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묻은 파편을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 나오자마자, 여자는 책상 앞에 앉았다. 통쾌함은 잠깐이요, 앞으로의 여정은 길 테니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지 5분도 되지 않아, 왜 끝에 가서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을까 후회했다. 그 흔적은 고스란히 종이위에 자취를 남겼다.
내 능력이 나에게만 적용되는 줄 알아
그녀가 뱉었던 말이 한 토씨도 틀리지 않은 채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뒤로 갈수록 점점 크기를 넓혀가는 흘려쓴 글씨로 욕지거리도 나란히 뒤따르고 있다.
그 말만 안 뱉었어도 새벽 즈음에 다시 숨어 들어가 2차를 결행할 텐데, 그러다 들키면 ‘좀 봐주시면 안돼요?’ 불쌍한 척 빌어 보기도 하고. 물론 자비를 바라는게 아니라, 그렇게 비는 자신에게 욕 하거나 비꼬는 새에 도망가기 위한 시간 벌기용이지만.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톡 떨어진 물방울이 종이위로 번져가는 걸 보며 여자는 ‘사람이 물만 먹으면 며칠 버틸 수 있다더라?’하는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주제를 바꿔,처음에는 일주일 넘게 버텼으니까….이번에도 그 정도는 버티겠지 생각했다가 앞 전에는 꼬박꼬박 식사를 하다가 굶은 거고 이번에는 며칠을 굶고서 딱 한끼 먹고서 버텨야 한다는 차이를 떠올렸다.
“작전 변경”
여자는 백지를 휙 집어 들고서 분주하게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식량 상태
ㅡ 쌀 200가마니 이상 추정
내번 수행중으로 추정. 키우는 작물은 최소 8종류
공급처는 불명이지만 다수의 육류도 보관중
이어서 식량상태에 관한 몇 가지를 더 적다보니 어느새 한 면이 다 찼다. 날림으로 쓴데다 초안이라 해도 그동안 여기서 관찰한 게 전혀 없는 건 아니네 싶었다. 그렇지만 다시 슥 훑어보니 열줄이 가볍게 넘어가는 문장 중 서너가지를 제외하면 전부가 오늘 하루동안 확인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충실히도 히키코모리의 시간을 보내왔구나 실감됐다.
“이건 어디까지나 대비야, 대비”
게이트로 나가더라도 계약위반을 덮을 수 있는 보고서를 만들어 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굶주림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면 이제까지만큼 버틸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오히려 경험을 하고나니 더욱 진절머리가 났고, 거기에 상황도 우습게 꼬여버렸다. 물론 그렇게 만든 데에는 자신의 책임이 막대했지만.
“전부 술 때문이야”
그러나, 인정하기 싫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손아귀에 잡힌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여자는 부정했다. 담당자에게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며 큰소리 친 것도, 퍼렁이 요괴에게 말도 안되는 허세를 피운 것도 자신이지만 여튼 그랬다.
도검남사들 사이의 갈등 짐작
ㅡ 단, 외부(인간)을 대하는 일에서는 단결되어, 행보의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무리로 보인다.
솔직히 별 내용 없을테니 이런 시도조차 소용없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는데….뭐라도 적어서 담당자에게 내밀면 어느 정도 커버를 쳐주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어쨌든 이 혼마루에 와서 생존한 건 자신이 유일하고, 이 혼마루는 인간이 없는 채로 2년 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 사이, 변화된 게 딱히 없다 해도 그 역시 나름의 정보인 데다 그를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정부에게는 가치가 있다. 무언가 변화가 있다면 그건 두말할 것도 없다. 단지 그 가치에 어느 정도의 무게가 매겨지는지가 관건이지만.
악귀화한 개체는 없는 것으로 추정
ㅡ 대면하지 못한 미카즈키 무네치카를 포함한 결과이며, 해당 개체를 제외할 경우 악귀화된 개체는 전무로 확정.
그러고보니, 아무리 자신이 본채에 간 적이 드물다고는 하지만 2달이 되어가도록 이 남사는 코빼기도 보이지가 않는다. 게다가 처음 이곳에 온 날 있었던 일은, 다시 생각해봐도 수상했다. 도검들의 거처 중 제일 안쪽이면서 빙 둘러싼 형태의 중앙에 자리한 방. 그곳에 도착해 인사말을 떼기도 전에 온갖 남사들이 몰려와 문 앞을 막아서더니, 말을 붙이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도록 너도 나도 아우성이었다. 어느 혼마루에서든 취급하는 방식에 정도차가 있을지 언정, 기본적으로 그를 웃어른 대하듯 하는 면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위화감이 들었다. 그 모습은 퍼렁이 요괴가 제 동생들을 보호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는데, 어디가 다르냐 묻는다면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 게 스스로도 답답했다.
‘뭐, 악귀화만 아니면 됐지.’
도검의 악귀화는 혼마루라는 영적 공간의 소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모든 도검이 악귀화 된 후는 여지없이 혼마루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우주에서 존재하던 위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암흑 배경이 되는 것과 다름없는 완벽한 무위라 칭할만 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의 존재였다. 혼마루에 인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악귀화는 진행을 멈추었다. 단지, 사니와가 아닌 인간을 이런 곳에 보내봤자 자각을 유지하는 남사가 됐든 악귀가 되어버린 존재이든 일반인이 살아남을리 없으니, 결과가 뻔할 뿐. 자신이 이곳에 와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도검남사가 악귀화 된다 해도 그녀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건 투입 전에도 확인이 끝난 지라,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닥 신경썼을 사안이 아니다. 자신이 나간 뒤의 일까지 신경 써 줄 의리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도검이 악귀화가 된 거라면? 2달이라는 시간동안 분명 전염자는 분명 나타났을 거다. 악귀화의 진행이 즉각적으로 멈추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그동안 변모한 남사는 없었다. 혹시 큰 부상을 당해 거동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로 사고가 옮겨졌다. 그렇다면 도검들의 그런 반응도 자연스럽다.
‘됐어, 치명상이시면 더더욱 내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해드려야겠지’
지금까지 저 도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가 좋은 꼴을 못봤다. 무언가를 바라고 했던 건 아니지만 지긋지긋하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만 해도 그 완벽한 예시였다. 그래, 무시가 상책이야.
‘근데…..뭔가를 놓친 거 같단 말이지’
톡,톡,톡,톡
펜으로 종이를 찍는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으으으음~”
그러다 어느샌가 보고서와 관계없이 찜찜함의 근원을 찾기 위한 사색에 빠져들었다. 점점 손아귀의 펜이 만들어내는 박자가 느려지다가 아예 제 몸이 있던 곳을 빠져나가 데구르르 굴러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선율은 느릴지 언정 끊기는 일 없이 여자의 손가락에서 이어져갔다.
톡….톡…..
‘그러고보면 이런 기분이 처음은 아니라 첫날부터 였던거 같은데.
……톡
‘처음에야 이곳이 예상보다 깔끔하다 싶어서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몇몇 군데가 집중적으로 파괴되어 있어서 그러려니 했는데….그게 안일한 거였나’
톡…..
이곳이 혼마루로 기능한 기간은 5년. 이후 이곳을 제압하기 위한 무력시도가 이루어진 것은 2년 정도. 2년을 채우기도 전에 이곳에는 사니와를 포함한 영능력자의 사망자 수만 3만여명에 도검남사의 수는 100만을 훌쩍 넘겼다. 신식무기가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는 아이디어로 영력 보유의 군대가 아닌 일반 무장용병을 투입했던 식의 소소한 인력도 대략 천 단위에는 이를 것이다. 그런 시간을 보낸 곳 치고는 의아할 정도로 깔끔한 건 있지만, 전투의 횟수가 꼭 파괴의 횟수에 비례한다는 건 아마추어의 발상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곳 남사들 대부분이 방에서 나오는 시간이 짧을지는 몰라도 이 역시 차이는 있었고, 일반적으로 ‘일상’하면 떠오르는 삶에 가까운 행태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파괴되었던 공간을 이들이 수리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생각해보니, 적이 아니라 같은 도검남사에게 사니와의 절반을 잃게 되다니, 웃기지도 않아.’
막판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사니와를 잃을 수 없다는 위기감에 남사만을 투입하는 전투를 치르기도 했지만, 그 결과로 도검들을 잃은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해 사니와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이들이 속출. 결과적으로 시간정부에 남은 사니와는 1/3 정도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정부의 판단이 어리석었다기에는 혼마루라는 특수성과 그 중에서도 이 곳에서 벌어지는 특이점들을 알고 있는 여자이기에 마냥 비판만 할 수 없었다. 그저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면 모를까. 그렇지만…..
“벌 받은 건 맞지”
날이 잘 선 칼날이 궤를 그리듯 시원스레 뱉어진 말. 그러나 단호한 음성과 다르게 얼굴은 쓴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구겨져갔다.
‘정작 벌 받아야하는 것들은 받지 않고 엉뚱한 사람들이 죽긴 했지만’
하아ㅡ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트롤….여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되뇌였다. 우울해지는 것 외에 남는 것 없는 상념의 입구에 들어서지 않기 위해.
지지지직ㅡ 지지이이이직ㅡ직!
“어이, 아직은 죽지 않았지?”
때마침 들려온 통신기 잡음에 이어 담당자의 인사말이 맞긴 한지 애매한 인사가 들려왔다.
“그렇게 됐네요~”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것 아니면 그 편린이 음성에 베어 나올까, 무엇이든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여자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짜식이 무슨 대답이 그래, 네 목숨 이야기인데”
여자는 먼저 시작한 게 누구더라는 말로 응수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인사말은 좋은 소식을 괜시리 감추고서 반응을 즐기려는 심보라는 걸 알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 그 기대를 깨 준다면 몰라도.
“뭐 큰 거 걸렸구나. 좌표 해결되기라도 한 거예요? 그럼 언제부터 정상작동 하는지 알려주고 얼른 가서 일이나 하시죠.”
“뭔소리? 오늘은 간만에 애 안 먹이고 통신기가 잘 연결되길래 테스트 겸 좌표반응 체크….”
“아, 너무 너무 배고프다! 그냥 확 나갈까~ 바뀐 게 없으면 이제 나가야지 뭐 어째, 우리 담당자님 깨지든 말든. 나 지금 게이트로 간다? 이거 무조건 야근각일텐데~ 평사원들이랑 다르게 부국장님은 한가하셔서 어쩌다 한번 이런 건 이벤트인 뭐 그런걸까나?”
“나 요즘 들어 궁금한 게….너 예전에 일할 때, 팀원들 사이에서 눈치 없다고 말들이 참 많았거든? 그래도 일적으로 제 몫은 다 하니까, 그런갑다 했는데….”
담당자에게서 여자의 전 직속상사이자 당시 과장이었던 시절의 일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후처리로 관련 업무가 있어 도운 뒤로 은근슬쩍 여자의 이름을 보고서에 올리고서 팀원인양 찾던 옆팀 팀장에게 대면으로 찾아가 ‘실수하셨다’며 이름 삭제를 요청. 거기에 해당팀에서 먼저 처리하지 않은 일들을 ‘내가 잘 몰라서 묻는건데’로 시작하며 하나하나 짚고서는 이걸 처리 안 하면 내가 후처리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문의해도 알 수 있는 게 없으니 ‘답변 못해줘도 이해해달라’며 마무리하는 바람에, 통보에 가까운 내용은 지워지고 옆 팀의 업무상태만 까발려졌던 일 같은 에피소드 몇가지와 그 외 자잘한 것들까지.
“솔직히...귀찮아서 관심 안 둔 것도 있고, 모르는 척 한 것도 있고 그렇죠. 다들 그러지 않나?”
“……근데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 중에서 ‘그건 몰랐다’는 말이 한번도 안 나온 거 같은데?”
“………”
“이 사기꾼아! 아오~ 이런 녀석을 가끔 눈치 없어서 사고치는 곰팅이로 본 내가 등신이지, 어쩐지 이상하더라!”
그때와 지금은 내가 처한 상황이 다르지 았느냐, 당장 우리 둘의 관계도 그때와는 다르다 같은 항변을 입도 뻥긋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대학 후배라고 선뜻 말도 걸어준 그를 ‘친해지면 귀찮을 거 같은 캐릭터’라는 생각에…. 상사여서 대하기 어렵다는 티를 은근슬쩍 그러나 일관되게 드러내서 결국 그냥저냥한 관계로 남았던 일이나, 신입에서 벗어나면서부터는 ‘이 정도 선에서는 분명 개입해서 편 들어줄 사람이다’라는 판단에 사고친 일들이 많은 지분을 차지한 것까지.
‘그래도 그것들은 눈치 못 채서 다행이야,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휴우~’
찔리는 일이 있다보니 40이 훌쩍 넘은 아저씨의 징징거림도 좀더 너그럽게, 오랜 시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라는 사과도 수십번이 선선히 나왔다. 결국 용건을 듣게 된 건, 통신기가 연결되고 한시간이 소요되고 나서였다.
“그러니까 보조게이트를 정확하게 열 수는 있는데….변칙적인 방법이라 딱 1회만 사용 가능하다, 이 말이죠?”
“응.”
“….보조게이트가 한번에…. 도시락 정도면 최대가 3-4개 정도 배달 가능이지 않아? 그럼 2-3일만 밥 먹고서 그 두배 되는 시간은 굶으면서 버텨라, 그 말 하는 거?”
그래서 어쩌다 ‘점보’나 ‘특’이 이름 앞에 붙으면서 그 이름값을 하는 크기의 도시락과 넉넉한 용량의 음료수를 함께 시키면 그 이상은 한 번에 받지 못해, 나눠서 배달을 받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최소 일주일 쫄쫄 굶는 거보단 낫잖아! 어떻게든 버틸 테니까 허가부터 받으라 하신 건, 우리 무서운 후배님 아니셨어요?”
치사하게…. 그냥 바로 게이트로 나오라고 한 건 누구셨는데? 담당자를 삐지게 만드는 건 역시 피해야 하는구나. 아니, 애초에 전 상사가 담당자가 된 것부터 피곤한 일이야. 아까부터 뚱한 단답 아니면 비꼬기인 이유를 이해 못할 바 아니고, 통신기 너머의 상대가 옹졸한 성정이 아닐 뿐더러 서운해서 라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아니, 그래….좀 놀랄 수는 있긴 한데….나 원래 남한테 관심없는 사람은 맞다고.’
주변 돌아가는 일이나 타인에 대해 알면서도 별 신경 안 쓰는 점을 눈치 없음으로 퉁치고서 아는게 없으리라 제멋대로 단정짓는 사람들이 많은 것까지 자신의 책임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억울한 점도 있으니 정상참작 가능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거기다 슬슬 상황이 부부싸움으로 삐진 남편을 대하는 아내가 된 듯 하다는 심술 섞인 감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혼은 커녕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본 적 없는 미혼의 여자가 이럴 때는 그 아내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 리 없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말이다.
“네,네,네. 무조건 맞습니다~ 하루에 한입만 먹으면서 버티면 며칠이나 먹을 수 있는지 도전 챌린지라도 하면서 버텨 볼게요.”
이제는 한계다. 쫄쫄 굶는 거보단 낫지 않냐는 말에 좀 울컥하기도 하고. 언제나와 다름없는 깐죽거림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데 뭐 어쩔거야?
“상황 잘 알았고요. 이건 나중 이야기이긴 한데…. 이번에 나가게 되든 보조 게이트가 정상작동 하건 간에 상비약이랑 항생제 좀 넉넉히 준비 해줘요.”
“뭐? 너 어디 다쳤냐!”
분노인지 추궁인지 의문인지 혹은 그 모두인가 싶은 외침이 즉각 들려왔다. 이미 앞에 있었던 서운함은 순식간에 뒤로 젖혀졌다는 걸 알 수 있는 그런 음색이었다. 우습게도 여자 역시 거기에 슬슬 차오르려던 심통이 녹아내렸다.
“그런 거 아니야. 그래도 이번 일 겪고 나니, 비상사태 정도는 대비하자 싶기도 하고.”
“그래. 부적이랑 옷가지는 줬으니 나머지는 혼마루에서 알아서 갖다 쓰라는 미친 것들이 문제였지만….너도 만만치 않긴 했지.”
“그런가, 그래도 그때에는 정말로 죽지 않을까 의문이 있었으니까. 온갖 임상 다 모았다 해도…그렇잖아? 여기는 다른 혼마루에 비해 예외가 많기도 하니까요.”
죽을지도 모르는데 뭣 하러 바리바리 싸가겠냐는 말이나 다름없다는 걸 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상대 역시도 여자가 당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모르지 않았겠지만 굳이 상기시킬 필요 없는 이야기였다. 담당자의 침묵이 이어질 기색에 여자는 얼른 덧붙였다.
“그래도 나중에 가져오고 싶은 거 다 말해서 받았잖아. 우리 능력있는 담당자님 덕분에 지급품 상한액이 그렇게나 올라가고 말야~”
“……..임상은 무슨, 제길”
여자는 난감했다. 조심한답시고 감정이 섞이지 않은 표현을 쓴 것조차 담당자의 심기를 거슬렸다니. 아니, 어쩌면 그조차도 일종의 감추기일지 모른다. 감정을 주체 못해 쏟아내면서도, 적나라하게 보이지는 않으려 정작 화나게 한 상대가 아니라 그 옆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그런 것처럼.
“맞다, 저번에 구해달라 한 오일이름이 뭐였지? 별별 종류가 많아보니, 들어도 들어도 안 외워지네.”
다행히 화제전환을 당사자 쪽에서 적절히 꺼낸 데다 어색함이 감돌기 전에 쳐내서 타이밍도 굿. 여자는 질문에 대한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흐름을 깨지 않기 위해 냉큼 대답했다. 이곳에 오고 난 뒤, 꼬박꼬박 요청하면서 채워 나가는 컬렉션에 아직 포함되지 않은 오일 중 비싼 걸 부르는 걸로.
“오스만투스. 좀 적어요, 적어!”
“아니….누가 안 하는 줄 알아. 근데 어쩌다 메모 한번 잃어버리면… 오일 이름도 길어, 브랜드명도 길어 가지고, 원….”
분위기를 잇기 위해 괜시리 놓은 핀잔이었는데도 풀이 죽어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게, 역시 이 양반 오늘 퍽이나 감정적이야 싶었다. 그리고 이는 앞선 대화에서 과거의 기억과 죄책감이 피어났다는 확신을 갖기에도 충분했다.
ㅡ 미안하다, 미안….. 미안해…..내가 널…. 여기로….
선배의 숨죽인 울음 섞인 음성이 떠올랐다. 꽤나 선명했고, 동시에 가슴이 꽉 조이며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때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정작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건 유일하다시피, 자신과 다른 이들까지 모두에게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모든 기억이 온전한 그런 상태였다면…. 자신은 이곳에 올 수 있었을까? 처음 대답은 ‘아니오’ 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예’로 바뀔 여지도 있었다. 시체가 아닌 이상, 자신을 이곳에 던져 놓기만 하면 정부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이라는 점에서.
사고의 흐름이 그곳에 닿자, 되려 차분해지면서 숨쉬기 편해졌다. 마침 눈에 들어온 쓰다 만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된 김에, 이 내용으로 정부와 협상 가능할지 자문이라도 구해볼 요량이었다. 이번 문제가 잘 해결된다 하더라도, 차후를 위한 대비 하나 정도는 만들어 둬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쳇, 향 좋은 거 외에 쓸 일도 없는 기름 같은걸 뭐 그리 모으는 거야.”
볼멘 소리로 투덜거리는 이에게 친히 아로마 테라피라는 개념과 그 효능을 구구절절 말하는 것보다 딱 한마디면 되겠지 싶었다.
“그래도 굶을 때, 그냥 물 먹는 것보다 오일 몇 방울 넣으니까 배가 더 차는 건 있던데. 그리고 비타민 보충은 확실히 됐을 걸?”
끙 ㅡ 신음 같은 소리가 잠깐 나더니 말문이 막혔는지 침묵이었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확인한 여자는 쿡쿡 웃었다. 심신 안정, 소독 효과, 질병의 치료 보조제, 거기에 상처 치료까지….오일에 따라서 그 효능과 쓰임새는 다양했다. 그 많은 사용법을 제치고 이렇게 쓰게 된 데에는 여자도 기막히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런 내용을 입 밖으로 꺼내려 하던 찰나,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먼저 이행하려던 행동의 반응 속도와 머리 속 사고가 정리될 틈조차 없어 충돌을 일으킬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아아아앗!”
그 결과는 비명이었다. 입은 뒤늦게 막았지만 한발 늦었다 해서 허무하지도, 쓸모없는 몸짓도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보지 않았다면 코웃음 쳤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일. 그 압도적인 사실만으로 입을 막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사실 통신기 너머에서 다급한 외침이 나오기도 전에, 여자는 이미 반쯤은 말을 뱉고 말았다. 단지 본인도 모르게 더듬더듬 흘러나온 말은 그 소리가 너무 미약했던 데다, 손으로 가로막혀서 상대 쪽에서 듣지 못했을 뿐.
“버…벌레,벌레! 선배, 나중에 다시 통화해!”
진짜로 놀란 상태여서일까 정신없는 와중에도 연기가 퍽 자연스러웠다는 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통신기를 끊고서 여자는 무릎을 얼굴에 묻은 채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과 도검남사에 대한 원리들을. 그저 상황정리일 뿐인데도, 마주친 현실을 부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 지 알 수가 없었다.
이곳에 전투인원들을 보낼 당시, 언제나 상황을 볼 수 있는 영상장비들이 지급됐었다. 전투를 위한 실시간용도 있었고, 차후 기록보존과 연구를 위한 녹화용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공간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양, 대부분의 장비조차 이곳에 들어서는 즉시 무용지물이 되었다. 제 목적은 커녕 약간의 구실이라도 한 것은 수만 개 중, 단 3개. 그 중 하나는 음성만이 존재할 정도였다.
2개의 영상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죽은 이의 몸에 달려 있었는지 한 곳만 응시하는 시점이라든가, 이곳의 몇몇 남사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내용 같은 것들. 중요한 건, 이곳의 남사들이 몇 명의 인간을 산 채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부가적인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주 목적은 뻔했다. 연도 높은 남사들을 몇십 대 1로 상대하면서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리는 힘의 소유자들도 전투를 치르면서 상처를 입었으니까.
그러면, 음성만을 남긴 3번째 영상장비에서 나온 내용은 무엇이었나.
처음부터 영상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음성이라도 남겨야 하나? 하는 대화가 잠시 이어지다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모두가 상처를 치료한 상태였으며 목적을 달성한 탓인지 인간의 흔적은 시체만 찾을 수 있었다’는 상황보고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녹음을 시작한 음성은, 그 뒤에는 싸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내용만 한참을 이어지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전멸. 하지만, 여기 녀석들 대부분이 치명상을 입었으니 다음 전투로 끝을 낼 수 있을 거다. 자신도 한계가 온 것 같으니 이 장비만 보낸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음성을 근거로 출진했던 이들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투를 마지막으로 정부는 결국 이 곳의 폐쇄를 결정했다.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도검들의 악귀화와 변화 과정에는 차이가 있지만 같은 결과의…..혼마루의 소멸화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이 공간에 인간이 없다는 것과 동의어였다. 비록 에너지의 크기 자체는 범접할 수 없더라도, 법칙의 아래에서 순리대로 변화는 이뤄져갔다. 우연히 발견된 문제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사라졌을 공간이었다.
‘그런데 왜……’
마지막 전투가 치러지기 훨씬 전부터, 이미 정부에서 보낸 전투요원들은 모두가 도검남사 뿐이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최소한 마지막 영상장비가 확보되기 전까지는 붙잡혔던 이들이 생존하고 있으리라 추정했다. 그게 당연했다.
도검남사를 치료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이니까.
‘….어떻게 다친 도검이 없는 거냐고.’
보고서로 올릴 만한 건수가 발견되었는데도 달갑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 도착했을 때보다도 큰 불안감만 엄습할 뿐이었다. 혼란에 그저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럴 틈조차 여자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ㅡ 이봐.
처음 경험했다면, 아무리 선명한 소리라 해도 자신의 착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영력 보유자라 분류될 이가 아님에도 이 현상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 정부에서 일했을 당시에도 몇 번 경험했던 일이었으니까. 분명 영력으로 걸어오는 대화다.
자신이 누구인지 대화를 건 상대는 밝히지 않았지만, 여자는 알 수 있었다. 한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 목소리였으니까. 낮지만 부드럽게, 은은한듯 하다 갑자기 휘감아 버린다는 느낌을 주는 음성. 지금도 분명 딱딱하게 말하려는 걸 느낄 수 있는 와중에도 맴돈다는 인상을 받아버린다. 충분히, 아니 과하게 유혹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극도로 예민한 상태인 여자에게는 오히려 그 점이 갈 곳을 헤매던 불안감을 분노로 바꾸는 촉매제가 되었다.
ㅡ 뭐 하는 거야, 지금
지면에 말뚝이라도 박듯 한음 한음이 딱딱한 음성. 여자의 거부하는 기색이 역력한 탓일까. 상대에게서 답이 없었다. 굳이 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으니, 여자는 잘 준비를 하려고 일어섰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 말자, 머리가 터질 거 같아.
ㅡ 우선은 들어가게 해줄 수 있을까
왜? 너희들 잘하는 거 있잖아. 문 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부터 시작 해야지, 그러다 질리면 그 잘난 검을 문으로 날려야지 않아? 아, 그거구나~ 문 여는 순간, 나한테 날리는 거.
떠오른 생각을 대화의 장에 던지지 않은 건, 어차피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나갈 마음이 없어서였다. 대화 시도 자체가 위협은 아니니 처음의 시도부터 차단되지는 않았다 해도 별채에 걸린 결계는 거의 신역급에 가까웠기에, 그녀가 맘만 먹으면 아무리 영력이 없는 수준의 신세라 해도 이 대화는 차단이 가능했다. 그 전에 대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한마디 정도 해주는 친절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대였다. 꺼지라는 말로 해주겠지만.
이런 식의 괴롭힘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남사라는 생각이 순간 스쳤지만, 괴롭히는 방법을 바꿨다면 그만이고, 아니면 지금까지와 다른 아이디어를 시도하는지 알게 뭔가. 어차피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상대라는 건 명백하다.
‘나 자리에 누웠어, 이 자식아. 절대 문 안 열어준다!’
무엇보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이곳에서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에 박히는 와중이라, 문을 연다는 자체에 부담감이 일었다. 하지만 대화가 더 이상 전달되지 않게 차단하려던 찰나, 아슬아슬하게 당도한 음성에 여자는 결국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 버렸다.
ㅡ 계약을 하고 싶어.
여자가 지내는 방은 내실을 막는 문과 외부를 막는 장지문이 조그만 협탁 정도의 폭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하는 구조였다. 안 그래도 긴장되는 와중에 열어야 하는 문이 2개라는 게 퍽이나 거슬렸다. 그렇지만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조급함에 벌컥 열어버리는 일 없이 여유로워 보일 정도로 천천히 장지문을 열 수 있었다. 실상은 정말 대화를 건 당사자가 앞에 있을까 하는 의구심 떄문이었더라도. 그러나, 열린 문 사이로 검이 날라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공간을 바람만이 지나가는 일도 없었다.
방문자는 예상대로였다. 저지 차림이지만 허리춤에 비스듬히 검을 맨 그는 대청 위에도 올라오지 않은 채였다. 예의 차원을 떠나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츠쿠모가미는 결계가 쳐진 경계선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올 수 없고,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반대로 그가 육성으로 말을 걸었다 해도 여자 쪽에서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와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왜 그런 방법으로 말을 걸었는지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었다. 결계의 공간은 여자의 의지가 반영되는 곳이다. 그래서 여자는 입을 열었다.
“계약이라니, 무슨 말이야?”
의문을 굳이 감출 생각은 없었기에, 그의 이름을 이어서 부르는 것으로 채근했다.
“쇼쿠다이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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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 줄 알았는데 안 올렸더라. 전에 3편 관련글에 댓글 단거 구라친 거 되어버려 ㅈㅅ
웃효wwww기다렸다구
사니짱 기엽네오...흥미진진하게 봤읍니다...다음편도 기대함미다....
쿨한 사니짱과 은근히 사이좋은 선배가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