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억 / 레일로드 편집위원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괴뢰군은 불법으로 38선을 뚫고 남침을 개시하여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짓밟기 시작했다. 남침 3일만인 6월 28일 수도서울이
적군에 함락되고 이어 수원까지 북한괴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때 「맥아더」원수가 UN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유엔안보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미국제8군 제24사단이 한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제24사단의 지휘관은 「윌리암.F.딘(william F.Dean)」소장이었다.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7월 1일 부산항에 상륙하였으며, 7월 5일에는
스미스부대가 오산에 도착하여 남하하는 북괴군을 맞아 치열한 저지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제24사단은 작전상 대전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제24사단의 병력은 약1만6천여명에 차량 약5천여대로 우리 국군과 함께
임시수도인 대전을 사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미군은 우리국군과 함께
전열을 가다듬고 금강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대격전을 예상하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괴는 보병2개사단과 포병2개연대, 탱크1개연대를 앞세우고 물밀듯이 내려와
금강방어선을 뚫고 대전지구를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미군과 국군은 집중공격을 가해오고 있는 적군을 맞아 치열한 공방전을
벌리고 있었다.
「딘」사단장도 직접 선두에 나서 3.5인치 바추카대전차포로 적군의
탱크2대를 격파하면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무전을 통해서 그에게 전해오는 전황보고는 대전비행장과 공주,
신탄진방면의 미군이 모두 참패했다는 참담한 소식뿐이었다.
미군 제24사단은 7월 19일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북한괴뢰군에게 더 이상
대항해서 싸울 수 없을 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고 부득이 영동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군은 북괴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
시작하였으나 잔악한 북괴군의 맹렬한 공격에 밀렸다. 한국지형에 어두웠던
미군은 대전지구에서 많은 희생을 당했고, 최후까지 선두에서 대전지구
사수를 진두지휘했던 「딘」소장 자신은 미처 적진을 탈출하지 못하고 말았다.
영동에 집결한 제24사단 장병들은 「딘」사단장의 행방불명을 확인하고
구출특공대(결사대)33명을 조직하고 열차를 이용, 적진에 들어가 구출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의 위급한 전황으로 봐서는 적치하에 들어가 있는 적진에 열차를 몰고
진격하여 구출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용감한 결사대만이 할 수 있는
작전임무였던 것이다.
「딘」소장 휘하의 장병들은 7월 20일 「딘」장군 구출을 위해 자원한
특공대를 적지인 대전에 보내기 위해 결사대원들을 태우고 갈 기관차로
미카 3-129호를 지정했다.
대전이남인 옥천ㆍ세천까지도 이미 적군에 점령되고 말았는데, 이러한 위험한
적지에 기관차를 운전하고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엄두를
내지못할 일이다.
이런 위험을 알면서도 기관차를 몰고 적진에 뛰어들겠다고 분연히 자원한
기관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27세의 젊은 김재현(金栽鉉)기관사였던 것이다.
김재현기관사는 평소 의로운 일에 앞장서고 맡은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성실한 철도인으로서 항상 조국애에 불타는 청년이었다. 하물며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적과 싸우다가 행방불명된 「딘」사단장을
구출하는데 거절한 김재현 기관사가 아니었다.
김재현기관사는 현재영ㆍ황남호 두 기관조사와 함께 성명을 무릅쓴
미특공결사대원들을 기관차에 연결된 석탄차와 화차 1량을 연결하고
이원역을 출발했다.
이원역을 출발한 시각은 하오6시 정각, 대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철길연선에는 피난민 한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고 적막한 전운만이 감도는
전적이 흐르고 있었다. 세천역을 통과할 때 역사는 이미 파괴되어 있는 것을
보자 섬뜩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증약터널을 빠져나오자 따발총이 빗발쳤다. 때를 같이하여 박격포탄과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탄수차에 타고 있던 미군도 일제히 기관총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김재현기관사는 최고속도로 기관차를 운전했으며 두 기관조사는 쉴틈없이
비지땀을 흘리며 화구에 석탄을 퍼 넣고 있었다.
적군과 미특공대간에 치열한 사격전이 벌어진지 1분여만에 미군이 화구옆으로
쓰러지고 석탄을 퍼 넣던 삽에도 걸렸다.
이때 미군 10여명이 적의 치열한 공격을 받고 기관실과 석탄차 석탄위에
쓰러졌다.
김재현기관사는 이렇듯 치열한 적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간신히 세천을
빠저나와 대전역 남부신호실 앞에까지 달려가서 정차했을 때는 대전시내는
불바다가 되어 하늘에는 검은 연기로 휩싸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미군결사대원 중 이미 10여명이 희생되었으나 기관사와
기관조사들은 모두 무사했다.
북괴군의 탱크와 포탄이 휩쓸어버린 적치하의 대전에서「딘」사단장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치하의 대전까지 목숨을 걸고 달려온 결사대원들이 적지에서 1시간여동안
수색했으나 더 이상 머무르면서 수색해보아야 구출작전에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대전역을 출발, 영동을 향해 전속력으로
남하했다. 「딘」소장 구출결사대의 철수를 미리 예측한 북한괴뢰군들은
대전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필암동 산기슭에 매복해 있다가 열차가
이지점을 통과할 무렵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미군들도 달리는 열차안에서
응사했으나 중무장으로 공격하는 적과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적의 집중사격을 받은 미군결사대는 전원 전멸당하고 단 한명만 부상하고,
김재현기관사도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는 총탄에 맞고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재영이!」를 부르며 무사귀환을 당부했던 것이다.
현재영기관조사가 쓰러진 김재현기관사를 부등켜 안았으나 그의 입에서는
먹물같은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이미 눈이 감기면서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현재영기관조사는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기관차의 가감변을 놓지 않고
있는 김재현기관사의 손을 조용히 떼어놓고 그가 대신 운전석에 앉아
전속력으로 질주하다가 그도 왼팔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화구에 석탄을
열심히 퍼넣고 있는 황남호기관조사가 이 광경을 보고 그가 재빨리 기관차의
가감변을 잡고 간신히 옥천역까지 운전하므로서 적의 공격지점을 벗어났던 것이다.
김재현기관사는 전신에 8발의 총탄이 관통되어 달리는 열차안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구출작전에 동원되었던 열차가 세천역구내에 도착했을 때는 역장 혼자서
지키고 있었다.
옥천역에는 미군야전병원 열차가 최후로 철수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야전병원 열차에는 미군사망자와 부상자가 실려 있었다.
「딘」소장 구출결사대에 참가했다가 희생당한 32명과 부상자 1명을
병원열차에 옮겨 싣고 김재현기관사까지 옮기고 곧바로 영동으로 출발했다.
영동역에서 김재현기관사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현재영기관조사는
후방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제24사단 특공대의 영웅적인 「딘」소장 열차구출작전은 너무나 큰 댓가를
치루고도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세계전쟁사에 「대전전투」는 여러 가지 특수한 사건으로 한페이지를 찾이하고
있으며,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딘장군의 대전사수로 말미암아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고, 대구와 부산을 지킬 수 있었다.』
김재현기관사의 유해는 황남호기관조사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영동산 아래
묻혔다가 휴전협정 후 다시 고향인 논산군노성면정암리 뒷 산으로 이장되었다.
그러다가 1962년 12월 5일 대전철도국 직원들이 성금을 모아 적의 흉탄에
맞아 산화한 지점인 대전시삼정동 철로변에 그의 순직비를 세웠다.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다.
〈 여기 위대한 죽음이 있다. 6.25거치른 날 우국의 딘장군을 구출하기 위하여
최후 일순간까지 철마를 달려도 보람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비단 아름다운
우정에서랴 ! 민족의 생존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숭고한 죽음이어라.
조국과 더불어 영원한 영혼을 위해 여기 돌을 하나 놓는다.
서기 1962년 12월 5일
후원 반공유적부활운동 충남지부
중도일보
대전철도국 직원일동 건립 〉
김재현기관사 순직 28년 뒤인 1978년 3월 정부에서는 그의 희생정신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철도청에서는 1983년 6.25동란 33년만에 김재현기관사의 국립묘지안장
대상자지정을 국방부장관에게 요청한 바 국방부에서는 「고 김재현기관사는
6.25당시 대전철도국 소속으로 미제24사단장 딘소장 구출작전에 참가,
미특공대를 열차에 태우고 적진에 들어가 임무수행중 괴뢰군의 총탄에
순직하였으므로 국립묘지에 안장을 승인한다.」고 통보 해왔다.
국방부로부터 국립묘지승인을 받은 철도청에서는 그 해 10월 28일
대전지방철도청 및 유족들의 협조를 받아 철도인으로는 최초로 국립묘지의
령관급묘역에 안장되었다.
한편 현재영기관조사가 팔에 관통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옥천군청내에 있는 미군야전병원 침대였다. 여기에서 다시 미군병원차에 실려
a 영동역에 도착한 뒤 구세군병원으로 후송도중 이 병원을 미군전용병원으로서
민간인은 입원할 수 없다하여 한국군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야전병원에
입원한 하루만에 열차에 실려 대구로 후송되고 일주일 후에는
마산철도병원으로 후송되어 한달동안 입원치료 받다가 다시 부산임시병원,
동래임시병원을 거쳐 철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렇게 자주 후송되는 동안 그의 집에서는 생사확인을 못해 사망한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는 9.28수복 후 일반병원을 전전하며 2년여에 걸쳐 4번의 대수술을 받았으나
완치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통증에 시달릴 때마다 그날의 참상과 악몽이 떠오른다고.
그는 황남호기관조사와 함께 대전기관차사무소에서 근무하다가 1986년
정년을 맞이하기 까지 철도에서 일했다.
김재현기관사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그가 순국하자 부친의 위업을
이어받아 철도에 몸담아 일하고 있다.
김재현기관사의 유품은 철도박물관부곡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으며
특기할만한 사하은 그가 전사하기 3일전인 7월 17일 까지 기록했던
운전일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관람인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미제24사단장 「딘」소장은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과 더불어 9월 4일 포로교환 제1차로 석방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1년 82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
故김재현 기관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__) 3초간 묵념
어렸을때 철도박물관에서 본 기억이 나네요. 차 이름이 \'미카\'였던가 \'ㅅ\'
딘 소장도 참 험난했지요. 저 날 오전 혼자서 대전시내에 고립되어 인민군 1개 소대랑 맞짱뜨고 혼자서 철수하다가 풀밭에 쓰러져서 이틀인가 뒤에 발견되어 포로가 되었다네요
통일 전쟁의 과업을 방해한 수구꼴통이네...
조국//이런 말 하면 안되는 건 알지만 김일성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빨갱이는 지구를 떠나슈.
조국//지구를 떠나실 것까지야... 북녘으로 가시지요 참 자진입북은 받아주지 않는다던가요? 납북될 길을 찾아보시는게 빠르겠네요
▶◀ 사진을 보니, 비석 위치가 대전지하철 판암기지 근처에 있나보군요...
▶◀ 저길 지나가면서 판암기지는 봤는데 왜 저건 못봤을까 ㄲㄲ;
사무실에서 저 비석이 보이는데 멀까 궁금해했었는데..... 기관사님 순직비였군요......
김기억 선생님이 글이 연재되는 사이트가 있는데 읽어보면 참 재미납니다. 현직에 몸담으셨던 철도계의 원로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