 공장 직원이 한 20명~30명 있었고 점포에도 점원들이 있었어요. 나중에 커서 사회과학도 좀 배우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을 쁘띠 부르주아라고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용돈을 잘 주지 않았어요. 뭘 주는가 하면 물건으로 줘요. 실을 주면서 팔아서 쓰라고 했어요. 실을 어디서 파냐. 교복 집 쫓아다니면서 팔아요. 염료 다 쓰고 남은 빈 깡통도 자전거에 실어서 팔면 돈이 됐어요. 중학교 때는 껌 장사를 했어요. 껌은 누가 제일 잘 사주느냐면 여고생 누나들. 극장 앞에 가서 영화 보고 나온 여고생들한테 누나, 누나, 하면서 5미터 10미터만 쫓아가면 반드시 사줘요. 귀찮으니까. 그런 방식으로 용돈을 벌어서 썼어요.


엄마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신앙심이 아주 깊으신 분이었죠. 집안에 분란들이 많았어요. 서문시장에 불이 몇 차례 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그 화를 아내와 자식들한테 푸셨죠. 엄마는 그 모든 걸 신앙의 힘으로 견디셨어요. 기도하면서 수용하셨죠. 성경에서 지아비 말을 잘 들어야 된다고 했거든요



에잇, 잡혀가느니 지원해서 가겠다고 해서 해병대를 지원해서 합격했어요. 해병대 신병 훈련 때 교관한테 개기다가 두드려 맞아서 턱뼈가 부러졌어요. 병원에 입원했다가 두 기수 아래 애들하고 같이 김포 2사단으로 배치되어서 지냈어요. 지내다 보니 그냥 보병생활이 지루했어요. 이왕 해병대 왔는데 좀 더 빡센 경험을 하고 싶은 욕망에 수색대를 지원했어요. 수색대에 가면 일반병보다 훈련비를 좀 더 받을 수 있어서 그 돈으로 휴가 나가서 잘 놀고 싶기도 했고요. 수색대에서 훈련받다가 또 고참한테 보트 페달로 맞아서 턱뼈가 부서졌어요. 아우, 내가 군대에서 턱뼈 두 번 부서졌어요.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가 제대를 2~3개월 남겨놨을 때였어요. 

한 번 다른 지역도 순례를 해보자 해서 포항을 지원했어요. 나는 군대생활을 김포에서 두 군데, 포항까지 세 군데나 돌아다녔어요. 군대생활을 이렇게 화려하게 한 사람 없어요. 포항에 갔을 때 바닷가에서 술 먹다가 영창에 갔어요. 나는 영창도 두 번 들어갔어요. 해병대는 1년 군대 생활하면 일병이 돼요. 그런데 하사관은 6개월 훈련받고 오는데 계급이 더 높아요. 6개월짜리 하사관이 상병이나 병장한테 말을 까고 두들겨 패고 그러면 상병 애들이 눈이 돌아가거든요. 내가 일병일 때 하사관을 밤에 몰래 불러서 팼어요. 내가 패고 싶어서 팬 게 아니라 병장이 나보고 패라고 시킨 건데 그걸 대대장이 본 거예요. 상관 폭행으로 영창 10일을 갔다 왔어요. 얼마나 억울했던지.


신병훈련소 시절에 연애편지를 몰래 보내다가 걸려서 된통 당한 적이 있어요. 그땐 병사들이 편지를 쓰는 시간이 따로 있었고 교관들의 검열을 받은 후에 일괄적으로 부쳤어요. 저는 그게 싫어서 몰래 써서 보냈어요. 일주일마다 선배들이 수료를 했는데, 수료하고 나가는 선배한테 편지를 전달해 주면, 그 사람이 자기 면회 오는 사람한테 나가서 부쳐달라고 전해줬어요. 어느 날 여자 친구한테 장문의 편지를 썼어요. 봉투를 봉해야 하는데 풀이 없으니까 식당에서 밥풀로 붙이고 있는데 아이씨, 훈련받는 날 점심시간에 그게 딱 걸려버린 거예요. 교관이 밥 먹고 훈련 나가야 되는 내 후배들 앞에서 그걸 크게 읽으라고 했어요. 나랑 훈련했던 애들은 지금도 만나면 그 일을 기억하더라고요. 내 편지가 너무너무 좋았대요. (웃음)

내가 교관들을 자근자근 씹어놨거든요. 이 새끼, 저 새끼, 배워 처먹지도 못한 놈들, 하면서 하여튼 내 모든 상상력을 발휘해서 교관들을 거의 악인으로 만들었어요. 자식을 낳는다면 해병대 있는 방향으로 오줌도 못 누게 할 거라면서. 그게 들켰으니 아주 혼이 났겠죠. 어떻게 혼났냐면, 훈련장까지 기어서 갔어요. 1~2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뒤로 굴러, 앞으로 굴러’도 했다가 조교들 두세 명이 내 등에 올라탄 채로 기기도했어요. 동기들은 내가 기어가는 걸 뒤에서 지켜보면서 천천히 걸어갔어요. 내 덕분에 훈련도 안 받았고 푹 쉬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렇게 기어서 바닷가 앞에 도착했어요. 교관이 나를 꿇어 앉혀놓고 저 앞에 무인도가 있으니까 탈영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며칠 전에도 너희 선배가 탈영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말했어요. 진짜 막 사지로 몰리는 기분이었어요. 수영해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빠져 죽었다니까 또 못 가겠고. 악몽 같은 시간들을 보냈죠. 그런 걸 군대에선 고문관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바로 고문관이었어요.


1983년 봄에 대학에 복학했어요. 2학년이면 학과를 선택하게 되는데 입대 전 성적이 거의 0점이어서 가장 경쟁률이 낮은 문화인류학과에 들어갔어요. 그 과의 특성은 엠티, 그러니까 문화유적 답사를 많이 간다는 거예요. 만날 놀러 가서 여자애들하고 노니까 재밌더라고요. 

나는 해양전수대학이라는 학교에 다시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에 학과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시간이 많으니까 취미로 학교 안에 있던 행글라이딩 동아리에 들었어요. 해병대에서 낙하산을 탔던 적이 있는데 아주 재밌더라고요. 행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은 욕구가 강했어요.

대학 동아리에 기구가 있어서 그걸 갖고 일주일에 한 번 동네 앞산에 가서 훈련을 받았어요. 그러다 8월 7일 일요일엔 토함산으로 향했죠. 그해에 최초로 전국 대학생 행글라이딩 대회가 열렸거든요. 그날 선배와 둘이서 토함산 정상까지 행글라이더를 지고 올라갔어요. 차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고 거기서부턴 끌고 올라가는 거예요. 8월이니까 얼마나 더웠겠어요? 고생고생해서 올라갔는데 그 선배가 이륙도 제대로 못하고 확 거꾸러져서 나무에 처박히고 말았어요. 

다행히 행글라이더는 크게 부서지지 않아서 대충 고쳐서 타면 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선배는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 타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행글라이딩을 해서 내려가지 않으면 뙤약볕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그 무거운 걸 지고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죠. 너무 끔찍했어요. 대충 수리를 했으니 괜찮을 것 같아서 선배 대신 내가 그걸 타고 내려가기로 했어요. 

토함산 정상에서 멋지게 이륙했어요. 행글라이더는 힘차게 날아올랐고 이륙은 아주 성공적이었죠. 발아래 펼쳐진 장관을 즐기면서 환호성을 질렀어요.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죠. 엄청난 소리와 함께 굉장한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정신을 잃었죠. 


1983년 8월 7일 일요일이었어요. 아침에 엄마가 내 손을 잡으면서 교회에 가자고 하는 걸 살짝 뿌리치고 온 거였어요. 그날 중국 전투기 조종사가 미그 21기를 몰고 우리나라 휴전선을 넘었어요. 민방위 본부가 공습경보를 발령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실제 상황! 실제 상황!”을 외쳤던 날, 저는 장애인이 되었죠.

깨어났을 때는 경주의 어느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대구 영남대병원으로 이송되어 가던 차 안이었어요. 그때 내 하반신이 내 의지를 전혀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1983년이면 엄혹한 시절이었는데 내 주변엔 운동하는 사람들은 없고 낭만주의자들, 스포츠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었어요. 기타 치고 행글라이딩 하고 연애하고. 내 신조가 서른 살까지 살고 죽는다, 짧고 굵게 즐기다 죽는다, 였어요. 

담치기가 가장 중요한 생존 기술이었어요. 아침에 지각하면 정문이 닫히니까 담 넘어 들어가고 수업 듣기 싫어지면 다시 담 넘어 도망치고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어디선가 놀다가도 12시 땡 치면 친구 집 담 넘어 들어갔어요. 특별한 욕심도 없었고 그저 친구들하고 놀기 좋아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죠. 평범했나? 잘 모르겠네요.


딱 6개월 입원하고 돈 때문에 퇴원을 해야 했어요. 그땐 보험이 6개월만 됐거든요. 그리고 5년 동안 집에만 있었어요.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물어요. 이렇게 운동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왔냐고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5년 때문인 것 같아요. 굉장히 힘들 때도 그 시간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때만큼 밑바닥을 헤맨 적이 없으니까. 살다 보면 슬프고 힘들 때 있지요. 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느낀다는 건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고통스러운 것도 힘든 것도 없었어요. 삶이 무감각해요. 시체의 경험을 했던 것 같아요. 몸도 마음도 아프지를 않으니까 고통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혼자 있을 땐 칼로 허벅지를 막 긁었어요. 지금은 흔적이 거의 없어졌는데 담배로 팔뚝을 지져서 항상 퉁퉁 부어있었어요. 고통을 느끼기 위한 몸부림이었죠.

갇혀 있다는 느낌… 우리 집에 갇힌 동물 같은 느낌이었어요. 정말로 집에만 방에만 있었거든요. 말동무도 없이 어머니하고 24시간 같이 있었어요. 시간이 진짜로 안 갔어요. 자도 자도 끝이 없었어요. 새벽까지 멍하니 TV 보다가 애국가 나오고 지지직하면 또 잠을 자기 위한 투쟁을 했어요. 책도 잘 안 읽혀요. 무슨 희망이라도 있어야 책도 읽을 수 있는 거예요. 감옥이라면 나올 희망이 있으니 열심히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할 텐데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요. 그렇게 시간과의 싸움을 하는 동안 밖에서는 84, 85, 86년이 흘러 87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대적 저항이 터져 나오는 걸 뉴스에서 봤어요. 어느 날은 동네에서 경적 운동을 했던 것 같아요. 자동차들이 빵빵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났는데 난 그저 무감각하게 들었죠.


지금의 박경석이 그때의 박경석을 생각하면 진짜 아팠겠구나, 슬펐겠구나, 애처롭고 가엽게 느껴지지만 그때의 나는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았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여자 친구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떠나보냈는데도 아프지가 않아요. 모든 것이 포기되었을 때는 사람이 무감각해지더라고요. 내 앞에서 누가 죽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거예요. 가장 큰 절망의 상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 같아요. 그러니까 삶이 참 공허하고 허무하다는 느낌… 유서 쓰는 연습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친구야, 우리 고등학교 때 좋았지, 나를 잊지 말아줘, 이런 거. 그런데 몇 자 쓰다 보면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요. 그런 시간의 반복이었죠.

죽는 방식을 골똘하게 생각했어요. 집에서 죽으면 어머니가 너무 슬퍼할 테니까 나가야 하는데 혼자서는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 당시엔 혼자서 휠체어에 올라타는 것도 엄두를 못 냈어요. 어머니가 도와줘서 간신히 탔죠.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구체적인 실천에 들어갔어요. 교회를 가기 시작한 거예요. 나가는 방식을 알아야 되니까. 쌍둥이 형이 아주 바빴는데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와서 나를 휠체어에 올려주고 계단을 내려줘서 교회에 데려갔어요. 나중에 이동권 투쟁할 때 “장애인의 70퍼센트가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을 못 합니다” 하고 수도 없이 외쳤는데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때의 내가 딱 그랬더라고요.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네 번 혹은 다섯 번의 외출. 바로 교회에 가는 횟수죠.


당시엔 장애인 콜택시도 없었고 저상버스도 없었고 지하철을 탈 엄두도 못 냈죠. 그나마 탈 수 있는 건 택시뿐이었어요. 형이 택시를 불러서 휠체어를 싣고 나를 안아서 택시에 태웠어요. 서울 고덕동에서 살았는데 교회는 혜화동에 있었어요. 택시로 한 시간 정도 걸렸어요. 어느 비가 오는 날에 택시를 탔더니만 기사가 왜 장애인이 돌아다니냐는 둥 하필 왜 자기 차에 탔냐는 둥 재수가 없다는 둥 궁시렁거렸어요. 그때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말 한마디가 너무 힘들었을 때라 형의 옷소매를 잡고 “형… 내리자…” 했어요. 중간에 내려서 둘이 비 맞으면서 30~40분 동안 휠체어를 밀어서 교회에 갔던 게 기억이 나요. 비참했죠. 그래도 그걸 하려고 마음을 먹은 건 순전히 자살을 하려고 그런 거예요. 나가야 하니까. 택시 타는 법을 알고 익히려고. 혼자서 할 수 있어야 하니까. 핸드폰도 없으니 집에서 전화를 걸어서 택시를 불러야 하는데 진짜 그런 것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아니면 휠체어를 타고 나가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야 하는데 그걸 할 용기조차 없었어요. 그렇게 나가는 여정을 연습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갔어요.

어느 날 매형이 성경을 백번 읽으면 돈을 준다고 했어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죽으려면 돈이 필요했어요. 집에만 누워있는 나에게 아무도 돈을 주지 않으니까 택시비조차 없었어요. 돈을 모아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어요. 신약과 구약을 진짜로 백번 읽었어요. 사람들은 내가 성경을 백번 읽었다고 하면 거짓말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꼬박꼬박 성실하게 진심으로 읽었어요. 죽음을 앞둔 사람이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처음에는 오래 걸렸는데 열 번 스무 번 하니까 나중엔 빨리 읽게 됐어요. 그걸 읽으면 돈이 생겼으니까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이 생긴 거예요. 목표가 생긴 거죠. 물론 그 목표가 죽음을 향한 것이었지만. 목표가 생기니 무감각했던 삶이 조금씩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다 2박 3일 일정의 교회 수련회를 따라갔어요. 그것도 밖에 나가서 자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 간 거였는데 거기서 갑자기 핑 도는 영감이 왔어요. 교회에선 그런 걸 회개라고 하죠. 프로그램 중에 인생 고백이라는 게 있었어요. 너의 삶에 대해 써보라고 했어요. 어차피 죽을 거니까 유언장 쓰는 연습이라고 생각하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내 인생이 참 보잘것없더라고요. 남길 만한 게 없었어요. 담배 피워서 좋았다, 술 마셔서 좋았다, 이런 것들을 남길 수는 없잖아. 뭔가 머리를 띵 울렸어요. 그때부터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는 글을 썼어요.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 말씀 안 듣고 학교 도망친 거 잘못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여고 앞에 가서 오줌 누고 달아난 거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말씀 안 들은 거 회개합니다, 그런 걸 썼어요. 죄 사함을 받아야 되니까 성경에서 잘못이라고 하는 것들을 쭉 썼어요. 예전엔 죄인지도 몰랐던 것들이 그날 다 후회되더라고요. 그걸 또 발표하래요. 한참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내 슬픔과 고통에 대해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함께 있었던 교인들이 내게 많은 위로를 해주었어요. 그날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어요. 그리고 앞으로 죄 사함을 받으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목자가 되어서 사람들을 양으로 삼고 하나님 말씀을 먹이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어요.


이북에 기독교 
해병대

인데 전장연으로


필력은 또 대단함
하여간 평안은 참

전장연은 미국이 시키는거 맞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