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인이 있을 당시에 둘러본 적은 있는 곳이었다. 별채라고는 하지만 창고로 이용되던 곳. 지금은 제법 방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단지 옷장으로 쓴다 짐작되는 장 하나와 서탁만이 보이는 공간은 사람이 생활하기는 커녕 집무실이라 해도 황량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장지문의 반절이 남았을 때까지는 그랬다. 가려져 있던 나머지 공간이 드러나자 성인의 허리춤까지 올 만한 아담한 선반장 하나가 다소곳 하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벽면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것 하나만으로 방의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그 이유가 워낙 썰렁한 곳에서 자리잡은 만큼 반전을 주는 덕분인지 아니면 요란하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장식효과가 있어서 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선반마다 갈색병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채워져 있었고, 전부는 아닐지라도 꽤 많은 병에는 이런저런 꽃이 줄에 꿰어진 채 병에 둘러져 있는 모양새로 장식되어, 통일감 안에서도 다채로움이 있었다. 몇몇 선반의 끝 쪽에는 향수병처럼 보이는 투명한 크리스털류도 있었는데 과하게 반짝 거리기보다는 은은한 빛이 감싸는 류의 것이라 위화감 없이 스며들면서 화려함을 가미하고 있었다.
‘센스는 나쁘지 않은 거 같네’
그렇게 평가를 내리고 나서도 그쪽을 구경하듯 보고 있었다는 걸 쇼쿠다이리키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방의 주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선 계약 내용부터 말해줘”
서탁을 사이에 두고 앉자마자 꺼낸 음성에 시선을 돌리고, 앉으라는 눈빛을 마주한 쇼쿠다이키리는 덤덤히 맞은 편으로 자리를 잡았다.
바로 본론인가…..하기야 여자와 자신은 시덥지 않은 이야기나 꺼낼 사이가 아니었고, 면을 차리는 서두부터 천천히 이야기 나누기에는 적합한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다급하고 간절하다는 인상을 주기에는 적합하겠지 라는 판단 정도는 내렸었지만. 그리고 아주 조금은…. 이번 일이 뭐가 됐든 빨리 결론이 났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그래,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온 건 미안. 빨리 끝내도록 할게”
그렇게 말하는 쇼쿠다이키리의 얼굴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가 싶더니 바로 떠오른 것은, 물의를 일으켜 사과 회견을 열면서도 표정은 당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치인의 얼굴이었다. 그래도 비꼬는 거라도 너희 입에서 그런 말 나오는 게 어디냐 납득이 됐다.
“앞으로 주방에 오지 않는 것, 그게 내 요구야.”
“싫어”
여자의 즉답에 멈칫하거나 곤란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오히려 그에 못지 않게 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식사는 내가 챙겨주도록 할게.”
“왜?”
여자가 주방에 오는 걸 꺼린 남사들이 결국 합의하에 정한 일이라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이들의 사정을 모른다 해도 속 편한 결론이었다. 여자는 바로 몇시간 전에 퍼렁이 요괴가 문제의 발언을 했을 때, 그 주변의 다른 요괴들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보고 온 참이었으니까. 이 눈앞의 요괴만 제외하면 공감하는 기운이 흘러 들어온다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이들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우연을 생각하기 보다는 그 자리에 없는 이들도 딱 그만큼의 비율로 찬성할 거라 보는게 합리적이다.
“이건 내 독단으로 진행하는 거야, 합의된 게 아니란 거지. 내가 너에게 식사를 가져다 주는 것도 공개적으로 하지는 못해.”
아하, 그런거야? 이제야 말이 되네. 그러니까 이곳의 요괴들이 당장 주방에 무슨 일을 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이 다시 주방에 모습을 보이면 그날로 확실히 끝을 맞이할 거고 눈앞의 요괴는 그걸 원치 않는거다. 이런 제안에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게 아닐지 의심을 할 법도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데다 2달이라는 시간동안 이제 와서 그녀를 해하기 위해 시도할 새로운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한 탓에 여자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거기에 주방에서 이 요괴가 지었던, 착각이었나 했지만 잘못 본 게 아니구나 싶은 표정이 새삼 떠올랐다. 그 탓에 점점 마음이 약해지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비록 그 마음을 ‘위험과는 거리도 있고, 대단할 거 없는 내용의 제안이잖아’ 라는 생각으로 애써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밥을 가져다 줄 테니 앞으로 주방에 출입하지 말라는 그런 계약인 거야?”
“원하는 다른 게 있다면 제시해봐도 좋고. 하지만 지금 제일 필요한 건 식사가 아닐까”
“지금은…..말이지. 근데 꼭 너희 주방에 가는 게 아니더라도, 다른 선택지가 전혀 없는 건 아니거든. 고르기 싫어서 그 방법을 강행했을 뿐이지.”
“그런가. 그래도 내가 제시하는 건 변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방에 오지 않는다는 거거든.”
그러니까 이번 일이 마무리 되기까지가 아니라, 영구적인 출입금지란 거였구나. 그렇다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질 수도. 이번 일을 봐도 그렇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도 식사가 제공된다는 건 괜찮은 이점이긴 했다. 하지만 이건 그만큼 제안에 관해 확인해야할 것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무기한적인 출입금지를 조건으로 내 식사를 교환한다는 건데 이건 성립되기도 힘들지만,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애초에 내가 주방을 찾아갔다가 거기가 박살이 나는 건, 당신이 나에게 식사를 가져다 주는 게 밝혀져도 마찬가지의 결과일 거잖아? 그렇게 주방이 없어지면 결국 내 식사도 그대로 끝인 거고. 그때 가서도 당신이 성실하게 내 식사를 가져다 줄 거라는 생각은 안 들거든. 애초에 계약을 맺은 공간이 사라졌으니 저절로 계약종료다 뱉는 게 자연스럽지.”
“부정은 않겠어. 사실 지금도 그냥 없어지도록 하는게 더 나은 선택 아닐까 하는 고민도 있으니까.”
참나, 저런 대답에 오히려 신뢰가 쌓이는 상황이라니. 동시에 이쯤 되고 나니 ‘그러면서 왜?’라는 순수한 호기심도 피어났다.
“그래도 어찌됐든 아직은 존재하는 공간이야. 그리고 그 시간만큼은…..”
네가 그곳에 있는 광경을 보고싶지 않다, 이번처럼 그곳이 골치거리 마냥 전락하고 취급되는 것도 싫다라는 말들을 쇼쿠다이키리는 삼켰다. 특별히 눈치를 본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이런 생각들을 내보이는 게 꺼려진 탓이었다. 눈앞의 인간을 꾀기 위해 접근한다는 명목으로 찾아왔지만, 실상은 지금까지의 말들 모두가 제 속내인 탓일 거다.
“당장은 아니더라도….며칠 안으로 다른 이들을 설득하도록 하겠어, 그러면 불만 없을까?”
“애초에 불만 있다는 말을 한 적은 없는데”
“며칠이라고 하는 애매한 말도 계약에는 적합하진 않겠지. 기간은 3일, 그동안 너에게 식사를 가져다주고 주방을 없애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도록 하겠어. 그때까지는 서로 가계약 상태라고 보면 되겠지. 최대한 조심하겠지만 혹시라도 그 안에 들킨다면 가계약 기간동안만 식사를 못 가져준다 해도 참아줘. 이후 결과에 따라서 계약이 진행인지 불발인지 정하는 건 당연한 거고”
여자의 딴지에는 일절 대꾸없이 제 할 말만 늘어놓고 있지만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대화라는 점에서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앞서서 쇼쿠다이키리의 말이 이어지지 않던 침묵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공백의 시간을 그득히 채운 무거운 공기에 두려움까지는 아닐지라도 마음이 싱숭생숭 했던 탓에 투덜거림이나 불만은 커녕 감사에 비슷한 마음마저 일어났다.
“잠깐 어떻게 할지 생각해봐도 되지?”
상대의 심상한 눈빛에 여자는 양반다리를 하고 있던 자세에서 한쪽 무릎을 들어 그 위에 턱을 괴고서 본격적으로 생각에 빠졌다. 고민한다는 티를 내보인다 해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시원스럽게 거절하지 못할 거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 요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와 별개로 자신에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잖은가. 오히려 상대측에서는 초조함에 이렇게 찾아온 이가 있을 정도니 굳이 따지자면 우위를 점한 건 자신이다라는 생각이었다.
‘잠깐, 그러면 내가 마지막에 허세부린 게 먹히긴 했다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물어보면 그때부터 상대가 의심을 품을 수 있다는 머리 속 외침들을 가볍게 무시하고서 여자는 입을 열었다.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고 있는 걸 참아가면서.
“크흠…..이치고 히토후리가 절대 허락치 않을 거 같던데? 그 노….남사를 생각하면 그냥 부엌에 힘을 발휘하는 게 내 입장에서는 나은 방법 같기도 하거든? ”
그 놈이라고 부를 뻔한 걸 직전에 고쳐 말하고서 눈치를 살핀 건 호칭문제만 아니라, 그 퍼렁이 요괴가 어떤 상태인지 대답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탓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감은 아직 입을 열기도 전에 내보이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도자기에 모습을 드러낸 선명한 실금마냥 깨져갔고.
“그 힘은 그렇게 쓸 수 없을 텐데?”
와장창! 형태만 질문이지 확언인 말에 여자가 품었던 기대감은 기어코 파열로 끝났다. 그 여파로 빵빵하던 풍선이 터진 마냥 괴상한 비명으로 ‘엑’ 소리까지 뱉고 말았다. 고개도 절로 떨궈졌다.
뭐야, 비록 힘을 깨지는 못해도 신님이셔서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는 거냐? 아니면 이성을 찾고 나니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나? 그래도 그 말을 뱉었을 때 다른 요괴들은 믿는 눈치던데, 그 퍼렁이도….잠깐?
여자가 고개를 퍼뜩 들었을 때는 상황종료였다. 이제까지 이곳에서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싶을 정도로 산뜻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떠보길 잘했네”
세상만사에는 허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력이나 법칙에 엄격한 신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허점을 이용해 이즈미노카미는 인간이 세워놓은 침입불가 영역에 들어와 있었다. 신들끼리는 침범하지 않도록 약속이 되어있는 신역. 그곳의 법칙을 몇 가지 이용해 재현한 공간이기에 침범할 수 없었던 곳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정직하게 이즈미노카미 자신도 이 상황이 얼떨떨하기는 했다. 수상해서 무작정 뒤를 밟기는 했지만, 막상 별채에 가까워질수록 저곳에는 일정거리 이상 발도 디디지 못했던 게 떠오른 것이다. 가끔은 낮에 대청마루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게 최대였고, 그조차 어쩌다 한번이었다. 막상 들어간다 해도 그 공간을 훼손하는 건 역시 불가능. 일반적으로는 이 육체 안에서는 신력을 운용해야 하더라도, 맘만 먹으면 나무바닥 정도야 훼손하는 건 식은 죽 먹기.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저 능력이 정말로 편리하게 운용되는구나 싶어졌는데, 그건 대청에 들어서게 되자마자 숨겨왔던 뱀 무더기를 풀었을 때였다.
여기서 이걸 풀면 최소한 몇 마리는 가옥 틈새에 몸을 숨길 거고, 그러면 저 여자는 불안에 떨겠지 싶었다. 단도들에게서 언젠가 뱀을 던져봤더니 역시나 보이지 않는 막에 튕겨졌지만, 여자가 움찔하긴 하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던 터였다.
던지는 게 아니라 이런 방법도 있지! 직접적으로 여자에게 해를 가한 게 아닌 데다, 이미 들어와있는 공간이니 먹히지 않을까 했었다. 그러나 그 무더기를 휘이 풀어놓는 제 손 앞에서, 딱 손가락 한마디 거리에서 이리저리 튕겨지는듯 혹은 찌그러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저희끼리 엉키는가 싶더니, 그대로 덩어리가 되어 제 얼굴에 직격했다.
흉물스럽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 여자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 수확이라며 나름 위안을 삼았지만, 본채로 부리나케 돌아가서 그 놈들이 제 옷속으로 들어가 기어다니는 걸 기겁하는 호리카와와 함께 떼어내느라 고생했던 기억은 끔직했다. 야스사다랑 키요미츠 녀석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중간에 난입해서 누가 더 많이 베서 떼어내는지 내기라며 덤벼들었던 것까지도.
‘그러고보니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 자식들…. 그때의 빚은 꼭 갚아주마!’
그렇게 토막난 뱀 사체들이 방안 여기저기에 널린 걸 묵묵히 주워담으며 정리하는가 싶더니, 당장 카네상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이것들을 두 사람이 잠들었을 때 전부 입 안으로 넣어주겠다는 호리카와의 말에 사과는 받았다 해도 별개로 말이다.
여튼 오늘은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뭣보다 다른 남사들에게 들었던 ‘깨닫는 순간’을 이때 경험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영력이나 신기, 이 세계의 힘과 관련된 법칙을 저절로 알게 될 때가 있다는 걸 말로만 들어왔는데…..공간의 주인인 여자가 쇼쿠다이키리의 방문을 허락했을 때 생긴 찰나의 틈이 보이면서 ‘이거구나’ 싶었다.
그동안 제 의지로는 들어갈 수 없었던 곳에 저 틈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게, 절로 떠올랐다. 전부터 알고 있었던 양 곧 닫히니까 서둘러야 한다는 것도, 점점 작아지는 크기도 선명히 보였다. 신역의 법칙을 이용할 뿐이지 결국 인간이 만든 공간인 데다 그 힘의 바탕이 되는 여자의 영력이 낮아서 생긴 허점이라는 건, 짐작이긴 했지만 이 또한 흘러 들어오는 깨달음 속에서 어른과 아이가 내리치는 목검의 힘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명확한 전제하에 내린 것이었다.
이는 공용주택의 비밀번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누군가 들어갈 때 뒤이어 따라 들어간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영력이 뛰어난 이였다면 결계를 펼친 무구의 힘과 합쳐져 애초에 이 정도까지 틈은 발생하지 않거나, 설사 허락치 않은 침입자를 잠시 들인다 해도 곧바로 튕겨내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 없는 공간과 다름없는 상태로 벌어진 틈새는, 여자의 미약한 영력과 미숙한 운용 탓에 결계의 주인보다 큰 힘을 가진 이를 거부하기는 커녕 그 공간을 유지, 독립적인 영역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침범할 수 있는 건 틈새뿐인 한계가 있었고, 이즈미노카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결계를 여기서부터 깨는 시도를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지금은 저 둘의 대화가 먼저라는 생각에 관뒀다. 실패하면 괜시리 제가 여기 숨어 있는 걸 들킬 소지가 없는 게 아닌 탓이었다. 실제로도 결계가 제 힘을 발휘하지 않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사방으로 서너 발자국 정도로 협소했다. 나머지는 전부 결계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의미였고 애초에 그 범위도 훤히 보였다. 어차피 결계를 깨는 건 저 둘의 대화가 모두 끝나 어떤 수작인지 파악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 모양새가 갇혀 있는 꼴인 건 맘에 안 들지만, 지금 이 모습을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이런 꼴인데 틈새공간의 위치마저 애매해서 저 둘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면 그야말로 완벽히 시간낭비였을거다. 맘을 달래며 이즈미노카미는 벽에 기대어 서서는 그 너머의 대화를 듣는 것에 집중했다.
비록 쇼쿠다이키리 쪽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게 고작이었지만, 여자 쪽이 벽에 더 가까운 건지 목소리가 커서일지는 알 수 없어도, 결과적으로 여자의 말은 대부분이 잘 들린데다, 그것만으로도 대화내용을 파악하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괴상한 외침이 들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쿠니히로, 네 녀석은 저렇게 우아함과 거리가 먼 여자한테 내가 관심을 줄 거라고…..’
새삼 억울함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인 이즈미노카미였다.
“…….아직도 계약할 마음이 있어?”
“받아들인다는 건가?”
아니, 말 그대로 질문인데. 거짓말이 막 들통난 사람과 계약이라니.
들통난 순간 ‘역시 거짓말이었군’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알았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 계약 운운하며 방문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깊게 숙여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이대로 계속 있다 보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겠지. 그 전후로 비웃거나 경멸하는 말을 뱉어 주시고. 오늘만큼은 토달지 않을 테니까, 아니 애초에 반박하는 일이 드물긴 하지만, 오늘은 마음속 깊이 순순히 받아 들일게. 그러니까 제발 나가줘! 속으로 간절히 외쳤지만,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싶을 정도로 고요함만 이어졌고. 결국 여자는 고개를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흐름이 무엇이었나 싶을 정도로, 눈앞의 남사는 그저 자신에게 확인하는 눈빛만 보내고 있는 그런 상황. 그의 분위기에서 용건이나 태도가 바뀔 기색은 없었다.
‘차라리 계속 웃고 있으면, 얄미워서 열 받으니까 파토! 이렇게라도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슬슬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건 허세를 들켜 민망해서만은 아니라 약간의 미안함이 피어난 탓이었다. 애초에 눈앞의 이를 포함한 요괴들 탓에 벌어진 일이다, 살고 봐야 하잖아, 저쪽에서 먼저 잘못했으니까. 이런 감정을 품을 필요 없는 이유들은 넘치고 오히려 불합리할 정도의 마음이지만 그랬다. 그저 하나만을 바라보는 바램 앞에서 이유 같은 건 무의미해지고 마는 거다.
‘그래, 어차피 주린 배 움켜쥐고 지내겠거니 했잖아. 산 사람 소원 하나….정확히는 신? 요괴? 여튼 남사 소원 하나 들어주는 셈 치자.’
그러나 마음을 정하고 나서도 못내 찝찝해서 선뜻 수락의 말은 나오지가 않다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곳의 요괴들을 3일만에 설득한다는 걸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물론 자신이 이곳의 사정을 아는 건 없지만, 이번의 일로 이곳에서 쇼쿠다이키리에 대한 취급이 어떤지는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자신에 대한 적의가 넘치고 다른 방법이 없다 생각해도, 동료에 대한 존중이 있다면 주방에 대해서 ‘그러면 태워야지 어쩌겠어’ 가 아니라 ‘너 따위가 이곳을 어떻게 한다고?’ 같은 반응이 먼저 나오는 게 맞지 않나.
어쩌면 이 점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까칠하게 대꾸하고 의심을 모두 지울 수 없으면서도 대화 내내 ‘나 긴장감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싶었던 것도. 미친 건가 싶지만 자신을 죽이려 했고 앞으로도 그럴 상대에게 되려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느낀 것도. 모두 이래서였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을 순순히 인정하는 건 또 싫었다. 왠지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괜시리 막 떠오르고….. 결국 여자는 일련의 사고를 거쳐 나름의 절충안을 택했다.
“알았어, 앞으로 주방에는 가지 않도록 할게”
“그럼 식사는 내일부터…..”
“그렇지만 조건은 다른 거야”
아주 잠시였지만, 이곳에서 무수히 봐온 터라 익숙한 비웃음이 쇼쿠다이키리의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진 걸 여자는 놓치지 않았다. 훗날 생각하면 조건으로 몸을 원한다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당시에는 요괴들의 웃는 낯에 일일이 반응하던 시기가 한참 지난터라 뭐가 또 그렇게 아니꼬우십니까 정도의 감상만 남을 뿐이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우리 둘 뿐 아니라 이곳 남사들 모두에게 내가 주방에 갈 일이 없다는 걸 직접 각인시킨다면…당신의 맘이 더 편할까?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는 바를 좀더 충족시킬 수 있냐는 거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것까지 말해주긴 좀 그렇고. 우리 사이가 그리 신뢰 넘치는 관계는 아니잖아. 아, 그렇지만 폭력행사의 종류는….아니니까 걱정마시고.”
“그렇네, 하지도 못하는 일을 허풍치며 위협하는 사람하고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싶지만.”
“…..그러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지 그래? 믿거나 말거나 난 이런 계약 안해도 그만이야. 서로 이익이 된다면 나쁠 건 없겠지 싶어서 조건을 바꾸려 한 거고”
대꾸는 없었지만 더 이상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부터 내걸 제안도 상대가 받아들일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좋아. 굳이 확인할 거 없이 당신이 할지 안 할지 정해도 상관없을 테니까. 내 제안은 이거야.
내가 당신뿐 아니라 다른 남사들도 앞으로 주방에 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도록 할게, 물론 실제로도 내가 주방에 가지 않는 것도 포함이야. 대신, 내가 조건을 완수해내면 당신은…..”
어쨌든 자신이 헤집어 놓은 결과로 눈앞의 남사가 피해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앞으로의 불안감까지 제거해 줄게. 대신 내가 느낀 당신의 절박함….그만큼의 간절함이 진짜일지는 확인 해야겠어.
“출진을 해줘, 한번이면 되니까”
차라리 ‘앞으로 출진 해달라’는 말이었다면 그 의미를 깨닫는 것도, 결정도 쉬웠을 거다. 하지만 도무지 이건…. 의문은 가득했지만 의심은 끝내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나마 다른 경우였다면 단도의 경우가 있겠다. 제 편이 되어줄 도검남사의 현현을 원하지만 자원에 함부로 손을 댈 수도, 단도실에 다가가기도 힘든 처지일 경우에 간절한 첫발을 내딛기 위한 몸부림 말이다. 하지만 이 혼마루에는 자원이 넘쳐났고 여자가 원한다면 그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혼란스러움에 무엇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와중에, 여자는 무슨 생각인지 안다는 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출진할 때에는 정부의 실험장비를 착용한 상태에서 진행하는 거고”
그걸로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듯 조심스럽게 변한 낯빛도 가증스러웠다. 물론 정상적인 혼마루에서라면 잘못될 수 있는 위험한 종류의 장비가 지급될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의 남사들에게 실행할 수만 있다면 어떤 종류의 장비가 시도될지 뻔했다. 어쩌면 실험장비라는 명목의 살상 목적일 수도 있는 거다. 무엇보다 정부의 물건을 순순히 차고서 그들의 의도대로 실험체가 되어준다? 상대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였다. 눈앞의 인간을 꾀어내기로 한 목적만 아니었다면 더 이상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을 거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지만…..”
“그러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하는데, 어떤 목적의 장비인지 말이야. 살상? 정신교란? 그것도 아니면 아예 이 몸을 제어하는 목적인 건가?”
“그런 목적이라면 진작 시도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해줬으면 좋겠어”
쇼쿠다이키리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뒤를 이어 마치 일부러인 듯 여자의 눈썹은 아래로 향했다. 그러나 너스레도, 과장된 비굴함도 아니라 무언가 공감을 하는 이에게서 나올 법한 류의 표정인데다 여자의 말이 억지스럽지는 않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여자는 소리를 높이지는 않았지만 기회를 놓치지도 않고 재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아마 당신들도 짐작하지 않을까 싶은데….이 혼마루를 정부가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히 말하자면 에너지가 워낙에 넘치거든. 내 입장에서는 그러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이긴 한데, 문제는 당신과의 계약이 성립되려면 내가 여기서 한번은 나갔다가 돌아와야 하고, 그러면 여기 들어올 때 계약한 게 위반이 되기 때문에 나로서도 정부에 먹이 정도는 던져줘야 한다고”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실이라 하기에는 의문인 고백이었다. 이곳을 정부가 포기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이곳에 손님으로 방문했다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하나같이 고위인사들인 탓이었으니까. 당시 여자가 속한 부서의 진두지휘 하에 온갖 정치인들과 재벌, 유명인들의 사인과 사망일을 조정하느라 난리가 났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 정도 날짜 간격을 벌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던 지라, 이때의 사건은 당장에 그 내년부터 ‘일본의 기이한 죽음 미스터리’ 류에서 어김없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내노라 하는 각 분야의 인사들이 연이어 죽은 ‘22XX년의 X월’ 따위로 말이다. 어느 정도는 여자의 부서에서 의도적으로 흘린 괴담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동료들끼리 ‘한달내로 정리할 게 아니라 2달로 넉넉하게만 했어도 말이 덜 나오지 않았을까’하는 나름의 반성회도 가졌다. 누군가의 ‘그러면 야근이 아니라 거주였던 그 생활을 2달을 해야 한다는 건데요’라는 지적에……생각해보니 자신의 지적에 반성의 시간이 종료가 됐었던 기억까지.
여튼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는데, 그런 대단하신 인사들의 친인척들도 자연스레 비슷한 위치의 사람들인 탓에, 복수심에 불탄 이들이 끊임없이 효과적으로 시간정부를 압박해온 게 문제였다. 그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정부에 속해 있어서….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 어느 정도의 인력과 사망자가 발생하는지를 알면서도, 시간정부 외의 각종 정부 부처에서도 여러 피해와 인력낭비가 발생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군가는, 심각해진 상황에 부랴부랴 열린 비밀회의 도중 ‘우리는 일본의 상징이야. 그런 우리가 학살을 당했는데 본때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건 일본의 이름에 먹칠인 거라고!’ 같은 어처구니 없는 소리도 했더라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이야기로만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동료들끼리 그 카더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기가 걸리고, 결과확인을 위해 보안문서를 확인 후에 진실이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의 기분은…..말 그대로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애초에 목숨을 잃은 혈육들의 사인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주제에….. 염치는 없고 뻔뻔하면서 비대한 자아의 복수심과 자존심이란 거다. 그러나 이런 진실을 알려줄 수도 없었고, 다행히 말해줄 필요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지내는 당신이 출진을 해서 뿜어내는 영력…신기라고 해야 더 정확할까? 하여튼 출진터에서도 그 힘이 다른 혼마루의 남사들과 차이가 없는지 확인할 수 있다. 난 이 정도에서 거래를 해볼까 하는 거야. 성공시킬 자신도 있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그 장치가 이야기와 다를 경우는?”
오~ 거기까지는 여자도 미처 생각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신뢰가 없는 곳의 실험체가 된다면 당연히 들 법한 의심이었다. 거기다 냉정히 봤을 때, 시간정부가 해온 그동안의 대처와 역사를 보자면 충분히 그러고 남았다. 비록 여자의 위치가 독립부서에 속해 있는데다, 관리자가 다름아닌 시간정부의 2인자이니만큼 그 전과는 다른 태도겠지만…. 여자 입장에서도 돌다리도 두들겨볼 필요는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결국 여자입장인 거고, 눈앞의 남사 입장에서는 그런 속사정을 알리는 없으니….
‘그래도…..이렇게까지 조심스러워 하는 건 당초 기대한 것보다 더 큰 반응이야. 그만큼 내 제안을 그럴듯하게 받아들인다는 거고’
그걸 깨닫고 나자 나아갈 방향이 명확해졌다. 단지 본인의 확신과 약간의 각오가 필요할 뿐이었다. 저쪽이 목숨이 걸렸다고 생각한다면 자신도 같은 걸 내걸면 되는 거다. 단지 이걸 내보이면 상대의 목적이 달라질 수 있기에 지금 내보일 수는 없었다. 이제까지의 제안이 모두 뒷전이 되고, 성사여부를 떠나 자신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기회인 것만으로 OK를 내릴 확률은 꽤 높을 테니까.
여자가 이런저런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밑으로 향하던 시선을 바로 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한 곳만 응시하기에는 짧지 않은 시간을 묵묵히도 정면을 응시해오던 쇼쿠다이키리의 옆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오래 생각에 잠겼나 싶어 ’아차!’ 싶었지만 자연스레 시선을 따라가자, 거기에 자신이 그동안 모아온 수집품들이 있다는 걸 깨닫고서 ‘이런데에 관심이 있나? 의외다’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저기…..”
왠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게 된다. 이런 상황도 상황이지만, 이제 두사람의 줄다리기는 끝을 향해가고 있었으니까. 특히 지금부터 나올 이야기는 결단만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쇼쿠다이키리에게서 대답은 없었지만 표정은 ‘응?’하는 대꾸를 어김없이 담고 있었다. 오늘 대화하면서 제일 솔직한 반응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저도 모르게 ‘혹시 관심가는 오일이 있으시면….시향이라도?’ 라는 말을 뱉을 뻔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단호하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주도권 문제만이 아니었다. 상대에게 목숨이 걸린 사안인 만큼, 그만큼의 각오 같은 것을 내보일 필요가 있었다. 꼭 비장할 필요는 없나 싶으면서도 가볍게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닌듯한….그런 거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저 중에 원하는 게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걸로 꾀여서 계약성사!는…. 너무 손 편한 바램일까’ 하는 상념과 바램의 중간쯤 되는 무언가가 둥실둥실~ 의식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멈춘 게 정부에서 지급한 장비가 내가 말한 내용과 다를 경우였지? 거기에 대해서는 당장은 말해주지 못하겠어. 당신이 거래를 하겠다 받아들인다면 그때 말하도록 할게”
“무슨…..지금 본인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어?”
쇼쿠다이키리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되묻는다. 당연한 반응이긴 하지만 변하는 건 없을거다.
“그러면 묻겠는데, 내가 거래에 응할 경우 얻는 게 도대체 뭐야? 식사는 필요 없고, 그 외에 다른 제시로 뭘 해줄 수 있어?”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야. 당신이 하겠다 하면 거래는 가능해. 아니면, 내가 혹할 만한 무언가를 당신이 새로 내밀고 거기에 응할 수도 있는 거고. 하지만 그런 것조차 없다면 내 조건은 변하지 않을 거야”
“…………..”
“당신이 우려하는 일이 벌어질 경우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야. 그저 그 책임을 어떻게, 뭘로 질지는 당신이 거래를 받아들일 경우에, 그 뒤에 말한다는 거지.”
“퍽이나 공정한 제안이군”
“저울이 균형을 이루는 평등한 계약이라는 게 있긴 할까? 뭐, 신의 세계에서는 있을지 모르겠는데 인간 세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거 같더라고”
“그렇지, 너희는 그런 존재니까”
이제까지 이 남사에게서 비아냥 정도야 몇 번 경험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명백히 위협만을 위한 나직한 음성. 첫인상때 느꼈던 흑빛의 육식동물이 저를 노리는 눈빛을 마주한 것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불공정하다 느껴져서 싫으면 그만두면 되는 거잖아.”
여자는 겨우 기운을 짜내서 말을 뱉었다. 그래도 한번 해내고 나니, 그 뒤부터는 말문이 막히지 않았다.
“그것조차 포함하는 게 내 조건인 거라고, 그러니까 그게 맘에 안 들면 이야기는 끝이겠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선택에 의해서 말이야. 당신이 원하는 게 어느 정도의 무게인지는 당신만 판단할 수 있는 거니까. 난 더 이상은 할 이야기 없어”
말을 끝낸 여자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듯한 몸을 가까스로 부여잡는 듯한 기분으로 자세를 유지했다. 저를 노려보는 눈빛을 마주볼 기운은 남아있지 않아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덕분에 여자는 보지 못했지만, 쇼쿠다이키리 역시 얼마 안가 고개를 돌렸다.
넓은 편이지만 휑뎅그레한 방안에서 서로가 반대방향을 향해 눈을 돌린 채로, 그렇게 침묵은 이어졌다. 얼핏 보면 사랑싸움을 한 연인이 토라져서 어떻게든 상대에게 눈을 향하지 않으려는 모양새 같기도 했지만. 한 쪽에서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숨쉬기 힘들 정도로 두려움에 발을 담근 상태였다는 점에서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참는 것도 무리다 싶을 때 즈음이었다.
“저기에 ‘바닐라’라고 적혀있는건….바닐라빈의 향유인 걸까”
언제든지 물어뜯으려 달려들 준비가 되어있던 그 음성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대답이 한발 늦었고, 목소리에서도 당혹감이 한껏 묻어났다.
“어?....아,아,그게….맞아,맞아! 디저트류 만들 때 많이 들어가는 그 오일이야. 나는 가끔 라떼 종류 마실 때 한 방울 정도 넣기도 하고…”
“저걸로 하지.”
뭘 말이야? 머리 속 물음조차 끝맺기도 전에 쇼쿠다이키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바닐라’ 라벨이 적혀진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네가 제시한 제안에 이걸 추가하는 걸로, 이로써 계약 성립”
의사 확인은 커녕 마치 게임 승패를 알리는 것처럼 단호한 음성이었다. 여자가 대답하기도 전에어느새 방입구에 가 있는가 싶더니
“책임을 다하는 조건이란 게 어떤 건지, 기대해 볼게.”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방문이 순식간에 열리고 닫혔다. 잠시 후 여자의 제정신이 더듬더듬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여자의 고개는 서서히 젖혀져 허공을 향했다. 이윽고 여자의 정신이 충전완료 상태에 다다를 즈음…..
“왜 갈취 당하는데 안 도와주냐, 이놈의 능력!”
여자는 분노에 소리를 질러댔다. 양 손바닥으로 서탁도 몇번을 내리쳐가면서.
“하필이면 더 비싼 걸 가져 가냐고~ 그거 옆에꺼랑 가격 3배 차이란 말이야!”
“아직 향도 몇 번 못 맡아봤는데~”
징징거려도 이미 늦은 뒤였다. 어렴풋이 여자가 마음속에서 허락했다가 물건을 착각했단 걸 한참 뒤 깨달은 탓이 아닐까 싶은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사함미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