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꿈을 꾸었다.






"-------주인?"


낯익은 목소리가 방울소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숨을 삼키며 정신을 차렸다. 안개처럼 흐리멍텅하게 떠돌던 의식이 한데 뭉쳐 돌아와, 천천히 머릿속에서 형태를 만들어간다. 백일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멍하게 고개를 들었다.

옆에 있던 '카센'이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는 또 그렇게 멍하니......어젯밤에 푹 자지 못했니?"

".............카센?"

"그래. 설마 나를 잊어버렸다는 말은 안 하겠지?"


기울인 얼굴 윤곽을 따라서 곱슬거리는 보라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비취색 눈 안쪽에는, 불만이 가득한 말투와는 반대로 걱정하는 빛이 스친다. 알기는 어렵지만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이 보이는 눈에 홀린 것처럼 순간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며 정신을 놓은 듯이 멈춰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카센이 점점 불안해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네가 멍하니 있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의식이 확실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구나. 오늘은 그렇게 꿈자리가 사나웠니?"

"..................꿈자리.............."


그 말을 듣고 아직 얕은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 같던 의식이 무언가를 잡을 뻔 했다.

꿈. 확실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둠 속에 의식이 빠져들었고, 한순간 세계가 정적에 휩싸였다.

그 찰나의 순간. 어두컴컴한 밤 동안, 깜빡 존 것 같은 꿈.


"그것도 아니면, "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또다시 심연으로 가라앉으려던 내 의식을 현실로 되돌려준다. 감지도 않았던 내 눈에 걱정스러워하는 미소를 띄운 카센의 얼굴이 비쳤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카센 카네사다' 라는 도검남사에게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상대를 걱정하는 반면, 스스로를 봐 주지 않는 점에 대한 작은 불만과 토라진 것 같은 감정이 섞여 의도하지 않아도 표정에 드러난다. 평소의 온화한 성격과 전장에서 보이는 조금 난폭한 성질을 동시에 가지면서도, 풍류와 미야비를 중요시하는 마음을 가진 칼.

그런데 나는 어째선지 그것을 보고, 아니야, 라고 깨달았다.

무엇이 아닌지도 명확하게 모르면서 그 말이 나오기도 전에 눈 앞의 존재에 위화감을 느꼈다.


"또, 이전의 나를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쿵 하고, 가슴 속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내 초기도는 카센 카네사다라는 이름의 도검남사였다.

내가 일곱 살 즈음에 불러내린, 나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그 카센 카네사다가 나를 위해 부러진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갑작스럽게 혼마루에 나타난 역행군들의 습격은, 전송장치 고장으로 생긴 사고로 처리되었다. 그 진실은 최근 몇 년 동안 정신이 혼미했던 주인을 우려한, 카센 카네사다의 모반.

혼마루의 시공간 좌표 포기와, 그 칼의 파괴라는 커다란 희생을 지불하고 일련의 소동이 막을 내렸다.

내가 스스로 봉인했던 기억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모반을 일으킨 카센은, 단지 온 힘을 다해 살아가라는 바람만을 나에게 맡기고 사태의 죄를 짊어진 채 파괴를 받아들였고, 지금은 이제 없다.

이 세계 어디에도, 나의 카센 카네사다는 없었다.

그 사실을 그저 받아들일 때까지 얼마나 되는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나 자신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카센이 부러진 뒤, 나는 남은 다른 도검들과 다시 마주보았다.

서로에게 지금까지의 일이나 응어리를 이야기하고, 그렇게 앞으로는 서로 조금 더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나의 추악한 본심이 노출되는 것이 무서워 만들어냈던 가면을 벗고 보니, 신기할 만큼 세계는 조용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하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만물이 죽어 넘어진 것 같은 폐쇄감을 주는 정적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지금까지 들리던 목소리가 겨울 매미처럼 뚝 멎어버린 듯한 침묵이었다.


신기하게도 하면 된다는 말을 구현화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혼마루는 천천히 다시금 형태를 되찾았다.

눈에 보이는 커다란 충돌도 그리 많지는 않았고, 하고 보니 이렇게 쉬운 것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마 그것은 진실과는 다를 것이다. 모든 기억을 되찾고 그 결과 카센을 잃은 지금, 나에게 지켜야 할 긍지 따위는 없었다. 모든 것이 싹 빠져나가버렷기 때문에, 망가진 조각을 조금씩 이어붙이듯이 모아나가는 것에 갈등도 없었다는 말이다. 카센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미적지근하게 다정한 지옥에 몸을 담그고 있었을 테고, 그것은 슬플만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어리석을 정도로 우스운 긍지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고, 그것을 산산조각으로 파괴한 것은 카센의 죽음이었다.


카센이 목숨을 걸고 원한 생명이 나라고 한다면, 나는 살아야 한다.

강박관념에 가까운, 단지 그 마음만이 나를 제정신으로 붙들어 매었고 아예 죽고싶을 만한 괴로움 속에서도 숨을 쉬게 만들었다. 거의 빈 껍데기같은 꼴이 되면서도 나는 가장 소중했던 것을 잃었고, 처음으로 파도라는 것은 전혀 일지 않는 수면을 알았다. 또는 그 새하얀 감각이야말로 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묘하게도 나는 나를 놓고 나서야 처음으로, 나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결국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 속에 희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이루고 싶다고 기원하는 마음이 사람을 괴롭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든다. 그러니 그런 것에 얽매여 가장 소중한 것을 놓쳐버린 다음에, 내가 모든 것에 대해 무기력해진 것은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향한 통한이었다.

나는 이미 내가 누구라 해도 상관없었다. 나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나를, 그래도 그대로 있으면 된다는 말을 남기고 스러진 칼을 생각하면 그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죄인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카센 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다른 칼들을 괴롭게 했을까. 하지만 그들은 어째선지 내 곁을 떠나지 않앗다. 그 덕분에 나는 아직 사니와로 살고 있다. 습격 건이 있은 뒤로 재촉이 심해진 본부의 호출을 거절하면서까지 아직 사니와로 살고 있었다. 그것은 이 혼마루의 칼과 주인이 드디어 숨기는 것 없이 마주보게 되려는 징조였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다 망가지고, 새하얗게 타 버린 다음에 어쩔 수 없이 온화해졌다.

그리고 그런 조용한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나는 새로운 카센 카네사다를 현현했다.


"카센"


새롭게 카센 카네사다를 현현한다는 결단에 내 정신이 또다시 불안정해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칼도 있었지만, 두 자루 째의 카센을 맞이한 이후에도 내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나의 카센과 그 카센이 다른 존재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고, 새로 현현한 카센 카네사다는 나를 당연하게도 주인이라고 불렀다.


사람은 아무도 누군가의 대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 늦은 이해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두 자루 째 카센 카네사다를 이 눈으로 볼 때까지 믿을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채 죽지 않고 남은 망집을, 현현한 카센 카네사다의 존재가 벚꽃잎과 함께 날려버렸다. 도검이 현현할 때 내리는 꽃잎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타난 칼을 보고 나서야, 나는 내가 카센 카네사다를 잃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래도 카센 카네사다라는 도검남사의 존재는 나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설령 그것이 잃어버린 옛 그림자를 더듬을 뿐인 향수에 가까운 감상이라고 해도.

나에게 특별했던 카센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유일한 카센이고, 그것을 두 번째 카센에게서 때때로 보이는 그림자를 쫒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온화한 여생같은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다.

이런 추악한 몸이라 해도, 살아 있어 달라고 바란 칼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평온하게. 죽어가듯이. 이미 어떤 일에도 격정을 품지 않고. 조각난 마음을 조금씩 이어붙이면서. 주어진 것에 만족하면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이 아름다운 닫힌 정원에서. 모두의 다정한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면서. 추억에만 기대서. 오래된 앨범을 넘기듯이 기억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는.

이대로 평온하게.

시간을. 보내고.


"주인"


두 번째 카센이 나를 부른다.

내가 그 모습에, 목소리에, 눈길에, 다른 칼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정과 다정함 때문에 곁에 있으려 해 주는 칼. 위로로 가득찬 목소리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불려내려왔는지 이해하고, 그 역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주인"


카센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섞인다.

다른 도검들의 목소리같기도 했고,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금이 간 금속음처럼 겹치는 그것은, 나의 의식을 긁었다.


"주인"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응하려 한다.

그런데 눈이 떠지지 않는다. 아니, 눈은 뜨고 있었다. 이 눈은 아직 보인다. 소중한 것은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던 이 멀어버린 눈은, 슬프고 짜증이 날 정도로,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선가 어둡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주인"


몇 개의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눈꺼풀 뒤에 벚꽃잎이 흩날렸다. 이 목소리는 그 안쪽에서 들리는 것이다. 날리는 벚꽃잎. 어둠 속에서 미친듯이 춤추는 꽃잎.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아루지"


내리는 꽃잎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 단 세글자가 들렸을 때, 펑 하고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지금까지 보고 있던 공간이, 보고 있는 것처럼 환각을 보여주던 세계가, 금이 가 부서진다. 그 파편이 마치 작은 봄의 폭풍처럼 어두운 밤에 날려 사라진다. 꿈틀거리는 것 같은 격렬함을 가진 바람에 날리는 수많은 꽃잎이 춤췄다.


-------아니야.


그 목소리는, 아니야.


"내, "


마치, 백 년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것처럼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말을 뱉으면, 모든 것이 다 부서져버린다는 것도. 메마른 목. 떨리는 입술.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방울이 위를 향해 떨어진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저 검기만 한 어둠 속에서 나는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알아차리고 나니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내 카센은, 이제, 돌아오지 않아........"


동그랗게 말아쥔 주먹을 얼굴에 대고 신음하듯이 말했다.

내가 그것을 인정해버리면, 이제 두 번 다시, 환상으로도, 나를 불러 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하지만, 왜냐하면, 다른 것이다. 다르다. 아니야. 아니란 말이다.

아아, 어떻게 이렇게 다정한 꿈일까. 어떻게 이렇게 다정한 세계일까.

그러나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건,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가능성은, 이미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내가 부순 것이다. 내가 카센을 부러뜨렸다. 내 유일한 카센을.

내가 죽이고 싶었던 까마귀는, 곁에 있고 싶었던 누군가의 존재가 없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드디어 깨달은 거니"


갑자기, 어디선가 들리던 목소리가 또렷하고 명료하게 들렸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 '주인' 을 반복해 부르던 그 목소리와 같았고, 하지만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마치 귓가에서 속삭이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뜬 순간,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붙잡혔다.


"자, 그럼 투정부리지 말고 제대로 서야지. 이제 가려무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목소리와는 다르게 얼굴에 닿는 손길은 부드러웠고, 자애로운 손짓에 또다시 눈물이 흘러넘쳤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떨어지면서, 흐르는 눈물이 꽃잎처럼 터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곧 이 어둠이 끝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나는 결코 저항할 수 없을 거라는 것도.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런 나의 뺨을 쓰다듬는 손. 두 번 다시 닿을 수 없는, 나를 밀어낸 손. 그 손의 주인에게 나는, 반드시 무언가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나는 분명 살아갈 수 없어.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거품이라도 물고 있는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물 속에 있기라도 한 양, 뻐끔거리며 몇 번 입을 열었다 닫았다가, 드디어 나온 속삭임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카센, 나, 카센을 선택해서, 좋았어......?"


일곱 살이 되었던 날. 내가 나의 칼을 내린 날.

내 세계가 시작된 날을 기억한다.

하지만 시작되었으니 끝나는 것이다.

내가 카센을 고르지만 않았다면, 카센에게 그런 결말을 결단하게 만들 필요도 없었다. 카센에게 그런 고통을 느끼게 할 일도 없었다. 내가 그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내가 고르고, 바람을 맡기고, 그에게 동경을 품지만 않았다면, 카센은 줄곧 카센 카네사다인 채로 지낼 수 있었다.

긍지 높고, 아름다우며, 부러지지 않는 칼로.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모두 내가 그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묻는 나에게, 질렸다는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린 시절의 내 비굴함을 잘 타일렀던 때처럼. 아직 나와 카센이 아무런 죄책감도 괴로움도 없이, 서로 곁에 있었던 때와 같은 목소리로.

어딘가 화가 난 듯한 분위기를 내면서, 항상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쉬고는 나에게 직접 세계를 하나부터 가르쳐 준, 부드러운 목소리.

언젠가의 광경에 벚꽃이 춤춘다. 그 봄날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세계가 어두워도, 카센은 나에게 봄이었다.


"당연히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맙고 말고"


자신감으로 가득찬, 밝은 봄의 햇빛같은 목소리.

모든 것이 춤추는 벚꽃잎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나간다. 벚꽃 폭풍이 모든 것을 삼키고, 찰나의 순간 어둠을 희게 물들였다.

춤춘다고 하는 별 것 아닌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격렬한 꽃잎의 홍수 속에 휩쓸려 나도 떨어진다.

기념처럼 눈 위에서 꽃잎이 한 장 팔랑거리더니,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시야가 전환되었다.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시공의 틈새 속을.


나는 혼자 어디까지고 떨어진다.


그리고.


-------아아!


눈을 떠야지, 하고 몸이 찢어지는 슬픔과 나 자신을 향해 불타오르는 분노로, 미칠 것처럼 생각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의식이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여기서 눈을 떠야 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이 떨어져서는 춤추는 꽃잎처럼 흩어졌다. 이제 한번 더 눈을 감으면 그 다정한 환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진실이 아니라 해도, 그 장소에서, 고통에서도 괴로움에서도 눈을 돌리고, 귀를 막고 있으면 나는 지금 이 가슴을 찌르는 미칠듯한 비탄에서는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달콤한 꿈에 잠겨 눈을 뜨지 않는다 해도, 이제 아무도 너를 힐난하지 않아. 그래도 눈을 뜰 테냐"


문득 귓가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카센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칼은 두 번 다시 나에게 말을 걸어 주지 않는다는 걸 안다. 혼이 났다. 카센은 나에게 '투정 부리지 말고 제대로 서라' 고 했다. 내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면서 '이제 가라' 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것이 벌이라고, 보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카센의 바람이고, 목숨을 건 기원이었다고 한다면.

나는.

나는!


"그런가. 그것이 네 선택인가'


하늘로 뻗은 손이 갑자기, 강한 힘으로 붙잡혔다.


"그렇다면 나는 너와 함께 가겠다. 삼천 세계의 끝까지"


팔이, 쑥 끌려올라간다.


"-------자, 눈을 뜰 때다"


그리고 급속도로 빛 속을 향해 나아갔다.


"주인"


시야에 벚꽃잎같은 흰 빛이 흘러넘친다.

그리고, 홍수같은 빛의 흐름이 지나고.

눈 앞에, 팔랑거리는 꽃잎이 춤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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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타고, 모래 위의 누각이 무너진 다음, 기도와 함께 떠맡은 기억을 안고, 괴로워하면서 살고, 이윽고 온화하게 자신을 상실해간다고 한다.

행복하고 슬픈 꿈이었다.







그곳은 처음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트인 시야에 흔들리는 풀이 보였다.

눈 앞에 날아들어온 광경에 순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어서 눈만 깜빡였다.

풀과 흙 냄새를 강하게 느끼고, 마디마디가 아파오는 몸을 일으키면서 자신이 땅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드러운 풀로 뒤덮인 흙에 손을 짚고,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뺨을 쓰다듬고, 한 박자 늦게 초원이 바람을 맞아 스르르 흔들렸다. 파문처럼 사아아 하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메마르고 서늘한 기색이 열을 가진 온 몸을 도닥이듯이 감쌌다.

낮은 시야에는 흔들리는 풀과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높은 하늘이 보인다. 하늘은 붉었다.

하늘에 불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세계가 불꽃 속에 가라앉아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저녁 노을의 붉은 빛이 초원에 반사되었고, 일면을 가득 채운 녹색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를 안고 있던 어둠은 사라졌다.

어딘가로 떨어지던 몸이 내동댕이쳐지고 눈을 떴을 때, 펼쳐져 있었던 것이 이 경치였다.

봄의 기색인 이미 아무데서도 느낄 수 없었고, 벚꽃잎은 한 장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이기 전의 일인데도 10년은 지난 꿈처럼 느껴지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면서,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 하나 알 수가 없었다. 일어설 기력도 없이 주저앉은 채, 미끄러지기만 하는 머릿속에는 현실감도 절실함도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떨어트리고 온 것처럼, 몸 안쪽이 기묘하게 텅 비어 있었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정신을 놓고 멍하니 앉은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단 몇 초 정도인 것 같기도 하고, 역시 10년은 지난 것처럼 영원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소리를 내고 있던 초원은 이미 호흡을 멈춘 듯이 침묵하고 있었다. 녹색을 온통 물들이던 붉은 빛도, 해가 지자 이번에는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밝은 달이 파란 하늘 위에 떠 있었고, 작은 유리 파편같은 빛을 내는 별들과 함께 지상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도 아직 꿈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한 어둠이 찾아왔다.

지상은 한밤중이었다.


그래도 일어서지 못하고 나는 앉아 있었다.

언제부턴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그저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던 시선은 내려왔고, 지면의 풀들을 보고 있었다. 흙 냄새가 났다.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자륵, 하고 등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이런이런, 설마 따로따로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못 했구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 줘서 다행이다"


머리 위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떨어진다. 그 목소리는 분명히 내 귀에도 닿았지만, 고개숙인 채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정면으로 돌아오는 기색이 났다. 나는 그저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몸의 모든 신경이 끊어져버린 것처럼,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냥 장식처럼 무겁게 몸통에서 뻗어나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힘을 잃은 그 몸을, 뻗어나온 팔이 안아들었다.

그 바람에 팔에 무언가가 닿았다. 나를 안아올린 것과 같은 손으로 안은 두 자루 칼을 보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음? 아아"


너무 목이 말랐다. 입을 열고 나서 처음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마치 계속 소리치고 있었던 것처럼 고통을 느끼면서 잠기고 작은 목소리를 냈고, 바로 옆에 얼굴이 있었던 도검은 내 목소리를 들었다. 사람 하나를 안고서도 요령 좋게 들고 있는 두 자루 칼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네 칼이다. 나도 그렇고"


미카즈키 무네치카의, 내리깐 눈동자가 깜빡였다. 눈 안에 든 초승달이 밤의 정적 속에 빛났다. 나는 시공의 틈새에서 떨어지면서, 자신이 들고 있던 두 자루 칼에 눈을 돌렸다.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라는 이름의 타도와, 이시키리마루라는 이름의 대태도는 지금 입 없는 칼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구멍에 빠질 때는 미카즈키도 똑같이 본체였을 텐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사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득,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나를 끌어올린 손을 떠올렸다.

지금 나를 안고 있는 기모노의 소매가 시야에 펄럭이는 광경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만 순간, 심장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아팠다.

몸 안쪽에서 나오려 하는 충동을 억누르는 방법을 몰랐다. 몸을 구부려 접고 폭발하는 감정 그대로 날뛰려다가, 강한 힘에 붙잡혔다.


"놔......놓아줘......"

"어째서"

"왜냐니, 난, 내, 카센, 카센을......."


카센을, 죽이고 말았다.


떨어진 목소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 말단에서부터 천천히 냉랭한 기운이 안쪽으로 기어올라오는 것처럼,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한순간 확실히 내 숨을 멎게 만든 감각은 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풀려, 돌아온 열에 나는 반쯤 광란에 빠졌다.

카센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나에게 닿은 손을. 뒤집어쓴 피분수의 온기를. 꽃같은 향기를 떠올린다. 생생하고도 선명한 그 감각이, 지금까지 내 안쪽에서 가사상태로 자고 있었던 것처럼 일제히 숨을 몰아쉬며 나를 습격했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카센은 행복해지라고 했다.

그런가. 나는 불행했던 건가.

그런 걸, 이제 와서 알앗다.


그런 나였기 때문에 이런 결말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건.


"사, 사랑한다고.........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는데, 왜........어째서....."


온몸이 덜덜 떨렸다. 눈가에 머무르던 열이 몸 안쪽에서 날뛰고 있는 것 같았고, 끊임없이 시야가 흔들렸다. 심장과 함께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이것을 그대로 억눌러 둘 수 없다. 어째서 이렇게나 가슴이 괴로운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나는 알고 말았다. 살아 있기 때문에 아픈 거라고, 카센이 여기에 있었다면 말해 줬을 텐데 하고, 기억을 되찾은 지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지금 상황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 나는 사실은, 먼 옛날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살아가려 하는 한 인간은 계속 아플 것이다. 누구나가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건. 그건, 그건!

비통한 절규가 가슴을 때렸다. 귀를 막고 웅크리고 싶었다. 소리치고 있는 것은 나의 마음인데도.


"그건, 그럼, 대체........사, 사랑이란.......뭐야........? 나, 는, 뭐였어......?"


정신줄을 놓은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이 지친 머릿속은 무언가를 받아들일만한 여유가 없엇다.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일그러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거기에 있었던 것이 도저히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집착에 가까운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내 손에 있는 것을 모두 사랑하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나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면, 대체 뭐가 사랑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서, 지금까지.


"그것을 찾으라고 했지 않느냐. 그 녀석이"


갑자기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너는 너란다. 누군가의 생각대로 살지 않아도, 네가 바라는대로 되지 못해도, 너임에는 변함이 없구나"


그리고 그 칼은 네가 그러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저 네가 너인 채로 여기에 존재하기를. 그저 그것만을 바랐을 것이다.


나는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런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리도 없이 울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살아있기만 해서는 용서받을 수 없었던 나는, 살아있기만 해도 된다는 말을 누군가 해 주길 항상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을 누가 용서해주지 않아도 좋다.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지 않아도 좋다.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래야 했다, 사실은. 나는 그저, 내 옆에 있어 준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했다는 것을 어째서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이제 와서 아무리 울어 봤자, 이제 두 번 다시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


카센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스러졌을까.


나의 세계. 나의 유일. 나의 진실.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 물건을 다루는 방식은 사람에게 돌아간다. 자기 자신을 버린 나에게, 나를 돌려준 카센이 부러진 것은, 내 죄 그 자체였다.

카센. 카센. 나는 당신의 삶과 바꾸면서까지 기도해줄만한 목숨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어 기도해준 이상, 나는 그 저주를 받아들여 살아가는 것을 강요받고 있었다.

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은 존재를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나 숨쉬기가 힘들었던, 다정한 상자 정원을 부수고, 결코 이전보다 가볍지 않은 괴로움으로 가득한 몇 천의 나날을, 스스로 걸어가야 한다. 신이 죽어버린 이 세계에서.


풀이 생생한 초원에서, 푸르고 신선한 냄새가 났다.

파랗게 잠긴 밤의 공기가 눈물 젖은 뺨을 닦아주듯이 부드럽게 쓸고 지나간다.

공기가 대단히 온화했고, 그것이 무언가 너무나 잔혹한 일인 것처럼 느껴져서 비참했다. 나는 세계를 앞에 두고 비참해졌다. 어두운 밤 하늘 끝자락에, 엷은 구름의 빛이 번지고 있었다.

하늘에 뚫린 구멍같은 별들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달이 밝았다. 어르듯이 나를 안은 품 속에서, 나는 이곳에 막 떨어졌을 때 보았던 하늘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밤하늘도, 그 하늘도, 차라리 죽고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오랜 어둠의 틈새에서 빠져나와 본 불타는 하늘은, 마치 이 세상의 종막처럼,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줄곧 나를 얽어매었던 봄날의 경치와는 하나도 겹치는 구석이 없는 광경.

춤추는 벚꽃잎 너머로 결코 보이지 않았던 하늘. 마음이 짓눌릴 정도로,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그런 생각을 해 버린 나를 강하게 증오했다.

하지만 한순간의 격렬한 증오도 밤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흩어져버렸다. 지금 나에게는 격정이 없다.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어디. 그럼, 갈까"


바람이 지나가고 초원이 술렁인다. 힘이 빠진 내 몸을 조용히 초원 위에 내린 칼을 올려다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어디로, 하고 물은 것 같았다. 떨리는 소리는 혀뿌리에서 제대로 빠져나왔는지 아닌지도 미심쩍었지만, 눈 앞의 도검은 제대로 내 질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눈물로 젖은 내 눈을 바라보며 멈췄다.


나는 막막한 심정이었다. 미카즈키가 내 몸을 지탱해 주지 않으면 힘없는 다리는 곧바로 무너지고, 또다시 땅에 주저앉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제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어디로 가면 좋은지도 알 수 없었다. 원래부터 가고 싶은 곳 따위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저 항상, 항상, 나는, 내가 어디에 있으면 되는지도 몰라서, 그 끝에 지금 이렇게 여기 있었다.

가장 소중했던 것조차 망각하고, 전부 다 밑바닥에 봉인하고, 탁한 세상을 기피하고, 자기 자신을 증오하면서, 그 결과 손을 놓아서는 안 되었던 모든 것을 영원히 잃어버린 나에게는, 이제 살아갈 기력도 거의 없었다.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적어도, 지금 나는 혼자서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고, 서 있을 수도 없었다.


하나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던 내 목소리를, 미카즈키 무네치카는 어째선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아니, 하고 속삭인다. 파란 밤으로 물든 세계에서, 밤하늘을 비추는 달빛같은 조용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단다. 살아 있기만 한다면야"


그 눈에 밤의 이정표를 가진 칼이, 내 손을 잡았다.

기모노의 소맷자락이 펄럭이고, 힘있게 잡아당긴 내 몸은 끌려가는 모양새로 발을 내딛었다. 나를 밀쳐낸 등에 밀리는 것처럼, 앞으로 기울어 넘어지는 것처럼 한 걸음 내딛었다.

봄의 색도, 냄새도, 어디에도 없는, 파란 세계.

아직 어두운, 맑은 달빛만이 비추는 들판을, 나는 걸어간다.


모든 것을 잃고 아무 것도 없는, 손을 잡는다.

지옥처럼 아름다운 봄에, 등을 돌리고.



-------돌아보지 말고, 너는 가거라.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