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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국 변경에 노부부 두 사람이 함께 사니와로 취임해 일하던 작은 혼마루가 하나 있었다. 현현된 도검의 수가 서른도 넘지 않는 소규모 혼마루였다. 가족을 현세에 두고 와 적적했던 노부부는 칼들을 자식처럼 아꼈다. 잔상처에도 호들갑을 떨며 수리실로 보내는 통에 현현된 이후로 부서진 검은 한 자루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이 혼마루의 첫 죽음은 칼이 아닌 사니와 쪽에 먼저 찾아왔다. 노부부 중 남편 쪽이 노환으로 인해 숨을 거둔 것이다.


칼들은 의외로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전란의 시기를 겪었던 그들에게 있어 제 명에 살고 떠나는 주인의 죽음은 호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슬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한 명의 주인이 남아 있었고, 빈 자리는 새로운 도검의 현현으로 빠르게 채워졌다. 다만 도검남사들에게는 미약한 불안이 남았다. 남은 한 명의 주인이 죽고 나면 이 혼마루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불안. 소리 없는 웅성거림이 혼마루를 조금씩 채워갈 때 쯤, 그것을 견디지 못한 심약한 단도 고코타이가 훌쩍이며 사니와에게 입을 열었다. 


"주인님, 주인님은 가지 말아요. 주인님이 가 버리면 저희는 어떻게 살면 좋아요."


사니와는 여느 때처럼 온화하게 웃으며 말없이 고코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노부인은 칼들을 마당에 모아 놓고 말했다. 여우에게 물어 보았는데, 할미가 죽어도 이 집은 정부의 높으신 분들이 거두어 준다는구나. 새 주인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단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말려무나. 그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 미소만 짓고 입을 다문 사니와는, 울음을 참는 단도들을 품에 모아다 안아 주고는 침소로 돌아갔다. 남겨진 도검들은 머리를 모으고 대화를 나눴다. 여러가지 의견이 오갔으나 결론은 금방 나왔다.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쓸쓸하게 웃으며 말하는 미카즈키 무네치카의 한 마디를 끝으로 칼들도 그 자리에서 흩어졌다. 늙어버린 인간이 죽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가보로써, 유물로써 몇 세대를 걸쳐 후세에 전래되어 왔던 검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천수를 누리고 죽을 수 있다면 이는 기뻐할 일이지 막아야 할 일은 못 되었다. 그렇게 도검남사들은 자신들의 사니와가 늙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불안함은 해소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쿠로다 간베에의 검은 가보로서 쿠로다 나가마사에게 넘어갔다... 사카모토 가문의 보도 요시유키는 사카모토 료마의 손에 전래되어 역사에 남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다음 주인이 어디서 굴러먹다 온 인간일지, 주인의 자격이 있는 인간일지, 아무도 알지 못했기에.


"생면부지의 남에게 물건 팔리듯 넘어가는 건가."


늦은 밤 어떤 도검남사가 자듯이 중얼거렸으나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들었더라도 뭔가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칼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사니와를 연모한 나머지 눈이 돌아간 도검남사라도 있었더라면 카미카쿠시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겠지만, 이 혼마루에서 해당 의견은 나오자마자 기각되었다. 할머니가 죽고서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별다른 수단도 대책도 없이 시간은 흐르고, 불안감이 체념으로 바뀌어 가는 여름이었다. 어느 날 아침 사니와가 드물게도 들뜬 얼굴로 검들에게 고했다.


이번 여름, 혼마루에 손녀딸이 온다는구나. 손님방을 치워 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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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월 O일


놀라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일기를 쓰고 있다.

밖에서 할머니 외의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여러 명.

다른 손님이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혹시 드디어 츠쿠모가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건가.

일단 점심을 먹고 돌아오자.


이어서 쓴다.

점심은 가라아게가 맛있었다.

그리고 츠쿠모가미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되었다.

거기에 덧붙여 눈에 보이는 윤곽도 좀 더 뚜렷해졌다.

세세한 머리모양이나 옷차림 같은 게 좀 더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그렇지만 아직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일단 목소리가 들린다고는 해도, 온전한 문장까지 알아듣기는 어렵다.

아직 웅웅거림이 너무 심하고, 말소리도 노이즈가 낀 것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난청이 온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츠쿠모가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도 여전했다.

윤곽은 느껴져도 색은 여전히 허여멀건한 것이.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희망이 보인다.

언젠가는 대화가 가능해지는 날이 오겠지.


시험삼아 무츠쨩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무츠쨩, 뭔가 말해 봐. 들리는 것 같아." 하고 말했더니,

무츠쨩이 큰 소리로 뭔가 기뻐하는 것이 들렸다.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서 당당하게 "역시 모르겠어"라고 말해 주었다.

어이없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무츠쨩, 이걸로 상대의 감정 정도는 눈치로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이게 큰 수확이 아니라면 뭐겠어.


기쁜 마음에 할머니께 상담했더니 어렸을 때처럼 쓰다듬어 주셨다.

내가 노력해서 이룬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칭찬받아도 되는 건가.

마음은 미묘하지만 쓰다듬어지는 것도 간만이라 즐기기로 했다.


내일은 여러 츠쿠모가미들에게 말을 걸어 봐야겠다.



O월 O일 


여러 츠쿠모가미들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 좀 진정하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무츠쨩 때처럼 먼저 말을 걸어놓고 "미안 역시 안 들려"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밖에 못 받겠지.

그래서 일단 발전한 감각으로 츠쿠모가미들을 관찰하는 것부터 해 보기로 했다.


우선 점심 시간에 알게 된 점이 있다.

내가 '하세베'라고 생각했던 츠쿠모가미가 한 명이 아닌 것 같다.

같은 사람이 여러 명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 정도 신장에 머리가 짧은 츠쿠모가미는 전부 '하세베'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몇몇 하세베는 복도에서 만나도 인사를 안 하더라니.


하세베의 종류를 정리해 보자면...

말수가 적고 혼자 밥을 먹는 하세베.

목소리가 다정하고 단도들과 함께 다니는 하세베.

조금 머리가 곱슬인 하세베.

원본 하세베.

이렇게 있는 것 같다.

나는 여태까지 몇 명의 하세베 아닌 하세베에게 "하세베, 안녕."하고 인사한 걸까.

이제 외관으로 구분할 수도 있게 됐으니 내일부턴 이름을 외우려는 노력을 좀 해보자.


그러고보니 문득 떠오른 건데, 츠쿠모가미들은 생각보다 목소리가 낮다.

작은 아이들은 아이같은 목소리가 나지만, 큰 애들은 더 성인 남자같은 목소리다.

사실 하세베의 건도 있어서, 슬슬 츠쿠모가미들이 아이가 맞는지도 의심이 간다.

그렇지만 이제와서 애 취급을 멈추기도 늦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혹시 아이가 아니라면 원래 아무나 아이 취급하는 성격인 척 해야겠다.



O월 O일


이름을 외우기 위해 오늘부터 츠쿠모가미들의 호구조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호구조사라고는 하지만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냥 이름을 모르는 츠쿠모가미가 있으면 특징을 메모해 뒀다가, 할머니께 이름을 여쭈는 것 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요새 자주 보이는, 벽에 등을 기댄 녀석이었다.

'벽에 등을 기댄 애'라고 하면 잘 와닿지 않지만 정말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머리카락은 짧고 키는 크지만 이 혼마루에 그런 애가 한둘이 아니라서.


이녀석은 혼마루에 오고 하루이틀째엔 눈에 띄지 않았는데, 점점 거리가 가까워져 오는 애들 중 하나다.

첫주에는 복도 저 멀리에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있더니.

요새는 아침에 일어나 복도로 나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벽에 등을 기댄 이녀석이다.

설마하니 비슷하게 생긴 츠쿠모가미가 여러 명 번갈아가며 그러고 있을 리는 없고.

아마 매일 똑같은 애가 매일같이 그러고 있는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다.

말을 걸어오는 것도 아니다.

약간 "날 봐!" 하는 느낌이랄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할머니께 여쭤봤더니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알기 힘든지 아리송해 하시길래,

무츠쨩에게 "매일같이 아침에 보이는 걔"라고 말했더니 아~ 하면서 뭔가 할머니께 알려주는 게 들렸다. 

그렇게 알아낸 이름은 "히라쨩"이었다.

조금 깍쟁이인데,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고 하셨다.

매일 아침 찾아오는 건 새로 온 전학생에게 관심받고 싶은 초등학생 같은 심리려나.

이해했다.

그렇지만 당장 뭘 해줘야 할지는 모르겠다.

불편한 점도 없으니 일단은 방치해두자. 


그 밖에도 하세베로 착각했던 아이들은 차례대로 쿠리쨩, 이치고, 카센쨩이라거나,

단도들 중 발 밑에 고양이 같은 걸 데리고 다니는 애는 고코쨩이라거나.

테루테루보즈를 닮았고 가끔 멀리서 이 쪽을 쳐다보는 애는 만바쨩이라거나.

여러가지를 배웠다.

다 외우진 못했다.

솔직히 다시 마주쳐도 좀 헷갈릴 것 같다.

다하면 서른 명쯤 있는 것 같으니까 천천히 가자, 천천히.



O월 O일 


할머니가 슬슬 새로운 가족이 올 때라면서, 단도 과정을 보여주셨다.

이 혼마루에 오고서 처음으로 보는 사니와다운 일이다.

흔한 경험은 아닐테니까 제대로 기록해두자.


우선 재료가 담긴 수레를 가지고 단도실로 갔다.

철에 냉각재까지 실린 수레는 무척 무거웠지만 무츠쨩이 도와주었다.

처음으로 들어간 단도실은 재래식 대장간 같은 느낌이었다.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으면 할머니가 누군가를 불러 재료 수레를 맡겼다.

인간 어린아이보다 살짝 작은, 그야말로 요정이란 느낌의 뭔가에게.

이 애도 츠쿠모가미냐고 여쭈었더니, 칼을 만들어주는 요정님이라고 하셨다.

일하는 요정이라면 스머프 같은 걸까...

츠쿠모가미도 눈앞에 있는 마당이니 하나하나 태클을 거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자원을 받아든 요정인지 뭔지는 커다란 망치를 꺼내 쇳덩이를 땅땅 두들기다가, 

이내 용광로 안에 집어넣고 단도실 뒷편에서 타이머를 하나 꺼내 왔다.

액정 달린 전자시계.

할머니께선 칼을 만드는 과정에 필요한 시간을 재는 거라고 하셨다. 

요정이라면서 이상한 데서 세련되어 있구나.

단도 과정을 베이킹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된다.

어중간한 시간관념으로는 안 되겠지.


할머니께서는 뭔가 확인하시다가 "이번 칼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칼인가 보다" 하면서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셨다.

새벽 늦게서야 완성될 것 같으니 내일 아침 같이 맞이하자고 하셨다.

혼마루 신입이면 나와는 동지니까 친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외울 이름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건 까마득하지만.



O월 O일


아침에 단도실에 가도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방에 찾아갔더니, 할머니가 앓아 누워 계셨다.

머리를 짚어보니 열은 없고 숨도 고른 것이 감기는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안색이 나쁘고 손이 차가웠다.

식은땀도 흘러서 깜짝 놀랐다.

걱정이 되어서 오전 동안 무츠쨩을 데리고 곁에 있었다.


할머니는 점심이 지나 일어나셨다.

갑자기 체력을 써서 몸살이 온 것 뿐이라고 하셨다.

체력을 쓸 일이 있었던가. 

혹시 어제의 단도 때문인가.

할머니 연세라면 단순한 몸살이라도 큰일이 될 수 있다.

무리하지 말라고 부탁드렸더니 할머니는 가서 새 가족을 맞아 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면 데려오기로 한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걱정됐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내가 가지 않으면 직접 가실 기세길래 그러기로 했다.


단도실에 가자 요정인지 뭔지는 사라져 있고 커다란 나기나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나기나타를 잡아 보았다.

그랬더니 뭔가 몸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더니,

펑 하고 벛꽃이 날리면서 츠쿠모가미가 나타났다.

키가 크고 옷에 팔랑팔랑한 깃털 같은 게 달린 녀석.

뭔가 말도 했다. 아마 자기소개가 아니었을까.

멍하게 보고 있는 동안 무츠쨩이 나 대신 상황을 설명해 줬던 것 같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제대로 환영해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했다.


새로 온 아이를 할머니의 방에 데려갔더니 할머니는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앉아 계셨다.

손을 잡아보면 어느 정도 체온이 돌아와 있어서 조금 안심했다.

할머니는 웃으며 새로 온 아이를 쓰다듬었다.

"이름은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라는구나" 라고 하셨다.

"오늘부터 토모에쨩이야" 라고도 하셨다.

평소와 다름없는 따듯한 목소리였다.


그 다음에는 나와 무츠쨩에게 새로 온 아이를 다른 아이들에게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셨지만...

토모에가 할머니의 침실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아서 오늘은 그만두기로 했다.

만나자마자 주인이 앓아누워 있으니 걱정되는 거겠지.

이해한다.


할머니의 방을 떠나기 전에, 다른 애들에겐 앓아누운 것을 알리지 말아 달란 소리를 들었다.

하긴 츠쿠모가미들이 걱정하면서 저 방에 우글우글 몰려오면 할머니도 불편하실 것이다.

속상하지만 그렇게 해두자.


밤늦게까지 할머니의 상태를 살피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O월 O일


아침에 할머니를 뵈러 갔다.

체온도 완전히 돌아오고 안색도 괜찮아서 안심했다.

다만 할머니의 태도를 보면 토모에는 엄청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만 하지.....


할머니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토모에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밖으로 나왔다.

온지 하루가 지났으니 소개 정도는 해야지.

금방 돌아오자.

그렇게 애 어르듯 달래서.

뭐 반응은 안 들리지만 어떻게든.


내 때 그랬던 것처럼 점심식사중인 식당에 데려가서 무츠쨩과 소개를 했는데.....

같은 츠쿠모가미라 그런가 박수는 따로 없었다.

환영해주는 것 같기는 했다.

다들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토모에는 소개가 끝나자마자 밥도 안 먹고 할머니 곁으로 쌩하니 가버렸지만.


왠지 지쳐 버려서 밥먹는 동안 카네쨩에게 칭얼댔다.

물론 할머니가 아프다고 말한 건 아니고.

"고민이 있어" "그런데 말 못 해" 하면서.

카네쨩이 정확히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여느 때처럼 못 알아들었지만,

"하아?" 하는 소리만큼은 틀림없이 들었다.

그런 다음에 접시에 가라아게를 받았다.


카네쨩의 성격도 이제 슬슬 알 것 같다.



O월 O일 


할머니의 몸상태가 회복되어 오늘 점심에는 지팡이를 짚고 산책도 나오셨다. 

다행이다.

다만 토모에는 아직도 할머니 곁에 붙어 다닌다.

할머니께 여쭤 보니 여기서의 생활도 가르칠 겸 한동안 곁에 두기로 하셨다고 한다.

느릿느릿 걷는 할머니를 잔걸음으로 따라다니는 토모에는 무슨 아기 오리 같다.


오후에는 용건도 없는데 찾아와선 유부나 얻어먹고 있던 공무원 여우를 잡아 몇 가지 질문을 했다.

혹시 할머니께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은 어디로 해야 좋은지.

구급차는 오는지. 치료는 받을 수 있는지.

뭐 그런 것들.

그랬더니 사니와님의 집무실의 단말기를 이용해 비상연락을 하면 된다고 대답했다.

할머니 방에 있는 낡아빠진 컴퓨터를 말하는 거려나.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나중에 작동되는지 확인을 해봐야겠다.


할머니는 올해로 여든을 넘는 연세다.

솔직히, 혼마루에 오기 전 몸상태가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많은 각오를 했다.

언제 떠나보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

심각하게 생각해도 별 수 없다.

옆에 계실 때 잘 하자.

그러려고 온 거니까.



O월 O일


오늘은 칠석맞이 대청소를 했다.

일단 2층부터.

내일은 1층과 마당을 정돈한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모레는 칠석이니까 깨끗한 집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대나무도 꾸미면 된다.

혼마루에 오니 도시에서 혼자 자취할 때는 못 느꼈던 떠들썩함이 있어 좋다.

대가족의 일원이 된 기분.


거창하게 쓰긴 했지만 사실 제대로 된 청소는 거의 못 했다.

뭔가 하려고 할 때마다 츠쿠모가미들이 달려와 선수를 쳐 버려서.

특히 하세베.

미처 몰랐는데 이 녀석 달리니까 엄청 빨랐다.

더러운 곳에 가까워지려고 할 때마다 쏜살같이 뛰어와선 말끔하게 만들어 버린다.

뭔가 조잘조잘 말하는 걸로 봐서는 청소하는 걸 말리는 것 같았다.

자취 경력 n년이라 잘 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비켜주지 않았다.

억울했다.


결국 2층에서 서성대면 서성댈수록 방해만 되는 것 같아 그냥 내려왔다. 

그대로 방에 들어가서 뒹굴거리기도 무안해서 마당만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창고 정리라도 먼저 해두면 어떨까 싶어 별채로 들어갔더니 짜쟌, 오늘도 미츠요가.

미츠요는 늘 창고에 있는 걸까.

커다란 덩치로 상자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 앉아 있는 모습이 무척 안락해 보여서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미츠요, 청소 땡땡이 치고 있었네.


그럼 새참이라도 만들어야겠단 생각에 부엌으로 갔더니 누군가 이미 자리를 선점하고 요리하고 있었다.

멋부린 것 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눈 부근에 뭔가 장식인지 안대인지를 하고 있는 츠쿠모가미.

혹시 할머니가 일전에 말했던 밋쨩이란 게 미카쨩이 아니라 이 쪽이었을까.

아무튼 기웃대면서 도울 일이 없는지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부엌의 츠쿠모가미는 이 쪽을 가만히 보다가 접시에 미타라시 당고를 담아 건네 주었다.


"누구한테 가져다 주면 돼?"

접시를 들고 그렇게 질문했더니 당고가 내 입에 물려졌다.

그런 다음엔 왠지 모르게 쓰다듬어졌다.

평소 츠쿠모가미들을 아이 취급하고 다니긴 했지만 내가 아이 취급 당하는 건 또 처음이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인사하고 밖에 나왔더니 벌써 해가 지고 있어서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그게 전부다. 오늘은 한 게 없다.


원래도 하는 일은 없었지만, 다들 뭔가를 하고 있는데 혼자만 하는 일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하다.

내일은 자취생의 경력을 살려 아무도 손대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을 잽싸게 청소해 봐야겠다.



O월 O일


뭐부터 써야 하지.

사실 일기나 쓸 상황은 아니지만 당장 갖고 있는 게 수첩과 펜밖에 없다.

그럼 기록이라도 해 둬야겠다 싶어서 펜을 들었다.

아무튼 지금 혼마루 밖에 있는 것 같다.

다리도 다쳤다.

부은 걸 보니 부러졌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스스로도 잘 파악이 안 된다.

조금 정리해볼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2일째의 대청소 준비를 했다. 

다른 츠쿠모가미들이 있는 곳에 가서 일을 도우려 들면 다들 말릴 것 같아 마당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무츠쨩도 데려가지 않았다.

잠깐 정원을 산책하러 간다고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그러던 중 정원의 구석에서 담쟁이에 감겨 여기저기에 금이 간 담벼락을 발견했다.

얼마나 금이 갔는지 살펴보려고 담쟁이를 치웠다.

아, 아마 그 때였나 보다.

담쟁이를 치워보니 담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지.

그걸 보자마자 몸이 기울어지고 어딘가에 쾅! 하고 부딫히면서 정신을 잃었다.


다리도 그 때 다쳤나.

기절해버렸으니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아무튼 지금은 첩첩산중 안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

해는 벌써 저물었고, 가끔씩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도피처라도 찾고 싶지만 이 다리로는 그것도 어려울 것 같다.


구청에서 받은 안전교육에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할머니, 걱정하시겠지. 

내가 잘못되면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무츠쨩도 걱정하고 있을까.

도움은 못 될 망정 이게 무슨 일인지 자괴감이 든다.


이런 생각은 해봤자 불안해질 뿐이다.

일단 어떻게든 불을 피우고 구조를 기다려야겠다.


내일도 일기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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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이지만 너무 내용이 없어서 스토리 좀 쳐 봄

남사들 시점이나 요바이 범인은 나중에 외전으로라도 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