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니 주의

이름 없는 사니와. 근데 보고 싶은 장면을 쓰려고 끼워넣다 보니까 덕지덕지 붙은 설정이 좀 많음.

괜찮은 갤럼들만.




제곧내

나른한 오후에 단둘이 앉아서 차 마시던 아루지가 남기고 간 찻잔에 남은 립스틱 자국에 조용히 자기 입술 맞춰 보는 남사들이 보고싶다.




평소에 다른 화장은 안 해도 립스틱만은 꼭 챙겨 바르고 다니는 아루지. 풀메 상태로 일하는 게 너무 디폴트가 되면 나중에 밤중에 역수자들 습격이 있거나 해서 피치 못하게 쌩얼 드러내게 되는 상황에 서로 망극해지는 게 싫다는 이유로 풀메 잘 안 함.


화장 지우면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이라 칼놈이 혼마루에 잠입한 역수자인 줄 알고 자기 잡아서 달랑 들어다가 옛날 히노모토 장수들처럼 "역수자 수괴 잡아냈다리~!" 호령하면 입술 꽉 깨물고 조용히 "역수자 아니고 아루지예욧... 내려 놔 주세욧..." 속삭여야 하는데 그 민망함을 다 어떡함...


물론 마음이야 그렇지만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대놓고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민망하기 때문에 칼놈들한테 대놓고 말하지는 않음. 만일 칼놈들한테 말했으면 겁나 억울해하면서 얼굴에 칠이 돼 있고 안 돼 있는 정도의 차이로 주인을 몰라보다니 그럴 일 없다고 펄쩍 뛸 거 아루지도 알고 있음.


근데 혹시 모르잖아... 이런 이벤트가 만분의 일 십만 분의 일 확률로 일어난다 하더라도 일단 한 번 실현되기만 하면 SAN치에 회복할 수 없는 끔찍한 상처를 입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절대 가능성조차 남겨두고 싶지 않음.




여하튼 그런 속마음은 꽁꽁 숨겨놓고 가끔 어디 회의 갈 때만 시발시발하면서 열심히 있는 화장품 다 꺼내서 숙련된 손길로 모공 메우고, 애교살 그리고, 턱 깎는 아루지. 화장을 안 하는 거지 못하는 건 아니라 너무너무 예쁘게 꾸민 거 보고 평소에도 이렇게 다녀 주면 좋을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에 가끔 칼놈이 조심스럽게 물어본 적도 몇 번 있을듯. 미다레나 카슈나...


그러면 우리 아루지는 이제 조금 쑥스러운 듯한 미소로 “혼마루는 24시간 상주하면서 구성원들끼리 생활을 공유하는 특수한 공간이다 보니” 하면서 조곤조곤 설명 시작함.


마지막으로는 조금 떨리는 입술로 “신직에 몸담은 무녀로서 자칫 법도에 어긋날까 두렵기도 하지만, 여러분들과는 많은 날, 많은 순간들을 함께할 테니 조금이라도 서로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고 싶다고, 부족한 몸으로서 감히 진심으로 생각해 버리고 말아요.” 시전해서 듣는 칼놈 감동시킴. 여지없이 이 주인, 이 혼마루라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마법에 또 한 번 걸리고 마는 것임.




근데 사실 진짜 솔직해지자면 아루지한테는 이것도 저것도 다 핑계고, 걍 제일 근본적인 원인은 화장할 때는 좋지만 온 화장대 가득 벌려 놓은 거 치우고 화장 지우고 하는 귀찮음이 너무너무너무 크게 느껴진다는 거임. 재수없어서 클렌징 제대로 안 되면 그 다음날 붉게 성난 왕 뾰루지 두어 개씩 생겨서 스치는 칼놈들마다 여기 뭐 났다고 괜찮냐고, 요즘 너무 무리하느라 컨디션 무너지고 있는 거 아니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봄.


칼놈들은 소중한 작은 아루지의 말갛고 뽀얀 얼굴에 흉악스럽게 뭐가 나니까 옛날옛적의 마마, 홍역처럼 무서운 병을 떠올리고는 심장이 철컥 내려앉아서 애타는 마음으로 걱정스럽게 온 마음을 담아 물어보는 거... 그렇지만 그게 혼마루에서는 한 놈이 한 번씩만 물어봐도 백 번임...


아루지 입만 웃으면서 걱정하는 칼놈 안심시켜서 돌려 보냄. 그렇게 아루지 얼굴에 ‘그거’, 그냥 뾰루지라고, 아루지 안 죽어도 된다는 낭보가 혼마루를 한 바퀴 다 돌아서 자기들끼리 훈훈하게 걱정 자체 해결하고 눈치 없이 물어보는 후발 주자 안 생기게끔 자치적 제재 시작할 때까지 열 번은 대답해 줘야 함;




그렇다고 커뮤에서 본 사니와들처럼 칼놈들 도움을 받자니 그것도 쉽지 않음. 이미 혼마루 첫날부터 칼놈 백 넘게 모은 베테랑 사니와 될 때까지 컨셉을 얌전한 상식인으로 잡아놓은 아루지. 이제 속으로 호박씨 까면서 투덜거리는 때 제외하면 겉으로는 거의 컨셉이랑 동화된 수준임.


바퀴벌레 나온 것처럼 빽 소리 질러서 급히 전기파리채 들고 달려온 초기도한테 뻔뻔하게 '어, 왔어? 화장대에 저거 좀 치워줘. 귀신 나올 것 같은 꼴이라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네.' 시키고, 카슈 미다레 불러다가 '야야, 아루지 쓰러지게 피곤하시다. 나는 고만 잘 테니까 얼굴에 그림 좀 싹 다 지워 주고 가라.' 주문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림...


걍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거임. 첫날부터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칼놈을 대했으면 지금쯤 다른 사람들처럼 편하게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이제 와서 바꾸면 신검들 다 와서 사방에 뺑 둘러서서는 고헤이 흔들면서 퇴마의식 들어갈 수도 있음. 근데 지금 이미지가 또 완전히 컨셉은 아니고 한 80프로 정도는 실제 자기 성격이라서 어차피 다시 돌아간대도 그렇게는 못 할 거 아루지 스스로도 알고 있음. 하지만 그냥 가끔 혼자 현타 올 때는 속이 좀 쓰림...





칼놈한테 댔던 핑계도 또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라서, 그래도 사니와라는 게 신의 마음을 살펴서 즐거운 마음으로 사명을 행하실 수 있게 북돋아 드리는 직업인데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1인으로서 일주일 내내 아예 칙칙하게 피로에 찌든 누런 100% 쌩얼로 다니는 건 또 좀 그렇다는 생각이 자꾸만 없는 양심을 자극함...


역수자보다 뛰어난 창의력을 뽐내는 혁명적 블랙 사니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거 가지고 착하고 순한 칼놈들이 하나뿐인 아루지에게 입대는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뭔가임...


그렇게 주로 아루지의 마음 속에서만 일어났던 무수한 좌충우돌을 거쳐서, 혼마루가 안정될 즈음부터 해서는 적당히 단정하고 생기 있어 보이도록 입술 정도는 꼭 바르고 다니는 상태가 디폴트로 정착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옴.




그런 아루지의 마음이 닿았던 걸까, 이 혼마루의 칼놈들이 아루지 하면 떠올리게 되는 건 뭐냐? 바로 은은하게 미소짓는 붉은 입술임. 물론 나름대로 신상을 사랑하는 아루지는 '립스틱 색깔이야말로 계어!'라는 좌우명 아래 말린 장미색이다, 버건디다, 모브다, 마젠타다 하면서 계절과 기분에 따라 여러가지 색을 시도한 역사가 있지만 칼놈들은 그쪽으로 특화된 몇 놈 제외하고는 그런 사소한 거 안 중요함.


그래서 자기들끼리 입밖으로 꺼내는 일은 잘 없지만, 대체로 그들의 머리속에는 유려한 선의 작은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며 다정한 소리를 만들어 내다 어느순간 반달처럼 휘어져 빠알간 미소를 그리는 장면이 한 편의 활동사진처럼 각인되어 있음. 그야말로 단순호치 그 자체임.


붉은 입술 사이로 아루지가 말할 때마다 언뜻언뜻 비치는 쌀알같은 하얀 앞니는 말해 뭐하겠음. 아루지에게는 초등학교때 엄마 등쌀에 치과에 끌려가 억지로 했던 치열교정의 실패를 상기시키는 망할 토끼 이빨이지만 칼놈들에게 이건 그냥 업계 포상임.


인간이 햄스터 앞니 보면서 귀여워 미치듯이 이 혼마루 칼놈들은 이제… 그런 거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역수자들이 혼마루에 춘약을 대량살포해서 일시적 핑크혼마루를 조성해 준다면 아루지 깔아놓고 일부러 지 어깨나 손 아루지 입 가까이 가져간 뒤에 작정하고 허리 거세게 흔들어서 콱 깨물도록 만들 놈 한 다스는 나올 것.




근데 이제 그건 아직 어디까지나 타락한 사니와들끼리 알음알음 돌려보는 음란서적에나 나올 법한 망측한 일이고, 이 혼마루에는 아직 아루지랑 그럴 수 있는 사이가 된 용기 있고 운 좋은 칼놈도 없음. 그래서 다들 그냥 외로운 밤에 아루지를 떠올리면서 혼자만의 마음의 위안으로 삼는 데에서 그침.


칼놈들도 검생이 좆같을 때는 있을 거 아님. 원정 갔다가 부대원들이랑 업무 처리 방식에서 마찰이 생겨서 싸우다가 서로 말도 없이 모닥불만 바라보면서 추운 밤을 지샐 때라던가. 연련장에서 딴 애들은 다 호마레 한 번씩 가져가서 아루지한테 칭찬받는데 자기만 호마레 못 따서 아루지 얼굴도 못 보고 터덜터덜 혼자 방에 돌어와 앉은 때라던가. 그럴 때 자신을 향하는 아루지의 미소를 생각하면 가슴 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차오르면서 좀 더 잘 견딜 수 있게 됨.


근데 이 방법에는 중요한 부작용이 있음. 생각할 때마다 뭔가 자라남. 칼놈에 따라서는 이제 엄한 것까지 함께 자라나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고, 일단 공통적으로는 마음 속에서 뭔지 모를 감정이 자라나는 게 느껴짐. 그리고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인가 본검조차 모르도록 조용히 싹을 틔운 마음은 점차 커져 가고, 가끔씩 수면 위로 드러날 때마다 그 주인을 뒤흔들어놓음.




그렇게 마음에 한바탕 파도가 일어서 혼란스러워진 칼놈은 밤동안 속절없이 흔들리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혼자서 부단히 애쓰다 아침이 되면 다시 높은 상석에 곧게 앉아 다른 칼들의 말을 주의깊게 경청하는 붉은 입술의 아루지를 눈에 담게 됨. 반쯤 홀린 것처럼 전달사항을 듣고, 자기를 찾는 동료들과 모여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사이 순식간에 오전이 지나가면 아루지가 급한 서류를 대강 쳐내고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지는 오후가 찾아옴.


개인실의 창틈으로 노랗게 발을 뻗어오는 햇살이 점심 식사를 거른 채 부르는 동료도 없이 혼자 물건처럼 방안에 구겨져 있던 칼놈으로 하여금 시간을 짐작케 해 줌. 아, 지금이라면. 그렇게 칼놈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아루지를 찾아감.




그렇게 말 없이 찾아온 손님을 맞는 일이 잦은 아루지는 딱히 방문의 이유는 묻지 않음. 그냥 살다보면 이유없이 누군가를 들여다 보고 싶은 때가 있으니까. 할 일 없는 밤에, 괜히 동생 방에 들어가서 불도 못 끄고 쓰러져 자는 거 보고는 이불 다시 덮어주고. 불 끄고 돌아서서 나오려다 다시 괜히 한 번 더 들어가서 머리 한 번 쓰다듬고 나서야 발길을 돌리는, 그런 때가.


칼놈도 뭐 다 비슷비슷하게 그런 거 아니겠나 생각한 아루지는 ‘짜식, 갑자기 외로워져서 아루지 안 죽고 잘 살고 있나 들여다 봐 주려고 왔구만.’ 속으로 생각하고는 조금 고마워짐. 누군가에게 고마운 일이 생기면 왠지 쑥쓰러워지고, 쑥쓰러워지면 할 말이 없어짐. 할 말이 없으면? 아, 그 때는 같이 뭔가를 먹으면 말 없이 훈훈한 분위기만 즐길 수 있게 되지.


이런 사고회로를 거친 아루지는 ‘오구오구 우리 칼놈, 아침에도 봤는데 그새 또 걱정했구나. 아무튼 다들 정이 많아서 큰일이야.’ 하는 주책맞은 속마음을 능숙하게 삼키면서 조용히 차랑 과자를 내 주곤 함. 오늘도 예외는 아님.


“새로 휴게실에 놓아 볼까 하고 지난번에 상점가에서 들여온 차를 개봉한 참이에요. 이리저리 평을 청해 듣고 싶던 참인데, 때가 좋았네요. 차에는 다들 조예가 깊으시니, 바쁘지 않으시다면 같이 한 잔 들며 소감을 말씀해 주셨으면 해요.”




그렇게 아루지의 보드랍고 따뜻한 흰 손에 이끌려서 자리에 앉혀진 칼놈은 지금까지 말이 없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기 시작함. 며칠 전에 원정 가서 본 풍경이며 부쩍 추워진 오늘 아침의 날씨 이야기, 정원의 연못에 새로 들어온 비단잉어 이야기.


아, 요즘 내가 정말로 이상하다. 입으로는 아침에 내번을 하면서 있었던 일에 대해 실감나게 묘사를 곁들여 가며 떠들어 가며 칼놈은 탄식하듯 생각함. 분명히 오늘 아침에는 분명히 머릿속이 하나로만 가득 차서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어째서 앞에 이 인간을 앉혀놓은 것만으로 그 때의 일들이 다시 제 색깔을 입은 것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되살아날 수 있을까?




한편 칼놈의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어떤 포인트에서는 같이 신나게 웃고, 또 어떤 포인트에서는 골똘히 생각하면서 자기 의견을 얘기하기를 반복하던 아루지는 칼놈이 우리 집에서 변함없이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함.


요즘 여러 정보통(?)을 통해 그 칼 좀 멍하다고. 뭐 시키면 묘하게 한 템포씩 행동이 느린 것 같다며, 상태 이상한 거 아니냐는 클레임 아닌 클레임이 들어오던 참인데 아루지 생각에 이 정도면 연식에 비해 충분히 빠릿빠릿하고, 컨디션도 뭐 이 정도면 괜찮아 보임. ‘애들이 혼마루 밖에서 생겼던 일에는 좀 민감하긴 하지, 출진은 중요한 문제니까.’ 하면서 당사자한테는 따로 언질 없이 이번 클레임들은 그냥 아루지 선에서 잊어버리기로 함.




그런데 자고로 이런 평화로운 시간들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깨지곤 하는 법. 완전히 긴장을 풀고 약간 퍼진 자세로 칼놈과 편안하게 근황토크를 이어가던 아루지는 복도 저편에서부터 가까워오는 발랄한 걸음 소리에 이어 귓전을 두드리는 정갈한 노크 소리에 언제 깔깔 웃고 있었냐는듯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바른 자세로 고쳐앉음.


“들어오세요.”


누가 들어오더라도 내치지 않고 맞아주겠다는 듯이 붙임성 있게 약간 끝을 끄는 그 곰살궂은 목소리가 칼에게는 더없이 달콤했던 오후의 종식을 알리는 선언처럼 차갑게만 느껴졌음. 그렇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들어올 칼놈은 들어오게 되어 있고, 그게 극단도라면 혼마루에 그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칼은 더군다나 몇 없음.


“주인, 있는가? 야그 중에 미안허네. 방금 물건 들어오는 시간에 정부에서 증답품을 한가득 보내왔는디, 이것이 아무래도 영 좋아 보이지가 않아. 주인이 한 번 와서 직접 봐야 쓰겄어.”


“이상하다, 정부에서 올 게 없는데. 뭐지? 그런 걸 그냥 거저 줄 일이 없는데……. 잠시만요.”




공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자기도 알고 있음. 그렇지만 방금 전까지 소녀같은 얼굴로 웃고 이야기하던 여자는 어디 가고, 금새 다시 주인의 얼굴을 하고 씩씩하게 일어서는 인간이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칼은 순간 그녀가 원망스러워짐. 단둘이서 보냈던 시간이 거짓말이었던 것 같음. 자기에게는 그토록 충만했던 시간이 이 여자에게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여흥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서 순간 그런 스스로의 생각에 상처를 받아 조금 찐으로 쓸쓸해짐.


새로이 떨어진 일거리를 귀찮아하는 내색 하나 없이 당연하다는 듯 소파 주변을 벗어나 사무용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던 가디건을 가볍게 걸쳐 입다가 칼의 얼굴에 스쳐가는 그늘을 본 아루지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아,”하고 운을 뗌. 같이 가자고 빈말이라도 건네 준다면 기쁘게 거기 기대어서 함께 하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이어볼 텐데. 칼은 자기도 모르게 희망을 가지고 아루지를 올려다 봄.




“아까 이야기한다고 정신이 없어서 과자도 몇 개 못 드셨죠? 아직 차도 조금 남았으니까, 앉아서 같이 느긋하게 드시다 가셔요. 저는 이거 한 입 먹고 바로 달아서 차 한 잔 마시고, 또 과자 한 입 먹고 차 한잔 마시고 하면 그게 그렇게 맛있더라구요? 아, 정리는 걱정하지 마시고.”


아루지는 그렇게 콧등을 찡그리며 개구진 미소를 지으면서 과자 베어 먹듯 칼의 희망을 와사삭 부숴 먹어버림. 과자? 과자? 내가 이깟 과자 받아 먹으려고 입때껏 여기 와서 앉아있었는 줄 아나. 기분탓이겠지만 문 너머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하카타 토시로의 안경알 너머로도 이쪽을 조금 안타깝게 여기는 것 같은 기색이 느껴짐. 애초에 주인을 빼앗아 가려고 대놓고 주인이 알아채라는 식으로 발소리를 내며 선전포고를 했던 주제에 이제 와 동정한대도 이쪽의 기분만 나빠질 뿐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주인은 사라지고, 칼은 주인과 단둘이던 방에 순식간에 홀로 남겨짐. 묘한 비참함 속에서 주인의 말에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채로 얼마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어느새 방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한 노을을 느끼며 칼놈은 문득 자기 앞에 놓인 주인의 찻잔에 시선이 감.


주인이 어디에 입술을 댔는지 알려주는 표식처럼 붉게 남은 립스틱 자국. 따뜻했던 차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지 오래지만 저기에만큼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강렬하게 칼놈의 충동을 부채질했음.


홀린듯 손을 뻗어 주인 없는 찻잔을 손에 든 칼놈은 한참동안 립스틱 자국을 바라보다 이윽고 천천히 손안에서 방향을 돌려 주인의 흔적이 남은 부분을 자신의 앞쪽으로 가져왔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주인의 입술. 모양 좋은 입술이 찻잔에 닿으며 눌렸을 때의 감촉을 가늠하기라도 하는듯 칼은 다시 또 한참, 주름까지 그대로 찍힌 섬세한 모양이 망가질까 차마 직접 손가락을 갖다대 보지도 못한 채 손가락으로 그 위를 하염없이 덧그리기만을 반복했음.




찰나같기도 하고, 영원같기도 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노을에 물든 찻잔을 손에 쥐고 숨까지 멈춘 양 그 자세 그대로 오랜 시간을 굳어 있던 칼. 이윽고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찻잔을 한참 전, 주인이 잡았던 그 방식 그대로 제 입술로 가져가며 고요히 눈을 감는데……








긴 노잼글 ㅈㅅ


참고로 정부에서 보내왔다는 선물은 특명조사를 홍보하고 많은 사니와들의 참여를 독려하려는 윗분들의 순수하게 화이트한 의도에서 보내진 것으로 노리무네의 도문이(노리무네의 동의 없이) 그려져 있는 스팸세트 양말세트 칫솔세트 등등 시간 정부에서 추석 선물 돌린 후 남은 재고를 짬처리한 것 같은 평범한 것들었다고 합니다. 착한 하카타는 아루지와 다른 칼놈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것을 성공적으로 봉쇄해서 기뻤고 아루지가 선물 고른 정부 직원의 빛나는 센스에 기함하느라 칼놈과 가졌던 티타임을 새까맣게 잊어버려서 또 기뻤다고 하네요^^


어쨌든 저렇게 칼놈한테는 아루지가 나름 검생을 건 절절한 첫 짝사랑인데 아루지한테 칼놈은 그냥 평범하게 곤란하고 귀여운 애완 영감 1에서 시작하는 착각물 세 스푼, 저세상 온도차의 심한 짝사랑 로맨스 보고싶다. 세콤들 nn자루보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이 아루지 1명이 더 큰 장애물일듯ㅎㅎ


그동안 자각 없다가/억지로 누르고 있다가 저 순간을 계기로 내면의 무언가가 각성해서 아루지 공략 루트 돌입 확정 땅땅 찍고 무한 직진을 시작하는 칼놈의 세콤 돌파 아루지 쟁취 연대기를 이웃 혼마루 사니와가 되어서 팝콘 봉지 하나 들고 실시간으로 관음하고 싶음.


아루지들 보기에 저거 누구면 맛있을 것 같음? 생각나는 애들은 많은데 너무 많아서 사실 잘 모르겠음...

우구라던가, 포평이라던가? 츠루라던가? 덴타나 금은바도 끝내주게 귀여울 것 같고. 의외로 야겐도 존나 파괴력 있게 잘 어울릴듯.

댓글로 어울릴 것 같은 애들 써 주면 제가 보고 감동해서 눈물 흘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