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겐지사니. (여주인공)

 *현대? 근대? 근현대? AU.

 *전생 x.






 그에게 손목을 잡힌 채 두꺼운 천막을 빠져나오자 밤도시의 조명이 우리를 비췄다. 우리는 몇 발자국 못 가 낭떠러지에 길이 막혀 발걸음을 멈추고, 발 아래 펼쳐진 화려한 네온 사인들을 눈에 담았다. 물론, 절벽 위에 세워진 커다란 서커스 천막도 며칠 사이에 이 도시와 완전히 융합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보였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밤도시에서 눈을 돌려 비교적 수수한 흰 가운 차림의 그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쳐다 보고만 있자, 한숨을 쉬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이던 히자마루는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체취가 내 몸을 감싸며, 늘 그렇듯 싫지 않은 소독약의 냄새가 났다. 아니, 오늘은 또 다른 알코올의 냄새, 위스키의 냄새도 났다. 그와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거, 말야.


 히자마루는 고개를 기울이며 자신의 왼쪽 어깨와 목이 이어지는 부분을 가리켰다. 나는 이제야 그가 머리카락에 숨겨진 내 오른쪽 어깨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걸 알았다. 하긴, 그가 나에게 말을 걸 이유는 그것 밖에 없을 것이다. 멋쩍게 눈을 아래로 내리며 한 손으로 상처 위 흰 거즈를 숨기듯 살며시 덮었다. 어젯밤, 히게키리가 직접 붙여주던 손길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상처를 내게 보여주겠어?


 결국 힘겹게 하고 싶던 말을 꺼내고 나서야 나와 제대로 눈을 마주쳐주는 히자마루. 그게 또 맘 아프면서도 기쁘다. 미소가 지어지려는 걸 억지로 참고, 그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난다. 그러자 내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는지, 손을 뻗는 그. 팔을 잡힌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아... 미, 미안...


 히자마루는 잠시 주춤하더니, 입을 굳게 다물고 내게 붙어 있는 거즈를 떼어낸다. 평소에는 다른 동료들의 더 심한 상처들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보면서, 내게 남겨진 상처에는 늘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그게 그의 귀여운 점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원인이 내가 아닌, 그의 형이지만.


 히자마루의 형인 히게키리는 내게 일부러 상처를 입힌 후 서툴게 치료해주곤 했다. 상처가 아물 쯤, 밤이 되면 나를 찾아와 또 다시 상처 입히고, 그의 동생이 해주는 것처럼 약을 바르고 거즈를 붙였다. 손길은 동생만큼 섬세하진 못했지만, 나와 내 상처를 아껴주는 게 충분히 느껴졌다.


 -형님이... 또, 그런 거지...?


 고개를 끄덕일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형의 잘못이 본인의 책임이라도 되는 듯 구는 게 너무나도 귀여웠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무심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가 웃기지?


 순간 히자마루는 싸늘한 표정으로 화를 냈다. 형의 잘못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도 있으니, 이런 꼴을 당해도 싸다고 책망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 화 또한 자기 자신에게 내고 있는 것 뿐이란 걸. 미간을 잔뜩 구긴 채, 그는 작은 구급상자를 열어 내 상처를 치료한다. 무척이나 부드럽고 섬세해서, 아랫입술을 깨물지 않으면 뜨거운 숨이 나올 것만 같다.


 -...미안하다.


 새로운 거즈를 붙여준 그가 중얼거리듯 내뱉는다. 나는 대답해줄 말이 없다. 그저 히자마루의 손길이 닿았던 깨끗한 거즈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날 지나쳐 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지, 한참을 자리를 뜨지 않더니, 입술을 달싹이며 내게 확실히 말했다.


 -...형님이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되도록이면 네게 상처 입히지 말라고 말해두겠다.


 바닥을 보며 낮게 읖조리는 그. 만약 히게키리가 나를 상처 입히지 않는다면 히자마루가 나를 주기적으로 찾아오지도 않을 거고, 내가 그와 이런 시간을 갖는 빈도도 줄어들 것이다. 그건 싫다. 나는 최대한 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의 부정에 히자마루는 울컥, 화를 내버린다.


 -...넌 이런 관계가 계속 돼도 괜찮다고 말하는 거냐!?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불안한 것이다. 무엇이 불안할까? 아, 그래. 사랑하는 형을 내게 빼앗길까봐. 당장이라도 말해주고 싶다. 나는 그저 당신과 나를 잇기 위해 그를 이용하는 것 뿐이라고. 그 또한 나를 가질 생각 같은 건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해주며 달래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히자마루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넌 잘 모르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형님은 널 맘에 들어하고 있다. 네게 찾아가는 날이 많아지는 것과, 네 상처가 점점 커지는 게 그 증거야.


 ...확실히 그렇긴 했다. 달에 한 번 찾아오던 그가, 요새는 일주일 간격으로 찾아 오곤 했고, 처음에는 손톱으로 작은 상처를 내던 그가, 어젯밤은 내 목 아래를 깨물어 깊은 상처를 냈다. 히게키리의 날카로운 송곳니는 마치 그러기 위해 있는 것처럼 내 살 깊숙이 박혔다가 빠졌다.


 -...이제야 눈치 챈 건가. 잘못하면 네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조금 굳어 있던 내게 히자마루는 그렇게 말했다. 나도 그 말이 전혀 과장된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히게키리가 정말로 나를 죽인다면? 그리고 그걸 히자마루가 알게 된다면? 아마 그는 죄책감과 분노에 떨며 히게키리를 노려볼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태연하게 되묻는 그의 형을, 아무런 감정도, 작은 표정의 변화도 없는 히게키리를 노려보며, 그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나를 애도하겠지. 그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어쩌면 히자마루의 기억에 평생 남을 수도 있겠다 싶어, 기분이 상기되었다.


 -왜, 왜 그렇게 웃는 거야. 도대체, 형님이나 너나, 무슨 생각을...!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어깨를 움츠리며 웃는 나를 보며, 히자마루는 기겁했다. 그에게 이해 받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그저 이 기분을 만끽하고 싶다. 히자마루가 바라봐주지 않았던 날들과, 히게키리와 보냈던 밤들이 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정신 차리라고, 제발...!!

 -누가 있어?


 순간 흠칫, 하고 몸을 떤 히자마루는 나를 끌고 쌓여 있는 자재들 사이로 숙이고 앉아 몸을 숨겼다. 분명 히게키리의 목소리인데, 어째서 숨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 두 사람은 지금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히게키리의 발소리는 가까워지는데, 그에게 폭 안겨 있는 게 기분 좋아서, 자꾸만 몸을 배배 꼬게 된다.


 -어라... 분명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점점 더 다가오는 히게키리의 기척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꾸 꿈틀거리자, 히자마루는 나를 더 꽉 안아 움직임을 봉쇄한다. 그래서 나도 슬며시, 흑심을 잔뜩 담아 그의 등에 팔을 두른다. 마치 그와 내가 비밀 연인이 된 것 같은 지금 상황에 가슴이 뛰고 있는데, 갑자기 왼쪽 어깨에 무언가 닿는다. 아니, 무언가가 살을 파고 들려고 애쓰고 있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히자마루의 송곳니일 것이다.


 -...아무도 없는 걸까나...


 만약 지금 내 심장이 눈 앞에 있다면 빨갛게 타들어가는 게 보일 것이고, 내게 목소리가 있다면 기쁨의 신음이 흘러 나왔을텐데. 그는 상처가 나지 않도록 깨무는 힘을 조절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내게 상처 입히는 게 두려워 더 이상 힘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그가 침대 위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이윽고 히게키리가 우리를 숨겨주고 있는 자재들 바로 옆까지 왔을 때, 저 멀리서 동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히게키리를 유혹하듯 말을 걸었다.


 -...흠, 넌 좀 시끄러운데...어쩔까나.


 히게키리와 여자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그제서야 히자마루는 나를 놓아 주었다. 커다랗게 숨을 내뱉자마자 그는 안겨 있던 나를 밀쳐내고는 서커스 천막 안으로 뛰어가버렸다. 순식간이었지만, 그의 귀가 매우 빨갰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보였다. 나는 내 왼쪽 어깨에 남은 그의 타액과 잇자국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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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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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이제 내 목 양쪽에는 흰 거즈가 하나씩 붙어있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쓰고 있는 쪽은 왼쪽에 있는, 히자마루가 만들어준 잇자국이었다. 붉게 남은 잇자국이 꼭 키스 마크 같다고 생각할 때마다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거울을 보며 거즈 위를 손으로 쓰다듬는데,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들어가도 괜찮을까?


 히게키리의 목소리다. 어차피 대답도 못하는데, 그는 늘 내 허락을 구한다. 어찌보면 굉장히 친절한 듯 보이지만, 내게 찾아온 첫날 그가 했던 행동들은 그렇지 못했다. 천천히 장막을 걷어 올리고 들어오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보인다.


 -벌써 잘 준비를 하고 있던 거야?


 뒤에서부터 안아오는 그를 뿌리친다. 오늘 밤은 만져지고 싶지 않다. 아니, 들키고 싶지 않다고 해야 맞을까? 그의 동생이 나에게 만들어준 상처를 그가 보게 된다면, 모르긴 해도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어라, 무슨 일이야?


 나는 그저 고개를 돌린 채, 침대 위로 올라간다. 그가 따라오는 게 느껴지지만, 모른 채 하며 그로부터 돌아 누운 채 이불을 뒤집어 쓴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이어지지만, 여전히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히게키리가 이 서커스단에 합류한지 벌써 반년 째지만, 아직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긴, 동생인 히자마루 또한 형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고 하니 당연한 걸지도.


 -내가 다른 여자들이랑 놀아서 그러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그는 나 말고도 다른 여자 동료들과 더 밤을 자주 보냈다. 내가 그의 눈에 띈 건, 그가 내 공연을 처음 본 그 때 부터였다. 매우 흥미로워하던 그의 눈이 아직도 떠오른다.


 -...아니면, 나 말고 다른 남자가 생긴 거니?


 목덜미 쪽으로 불어오는 숨결에 놀라 무심코 몸을 움찔거린다. 그 반응이 재밌었는지, 히게키리는 침대 위로 올라와 서서히 나를 만지기 시작한다. 저항해보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처음으로 그가 확인하듯 쓰다듬는 곳은, 어젯밤 그가 새로 만든 목덜미의 상처다. 새로운 거즈였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누굴까... 이 도시에서 새로운 남자라도 꼬신 걸 까나?


 일부러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아니면, 늘 너랑 붙어서 이야기하는 그 남자애?


 말하지 못하는 내 곁에서 수화로 이야기를 나눠주는 내 공연 파트너를 말하는 것이다. 이 서커스 단에서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수화를 아는 아이이기 때문에 나와 파트너가 된 것 뿐인데, 그게 거슬리는 걸까? 질투는 좋지 않다고 늘 말하던 그였기에 조금 이 상황이 생소하다.


 -...음?


 그의 표정이 궁금해 살짝 돌린 고개 옆으로, 히게키리의 커다란 손이 훅 들어온다. 그가 만지는 것은 반대 쪽의 또 다른 거즈. 나는 놀라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지만, 그는 아예 내 상체를 일으켜 확인한다. 보고도 믿지 못 하겠다는 듯, 그는 거의 달려들다시피 손을 뻗어 거즈를 뜯어낸다. 고개가 강제로 돌아가고, 히자마루의 잇자국을 그에게 고스란히 들켜버린다.


 -...설마 했는데, 보면 볼 수록 재밌는 아이구나, 너...


 어둠을 등지고 내게 다가오는 그와 마주할 수가 없다. 그의 눈이 마치 귀신처럼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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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의 공연을 위해 분장을 마쳤다. 오늘따라 무척이나 피곤하다고 느껴졌지만, 그저 어젯밤 늦게 잠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축 늘어지는 무거운 몸을 무대 위로 이끈다. 눈부신 조명과 대조적으로 누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관객석. 그 와중에 언제 들어왔던 건지, 저 멀리 무대 바깥에서 나를 바라보는 히자마루가 보인다. 눈을 마주치면, 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그 반응이 재밌어서 피식 웃었다.


 어제 그 일이 떠오르지만, 이미 그 때의 상처는 다른 상처로 대체되었다.


 조금 쓸쓸하게 그의 숨결이 남아 있던 왼쪽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공연을 위해 벽에 기대어 선다. 파트너는 내게 준비되었냐는 신호를 보내고, 나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한 번 닦은 후 십자가처럼 팔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인다.


 첫번째, 파트너가 던진 칼이 내 오른쪽 허리 밑에 꽂힌다. 몸이 울리는 소리가 이렇게 컸었나?


 두번째, 파트너가 던진 칼이 내 왼쪽 허리 밑에 꽂힌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조명이 오늘따라 눈부시다.


 세번째, 파트너가 던진 칼이 내 오른쪽 머리 옆에 꽂힌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오늘따라 머리를 아프게 한다.


 네번째, 파트너가 던진 칼이 내 왼쪽 머리 옆에...


 휘청거리던 내 몸이 바닥과 느리게 맞닿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하기도 전에, 숨 쉬는 게 힘들어진다. 누군가가 옆으로 달려와 나를 만지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눈부신 천장의 조명을 바라보도록 눕혀진 나의 시야에 문득 그가 들어온다. 내심 기뻐 입꼬리가 올라 가려다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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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막 밖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잠이 깼다. 한참을 잔 느낌이다. 나른하고, 아직 몸이 무거워 일으키지는 못 할 것 같다.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올리니,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데, 양쪽 목덜미가 아파온다. 공연을 떠올린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일으키던 동료들, 수근거리던 관객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단장.


 ...벌을 받겠지.


 그 때 천막 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가까이 온 사람은 파트너이다. 다정하게 정신이 들었냐고 묻는 그. 나와 마주친 표정은 걱정이 가득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목과 왼쪽 어깨 사이에 난 상처가 염증을 일으켰고, 그 때문에 열이 나서 쓰러진 거라고 한다. 상처의 원인은 묻지 않는 상냥함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다는 대답으로 받아 들여진 건지, 푹 쉬라고 말한 그는 단장에게 알리러 간다며 천막 밖으로 나갔다. 허공을 바라보며 치료는 당연히 히자마루가 해줬겠지,하며 내심 기뻐하고 있는데, 천막 밖에서 서성이는 그림자가 시선을 끈다.


 -...들어가겠다.


 그 말을 한 후에도 히자마루는 조금 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천막을 걷어 올리고 발을 들였다. 누가 보면 혼자 비극 한 편을 찍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내게 다가와 의자에 앉은 그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별로 미안할 건 없는데... 오히려 그가 남겨준 흔적을 지키지 못해서 내가 더 미안하다. 그보다 아직 열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정신이 몽롱한 게, 나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는다.


 -아직은 움직이면 안 돼. 약 기운이 남아 있을 테니.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아 다시 침대 위로 사뿐히 내려 놓아주는 히자마루. 그렇구나. 몽롱한 기분은 약 기운 때문이구나. 난 또. 그와 단둘이 된 이 천막 안이 너무나 행복해서 내 정신이 어떻게 된 줄 알았지. 그렇다면. 나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이 순간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봐, 움직이면 열이 더 오를지도...!


 나는 그저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가자 밤이 막 내려앉을 때 시작했던 공연은 어느새 피날레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인지,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환호소리가 파도처럼 들려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열을 식혀주고, 절벽에 가까이 갈 수록 바람이 나를 이끌었다.


 -...조심해.


 절벽 끝에 앉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는 그도 내 옆에 앉았다. 꿈만 같았다. 그와 단둘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마치 이 세상에 두 사람밖에 없는 느낌이었다. 멀리 보이는 밤도시의 불빛들은 그저 배경에 불과했다. 그 무엇도 우리 두 사람보다 예쁠 수 없었다. 나는 약 기운 때문이라는 핑계로 용기를 내어 그에게 손짓했다.


 -...? 뭐, 뭔가 필요한 거냐?


 나는 고개를 젓고 한 동작을 반복했다. 그는 내 손짓을 따라하면서 어리둥절해 했지만, 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아직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그가 귀여웠다. 손을 내밀었다. 다시 잡아달라고.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착각해버릴 것 같았다. 이미 연인이 된 듯,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밤도시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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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 하고 바닥에 넘어지는 순간, 까끌까끌한 모래가 입으로 들어온다. 손바닥이 흙에 쓸려 아팠지만, 동시에 다가오는 단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구둣발이 몸 이곳 저곳을 밟아댔다. 게슴츠레 뜬 시야에 보이는 건 덜덜 떨고 있는 내 파트너였다. 그는 뒷걸음질 치다가 천막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단장은 내가 여태까지 저지른 잘못들을 하나하나 말해주며,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벙어리에, 대단한 재주도 없고, 매일 매일 밥만 축내는, 가축보다 못하는 존재라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들어왔던 말이기 때문에 큰 영향은 없었다. 몸에 가해지는 폭력 또한 익숙했다. 그가 말하는 제일 큰 잘못은 어젯밤 내가 쓰러지는 바람에 공연을 망친 것이었다. 물론 전체적인 공연은 다른 단원들이 끝까지 잘 마쳤지만, 항상 완벽을 추구하는 단장에게는 내가 미울 만도 하다.


 아니, 미운 정도가 아니다.


 단장은 끊임 없이 나를 죽이겠다고 했다. 어쩌면 이번에는 그 말이 사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단장의 구둣발에 짓눌려 흙 속으로 들어가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내 주제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랬나? 어젯밤 히자마루와의 한 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이제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무심코 눈물이 났다. 내 파트너가 보면 정말 놀라겠지? 칼날이 볼을 스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내가 눈물이라니.


 순간 단장이 발길질을 멈추고 큰 소리를 내었다. 귀에서 이명이 들려와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 듣지 못했다. 벙어리에 이어 이제는 귀머거리가 되는 걸까. 그나마 좋은 시력마저 잃을 수는 없으니 눈을 꼭 감았다. 캄캄한 시야였지만 내 앞에 무언가가 쓰러지는 게 느껴졌다. 게슴츠레 눈을 뜨니, 단장이 엉덩방아를 찍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괜찮니?


 시선을 돌리자 히게키리가 보였다.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문득 어딘가 모르게 섬뜩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뒤이어 히자마루가 단숨에 다가와 내 몸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골절은 없는 것 같아.

 -그래? 그럼, 그 애를 부탁할게. 난 단장과 할 얘기가 있어서.

 -...알겠어.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하고 있는데 히자마루가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고, 히게키리는 그저 웃으며 나와 히자마루를 배웅했다. 어깨 너머로 본 그의 손에는 그가 공연할 때 쓰는 긴 칼이 들려 있었다. 그 길고 얇은 칼은 그들의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단장이 뭐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천막을 나와 멀어지는 동안 그 소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의무실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내 파트너였다. 단장으로부터 도망친 게 아니고, 히게키리와 히자마루를 불러준 거였다. 나중에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히자마루는 나를 침대에 앉힌 후, 이곳 저곳 멍이 든 내 몸을 살피며 연고를 발랐다. 매우 심각하게 찌푸린 미간이 귀여워서 바라보고 있자, 연고의 뚜껑을 닫고는 알약 하나를 내민다.


 -진통제다. 움직여야 하니까 먹어둬.


 ...움직여? 오늘은 공연이 없다. 이 상태론 연습도 할 수 없다. 우선은 히자마루가 주는 알약을 물과 함께 삼킨다. 그 사이 그는 내 파트너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색이 된 파트너를 안심시키려는 건지 어깨를 두드리더니, 천막 밖으로 내쫓듯 밀어낸다. 단둘이 남은 상황은 좋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물어볼 수도 없고, 조금 답답한 마음에 몸을 움직였다.


 -안 돼, 가만히 있어. 곧 형님이 오실 거다.


 조금 초조해 보이는 히자마루가 그렇게 말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히게키리가 돌아왔다. 그는 아까와는 다른 옷차림이었고, 양 손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이 들려 있었다. 히자마루가 가방을 받아들자 마자 그는 내게 가까이 와 아까 그의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녹슨 철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마 허리춤에 달린 그의 칼에서 나는 냄새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히게키리는 어째서인지 자연스럽게 내 옷을 벗기려고 했다.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옷을 사수하며 그를 밀쳐냈다.


 -응? 왜 그러니? 옷 안 쪽에는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려는 건데... 아, 혹시.


 히게키리는 귓속말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동생이 있어서 부끄러운 거냐고. 그 말을 듣고 히자마루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흠칫, 놀라며 얼굴을 붉히더니, 말을 얼버무리며 허둥댔다.


 -자, 잠깐 그 녀석의 파트너를 도와주고 오겠다, 형님!


 눈웃음으로 동생의 배웅을 마친 히게키리는 내게 얌전히 있으라며 내 옷 안 쪽의 상처들도 하나하나 살펴보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어쩐지 손길이 야릇해서, 상처의 치료일 뿐인데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흙투성이의 내 옷을 전부 벗긴 후, 그의 여행 가방에 들어 있던 프릴이 달린 원피스를 내게 입혔다. 히게키리가 옷가게에서 이런 귀여운 옷을 고르는 게 상상이 가진 않았지만, 어쨌든 나를 위해 준비한 거라고 하니, 얌전히 옷을 입었다. 착의가 끝난 후, 아픈 것을 잘 참았으니 상을 주겠다며 작은 봉투를 건네준다. 그 안에서 꺼낸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에는 기차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먼 도시의 이름이 적혀있다. 아무래도 그는 그 곳으로 떠나는 것 같았다. 항상 서커스단의 마차만 타고 다니던 내게는 조금 생소한 물건이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좀 더 설명해달라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응, 기차표야. 우리는 떠날 거야.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그가 떠나면 히자마루도 떠난다는 걸 깨닫는다. 곧바로 드는 생각은, 헤어지기 싫어, 라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곧 내 손에 들린 이 기차표처럼 이별이라는 말이 형체를 띄고 생생하게 와닿는다. 눈 앞이 뿌옇게 변하며 기차표의 글씨가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눈꺼풀을 깜빡이면, 커다란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져 기찻표가 든 봉투를 적신다.


 -...우는 거니...?


 처음 보는 내 우는 모습에 히게키리도 당황한 건지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본다.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내 볼에 닿는다. 지금은 가능하다면 그의 작은 손길조차도 내 곁에 두고 싶다. 히자마루와 헤어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히게키리가 주는 아픔은 그 어느 것도 참을 수 있다. 조용히 눈물만 흘리는 나를 히게키리가 달래준다.


 -그렇게 이 서커스단이 좋은 거니...? 우리는 그저...

 -혀, 형님! 그 녀석은 환자라고! 무슨 짓을...!


 내 눈물을 보고 당황하며 달려오는 히자마루. 히게키리와 나는 그저 불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찻표를 보여줬더니, 울어버렸어... 힘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히게키리는 동생에게 자리를 비켜주며 일어났다. 이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건, 곧 못 보게 될 히자마루였다. 하지만 이미 눈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뿌옇게 흐린 연두빛 머리카락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호흡이 더 가빠진다.


 -진정해. 우리는 떠날 거다. 아니, 떠나야 한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린 그는 엄지 손가락으로 목 위의 거즈를 상냥하게 쓰다듬는다. 눈을 꼭 감았다가 뜨면,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무언가 불안한 건지, 그는 내 두 눈동자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덩달아 불안해진 나는 고개를 기울여 그의 손길이 내 볼에 닿도록 한다. 그 고양이 같은 동작에 히자마루는 결심한 듯 말을 꺼낸다.


 -...우리를 믿어주고, 함께 가지 않겠나...?


 ...함께...라고...? 놀란 눈을 크게 뜬다. 눈물로 촉촉해진 탓인지, 그대로 눈을 깜빡이지 않아도 전혀 따갑지 않다. 굳은 의지로 입술을 꾹 다문 히자마루를 쳐다보다가, 옆에 일어서 있는 히게키리를 쳐다본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그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내 손에서 기찻표를 가져간다.


 -아, 말 안 했던가? 떠나는 건 우리 셋이야.


 겹쳐져 있던 기찻표를 봉투에서 꺼내 펼쳐보이면, 그것은 정확히 3장이다. 나는 다시 히자마루를 바라보지만, 그는 자신의 형을 올려다보며, 형님, 그런 것은 처음부터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라고 잔소리한다. 그러다가도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나를 돌아본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내게 권유한다.


 -...그, 그런 것이다. 괜찮다면 지금부터 우리와 함께...으앗!?


 나는 당장 그를 끌어안는다. 그의 목덜미에 대고 고개를 끄덕인다. 눈물이 넘쳐 그의 옷깃을 적시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기쁨의 눈물이니까, 참아주길 바란다. 히게키리도 웃으며 히자마루와 나를 껴안는다. 당황하는 히자마루의 목소리와, 달래주듯이 머리를 쓰다듬는 히게키리의 손길이 꿈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한참 뭉쳐 있던 우리 셋은 내 짐을 갖고 와준 내 파트너가 돌아오고 나서야 뿔뿔히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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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다란 기차에 올라타 작은 방 같은 곳에 들어가니, 2층 침대처럼 생긴 좌석이 마주보고 있다. 히게키리는 자연스럽게 창가에 나를 앉히고, 내 옆에 앉는다. 히자마루가 커다란 가방들을 의자 아래 공간에 차곡차곡 쌓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창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어라, 저기 봐.


 창문 너머를 가리키는 히게키리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절벽 위의 서커스 천막이 보인다. 언뜻 보이는 사람들의 그림자에서 어딘지 모르게 부산스러움을 느낀다. 어렸을 때부터 신세를 졌던 서커스단이었기에, 약갼의 그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시원섭섭하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건지 히게키리가 내 고개를 강제로 자기 자신에게 돌린 후 위로해준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네 곁에 있을 거니까 안심하렴.


 왠지 이들과 함께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된다. 앞으로 어디서 생활하게 될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쩐지 좌석의 쿠션이 푹신하게 느껴지고, 몸이 나른해져 온다. 아마 아까 먹은 진통제의 효과겠지. 반쯤 감기는 눈으로 고개를 숙이니, 히게키리가 내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게 한다. 눈이 완전히 감기기 전에 바라본 맞은 편의 히자마루의 표정이 어쩐지 불안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언젠간 히자마루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 날을 상상하며 기분 좋게 잠에 빠져든다.


 기차는 일정한 속도로 나아가며 우리들을 싣고 어딘가로 떠난다.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