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도시’ 부산을 세계도시 만든 ‘작은 영웅’들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① 들어가며
지하철·광안대교 놓은 현대사 주역들
석대쓰레기 매립, 문화의 전당 짓기까지
부산 현대사 증언 … 실화·비화 연재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땟국이 흐르던 ‘촌도시’ 부산은 이제, 세계 유수도시이다. 도시 인프라는 탄탄해졌고, 삶의 질은 높아졌다. 대한민국의 상징, 한국의 맨해튼을 꿈꾼다. 부산이 편리하고 편안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탈바꿈한 것은 불과 40년의 일이다.

부산의 교통을 바꾼 도시철도 1호선 1단계 기공식이 1981년 열렸다. 불과 30년 전인 범내골 인근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그 세월동안 부산은 맹렬하게 지하철을 뚫었다. 바다 위에 덩실하게 광안대교를 놓았다. 도심 속 수영비행장을 이전했다. 석대에 부산시민의 생활쓰레기를 묻었다. 곳곳에 문화의 전당을 짓고 가꾸면서, ‘문화 불모지’라는 오명도 털어냈다.

그 속에는 ‘작은 영웅’들이 있었다.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들이다. 오늘날 뒤돌아보면 별일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든 해놓고 보면, 별일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꿈같은 일이었다.

부산엔, 이 꿈 같은 일을 헤쳐 낸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해가는 이름들, 나이 70을 넘긴 퇴직 공무원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감히 ‘작은 영웅’이란 칭호를 붙인다.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일을 기획하고 추진한 불도저 같은 분들이다. 더러는 업무 추진 과정에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고, 억울하게 인사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이겨내고 무지막지한 열정과 추진력으로 오늘날의 부산을 만들어낸 개척자들이다.

‘다이내믹 부산’은 부산시정 현대사속 숨은 얘기를 조망한다.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비화와 함께 펼쳐 보이는 것은 부산시정의 또 다른 기록이요, 부산의 역사라는 인식에서다. 이들이 언젠가 유명을 달리하기라도 한다면, 더는 부산의 현대사를 증언해줄 사람이 없겠기 때문이다. 비하인드 스토리와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작은 영웅’들의 결단으로 태어난 광안대교(위)와 센텀시티 일원.

“처음 부산에 지하철을 놓아야 한다고 했을 때, 찬성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막대한 예산이면 도로를 넓히겠다. 도대체 지하철이란게 뭐고? 당신이 정신이 있는 사람이가?…” 1979년부터 8년5개월간 부산시 지하철본부장을 맡아 부산도시철도 건설의지를 관철시키고, 직접 지하철 공사를 주도한 임원재 씨의 이야기다. 생각해보시라, 오늘날 도시철도가 없다면 부산교통망이 어떻게 뒤엉킬지를.

광안대교는 10년 가까운 공사기간을 거쳐 국내 최대·최고의 다리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부산의 랜드마크로 손색이 없다. 조창국 전 광안대로 건설사업소장은 ”당시로서는 무모할 정도로 원시인이 최첨단 교량에 도전한 셈”이라고 말한다.

처음 이 기획연재 아이디어는 부산시 기획관리실장, 부산환경공단 이사장을 지낸 정영석 씨가 냈다. 그는 이 연재에 등장할 주인공들을 일러 ‘파워 브로커’(Power Broker)라는 표현을 썼다. 무지막지한 반대와 난관을 깨고,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다이내믹 부산’은 이 기획물을 격주 연재할 계획. 연재과정에서 더러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언짢아 할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너그러운 이해를 바란다.

“지하철 놓아야 한다” 첫 주장에 부산시 간부들…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 제1화 부산지하철 뚝심으로 뚫다①
8년 9개월 지하철본부장 지낸 임원재 씨
부산지하철 필요성 35년 전 첫 제안
 

“지하철을 놓자니? 돈이 없어 도로도 못 넓히는데, 어느 세월에 땅 밑을 뚫어서 길을 내자는 말이요? 그 엄청난 돈이 있으면 도로 확장할 생각부터 해야지…. 출퇴근 시간마다 교통대란이 일어나는 게 보이지도 않소? 도대체가 현실에 맞는 소리를 해야지, 원….”

부산에 지하철을 놓아야 한다고 했을 때 부산시 간부 공무원들의 첫 반응은 싸늘했다. 마치 팔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최신 유행 스마트폰이나, 블로그·트위터 같은 인터넷매체를 이야기할 때의 머쓱함과 같은 기분이랄까. 우선 지하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부산은 바닷가라서, 암반층이 많아서, 매립지가 있어서, 지하철을 시공할 수 없다는 제법 그럴 듯한 반대 이유를 대는 간부도 있었다. 공통적인 반응은 모두가 두 손 들어 반대한다는 것.

부산에 지하철을 놓아야 한다고 했을 때 부산시 간부 공무원들의 첫 반응은 싸늘했다. 그러나 지하철 말고는 답이 없었다. 좁은 땅에, 실타래처럼 엉킨 부산의 도로망, 미어터지는 시내버스, 도시계획 없이 들쭉날쭉 들어선 건물들을 감안하면 지상교통 확충만으론 한계가 있었다(위 사진은 1970년대 중반 부산 시내버스 승강장 모습).

때는 1976년, 정확히 3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에 지하철을 놓자는 첫 주장은 이 해 여름쯤 나왔다. 맨 처음 부산 지하철 건설을 제안한 사람은 임원재(78) 씨. 그는 이후 무려 8년9개월간 부산지하철 본부장을 맡아 갖은 반대와 난관을 뚫고 ‘부산도시철도’ 건설이라는 대역사를 일궈낸다. 부산의 도시발전을 이끈 주역이요, ‘영웅’이다. 부산의 현대 발전사에 한 획을 그은 ‘큰 일꾼’으로 손색없는 인물이다.

부산지하철 건설을 일궈낸 임원재 씨.

임 본부장이 지하철 건설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부산시 도시계획과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원래 저는 ‘수도쟁이’였어요. 고지대 급수사정이 좋지 않아 물동이를 이고 종종걸음을 치던 때였습니다. 회동수원지에 상수도를 놓는 일을 거쳐 그 무렵에는 상수도 시설과장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도시계획과장으로 발령이 난 겁니다.”

도시계획과장으로 발령받아 각종 서류를 챙겼다. 2015년도를 목표로 한 ‘부산시 도시기본계획’이 마련돼 있었다. 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보았으나 시민생활과 가장 밀접한 교통문제를 근본적으로 풀어갈 방안은 미비하기 짝이 없었다. 2015년에 대비한 교통해결책이라는 것이 고작 도로를 넓히고, 모노레일을 놓는, 지상교통 확충방안에 불과했다. 지하철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론은 건설 불가로 나 있었다. 바닷가에 암벽이 많고, 매립지가 있는 부산 사정으로는 지하철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근본적인 교통해결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땅에, 실타래처럼 엉킨 부산의 도로망, 미어터지는 시내버스, 도시계획 없이 들쭉날쭉 들어선 건물들을 감안하면 지상교통 확충만으론 한계가 있고, 당장 10년 뒤만 생각해도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이건 아니다 싶었지요. 그때부터 교통관련 책을 사보고, 외국 사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인구가 150만명이 되기 전에 지하철 공사를 시작하는 게 세계적 추세였습니다. 당시 부산인구는 300만명을 넘었으니, 세계적인 도시들을 볼 때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임본부장의 기억에 따르면, 박영수 당시 부산시장의 반응 역시 간부 공무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날 다른 결재 건으로 시장실을 찾았다가 지하철 이야기를 꺼냈다. 시장의 질문이 이어졌다.

“지하철 놓는데, 돈이 얼마나 드요?”

“2천200억쯤 듭니다.”

사실은 5천억 정도가 들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시장의 반대를 감안해, 절반 이하로 낮춰 보고 했다.

“부산시 건설예산이 얼만 줄 아시오?”

“건설부문 예산이 2천500억쯤 됩니다.”

“시장이 쓸 수 있는 예산이 얼만 줄이나 아시오?” 임 본부장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장의 말이 이어졌다.

“내 재량으로 쓸 수 있는 예산이 한해 200억 남짓이오. 그럼, 지하철 공사 10년쯤 한다 치고, 나는 그 10년 동안 한 푼도 쓰지 말란 말이요? 그만, 치우소!”

지하철 놓기보다 반대 설득 더 힘들었다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 제1화 부산지하철 뚝심으로 뚫다②
거듭된 퇴짜에도 지하철 건설 끝까지 주장
차트 100장 보고서 작성 4시간 토론 설득
박영수 시장 “지하철, 놓긴 놓아야겠구먼!”
 
박영수 당시 부산시장으로부터 부산지하철 건설 결심을 받아내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백지 전지에 무려 100장의 차트를 만들고, 4시간이 넘는 보고 끝에야 비로소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사진은 1984년 지하철 1호선 터널공사 현장순시를 나온 최종호 당시 부산시장과 부산시 간부들에게 임원재 당시 부산지하철 본부장이 현황설명을 하고 있는 모습.

부산에 지하철을 놓자는 첫 주장은 여지없이 뭉개졌다. 부산시 간부들의 반응은 냉소에 가까웠다. 박영수 시장 역시 움직일 수 없는 큰 바위 같았다. 절대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76년, 정확히 35년 전의 일이다.

당시 부산시 도시계획과장으로, 지하철 건설을 처음 주장하고, 그 뜻을 끝끝내 관철시켜낸 임원재 씨의 이야기다.

“어느 누구도 제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코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지하철 말고는 얽히고설킨 부산의 교통난을 풀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확고했거든요.”

시장실에서 쫓겨난 며칠 뒤 다시 시장실을 찾았다. 간단한 보고서도 만들어 들고 들어갔다. 그 정도 퇴짜를 맞았으면 물러설 만도 했으련만, 어디서 뱃심이 생기는지 그도 알 수 없었다.

“시장님, 진짜 지하철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지금 시작해도 늦습니다. 동래고, 연산동이고, 서면이고, 얼마나 차가 밀리는지 시장님도 잘 알지 않습니까?”

시장 앞으로 슬그머니 보고서를 내밀었다. 그러나 시장께선 보고서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역정 섞인 고함이 되돌아왔다. “그 많은 예산을 어디서 끌어다 쓴단 말이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소. 아, 참, 똑 같은 말을 사흘도 안돼 또 늘어놓는단 말이고….”

그 길로 시장실에서 밀려 나왔다. 2주 뒤 이남두 부시장실에서 확대 간부회의가 열렸다. 부시장이 주재하고, 실·국장 과장이 모두 참석하는 회의였다. 회의가 끝난 뒤 급하게 나가는 기획관리실장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당시 부산시 기획관리실장은 김화섭 씨였다.

“실장님, 부산의 교통대란을 근본적으로 풀 수 있는 방법은 지하철을 놓는 것밖엔 없습니다. 실장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시장님께선 제 보고조차 받아주지 않습니다. 실장님께서 부시장님께 말씀 좀 잘 드려 주이소. 부시장님이 시장님께 직접 말씀 드려, 보고 좀 받아달라고 말입니다.”

“허어, 이 사람이. 시장님께서 받아주지 않는데 누가 보고를 대신 한단 말이고? 타당성이 있어야 말이라도 붙여 보던가 하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부산 현실에서 지하철을 놓자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꾸….”

불끈 화가 치솟았다. “그래요? 도리가 없네요. 기자실 가서 기자회견을 좀 해야겠습니다.”

돌아서는 기획관리실장의 등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그런 말을 준비한 것도, 그럴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순식간에 열통이 터져 얼토당토않은 억지를 쓰고 만 것이었다. ”이 사람, 안 되겠구먼. 당신이 뭐라고, 어디 가서 기자회견을 한단 말이요?”

나무라는 기획관리실장에게 다시 맞고함을 질렀다. “실장님, 부산시민을 생각한다면 진짜 이러면 안 됩니다.”

물론 기자실은 찾지 않았고, 기자회견도 하지 않았다. 일개 과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한 가슴을 억누르고 있던 중 변화가 감지됐다. 기획관리실장이 말씀을 드렸던지, 부시장이 시장께 잘 말씀드려서 보고 날짜를 잡아 준 것이었다.

“당시에는 한달에 한번 시장이 주재하는 구청장, 실·국장, 과장회의가 열렸습니다. 부산의 모든 구청장과 시청 간부가 한자리에 모이는 회의지요. 아, 그런데 이 회의가 끝나고 바로 브리핑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지금과 달리 전자결재라는 것이 없었다. 중요한 결재사항이나 건의사항은 백지 전지로 차트를 만들어 차트걸이에 걸어놓고 보고하곤 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백지 전지에 쓴 차트는 무려 100장, 혼자서는 들 수도 없었다.

“확대간부회의가 끝난 뒤 회의실에서 곰탕으로 점심을 때우고, 보고를 시작했습니다. 곰탕은 당시 꽤 유명했던 중앙동 옛 시청 앞 ‘천안드람집’에서 배달을 시켰습니다. 간부회의에 참석한 구청장, 실·국장, 과장 전원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무려 100장에 달하는 차트 보고과정에서 찬반논란이 이어졌다. 고성도 오갔다. 건설국장을 비롯한 기술직 국장들의 반대가 더 심했다. “그 막대한 돈이면 도로를 확장하겠다” “시가지 중심지역이 인근 산의 암반으로 매립돼 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기술적으로 지하철 건설은 불가능하다….” 반대 목소리는 끝이 없었다.

오후 1시에 시작한 보고와 토론은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반대 논리를 하나하나 설득하는데 무려 4시간이 넘게 걸린 것이었다. 박영수 시장은 그 4시간 동안 자리를 지켰고, 보고와 토론, 설득 과정을 지켜봤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 과장 말이 맞기는 맞는 것 같네. 지하철을 놓기는 놓아야겠구먼!”

부산 1977년 … 마침내 ‘지하철 건설’ 결단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제1화 · 부산지하철 뚝심으로 뚫다 ③
 

“듣고보니, 부산에도 지하철을 놓긴 놓아야겠구먼.”

박영수 시장의 이 한마디에 몇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부산에는 지하철을 놓을 수 없다며 반대하던 기술직 국장들이나, 자리를 함께 한 구청장들은 더 이상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회의장은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침묵이 찾아들었다. 박 시장이 침묵을 깼다.

“임 과장, 그럼 무엇부터 하면 되겠소? 요구사항이 뭐요?”

“예 시장님, 우선 두 가지를 해결해 주십시오. 하나는 지하철건설을 전담할 기구를 만들어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하철 기본계획을 수립할 용역비 2억원을 책정해 주십시오.”

박영수 부산시장은 현안에 대한 결단이나 결정이 대단히 신중했다. 하지만 가야할 방향을 정하고,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추진력이 남달랐다. 지하철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보고도 안 받고 매몰차게 내몰았으나 결심을 굳힌 뒤로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업무를 지시하고 추진했다.

마침내 부산에 지하철을 놓겠다는 박영수 시장의 결단이 내려졌다. 부산지하철 건설을 기안하고, 뜻을 관철시킨 임원재 씨는 박 시장에 대한 첫 보고에서 2천650억원을 들여 구서동∼구덕운동장간 22.5㎞ 구간에 지하철을 놓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부산시는 지하철 건설에 앞서 시민들에게 이같은 기본구상 설명회를 열었다. 1979년 가을 서면극장 앞 대로변에서 당시 부산지하철 기획단장이었던 임 씨가 기본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박 시장은 ‘지하철 건설’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회의장에서 바로 업무지시를 내렸다.

“기획관리실장, 전담기구 설치는 내무부에 상신하고, 기본설계 용역비 2억원은 내년도 예산에 반영하도록 하시오.”

4시간이 넘는 보고와 토론, 끈질긴 설득 끝에 부산에 지하철을 건설한다는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1977년 여름쯤의 일이다. 부산지하철 건설을 기획하고, 보고하며, 시장의 최종판단을 끌어낸 임원재 씨(당시 부산시 도시계획과장)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실 용역비는 5억원 정도 들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용역비를 많이 요구하면 부산시 재정여건상 안 줄까 싶어 줄이고 줄여 2억원을 요구했습니다. 2억이면 대충적인 기본계획과 1호선 건설기본계획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하철 기획단은 정원 25명을 요구했구요.”

부산지하철 건설 결정이 내려진 날 임원재 씨는 도시계획과 직원들과 모처럼 만에 회식자리를 가졌다. 그의 머리 속에는 지금도 특별히 생각나는 두 사람이 있다. 계획1계장을 맡았던 윤종문 씨(훗날 부산시 건설본부장)와 계획1계 직원이었던 송기원 씨다. 부산지하철 건설 구상에 생각을 함께 했고, 외국의 지하철 건설사례 같은 자료수집에도 열심이었다. 특히나 송기원 씨는 10여년 뒤 영도구청 건설국장으로 발령받은 뒤 6개월여 만에 순직, 안타까움이 더하다. 그는 원래 간염이 있어서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환영파티서 부구청장이 저간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술을 먹여 돌이킬 수 없는 건강악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을 기획하고 추진한 사람은 양택식 서울시장이었다. 철도청장을 하다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양 시장은 부임과 동시에 ‘대서울 건설’이라는 시정목표를 내걸었다. 재임 4년간의 업적 중 첫 손가락 꼽는 것도 바로 지하철 건설이다. 서울은 말하자면 서울시장이 주도해서 지하철을 건설했다. 그러니 일사천리였다. 철도청장 출신이라 철도청에서 가장 우수한 직원 26명을 차출해 서울지하철본부를 구성했다. 서울도 그렇게 했는데, 부산으로선 당연히 지하철 건설을 전담할 기구가 필요했다.

해가 바뀌자 박영수 시장은 임 과장을 기획관리실장 직속의 설계기술단장으로 승진 전보했다. 직원은 25명이었다. 1978년 4월의 일이다.

내무부에 요청한 기구승인 결재가 나기까지는 1년이 넘게 걸렸다. 1979년 초반인데, 문제는 인원이었다. 25명을 요구했지만 13명으로 반토막 기구승인이 난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해 1월에 부산시가 예산반영한 지하철 건설설계 용역비 역시 2억 요구에 1억으로 딱 절반뿐이었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 박영수 시장은 서울시장으로 발령이 나 부산을 떠났다. 후임은 최석원 시장. 임원재 씨로선 기댈 언덕도, 자신의 요구를 귀담아 들어줄 ‘우군’도 잃어버린 모양새였다. 1979년 초 내무부의 기구승인에 따라 부산지하철 기획단이 발족했다. 어느날 최 시장께서 임원재 설계기술단장을 불렀다.

“임 단장, 지하철 기획단장 발령을 내야겠는데, 본청 과장들을 다 불러 의사타진을 했지만 전부 거절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임 단장이 좀 맡아주시오.” 인원 12명에 여직원 1명, 직급은 같더라도 이만저만한 좌천이 아닐 터였다. 업무가 낯선데다, 기술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지하철 기획단장을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최 시장께선 이 사안을 가지고 저를 3번이나 불렀습니다. 결국 마지막엔 엄포까지 놓더라고요. 내무부 기구승인 난 것을 없애던지, 당신이 맡던지 양자택일 하시오. 그러는데 어쩝니까. 결심을 굳히고, 한 계급 강등 당하다시피 자리를 맡을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