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홀가분함을 느끼는 쇼쿠다이키리였다.
이른 아침에는 부엌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여기, 여기’ 소곤대듯 자신을 부르는 낯설지 않은 소리에 고래를 돌리자
그곳에 예상한 이가 있다는 걸 봤을 때만 해도 ‘아침부터 짜증나는군’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더라도.
그러나 그것조차 곧 만회했을 정도로 이것저것 기분 좋아지는 일들이 이루어진 하루였다.
왜 이곳에 있냐는 질문을 할 틈도 없이 여자는 후미진 곳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이야말로 급하다는 것처럼 제 용건을 뱉기 시작했다.
내용은 잠시 후, 이치고 히토후리와 다시 한번 교섭을 해보겠지만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고, 결렬될 경우에는 선전포고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굳이 일일이 보고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확실한 결과가 나오면 그 뒤에 이야기해주지 않겠어? 나로서는 확인만 되면 끝나는 이야기니까.”
“그래도 계약 맺은 사람끼리 정 없게….그리고 단순히 보고 때문 만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며 웃는 여자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눈치를 살피는 듯도 했고 기대감 같은 것도 묻어 있어서, 쇼쿠다이키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싶어졌다.
“음…저기 있잖아”
새삼스레 머뭇머뭇 말문을 여는 걸 망설이더니, 주머니에서 조그만 유리병이 나왔다.
어제 여자의 처소에 있는 수집품으로 보이는 것들 중에도 이 정도 크기되는 병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어제 가져간 오일 말인데, 그거 조금만! 이 병에 반 정도만이라도 괜찮으니까 좀 나눠주세요!”
“너 바보야?”
즉답으로 거절의 말을 뱉고는 싶지만, 그보다 먼저 타박하는 말과 함께 여자의 입을 손으로 막을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소곤소곤 시작되던 말이 나눠 달라는 끝에 가서는 군대의 병졸이 상급자에게 답하는 마냥 우렁차다 할 정도로 변한 탓이었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킨다 하더라도, 앞서 있었던 회의에서의 이야기대로 진행하고 있다며 납득시킬 수야 있었지만,굳이 시끄럽게 만들 필요도 없었다.
거기다 아직은 이 일을 비밀로 진행시키고 싶었다.
그 날의 회의는 어영부영 끝이 났고, 이후 몇몇 이들이 자신을 찾아와 ‘만약 확정이 나더라도, 내키지 않으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담긴 말을 전하고 갔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대다수의 도검들이 어느 쪽으로 맘이 기울었는지는 명확했다. 단지 이치고 히토후리의 의사 역시 명확했고,
그 탓에 어느 정도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때까지는 알리지 않은 채 진행시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의 의사와 반하는 와중에, 굳이 신경 쓰이는 시간까지 늘릴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히 여자 역시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과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유리병을 쥔 한쪽 팔을 들어올리고, 반대편의 손가락으로 그쪽을 가리키는…. 뜻이 명확한 몸짓을 내보이는 집요함에는 감탄 비슷한 심정이 들었다.
동시에 ‘그만큼 바라는 걸 당연히 들어줄 리 없잖아?’ 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채운다.
그저 여자가 바라는 만큼, 그러고보니 높임말까지 써가면서 요구하는 상황을 즐길 만큼 즐기고 말 뿐이지 그 바램을 들어줄 마음은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생각 탓에 절로 나온 코웃음을 여자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절박함에 호소를 시작했다.
그 호소의 문장마다 존대어로 끝을 맺는다.
다시 사려고 봤더니 그 오일의 생산국에서 바닐라빈 해외 유출은 커녕 사기업의 추출도 금지시켜서 이제는 구할래야 구할 수도 없게 됐다는 둥,
다른 오일 중 마음에 드는게 있으면 그걸 덤으로 주겠다는 등의 내용이 이어졌지만 어떤 것도 쇼쿠다이키리에게 감흥이 일 턱은 없었다.
오히려 여자의 얼굴이 점점 절박해지는 모습에서 만족감이 채워지고 있었다.
애초에 젊은 연령의 여자지만, 제 딴 에는 협상을 진행하듯 구는 와중 속내가 어김없이 드러나는 모습은 ‘어리다’는 감상을 들게 만들었다.
마치 어린 아이를 보는 듯….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뿐, 마음을 바꿀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슬슬 여자의 얼굴에 체념의 색이 그늘이 지는 마냥 떠오를 즈음에, 쇼쿠다이키리는 맞바꿀 만한 것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어제 말해줄 수 없다 했던 조건, 그걸 지금 말해준다면 나눠 줄게”
그 말에 여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 더 이상 이야기 나눌 필요 없다 싶어 발걸음을 돌리자
“…..처음에는 계약 맺은 의리로 그냥 제공해 드리려던 게 있거든.”
애원하는 기색은 사라져 언제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평상시 여자의 음색이 돌아와 있었다. 높임말도 더 이상 없었다. 교태스럽기는 커녕 되려 여자치곤 낮은 음색이지만, 말이 빨라지면 비꼬는 것처럼도 들리는…. 그닥 귀염성은 없는 그 음성이었다.
“내가 정부에 다녀와서 다른 도검들을 설득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면, 당신도 꽤 힘들거야. 장담해”
“정부에서 만든 장비를 사용한다면….”
그렇다면 계약은 끝이다. 자신이 대상이 되는 건 그렇다 쳐도, 다른 남사들이 대상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그러나 그 말을 뱉으려 입을 열기도 전에, 되려 여자가 질색했다.
“당신에게 제안한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나야말로 거기하고 엮이기 싫다고! 막말로 ‘들어가면 이런 일 해줘라, 저런 일 해줘라’ 요구하며 내민 장비가 한 두개 였을 거 같아? 생각하는 류의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속고만 살았나 투덜대다가 무슨 생각인지 한숨을 거하게 쉬더니, 여자는 한결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저 내가 생각해낸 아이디어고, 필요한 건 현세에서 널리고 널린…..은 아닌가? 어쨌든! 계약 맺은 의리로 당신은 덜 고생하라고 전해주려던 물건이란 말이야! 원래대로면 지금 줄 수 있었는데, 골치아픈 일이 생겨서 다른 것 챙겨오면서 가져오게 생긴 거라고”
그리고는 입을 삐죽이며 ‘하여튼 이런 요괴들한테 내가 무슨 의리가 있다고’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걸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는 건지,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이었던 건지….눈이 마주치자 환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웃음과 함께
“반이 안되면 1/3이라도 부탁드려요~♡”
쇼쿠다이키리는 불확실성 보다는 확실하게 지금의 미소를 깨트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 뒤에는 오전 내내 주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식사준비를 끝내고, 다른 날에는 자신이 날랐지만 이 날은 가끔 부엌일도 도와주는 이 몇몇에게 부탁해 제 요리를 거부하지 않는 남사들의 방으로 전달을 부탁해 뒀다.
쇼쿠다이키리의 식사를 거부하는 이들의 것은 카센의 전담으로 자리 잡았다. 자신처럼 빠짐없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주기적으로 식사를 만드는 편이었고. 어차피 도검남사들은 식사를 하지 못해도 죽는 일은 없으니 이 곳의 모두가 적당한 선에서 식사를 섭취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나마 걱정된다면 오오쿠리카라일까. 가끔 카센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나면 제공 대상에서 몇일간 제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이 혼마루에서 제일 식사 간격이 길다고 볼 수 있다. 그럴 때는 자신의 것을 갖다 놓을 때도 있지만, 언제나와 다름없이 그는 손대지 않는다. 그래도 요즘은 제공 예외대상이 아닌 듯 하니…..그의 것을 제한 대부분의 날들과 같은 양만 만들었다.
그렇게 남게 된 시간은 재료를 구할 수 없어서 만들지 못했던 푸딩을 만들었다. 정확히는 츠루마루가 먹고 싶어했던 푸딩을. 우연히 맛보고서 한참 후에 그때 그걸 만들어줄 수 있겠냐 하던 그것을 드디어 만들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은 몇 번 대체품을 써 보기도 하고, 다른 종류를 만들어도 봤지만, 그때 그 맛을 원하는 거라는 걸 알고서는 푸딩의 질감이나 어떤 요소에서 재미를 느껴서 찾은 게 아니었다니 의외라는 생각과 난감함만이 남았다. 그때의 푸딩을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향료를 구할 수 없을 테니까.
이 혼마루에는 있는 다양한 종류의 씨앗 중 그 향료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들은 현세에 나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시간이 흘러 이 혼마루와 연결된, 열려 있는 몇몇 원정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서 때로는 그곳들을 드나들기도 했지만 그 시대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인간의 처소에서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억지나 다름없는 계약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그 상황을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정부의 장비? 자신을 조종해서 이 혼마루에 위협이 되게 하는 그런 것만 아니면 상관없었다. 거기다 츠루씨에게는 항상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최소한 그가 바래 온 걸 만들어 주고 끝낼 수 있다면 오히려 좋은 끝맺음이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몸이나 정신, 혹은 그 모두가 조종된다 해도 몇몇 이들에게 말해 둘 생각이니, 그런 경우가 온다 해도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은 있다. 어차피 알 수 없는 인간의 힘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도 필요한 순간이 있을 거고, 그 중 하나일 뿐인 거다. 그게 자신이라면 본인 뿐 아니라 이 혼마루의 누구라도 다행일 거라 생각할 거다. 아, 츠루씨는 아닐 수도 있겠다. 예외라면 오로지 그 하나겠지.
오랜만이었지만 푸딩은 성공적으로 만들어졌다. 흐뭇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결과물은 누구도 빠짐없이 돌렸다. 언제나 자신의 것을 거부하는 이들의 방 앞에도 갖다 놨다. 지나가다 그걸 보고서는 반사적으로 ‘어, 거기에도?’를 뱉고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이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 중 맨 처음인 시시오에게는 순간적으로 ‘마지막으로 주는 게 될 수 있어서’라는 말을 할 뻔했다. 이쯤 되니 흠, 과한 비장함이 들어 갔네 싶다가 오히려 긴장감이 너무 없는 것도 같고…어느 쪽인지 스스로도 갸우뚱해졌다. 그게 재미있어서 쿡 웃어버렸지만, 그조차 자신을 생각해서 그러는 줄 알고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이를 위해 쇼쿠다이키리가 ‘시시오군, 재미있는 표정이네’ 뱉은 말에 내 표정이 어디가 어때서 툴툴거리는 그에게 가벼운 사과를 남기고 자리를 뜨는 걸로 모면했다.
오후가 지나자, 혼마루 이곳저곳에는 인간여자와 이치고가 대면한 일이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여자의 요구 내용 덕에 오랜만에 이곳 남사들을 분로로 일치단결 시켰다.
1. 그동안, 단도들이 가져간 식료품을 돌려줄 것.
2. 이미 소진시킨 식품에 대체하는 식품은 여자의 판단으로 필요할 때 가져간다. 그런고로, 보상이 끝나기 전까지 주방을 유지시킨다.
3. 단, 여자는 대체하는 식품을 교환하는 목적외에, 그리고 교환을 완료한 이후는 어떤 이유로도 주방에는 출입하지 않는다.
4. 차후 유사한 상황의 발생시, 이곳 도검들을 위협하는 물품을 제한 것들의 갈취는 금지. 물건의 위협여부는 도검과 인간이 함께 확인하는 게 원칙.
내용을 취합해보면 이런 것이었다. 사실 화자가 누군인지를 떠나서는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화자가 이들에게 있어서는 제일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이치고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전해들은 남사들은 용암이 끓듯 부글부글 하던 분노를 각자의 방법으로 다스리다 가도 협상결렬이 되자 내걸었다는 선전포고에 이르서는 결국 폭발해버렸다. 특히 사정 봐주지 않을 거니까, 각오하라는 말에서.
그래서 곧 있으면 저녁이네 싶은 시간에 이르러, 본채에 다시 발을 디딘 여자를 향해 그 분노를 각자가 여과없이 내보였고, 그 광경은 여자가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날이 떠오르게 했다. 그 날과 다름없이 남사들의 시도가 모두 무효로 돌아간 것까지 변함없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있었다.그날 자신이 나타났던 그곳 너머로 여자가 모습을 감춘 것이다.
어떤 이는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했고, 어떤 이는 ‘꿍꿍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어떤 이들은 밤새 게이트 앞을 지키고 섰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자나가도록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쇼쿠다이키리는 그때까지도 그곳을 지키고 서있는 이들에게 여자가 곧 돌아온다 했다는 내용을 전해줘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런 그들도 하나둘씩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기에 그 갈등도 끝을 맺었다.
그리고 서서히 ‘드디어 인간이 이곳을 떠났다’는 의견에 힘이 실어지고, 단도 아이들 사이에서는 설렘이 가득한 음성이 나오기 시작한 오후였다. 여자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쇼쿠다이키리 역시 평화로움이 감도는 공기에 온화함을 만끽하며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콰콰쾅ㅡ!
우뢰와도 같은 폭발음에 대부분의 남사들이 진원지로 향하면서 떠올린 것은, 한동안 사라졌던 인간 군대의 습격이었다. 신속하게 정복으로 갈아입고 이동한 이들이 도착한 이들의 절반을 넘어설 정도였다. 그러나 진원지인 게이트 앞에 있는 것은 오로지 한 명이었다.
정확하게는 인간 한 명과 ‘한 대의 차량’이 있었다.
“그 누구가 내 앞을 막겠어~♪ 저 파도가…..바닷가 가고 싶어!”
신나게 노래를 부르다가 대뜸 희망사항을 내뱉었다. 상관없었다. 현재 자신은 노래 가사대로였으니까. 그 누가 나를 막겠느냐, 푸ㅡ하하하!
확성기를 부여잡은 여자의 손아귀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어제까지는 자신이 몰고 온 대형트럭의 지붕 위에 달려있던 확성기였다. 크기는 학교 운동회에서 응원단이 쓰는 정도의 것이지만, 성능은 크기에 비하면…. 아니 크기를 생각하면 더욱 어마무시한 아이템!
지금은 사라졌지만 옛날의 시골에서 마을전체에 중요사항이나 재난알림 같은 것을 알리기 위해 설치했었다는 대형 확성기를 능가하는 성능이 이 콤팩트한 사이즈에서 구현되고 있으니까! 이제 여자가 계획한대로 이 확성기를 든 채 각 방마다 돌기 시작하면, 마을 하나도 뒤덮을 수 있는 음량이 방 한 곳을 꽉 채우는 무자비한 음량인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출력가능 음량의 절반 정도일 뿐이었고, 이 무자비함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여자의 귀 만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어제는 트럭에 위풍당당하게 단 채,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는 혼마루의 모든 곳을 돌며 그 힘을 보여줬지만 항복선언은 없었다. 출력 최고치는 아니긴 했지만, 뛸 수 있으면 뛰고 날 수 있다면 나는 법.
어제는 대충 4시 정도부터 7시까지 약 3시간의 콘서트였지만, 오늘의 목표는 16시간이다!
각 방을 돌아다니는 것을 시작으로 각개격파. 그래도 끝이 나지 않는 경우에는 휴식시간으로 돌입. 오늘도 끌고 온 트럭에 비치한 각종 음악들을 확성기에 연결 후 틀고, 자신은 그동안 쉬는 거지~ 휴식이 끝나면 다시 난입이다!
현세에서 지낼 당시 여자의 취미 중 하나는 190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특히 1980년대부터 2020년대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호불호는 확실해도 오랜 세월을 아우르는 라인업 덕분에 트럭 안에는 다양한 음악이 비치되어 있었다. 단지 어디까지나 듣는 쪽이었고, 정작 가라오케는 즐기지 않았다. 어쩌다 가게 되면 무난한 음악만 불러온 편이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자신은 음치였다는 씁쓸한 진실도 이번에 깨달았다. 그래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꽤 즐거웠다. 생각지도 못하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에 목적을 잊고 즐기게 될 정도였으니까.
가끔 저 요괴들에게 무언가가 쌓이는 기분일 때 ‘으~저것들을 확 그냥!’ 하는 심정으로 이런저런 상상이나 하던 걸 이렇게 실현하는 날이 올 줄이야.
덕분에 여유로움은 정말 중요한 거구나ㅡ 새삼 깨달았다.
“야, 그 귀신 같은 목소리 집어치우지 못해!” 라는 한 남사의 외침에 ‘정작 요괴는 너잖아, 정체성에 혼란이라도 오니? 가여워라~’ 안쓰러움을 담은 고운 마음도 피어오르고….
‘안 그래도 오늘의 셋리스트를 뭘로 할지 못 정했는데 감사합니다~오늘의 주제는 귀신이다! 음산한 음악이랑 고딕록을 위주로 한 선정완료!’ 로 전환하는 유연성까지 발휘됐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대로의 기분대로 쭉 간다면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이의 비웃음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여자와 쇼쿠다이키리의 계약이 맺어진 날.
본인의 표현으로는 둘 사이의 대화를 확인하기 위해 ‘잠복’을 하던 이즈미노카미는 그 명명을 깨지 않도록, 별채를 나서는 쇼쿠다이키리가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없게 숨을 죽였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효율적이지 못한 시야를 이용하기 보다는 기색을 읽는 것으로 그와의 거리를 가늠하기로 정하고 눈은 감은 채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나 벽 너머에서 대뜸 들리는 괴성에 켁! 소리 지를 뻔한 걸 참아내느라 집중력은 흐트러졌고, 다시 끊긴 흐름을 이어보려 했지만 실패였다. 결국 그는 그냥 이곳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떼우다 돌아가기로 정했다. 거기다 인간 여자가 속상해하는 소리를 처음 듣는다는 점에서도 이유는 충분했다.
여자의 나홀로 외침을 킥킥 고소해 하며 들으면서, 그래도 더 보고 싶은 건 여자의 눈에서 또르륵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두려움을 품으며 자신에게 매달리는 눈빛도 괜찮겠다. 아니, 오히려 이 쪽이 더…..잠시 그 광경을 상상하자 아랫배에서 뭔가 밀려오는 듯 하다 가슴 부근에서 저릿했다.
‘보통 인간이라면 그런 모습은 본체를 들이대면 바로 나왔을 텐데 말이지….’
역시나 아쉬웠다. 그리고 아마 그 절박한 눈빛을 비웃으며 베어버리는 순간은, 조금씩 피어오르는 열기를 닮은 이 흥분보다 훨씬 짜릿하겠지 라는 생각에 더욱 그랬다. 그 광경을 상상이 힘든 것도 기대감이 큰 탓일 거다.
가볍게 끝날 줄 알았던 흥분은 가라앉기는 커녕, 점점 커져갔다. 지금 여자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게 의식이 되고, 또 그 점이 묘하게 자극이 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이즈미노카미는 슬슬 돌아가기로 했다. 날뛰기 시작한다 느껴지는 이 흥분은 단련장에서 좀 풀어야겠다 생각하며. 그런데…..
하나, 둘, 그리고 셋…..
다시 한번. 이번에는 좀 더 옆 쪽으로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 대충 세번째 발걸음을 넘기지 못하고 막혀버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즈미노카미는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어느 정도의 공간이 있는지를 진작 가늠했으니 굳이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시선은 저 멀리 있는 본채를 향해 두고서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대충 옮기고 있었다.
신력을 써야 한다지만 힘들일 것도 없이 볼 수 있는, 결계를 이루는 곳과 자신의 주변을 감싸는 공간이 다른 색채와 빛깔을 띄고 있기에 눈대중으로도 충분했다. 결계를 이루는 곳은 새벽하늘과 같은 빛깔, 자신이 들어온 틈의 공간은 머리 위에 자리한 밤하늘이 제 몸의 일부를 형상을 바꿔 물줄기로 내려앉은 듯한 광경이었다. 이 공간에 변한 점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결계에 변화가 있을리도…..’
게다가 결계에 변화가 생겼다면 자신이 못 느낄리도 없다. 이런저런 확신 탓에 결계 쪽을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서있는 공간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의 빛깔이 변한 것도 같다는 생각에 잠시 지켜보다 결계의 하늘빛에 석양의 색이 번지듯 스며들어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제서야 이즈미노카미는 자신이 감상에 깊게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탓에 결계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는 걸. 그리고 변화가 생긴 건, 이유까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계가 여자의 영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힘으로 운용기반을 바꾼 탓에 일어났다는 것까지 짐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정답이었다.
그럼 난 지금 여기 갇혔다는 건가? 하는 의문까지.
꼴은 ‘훔쳐보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인간의 결계에 갇혀서는 나가지 못하는 신세.
도움을 요청했다가는 이런 꼴을 보이자는 거다.
특히 호리카와 녀석이 이걸 보게 된다면…..
그 무엇도 곤혹, 난감, 용납불가 같은 단어들 외에는 선사하는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 결계의 주인, 인간여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조건 결계를 깬다! 그것 말고는 없어!
그런 결론에 한참동안 힘을 냈다. 그리고 결과는 방전.
더 이상 몸을 가눌 힘도 없어 털썩ㅡ 그대로 드러누운지 오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계에 제 힘을 침범시키고, 흠집을 내려 하고, 틈새만이라도 벌려보는 등의 온갖 시도를 하는 와중에도 여자는 그 기운을 느끼지 못했는지….. 결계에 주인의 의지나 의도가 스미는 기색 같은건 없었고, 하물며 벽 너머에서 태평하게 이불 따위를 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본채까지 거리가 있어도 그 공간을 가득 채운 고요함과 가끔 늦은 시간까지 밤을 지새우거나, 혹은 이르다는 말로도 부족한 시간에 깨는 등의 몇몇 이들을 떠올리며 큰소리는 내지 않았다지만, 연이은 도전의 실패로 어느 정도 존재감이 선명한 욕지거리에 여자가 밖을 확인해보는 일 같은 것도 없었다. 이건 여자가 쇼쿠다이키리가 떠나자마자 불발로 끝났던 잠자리에 들기 위한 준비 중 하나로, 모든 대화시도를 부리나케 차단해 놓은 덕이 컸다.
젠장, 젠장, 젠장
이제는 욕하는 것 말고는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말이다.
지금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겨우 몸을 뻗는 딱 그 정도.
주변에 사물이라고는 이 육체를 떠받드는 땅과 그 위에 난 풀 외에는…..오로지 벽.
그것도 일어서서 기대면 제 몸이 양 옆으로 삐져 나가지 않을 정도나 될까. 벽면의 위쪽으로 조그맣게 난 창문 역시 적은 면적만 영역 안으로 들어와 있는 거라, 화풀이로 박살낸다 해도 우스울 정도다. 차라리 그 쪽에 귀를 기울여서 뭘 훔쳐 듣는다면 모를까.
워낙 할 일이 없다 보니, 인간여자의 잠버릇이 코를 골거나 이빨을 가는 류라면 듣는 걸로 확인이 가능할 테니까 하는 생각으로, 슬쩍 그 방향으로 몸을 기대 서서는 귀를 기울여 본 것 뿐이었다. 인간여자들은 그런 거에 창피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 골릴 수 있을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잠꼬대 같은 게 없나 보네 싶을 정도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기만을 한참.
지루함 뿐 아니라 이게 무슨 꼴이야 싶은 생각조차 들기 시작할 즈음이 되서야 시작된 소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웅얼거림. 그러나 어느 정도 마르기를 기다렸다 옅은 농도로 조심스레 덧칠해서 입히는 색처럼 어느 순간부터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느릿하게, 그러나 끝나지 않을 것처럼 반복된다.
한참을 멍하게 듣고 있었던 것도 같고,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어느 쪽이든 변하는 것 없이 반복되는 그 말에 넌더리가 나고 지겹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즈미노카미는 고개 한번을,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던 시간은 누군가 한참을 조르던 목을 풀어준 것 같이 급하게 들이마시는 숨소리와 마치 몸을 일으켰다 무너져 바닥을 울린 것 같은 쿵 소리가 연이어 들리는가 싶더니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다. 저 요란스런 소리들보다도, 꺼져가는 불씨 마냥 가느다란 음성이 왜 더 크게 들려온 건지…..
계속해서 뱉던 말들은 어쩌고 저런 말을 뱉는 건지…..이해할 수가 없다.
죽여주세요 제발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원하는 바를 이룬 것처럼.
이곳 혼마루에 와서 좋은 점이 있다면 밤하늘에 떠있는 무수한 별들을 볼 수 있다는 것과 잠자리에서 맞는 아침 햇살을 꼽는 여자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이불 너머 여자의 몸을 발끝 아래부터, 조심스런 손길로 어루만지듯 천천히 올라와 얼굴에 닿는다. 이때 쯤이면 대개는 기분 좋게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세삼스레 몇번이나 어쩌면 이렇게 기가 막힌 위치인 걸까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분 좋게 꺨 수 있는데 비해, 수면의 질은 이상하게 떨어졌다.
언제나 자고 일어나면 개운하지가 않았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바꿔보고 수면시간을 줄이거나, 늘려도 봤지만 그닥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잠을 자려 누워봤자 수마가 찾아오지 않는 그런 증세는 없다. 결국 일종의 임시방편 혹은 대처법으로, 정해진 시간에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기운을 북돋는 오일을 사용하는 매일매일이었다.
단지 그 중에서도 유독 몽롱함이 떨어지지 않는 날은 있었다. 그런 날은 어쩔 수 없다. 머리맡에 놓아둔 담요를 챙기고 대청으로 나간다. 겨울에는 어림없지만, 얼마 전부터는 그렇게 나가서 잠이 깰 때까지 눈을 붙이고는 했다. 그러다 보면 덜 풀린 듯한 피곤함이 천천히 가시는 듯도 싶었다. 어차피 일어나야 하는 시간 같은 건 없는 생활이니까.
이렇게 나름의 패턴, 약간 과장하자면 생활의 지혜를 지니고 있는 여자였지만.
이 날은 언제나의 이유도 아니었다.
“야!”
반갑지도 않고, 잠을 깨는데 도움될 리도 없는 목소리와 지칭이 귀를 때렸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이 요괴의 목소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헷갈릴 수가 없다. 한동안 단도 꼬맹이들이 꺄르륵 거리며 외부에서 생겨난 게이트에서 식료품을 채 가는 현장 확인을 위해, 눈을 뜨면 동시에 외부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설정을 해 놨었던 게 이런 짜증나는 상황을 만들 줄 알았다면…..
맞다, 지금이라도 음소거 해버리면 되지.
산뜻하게 내린 결정을 이행하고서 도로 눈을 감으려다, 어제 강탈당한 아이템을 떠올리고는 벌떡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최상급 중의 최상급이라 불리는 바닐라 빈 생산국은 실질적으로 생산중단을 결정 내리고, 전부터 유일하게 그곳 오일을 통신판매 하던 곳의 재고도 품절 표시가 떡하니 찍혀 있었다. 이렇게 되면 옛날에 자주 찾던 오프라인 매장에 남아있는 재고가 마지막 희망이다!
엄밀히 따지면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지라….그쪽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정도의 기대밖에 없다.
아직은 푸른빛이 남아있지만 곧 환한 아침이 다가오겠구나 알 수 있는 색채가 장지문을 채우고 있었다. 어차피 일어난 김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특히나 똑같이 계약위반을 해도 선보고를 하느냐 마느냐는 차이가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식이라 해도 말이다. 양심상 비상라인을 쓸 용기는 없었다. 일반 보고를 올린 다음, 원칙대로라면 그쪽에서 확인 후 지시가 내려오면 그 뒤에 행동해야 한다. 단지 이번에는 상부에서 보고를 전달 받았다는 것만 확인되면 바로 나간다! 그나마 담당자인 선배가 잠은 언제 자나 싶을 정도로 일하는 위인이니, 이런 시간이라도 어쩌면 바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본인이 바라는 것보다도 빨리 나갈 수도 있다.
‘아침밥은 뭐로 먹을까’
기본적으로 보조게이트를 이용시에는, 여자가 요청을 넣고 식사가 제공되기 까지는 대력 1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이번에 사용될 편법 게이트도 그 정도 시간이면 도착을 할까? 설마 몇시간까지 걸리겠어 싶으면서도, 노파심에 차라리 미리 요청을 넣어서 지정시간에 받는 게 낫겠지 싶었다. 일어나자마자 이부자리를 개기는 커녕 이불을 몸에 감은 채로 아침식사 메뉴를 고민하는 모양새를 누군가 본다면 걱정할 거리도 없는 모습이라 하겠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꽤나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오롯이 본인 선택으로 나오는 광경이라면 본인도 환영백배였을 테지만.
‘보고서 올리고서….아침메뉴랑 제공시간도 표기해서 요청을 집어넣고….그 후에 나갈 준비를 하면 되겠다.’
떨어지지 않은 잠기운에 하암~ 하품을 뱉고서 여자는 세워져 있는 무릎 사이로 저도 모르게 서서히 고개를 파묻었다. 그대로 일어나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뭉기적 거리며 ‘누가 이 잠 좀 깨워주라’ 맘 속으로 애원하던 중
“감히 내가 불렀는데 대꾸를 안 해? 일어난 거 다 알거든, 얼른 나오지 못해!”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식은 결코 아니었다.
분명 여자는 결계로 모든 외부 음을 차단했다. 그런데 어째서?
처음에야 예전에 걸어 놓은 조건 탓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결계에 발생한 틈으로 예외공간이 생겨서 발생한 일이었다. 특히나 그 틈이 하필이면 창가를 포함한 자리였다는 것까지. 그러나 이런 걸 알 턱이 없는 여자로서는 결계 자체에 문제가 생겼구나 하는 짐작을 하며 몸이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얼른 나와라
나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명령과 위협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대사에 참신함을 넣어볼 생각 없냐’ 핀잔도 주곤 했던 그 말들이 이 순간만큼은 두려웠다. 저 말을 거역할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따르기도 무서운 그런 마음. 상대가 바로 쳐들어오지는 않고, 자신에게 나오라는 요구를 한다는 점에서 좀더 유리한 쪽은 이곳에 있는거다 라는 계산이 끝난 이성적 판단이 아닌, 그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무언가 잘못될 거 같다는 공포에 여자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문제가 생긴 게 결계 뿐일까? 어쩌면 이 힘도….하는 의심과 그로 인해 피어나는 불안감만 가득이었다. 그저 그 뿐이었는데….
“제발 나와 줘…..”
마치 배를 오랫동안 곯은 짐승이 힘없이 뱉는 울음처럼 꺼져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 내용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탁이야”
그러나 두번째에서는 여자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긴장으로 빨라지는 고동을 진정시키기 위한 들숨과 날숨을 천천히 번갈아 가며 내쉬면서, 경계처럼 느껴지는 문을 천천히 열었다.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대로의 불청객. 그러나 결국 걸음을 옮기게 했던, 앞서 있었던 애원의 말들보다도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아, 정말 괜찮을지도 모르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생각이 가감없이 드러나던 그 얼굴에 ‘살의’나 ‘잔혹함’과 같은 위협의 기색도, 그렇다고 오랫동안 바래온게 이루어지는 의기양양함 같은 것들도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단지 이상한 건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다가 안도하는 것 같은 기색이 떠올랐다는 것.
“이….이….너 뭐야…..너 뭐냐고!”
그 속은 알 수 없지만, 여자가 그런 생각을 한 걸 알고서 보이는 거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반응이 나왔다. 단지 이건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나 가정하며 나온 감상이고, 여러모로 뜬금없는 말이긴 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왜 이제서야 나오는 건데! 건방지게 이 내가 몇번을 불렀는데!”
그런 뜻이었구나. 황당하지만, 저 요괴에게서라면 이보다 어울릴 수는 없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여자는 그 순간 안도감을 느끼고서 웃어버렸다. 아직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는데도,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데도, 그런데도 괜찮을 거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잼민이 너무 귀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