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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 후 60년도 더 지난 오늘날, 미국은 현대사에서 가장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경제 전쟁 체제 중의 하나를 계속 강행하고 있다. 수십 년에 걸쳐 강화되고, 법제화되고, 확대된 봉쇄는 단순히 압력을 가하려는 게 아니라 질식시키려는 것이다.

연료 제재, 금융 압박, 치외법권적 강제, 그리고 에너지와 무역에 대한 쿠바의 접근을 방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개별적 조치들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했던 길을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사회를 탈진시키기 위한 일관된 전략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포위와 나란히, 쿠바 혁명을 약화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들어 궁극적으로 전복시키려는, 1959년 이래 계속 변하지 않고 있는 정치적 목표가 집요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 예속을 거부하는 어느 국가에 대해서나 미 제국주의가 가하는 전형적인 행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향수(鄕愁)나 추상적인 추측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제기되어야만 한다. ― 만일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에 힘의 균형이 달랐었다면, 쿠바와 미국의 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에는 이미 쿠바 혁명은, 넘을 수 있을 것으로 워싱턴이 결코 인정한 적이 없는 선을 넘었다. 이는 틀에 박힌 정치적 변화가 아니었고, 급진적 개혁은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소유권, 주권, 그리고 계급 지배의 파열이었다. 쿠바는 더 이상 미국 자본의 확장으로서 기능하지 않았고, 그 나름의 방식대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익숙한 패턴의 반응, 즉 단지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 설계된 침략과 파괴 행위, 암살 기도들, 외교적 고립화, 경제 봉쇄가 뒤따랐다. 이 어느 것도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곳에서 저항에 직면한 제국주의 세력의 전형적인 행동이었다. 쿠바가 표적이 된 것은 불안정해서가 아니었다. 쿠바가 표적이 된 것은 스스로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기 때문이었다.

이 대결은 1962년에 쏘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대결을 변화시켰다. 처음으로 미국은, 쿠바에 대한 공격은 자신이 완전히 통제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했다. 유사한 대응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제국주의가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었던 유장한 비대칭이 잠시 흔들렸다.

잠시 동안, 쿠바는 더 이상 아주 무방비 상태가 아니었다. 쿠바는, 비록 불완전하게라도, 제한을 가하는 억지력에 의해서 보호되었다. 알다시피, 그 순간은 지속되지 않았다.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들은 쿠바의 주권적 통제 아래에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중요하며. 그것은 모호해져서는 안 된다. 1962년 10월에 등장한 그 억지력은 쿠바 땅에 존재했지만, 그것의 운명은 멀리 떨어진 한 강대국의 수중에 있었다. 위대한 수정주의자 니끼따 흐루쇼프가 워싱턴과의 협상을 통해 그 미사일들을 철수하는 선택을 했을 때, 그 결정은 단지 당장의 긴장을 완화시킨 것만이 아니었다. 그 결정은, 미국이 카리브해 지역에서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했던 유일하게 효과적인 억지력을 제거했고, 그것도,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국가의 참여 없이 그렇게 했다.

이것이 쟁점이 되어야 할 지점이다. 문제는 핵전쟁을 피했어야 했느냐 여부가 아니다. 물론 핵전쟁은 피했어야 했다. 어떠한 진지한 정치적 입장도 수백만 명의 절멸을, 용납할 만한 위험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앙을 피하는 것이 위기를 야기한 모순들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 모순들을 옮겨 놓을 뿐이다.

이 경우 그 모순들이 쿠바로 옮겨졌다.

위기의 해결은, 이전의 수년을 규정했던 핵심적 사실을 온전히 남겼다. 즉, 미국은 여전히 쿠바의 혁명을 뒤엎으려고 전념하는 반면에, 쿠바는 그의 적에게 결정적인 공포를 가할 수단이 부족했다. 한계의 존재라는, 잠시 동안의 변화가 뒤집힌 것이다.

퓌델 까쓰뜨로는 나중에, 특유의 명확함으로, 작은 나라의 안보는 강력한 적국의 약속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이것은 이론적 주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침략과 파괴 행위, 상시적(常時的) 봉쇄에 직면했던 혁명의 농축된 체험이었다.

체 게바라도 동일한 현실을 더욱 넓은 시각에서 파악했다. 혁명 과정은, 이해관계를 위해 그것을 패배시킬 필요가 있는 적의 보장에 의지할 수 없다고 그는 실질적으로 주장했다. 제국주의는 합의문들이 작성되었다고 해서 억제되는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는 자신이 쉽게 흡수할 수 없는 결과들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억제된다. 이는 바로 논의가 불편해지는 지점인데, 그러나 피할 수는 없다.

이 어느 것도 핵무기들을 옹호하는 것으로 귀착되지 않는다. 맑스주의자들은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도구들을 폭력적이고 적대적인 세계 질서의 산물 이외의 무엇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궁극적인 목표는 분명 그것들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판단은 그러한 목표로부터만 시작될 수 없다. 그 판단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로부터도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억제력의 결핍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도덕적 한계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제국주의는 자신에게 강제하는 한계 내에서 행동한다. 침략의 대가가 낮으면, 제국주의는 진격한다. 그 대가가 예측 불가능해지거나, 수용할 수 없어지면, 제국주의는 망설이거나, 재검토하거나, 형태를 바꾼다. 이는 단지 이론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현대 역사의 가장 지속적인 양식(樣式) 중의 하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쿠바의 핵무장이 미국의 적대 본능을 변화시켰을 것인지가 아니다. 변화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쿠바의 핵무장이 미국의 적대성이 행사될 수 있는 범위와 자신감을 변화시켰을 것인가이다.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1962년 10월에 존재했던 것은, 핵무기에 대한 쿠바의 통제가 아니라, 무언가 더 제한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드러내는 것, 즉 제국주의가 태평스럽게 넘을 수 없는 경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일시적인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제거되자, 그 경계도 함께 사라졌다.

쿠바는, 특히 쏘련 해체 이후의 쿠바는 핵억지력을 독자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의(異意)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을 놓치고 있다. 억지력은, 영원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시기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거의 30년 동안, 그러한 제재는 미제(美帝)에 다른 전략적 규율을 강제하여, 쿠바에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한, 미제의 목전의 계산뿐만 아니라, 장기적 가정까지도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결국엔 그 억지력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에 의한 이전의 정치적 결과들을 지우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주장은, 혁명적 국가의 안보가 그 국가의 통제를 넘어선 결정들 여하에 달려 있었다는 더 깊은 모순을 강화할 뿐이다.

이후의 수십 년 동안 어떤 의미 있는 평화도 없었다. 더욱 안정적인 형태의 압력이 있었다. 집단학살적인 미국의 봉쇄가 유지되었고, 더욱 강화되었다. 비밀 작전들이 계속되었다. 혁명은 끊임없는 경제적ㆍ정치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달라진 것은, 이러한 탄압이 미국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위험으로 고조되지 않고 가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평화적 공존”이라는 교리를, 환상 없이,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이다.

기본적으로, 체제가 다른 국가들이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을 회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불합리하지도 않고 그 자체로 부당한 것도 아니다. 핵무기 시대에 전면전을 방지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원칙이 적용된 방식에 있다.

쓰딸린 사후, 이 방향 전환은 점진적으로 혹은 무심코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로선(新路線)이, 즉 “평화 공존”을 진행 중인 투쟁 속에서의 일시적 조건이 아니라 그 투쟁 자체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틀로서 제시한 신로선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쏘련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법제화되었다. 이러한 접근하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적대성은, 이제 더 이상 전 세계 체계에 걸쳐 불균등하게 표출되는 역동적이고 화해 불가능한 갈등으로서가 아니라, 갈수록 최고위급 국가 외교를 통해서 관리되어야 할 관계로서 취급되었다.

이는 사소한 조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적인 전환의 전조였다. 무게 중심이 ― 혁명적 주도에서 국가 간 균형으로, 반제국주의적 파열의 확장에서 핵 강대국들 간 관계의 안정화로 이동했다. 레닌이 이해한 바로는 적대적 세계 속에서의 전술적 필요성이었던 것이 지도 원칙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쿠바는 이러한 모순이 가장 첨예한 형태로 표면화된 최초의 그리고 가장 명확한 지점의 하나가 되었다. 모쓰끄바의 입장에서는, 이 위기는 워싱턴과의 전략적 균형의 문제였다. 아바나(Havana)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당면한 위협하에서의 생존의 문제였다. 이것들은 상호 교체 가능한 이해관계들이 아니었다. 두 번째를 충분히 다루지 않고 첫 번째를 우선시하는 교리는 불가피하게 불균등한 결과를 낳게 된다.

 

흐루쇼프의 결정은 이러한 틀 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압박하에서의 신중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근거리에서 제국주의와 맞서고 있는 혁명 국가에 대한 완전하고 비타협적인 방어보다 초강대국 균형의 유지를 우선시한 전략적 노선의 현질적 표현이었다. 미사일들의 철수는, 이러한 의미에서, 단지 대결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우선 사항들의 확인이었다. 즉, 국가 체제 차원의 안정이 그 가장 취약한 변경(邊境)의 변화보다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1962년에 벌어진 일이다. 미사일들은 철수되었다. 전쟁은 피했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쿠바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도록 한 구조는 온존되었다. 사라진 것은, 위험이 아니라, 그 위험을 잠시 억제했던 유일한 요소였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바로 이 때문에 제재의 문제가 다시 제기되는 것이다.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평등한 체제 속에서는 한계를 강제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한 제한이 없다고 제국주의가 덜 공격적이 되지 않는다. 제국주의는 더욱 자신만만해진다.

문제는, 억지력이 위험을 초래하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위험을 초래한다. 문제는, 작은 혁명 국가가 간섭의 이력이 입증된 제국주의 강대국을 가까이에 직면하고 있는 경우, 억지력의 부재가 더 심각하고 더 지속적인 취약성을 초래하는지 여부다. 1962년 이후 쿠바의 역사는 그렇게 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이 그 역사적 형태의 “평화 공존”이 해결하지 못한 모순이다. 그것은 전면전의 위험을 줄였지만, 압박과 강제, 봉쇄에 노출된 혁명 국가들의 계속되는 예속을 온존시키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정상화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

쿠바는 살아남았다. 그 사실은 명확하다. 그러나 중립적이거나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생존한 것이 아니었다. 혁명은 여전히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균형 속에서 지속되었고, 미사일 위기의 결과는 그 균형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면, 교훈은, 긴장 고조에 대한 찬가도 아니고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에 대한 한탄도 아니다. 교훈은 힘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설득한다고 해서 제국주의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으며, 균형이 선포되었다고 해서 스스로를 억제하지도 않는다. 제국주의는 한계에 적응한다. 그러한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제국주의는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 폭압의 장을 확장한다.

쿠바는 이것을, 이론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살아간 현실로 이해했다. 위기의 여파 속에서 퓌델 까쓰뜨로가 “국가의 안보는 적국의 선의에 의존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 발언은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험으로부터 끌어낸 정치적 결론이었다.

1962년 10월, 짧고도 이례적인 순간 동안, 미국은 카리브해에서 그러한 한계와 마주쳤다. 미국이 주저했던 것은, 제국주의를 포기해서가 아니라, 행동의 대가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 한계가 제거되자, 망설임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뒤따른 것은, 평화가 아니라, 장기간의 규율 잡힌 형태의 압력,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결과를 무릅쓰지 않기 때문에 정밀하게 계산된 압력이었다.

이것이 위기가 뒤에 남긴 영원한 진실이다. 핵무기들이 정의를 보장한다는 것이 아니라―그것들은 보장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구조화된 세계에서는 억제는 신중을 강제하는 반면에, 취약은 공격을 불러들인다는 것이 그것이다. 1962년의 비극은 전쟁을 모면한 것이 아니다. 비극은, 그 전쟁의 모면이 제국주의가 잠시 잃었던 바로 그 행동의 자유를 회복시켜 주는 방식으로 달성되었다는 것이고, 혁명 쿠바는, 돌파할 수 없는 한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된 적대 국가와 수십 년간 대치해야 하는 상황을 남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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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혁명 후퇴시킨 슨탈린이 흐루쇼프보다 딱히 더 혁명적인지는 잘 모르겠고 저자도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요즘 꾸바 상태를 보면 이건 맞는듯해서 들고와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