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졸작

* 만바사니/카센사니 요소 有(옅음)

* 사니와가 바보임

* 남사들끼리 술자리 만담하는 게 보고 싶었을 뿐




'내 칼'과 '내 초기도'는 엄연히 다른 말이라고, 카센은 생각하고 있다.


카센의 현 주인인 사니와는 젊은 여성으로, 수많은 명검 명도의 주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우아함을 지니고 있기는커녕 터무니 없는 말괄량이인지라, 하루가 멀다 하고 혼마루에 가지각색의 파란을 몰고 오곤 했다. 가끔은 놀라움을 추구하는 흰색 영감과 함께하는 소동의 결과물은 그 규모만 다를 뿐이지 늘 처참하기 짝이 없었고, 이런 주인을 두고 있는 죄로 매일 같이 문제 수습을 도와야 할 처지에 놓인 도검들에게 그들의 주인은 고개를 숙이며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정말 미안해! 그리고 진짜 고마워! 역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칼들이야!'


물론 이 말을 전부 믿는 남사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은 초췌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거듭 사죄하고 있지만, 하루만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말이지 상쾌한 얼굴로 함정을 파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 사니와다. 그래서 남사들은 그 말의 절반 정도만 믿기로 했다.


'역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칼들이야!‘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이 이 말을 쓰는 것은 단순히 소동을 일으켰을 때만은 아니었다. 주방 담당이 열심히 만들고 있는 요리를 한입 얻어먹고 싶을 때, 서류제출 기한이 하루도 채 남지 않았을 때, 자기가 판 구덩이에 자기가 빠져서 나오지 못할 때, 방에 바퀴벌레가 나왔을 때... 이처럼 무언가 얻고 싶은 것이나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주인은 '내가 사랑하는 칼'이라는 말을 방편처럼 써먹곤 했고, 대부분의 남사는, 심지어 평소에는 엄격하기 그지없는 카센마저도 이 말만 들으면 마치 여우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주인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따르곤 했다.


물론 그 아부가 늘 통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초기도인 야만바기리의 경우 사니와의 이런 아부 섞인 말을 들어도 아무런 동요 없이 자기 주인의 머리에 친히 제재(물리)를 가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왈가닥인 주인도 그 앞에서는 변명 한마디 못 한 채 넙죽 엎드리곤 했는데, 이 이유를 궁금해하는 칼들에게 첫 단도인 마에다가 일러준 것이 하나 있다. 혼마루 운영 극 초반에 주인이 아무 생각 없이 친 장난이 시발점이 되어 엄청나게 큰 소동으로 번진 적이 있었는데, 까딱하면 강제 퇴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큰 사건이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사건 자체는 어찌어찌 수습되었지만, 그게 원인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후 주인이 다른 남사는 몰라도 야만바기리의 눈앞에서 수작 부리는 일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의 말버릇도 그 앞에서만은 거의 언급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카센은 알고 있다. 그의 주인이 자신의 초기도만을 위해 아껴두고 있는 특별한 말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주인이 사니와에 취임한 지 막 4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늦겨울이었고, 무척이나 추운 날이었다는 것이 기억난다. 붉은 동백마저도 추위에 묻혀 제빛을 잃을 정도였으니 어련하겠는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빨빨대며 부지런히 혼마루 부지를 누비고 다니던 주인도 그날만큼은 집무실에 처박혀 솜이불을 잔뜩 뒤집어쓴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근시였던 카센이 화로를 가지고 오자 주인이 지었던 함박웃음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카센, 정말 고마워! 이래야 내가 자랑하는 칼이지!”


덧붙였던 말들도.


“너는 그 말을 아주 입에 달고 사는구나.”

“그치만 사실인걸!”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무게를 두고 사용해줬으면 좋겠는데. 정말 우아하지가 않아... 뭐, 됐나. 입이 아프도록 말해봤자 어차피 한 귀로 흘려넘길 테지.”

“나에 대해서 정말이지 잘 알고 있구만! 역시 카센이야. 말하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섬세한 문과계 남자다워!”

“너는 말이지...”


평소와 다름없는 바보 같은 대화는 장지에 비친 한 그림자로 인해 파장을 맞이했다.


“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천을 머리에 쓴 것이 확연해 보이는 그림자를 보자마자 사니와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리고 부산스럽게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기한이 다가온 서류를 쌓아놓고 있다 꾸중을 받을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지. 그러게 진즉 처리할 것이지. 카센이 혀를 쯧쯧 차는 동안 약삭빠르게 종이들을 책상 밑에 쑤셔 넣는 것에 성공한 사니와는 이내 자세를 바로잡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큼큼... 이제 들어와도 괜찮아!”


사니와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그림자의 주인, 야만바기리가 장지를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처럼 살짝 천 윗부분을 잡아 얼굴의 일부분을 가린 채다. 그렇게 변함 없는 자세로 사니와 앞에 선 야만바기리였지만, 어째서인지 그 상태로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한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당황한 것인가, 주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입을 열었다.


“야만바기리? 혹시 무슨 일 있어? 그... 저기...”


눈동자를 굴리며 필사적으로 얼버무린 뒷 말이 ’혹시 기한 넘긴 서류가 있는 거 알아챈 거 아니지?‘로 완성되어 들리는 것은 카센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야만바기리는 주인을 타박하기 시작하는 대신 카센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인에게 전할 것이 있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지 않겠나.”

“...밖에 있을 테니 용무가 끝나면 부르렴.”


들고 있던 화로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카센은 밖으로 나섰다. 장지를 닫고 마루에 정좌하자, 비슷하게 안쪽에서도 자리에 걸터앉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또 다시 기나긴 설교의 시간인가. 이제는 일상처럼 자리 잡은 수순이다. 이번에는 끝날 때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차라리 주방에 다녀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센은 청각에 집중했다. 평소처럼 야만바기리의 노성과 사니와의 반 울음소리가 들리면 그냥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러나 카센의 예상과 달리, 오늘 야만바기리가 입 밖으로 꺼낸 것은 타박이 아니었다.


“......들어줘. 부탁이 있다.”


자신이 없는 듯 잔뜩 움츠리는 어깨와 달리 늘 곧고 바르던 야만바기리의 목소리가 지금은 마치 바람을 앞에 둔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센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 들려온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수행을...떠나고 싶다.”


수행.


아, 그런가. 최근 정부에서 ’야만바기리 쿠니히로‘의 수행이 허가되었다는 소식은 카센도 주인으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이 혼마루의 야만바기리 또한 수행에 대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있었고, 마침 도구도 충분했다. 하지만 설마 그가 먼저 나서서 청할 줄이야. 카센의 놀라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야만바기리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어디까지나 복제품이다. 복제품에 불과한 내가 수행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얼마 없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가기를 원한다. 아니, 가야만 한다! 야만바기리 쿠니히로는 마치 비명처럼 소리쳤다.


“당신과 함께하며 줄곧 생각해왔던 것이 있다. 이 혼마루의, 당신의 초기도가 아닌 나는 과연 무엇인가를. 지금까지 나는 내 자신을 야만바기리의 복제품이라고 스스로 낮춰 생각해왔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전장에서 얼마나 활약해도,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모두가 나를 야만바기리에 빗대 볼 테니까. 먼 옛날 사람 잡아먹는 요물을 벤 이름 높은 명도, 야만바기리 쵸우기. 나에 대한 평가는 곧 본과에 대한 평가에 불과하다, 복제품에 불과한 나는 본과의 영향으로부터 영영 벗어날 수 없노라고, 그렇게 믿었다.”


말을 고르듯, 잠시 침묵하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제 야만바기리의 복제품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단순한 복제품이 아닌 내 자신...야만바기리 쿠니히로로서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 당신은 자랑스러운 나의 주인이니까. 나도 그에 맞춰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고, 구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받아줄 수 있는가.”


이 마음을.


머리 부분의 그림자가 마치 일몰처럼 몸을 향해 떨어진다. 기나긴 정적 후, 사박사박, 천이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는, 도저히 그 주인에게서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야만바기리 쿠니히로가 야만바기리 쵸우기의 복제품이라도, 아무리 야만바를 베지 않았다고 해도...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하지 않아.”


한번 숨을 멈추며,


“야만바기리 쿠니히로는 내 초기도야. 그것만은 잊지 말아.”


그렇게 대화는 끝났다.


그 후 야만바기리는 곧바로 수행길에 올랐으며, 그가 없는 사흘 동안 혼마루는 평소와 같은 소리를 잃었다. 정부의 시공 좌표를 토대로 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해당 혼마루를 담당하고 있는 사니와의 영력을 바탕으로 하는 공간인 혼마루는 그만큼 사니와의 영력 변화에 매우 민감하며, 그 신체적, 정신적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적막해진 혼마루는 사니와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표시이기도 했다.


새가 울지 않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햇빛이 쨍쨍 내리쫴는 일도 없다. 그러나 비가 오는 일도 없다. 그저 두터운 구름만이 빈틈없이 하늘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혼마루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그 현상을 두고 논의하는 남사들의 걱정 섞인 대화를 들으며, 카센은 야만바기리가 수행을 떠났던 그날 집무실에서 들었던 말을 몇 번이나 되씹어보았다.


그것은 무척이나 달큰한 말이었다.


대부분의 혼마루에서 초기도가 지니고 있는 위상은 엄청나다. 자원과 인력이 부족한 혼마루 초기부터 혼마루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며, 수많은 전장에서 앞서 싸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부와 의견 차이가 발생했을 때 사니와와 함께 혼마루를 대변하고 나서는 존재가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그보다 초기도를 더욱 특별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사니와가 처음으로 자의로 선택한 칼.'


무엇보다 칼이 아니고 인간인, 혼마루 바깥으로부터 온, 늘 새처럼 자유롭게 뛰노는, 천방지축인 사니와를 묶어둘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하다시피 한 존재.

그런 존재를 가리키는 말에는 깊은 신뢰와, 무엇보다 진득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혼마루의 거의 모든 이가 고대하던 바로 그날, 야만바기리 쿠니히로는 수행을 마치고 혼마루에 돌아왔다.


어찌된 우연인지, 카센은 그날도 근시를 맡고 있었다. 때문에 사니와와 야만바기리의 재회를 가장 먼저, 그것도 가장 근처에서 지켜본 것이 다름 아닌 그였다.


장지가 열린다.


그 전까지 무료하게 펜을 책상 위에서 굴리며 놀고 있던 사니와가 무엇인가 예감한 듯 퍼뜩 고개를 든다. 구름을 뚫고 마침내 찾아든 여명, 그 찬란한 광휘를 뒤로 하고 선 남자의 머리에 이제 얼룩지고 헤진 누더기는 걸쳐져 있지 않다. 대신 그가 품은 의지를 상징하듯 붉고 선명한 띠가 둘러져 있을 뿐이다. 며칠 전 자신이 다짐했듯, 그는 참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 양지에 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듯 늘 표정을 찡그린 채 시선을 피하던 남사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막 새벽을 맞이한 바다의 빛을 담은 눈동자가 주인을 쏘듯이 본다. 자세처럼 참으로 곧고, 늠름한 빛이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주인은 멍하니 앉아있다. 입은 살짝 벌린 채, 자신이 앞에 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멍청한 얼굴을 하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인이 천천히 일어선다. 그리고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 번개처럼 순식간에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야만바기리!”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했다는 듯 양옆으로 충분히 벌어진, 단단한 남자의 팔이 자신의 품속에 뛰어든 사니와를 온전히 받아낸다. 그리고 단 한 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 희색에 찬 눈동자는, 아아, 아마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


그 날 밤, 처음 수행을 떠난 칼이 돌아왔던 날처럼 축하 연회가 열렸다. 기분 탓인지, 여느 때보다 더 풍성하고 화려한 연회였다. 당연하겠지. 우아함을 잃지 않은 자세로 술을 홀짝이던 카센은 생각했다. 초기도라는 존재는 사니와 뿐만 아니라 다른 남사들에게도 특별한 존재다. 여러 가지 의미로.


“어째서... 어째서 내가 아닌 거냐!”

“자자, 하세베 군. 일단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고 진정하자? 저번처럼 술기운에 날뛰다가 다시 중상이라도 입으면 그 아이가 아주, 아주 슬퍼하지 않을까?”


오늘의 주역인 주인과 초기도가 잠시 산책 좀 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지금, 연회는 만취해 난동을 부리는 하세베에 의해 난장판이 된 지 오래였다. 곁에서 쇼쿠다이키리가 여러모로 챙기고 있긴 하지만, 주인이 아닌 이상 폭주하는 맹견을 다스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하세베의 추태를 지켜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니혼고가 문득 과거 생각이 떠오른 것인지 미간을 찡그렸다.


“그 주인이 네 꼬라지를 보고는 식겁해서 주명으로 온 혼마루에 금주령을 내렸을 정도니까 말이야. 네 녀석 혼자만 금주라면 상관없다만 무고한 나까지 끌어들이면 곤란한데.”


니혼고의 불평은 탁자 건너편에서 날아온 타박에 힘 없이 막혔다.


“워매 우짜쓰까. 내는 니혼고헌테 누기보다 금주가 필요허다고 생각허는디야. 몸집이 쬐깐허지도 않은 아재가 지 맴만 동하믄 허벌나게 마셔부리니 연회 날만 되면 창고에 금화가 남아나지를 않어잉. 연회 뒤에 듬성듬성해진 창고 바닥만 짚어보는 내 맴을 아재가 알기나 하쇼?”

“뭣,”


혼마루의 재무 담당, 하카타가 어느새 품속에서 꺼내든 주판을 총탄처럼 튕기며 내뱉는 정론에 니혼고는 말문이 막힌 듯 쩔쩔매기 시작한다. 그런 둘의 대화는 귓바퀴에도 들어오지 않은 것인지, 하세베의 신세 한탄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내가, 내가 좀 더 일찍 주군의 곁에 올 수 있었더라면...! 흐읍...나는 주군을 위해서라면 출진이든 고문이든 암살이든 서류 작성이든 발닦개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데...”

“갈수록 이야기가 이상해지지 않아?! 응? 하세베 군?!”

“주인님을 위한 발닦개!? 나도! 나도 할래!”

“...야, 누가 저 변태 좀 말려 봐라.”


점점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내뱉고 있는 하세베, 그 옆에서 허둥지둥하면서도 지극정성으로 하세베를 돌보는 미츠타다, 발닦개라는 소리에 바로 눈을 반짝이며 손을 드는 킷코까지. 아아, 연회 초반의 우아함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어서 이 사태가 수습되기를 바랐던 것은 카센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야겐이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하세베는 혼마루에 비교적 일찍 온 편이지 않나? 겨우 일주일 전에 현현한 미카즈키 나리에 비하면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데.”

“핫핫하,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구나.”


달래듯 하면서도 타박하는 야겐의 말에 미카즈키가 무릎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자 근처에 앉아있던 히게키리도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나도 이 혼마루에 온 지 아직 일 년밖에 안 지났고, 동생인...어라, 뭐였더라? 쇼쿠다이마루?”

“히자마루다, 형님!”

“참, 그랬지. 어... 피자마루는 나보다 늦게 이곳에 왔으니까. 맞다, 막 혼마루에 왔을 때는 주인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지 않냐면서 종일 훌쩍거린 적도 있었어.”

“형니임!!!”


원하지 않았음에도 모두의 앞에서 흑역사가 발각된 히자마루는 깔고 앉았던 방석에 머리를 묻고 침묵했다. 아랴? 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니 원인 제공자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뭐, 감춰뒀던 속마음을 폭로 당한 본인은 어찌 생각하든 간에, 그 마음에는 내심 공감 가는 구석이 있었던지 자신의 일가에 둘러싸여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던 태도, 산쵸모가 입을 열었다.


“이 둥지에 늦게 합류하면 할수록 옛이야기에는 잘 섞여들 수가 없으니... 어떨 때는 참 섭섭하더군.”

“맞아 맞아. 처음 오사카성에 도전했을 때의 이야기라던가!”


미다레가 공감한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본래 오사카성을 공략할 때에는 아와타구치 도파의 도검을 얻기 쉽지만, 미다레는 그 시기를 놓치고 혼마루에 찾아왔다. 워낙 수다를 좋아하는 아이이니, 오사카성을 공략할 시기만 되면 자신이 모르는 화제만 이어지는 것이 싫을 법도 하다.


“아아... 그 때는 참 엉망이었지.”


그러나 술김에 정신이 몽롱해진 탓인가. 아와타구치의 맏이는 평소라면 밟지 않을 지뢰를 제대로 밟아버리고 말았다. 첫 오사카 출전의 추억을 회상하는 듯, 가늘게 눈을 뜬 이치고를 미다레가 매섭게 노려봤다.


“그런 거! 그런 게 싫은 거야! 어? 주인님이 '아... 그때는 말이지...' 운 띄우면서 아련한 표정으로 옛날이야기 시작할 때, 일단 가만히 듣고 있긴 하지만 사실은 전혀 감정이입 못하고 있는 내 심정을 이 혼마루에 다섯 번째로 온 이치 형이 알기나 해!? 응? 레어 T(aedo) 4 중 하나인 이치 형이 그보다 입수율이 훨씬 높은 나보다도 더 일찍 오다니! 이 기만자! 절대 용서 못 해! 언젠가 반드시 복수하겠어!”

“...복수...?”


미다레의 입에서 복수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소우자의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졸던 사요가 귀신같이 깨어나 이치고를 응시했다. 그가 자다 일어난 탓인지, 아니면 취기 탓인지 어딘가 살기가 느껴지는 시선이다. 그 모습을 본 야겐이 중얼거렸다.


“이치 형, 당분간 밤에는 조심하는 게 좋겠어.”

“아, 하하하...”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멋쩍게 웃는 이치고와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씩씩대는 미다레, 그리고 웅성대는 주변 칼들 사이로 수습하듯 고토가 끼어들었다.


“잠깐잠깐, 모두 진정해! 그리고 미다레, 우리가 이 혼마루에 온 순서는 이치 형이 정할 수 있었던 게 아니잖아?”

“...뭐,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대장이 그러고 싶어서 너보다 이치 형을 먼저 데리고 온 것도 아니고, 그렇지?”


고토가 부드럽게 타이르자 미다레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댔다. 인정하기 싫지만, 일단 납득은 한다는 나름의 표현이다.


“그래. 그러니까 미다레도 그렇고 다른 남사들을 너무 몰아세우지는 마.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때에 맞춰 이 혼마루에 온 건 아니니까.”


과연 대가족의 연장자 답게 자리를 수습하는 고토의 말이 끝나자 긴장이 풀린 듯,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짝 냉각된 분위기였던 연회장에는 단숨에 부드러운 공기가 돌았다. 이대로 평소대로의 왁자지껄한 연회 분위기로 돌아올 수 있을 듯 보였다.


짝, 부채 접는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 혼마루에는 그렇지 않은 칼이 딱 한 자루 있지. 안 그런가?”


단숨에 긴장된 공기를 가르듯 목소리를 낸 것은 국화를 닮은 칼이었다. 카센은 무심코 근처에 앉아있던 카슈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인 앞에서는 늘 고운 말만 쓰려 노력하는 그 입술이 이번에는 ‘저 망할 영감’이라는 말을 내뱉은 것은 눈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야만바기리 쿠니히로인가.”


누구도 섣불리 입에 담지 않던 이름이 토모에가타에게서 튀어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하세베가 자기 자리에서 3m 위로 솟아올랐다. 아까도 귀청이 찢어질 듯하던 목소리가 이번에는 흥분한 오오카네히라도 한 수 접을 정도로 커진 것은 물론이다.


“야만바기리 쿠니히로! 그 주명 탈취기!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 녀석이 있어서... 그 녀석이 있어서...! 주군께서 내게 주명을 내려주시는 횟수가 줄어들지 않나!"

"지금 그게 문제야?!!?"

"젠장,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당장 주군께 가ㅅ,”

“하세베 군은 이제 그만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네. 술주정은 멋지지 않다구? 얍.”

“컥.”


드디어 인내심에 한계가 온건가. 쇼쿠다이키리가 날뛰는 하세베의 목뒤에 정확하게 수도를 박아넣었다. 단 일격에 하세베는 다다미 바닥에 얌전히 몸을 뉘었다. 이대로 침실에 옮기기 위해 오오쿠리카라의 도움을 받아 하세베의 늘어진 몸을 부축하던 미츠타다가 갑자기 툭, 내뱉었다.


“초기도는... 특별하지.”

“...무엇보다 주인이 직접 선택한 칼이니 말이야.”


평소에는 과묵한 오오쿠리카라의 화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기 어려운 진실이었던 탓이다.


“아니, 근데 불공평하지 않냐? 처음에는 정부에서 지정한 다섯 자루 말고는 선택할 수 없잖아? 만약 이 멋지고 강한! 최신 유행 칼인 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주인은 날 골랐을지도 모른다고.”


대놓고 투덜대는 이즈미노카미의 시선은 어느새 초기도 후보 중 하나, 카슈를 향해있다. 카슈는 어깨를 으쓱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아무리 나라도 초기도 후보라도 후보였을 뿐이고... 결국 우리는 선택 받지 못했으니까.”


제법 마음이 상한 듯, 술을 들이키는 품새는 난폭했다.


“이 혼마루에 온 이상 나도 일단은 주인 안에서 최고가 되고 싶지만 말이지이... 아, 기분 가라앉았다. 야, 야스사다. 내일 백화점으로 네일 사러 가자. 동행해.”

“엑. 술 마신 다음 날 나가자고? 싫은데.”

“동~행~해~애~! 저번에 네가 지갑 들여다보면서 살까 말까 망설이던 오키타 특집 다큐멘터리 블루레이 사는데 돈 보태줄 테니까!”

“...그럼 상관없지만.”


납득한 듯 고개를 꾸벅대는 야마토노카미를 흘겨보며, 늘 손톱에 바르는 매니큐어처럼 새빨간 얼굴로 술주정을 부리면서 툴툴대는 카슈의 미간에는 깊이 주름이 져 있다. 주인에게 가장 사랑받고 싶어하는 검이니, 어지간히 속이 쓰린 게 아닐 것이다. 그런 카슈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멀찍이 앉아있던 무츠노카미가 다가와 반쯤 비어있던 카슈의 잔에 호쾌하게 술을 따랐다.


“뭐, 그런 건 신경 쓰는 쪽이 지는겨! 무엇보다, 이미 지난 일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말여.”


자신의 잔에도 넘치도록 술을 따른 무츠노카미가 지로타치 쪽으로 눈짓을 하자, 지로타치가 빙긋 웃으며 호응하듯 술병을 들어 올렸다.


“에잇! 술자리에서 우울해하는 건 금, 지, 야! 자, 마셔 마셔! 무거운 기분은 술기운하고 함께 싹 다 날려버리자고...! 따르지 않으면 내일 대련을 가장해서 전력으로 날려버리겠어~”

“싸움은... 싫습니다...”

“오옷, 술 좋지. 그럼 잔뜩 마셔보도록 할까!”


지로타치의 협박 아닌 협박 덕인지, 아니면 완전히 가라앉아버린 분위기를 떨쳐내고 싶어 하는 칼들의 노력 덕인지, 점차 연회는 원래의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운치 있게 술을 홀짝이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던 카센은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하치스카와 눈이 마주쳤다. 본래라면 짧은 목례를 한 후 눈을 돌렸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고 말았는지. 어느새 술에 취했던 걸까. 아니, 역시 정신에 마가 낀 게 틀림이 없다.


“너는 부럽지 않니?”


무심코 이렇게 내뱉고 만 것이다.


아, 무례했군. 카센은 정신을 차렸다. 같은 처지인 입장으로서, 만약 자신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어어 하는 사이에 무심코 발도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방금 전 카슈도 옛 주인과 인연이 깊은 이즈노카미가 아닌 다른 검이 그런 말을 꺼냈다면 당장 칼부림을 냈을 것이라는 사실을 카센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치스카는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하게 답했다.


“글쎄. 어떨지.”


연꽃을 닮은 코테츠의 명도는 녹색 잔에 든 술로 꽃과 같은 입술을 축였다. 맛을 음미하듯 잠시 그렇게 있다가, 천천히 술잔에서 입술을 뗀다.


“나에게는 코테츠의 진품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어. 야만바기리 쿠니히로... 비록 그는 모작이지만 자신을 만든 도공인 호리카와 쿠니히로 제일의 걸작으로서의 자부심이 존재하지. 뭐, 이전까지의 그는 자신이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같았지만.”


짧은 접촉을 애잔하게 여기듯 술의 표면 위에 생긴 파문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며, 쓸쓸히 웃는다.


“지금의 그는 호리카와의 걸작이라는 자부심과 초기도로서의 자부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셈일까. 한쪽이 흔들려도 다른 한쪽에게 지탱받을 수 있으니... 솔직히 말해서... 그렇네. 부러워.”


카센은 말 없이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자신도 손에 든 술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첫 명예를 취한 날, 주인이 직접 현세에 나가 사 왔던 술잔이다. 그 색이 참 푸르고 깊어, 보자마자 카센의 눈동자가 생각났다며 해맑게 웃으며 건네줬던 귀물. 지금은 술이 담겨 밖의 모습이 비치는 그 표면 위에, 조명 모양의 달이 두둥실 떠올라 있다.


지금쯤 주인과 초기도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달밤을 단 둘이서 거닐고 있을까.


--선택받을 기회조차 없는 것이 더 불행한가, 혹은 그럴 기회가 있었음에도 선택받지 못한 것이 더 불행한가.

그것만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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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행에서 돌아온 카센은 얀데레로 진화했다.

메데타시, 메데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