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방은 8000호대 기관차. 출처는 불명하오.
위키페디어 입력용으로 태백선의 노선 연혁을 정리하다 보니, 상당히 복잡다단하더구랴. 적는 입장에서도 이게 언제 어떻게 된건지 알기 어려울 지경이어서, 조금 비주얼하게 데이터를 정리해 보았소.
태백선이라는 명칭이 등장한건 1973년에 고한~태백간의 정암터널 등이 개통되어 동서횡단철도가 연결되면서였고, 그 전에는 여러 노선이 갈라져 있는 그런 모양새라 할 수 있었소. 노선의 이름도 자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표기하는 예가 많고, 특히 이후의 노선명 변경에 따라 바꾸다 보니 몇군데 틀려지는 경우도 발생하는 듯 한데... 일단 아는 범위 내에서 좀 정렬을 하면 위와 같소.
우선 최초의 건설은 영월선 구간이오. 1929년에 건설된 영월 화력발전소의 연결선로로 건설된 것인데, 제천에서 영월까지의 노선으로 1949년에 착공했지만 1949년 11월 9일에 제천~송학간 9.8km가 개통되고 나서, 이듬해의 6.25로 일시 공사가 중단되어 1955년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소. 가장 험난한 구간인 영암선(지금의 영동선)도 유명했지만, 이 구간 역시 그리 녹녹한 구간은 아니었다고 하오. 38km 구간에 교량 10개에 터널 7개에 이를 지경이었으니.
이 구간 건설 이후, 노선을 함백까지 연장하게 되었소. 당초 영월선 공사가 함백선 공사의 1차 공사구간이라 할 수 있겠소. 이 노선 주변에는 탄광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 이를 개발하기 위한 목적이었소. 그러나, 노선의 난이도는 상당해서 22.6km 구간에 역시 교량 10개에 터널 6개소가 있었소. 이 구간의 건설은 1957년에 완료되었는데, 영월선 구간의 노선에 비해서는 비교적 터널 숫자가 적었던 것이 공기 단축에 도움이 된 듯 싶소.
이후 4.19와 5.16을 거쳐 정권이 바뀌고, 경제개발을 위한 석탄 수요가 필요하게 되면서, 영동선 측의 노선 정비가 착수되게 되오. 당시의 영암선(영주~철암 간)과 철암선(묵호항~철암, 인클라인 및 스위치백 구간 포함)을 연결하기 위해서 황지본선(현재의 동백산~심포리)의 건설이 착수되고, 여기에 병행하여 대규모 탄전이 있던 황지 일대의 개발을 위해 황지지선(현재의 태백~백산)의 건설이 실시되오.
황지지선의 공사는 1961년 8월 8일에 착공되는데, 건설에 매우 애를 먹은 구간으로 꼽히오. 터널 총 연장만 2km에 달하는데다, 지질도 매우 안좋아서 터널 공사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하오. 또, 지형 관계상 산 능선에 철도를 건설했어야 하는데, 이런 구간을 그냥 흙을 깎고 철길을 냈다간 비 한번에 모조리 쓸려내려갈 위험이 다분했다고 하오. 그래서 궁리 끝에 이른바 L자형 옹벽이라는 것을 개발해 적용했다고 하오. 즉, 콘크리트제 옹벽을 쌓을때 노반 아래로 가지를 뻗게 해서, 옹벽의 이탈을 노반의 자중으로 버티게 하였다고 하오. 뭐랄까, 옛 길에 있던 잔도(棧道)와 비슷하다면 비슷한 방식인 셈이오.
황지지선의 공사와 병행해서 정선선과 고한선의 공사도 병행 실시되게 되었소. 원래 함백선에서 연장하는 건 지형관계상 거의 어려울거라고 생각했던게 1950년대의 시각인듯 싶은데, 1960년대에 들어서 정선 일대의 탄전 개발 필요가 생기면서, 이 구간을 급경사를 감수하고서라도 건설할 필요가 생긴 듯 하오. 특히, 당초에 정선까지만 연결하려던 계획들이 크게 증가해서 고한, 회동, 구절리 등까지 노선계획이 확장되었던게 이 시점이라고 하오. 그런 결과, 1962년에 정선선과 고한선의 착공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때 착공지점은 함백이 아니라, 예미에서부터였소. 아무래도 경사 선형 관계상 함백에서는 쉽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예미로부터 라멘 교량 등을 건설하면서까지 신선을 부설한 듯 하오. 이로 인해 정선선 완공 후 예미~함백 구간은 지선으로 분리되었소.
이때만 해도 정선선이 본선, 고한선은 정선지선이라고 인식이 있었던 것 같소. 황지로의 연결은 어디까지나 계획선 정도로 구상했던 듯 하오. 1966년경에 정선선과 고한선의 공사가 증산역에서 접속되어 두 노선이 연결되었고, 이후 1967년에 정선까지 전 노선이 개통되었소.
이때의 정선선 구간은 당시로서는 말 그대로 오지 중의 오지를 달렸다 할 수 있소. 터널과 교량이 많은 건 물론이거니와, 삼림을 헤쳐가면서 공사를 진행했어야 하고, 심지어 공사를 위해서 도로를 새로 내야 할 정도였다고 하오. 특히 예미~증산 간은 거리가 불과 17.7km에 불과한데 기간이 4년 가까이 걸렸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 구간의 험준함을 보여준다 하겠소. 정선선 이후 1969년에 나전까지, 1971년에 여량, 지금의 아우라지까지 연결되고, 태백선 본선에서 분리된 1974년에는 구절리까지 연장되었소. 어떤 자료에서는 이 연장 구간을 정선지선이라고 하기도 하는 듯 하던데, 정확한 것은 아닌 듯 하오.
한편 정선선의 지선으로 시작된 고한선은 1966년 1월 19일에 완공되었소. 이 구간은 유명한 사북탄광을 지나 고한에 이르는 구간이오. 이 구간이야 석탄과 관련해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오. 지금이야 폐광촌 아니면 강원랜드 정도로 기억되는 동네지만, 석탄합리화가 들어가기 이전에는 이른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니는\" 동네로서, 또 사북폭동이라 칭해지는, 당시 광부의 권리투쟁도 있었던 곳으로, 석탄산업의 전초라 할만한 곳이었소.
고한선까지 뚫린 시점에서 이 구간에 대한 영동선의 바이패스로서의 가치가 대두되기 시작하였소. 물론 계획은 더 전부터 잡혀져 있었지만, 좀 더 본격적으로 가능성이 보이게 된 것이오. 그리하여 1969년에 고한~황지간의 연결이 착공되었소. 이 두 역의 거리는 15km이지만, 그 사이에는 1400m급 주봉이 늘어선 태백산 분수령이 자리하고 있소. 1950년대에만 해도 이런 곳은 통과불가능한 구간이었기에, 영동선으로 우회했던 것이오.
이 구간의 연결을 위해서는 따라서 장대터널이 필수적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4505m의 정암터널이 건설되었소. 이 터널은 슬치터널 개통시까지 우리나라 최장 터널의 기록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아직 깨지지 않은 기록인 가장 높은 철길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소. 여기를 지나 해발 855m 지점의 추전역이 존재하고, 다시 여기를 지나면 긴 내리막이 이어지게 되오. 이 구간이 1973년에 개통됨으로서, 동서 관통 노선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를 같은 해에 태백선으로 명명하게 되었소. 이후 이 구간과 영동선을 전철화 하고, 동백산역과 태백선을 잇는 800m 길이의 삼각선이 1975년에 건설됨으로서 태백선의 건설은 완료되게 되오.
태백선이라는 노선은 지금 입장에서 별로 빠르지 않은 노선이고 중요도 면에서도 예전만 못해 보이는 노선이지만, 1975년 기준으로는 약 50km에 달하는 운행거리가 단축되어 1시간 가까이 운행시간을 감축할 수 있었고, 또 1970년대에는 태백선으로 수송되는 화물 총량이 전체 화물의 거의 30%를 차지할만큼 중요한 노선이기도 하였소. 지금도 여객 열차보다 화물열차가 더 많은 노선이기도 하고 말이오. 또한, 동시에 국토의 가장 외진 곳에 있다 할 수 있는 강원도를 열어젖히는 노선으로서도 의미가 깊소. 서울에서 100km 밖에 안되는 곳이지만, 조정에서의 사화나 환란을 피해 숨는 곳이 될 수 있던 곳이자, 또한 근래까지 화전민이 생활할 정도로 험한 곳이었는데, 철도의 개통으로 인해 이런 공간이 극적으로 변하였소. 여러 측면에서 이 태백선은 그 의미가 우리 현대사에 있어 작지 않다 하겠소.
조사부장 님의 글 잘 봤습니다. 원래 \'국토균형개발\'이라 함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말입니다. 감히 X축 따위에 붙일 수 있는 미사여구는 아니죠ㄳ
80년대에도 태백선 주변의 도로들은 거의가 비포장길에 큰 비나 눈 등에 막히고 쓸려가기 일쑤라서 거의 유일한 확보된 교통수단이 철도였고. 이나마 큰물이 일어나는 장마나 태풍엔 철로도 띁겨나가던 시대라 힘들게들 살았던거 같습니다. 지금이야 도로도 그럴듯 하게 들어왔지만, 경부축에 쏟는 돈의 10/1 만이라도 관심좀..
더불어 너무 좋은글 감사.
지금은 그 험준한 지형때문에 관광철도로서의 가치도 더 높아진 셈이니 아이러니한 일이죠.
조사부장님 글은 어떤 면에서는 훌륭한 역사교과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