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하철 기획단, 지하철 ‘지’자도 몰랐다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제1화 · 부산지하철 뚝심으로 뚫다④
서울, 철도기술자 24명 과장급만 40명
부산, 지하철이 뭔지 모르는 직원 12명
밤새 책과 씨름 안상영 전 시장 큰 도움
 

“‘본청과장 누구도 지하철 기획단장을 맡지 않겠다하오. 당신조차도 맡지 않겠다면 내무부 기구승인 난 것은 없애고, 부산지하철 건설 이야기는 없던 일로 합시다.’ 최석원 시장의 세 번에 걸친 엄포에 기획단장을 맡겠다고는 했지만 막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정원 25명을 요구한 내무부 기구승인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12명, 2억원을 올린 기본설계 용역비는 1억원으로 반 토막 결정이 난 겁니다.”

부산지하철 기획단장을 맡은 임원재 씨의 이야기다. 용역비 반 토막에, 기구도 반 토막, 사무실도 없었다. 부산에 지하철을 놓아야 한다는 첫 주장을 펼쳐, 갖은 반대를 무릅쓰고 그 뜻을 관철시켰으니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일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 기획단장 발령을 받은 게 1979년 5월1일잡니다. 발령을 받긴 받았는데 사무실이 어디 있어야지요. 당시 시청은 중앙동에 있었는데, 시청 별관 선거관리위원회 3층 꼭대기 층에 사무실을 차렸습니다. 너무 더워서 비워두고 있던 공간이었는데, 사무실을 차리고 일을 시작하려니 한여름 아닙니까.”

그의 말대로 한낮엔 옥상 열기가 그대로 훅훅 내리쳤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 낡은 선풍기 2대만 탈탈거리며 뺑뺑이를 도는데, 출근해서 일도 하기 전에 온 몸이 땀에 절기 일쑤였다. 낡은 철제 책상을 여기저기서 구해다 직원 12명으로 사무실을 꾸렸다. 지하철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직원들로 구성되다 보니 의욕적으로 시작한 지하철 건설계획과 건설이 막연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서울 견학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하철을 건설해 운영하고 있던 곳이 서울시였으니까요.”

직원 12명 모두를 이끌고 서울 길에 나섰다. 당시 서울지하철 본부장은 신문수 씨, 차장은 안상영(전 부산시장·작고) 씨였다. 안상영 씨가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할 때 임원재 씨는 부산시 도시계획과장이었기에 두 사람은 제법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안 차장의 주선으로 신 본부장 등 서울지하철 직원들과 점심 자리에 마주앉았다. 자리에 앉고 보니 서울은 과장급 이상 간부만 40여명, 부산은 전 직원이 12명이었다. 신 본부장이 물어왔다.

“부산은 지하철 직원이 몇 명입니까?”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입니다.” “12명은 모두 철도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걱정 반, 한심 반이라는 표정으로 다시 자문자답을 늘어놓았다. “땅굴 하나 뚫는 것도 아니고, 경험도 없는 이 소수의 직원으로 어떻게 지하철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요? 서울은 철도청 우수 기술자를 몽땅 빼와서 공사를 해도 이런저런 사고가 많이 났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안상영 씨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당시 서울지하철 건설본부 설계계장이었다. 사실상 서울지하철 1호선 설계와 시공을 맡은 내로라하는 토목 전문가였다. 그 역시 대단히 걱정스럽다는 듯 한마디를 거들었다.

“임 형도 아시겠지만, 서울은 10년전 양택식 서울시장이 중점사업으로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시장이 앞장을 서면 그만큼 일하기가 수월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양 시장께선 철도청장을 거쳐 왔기에 철도청 전문인력 중에서도 우수 기술자만 24명을 차출해 왔습니다. 그래도 시공하는 과정에 시행착오가 생기고 생각지도 못한 사고가 터졌습니다.”

그가 말하는 요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한 도시의 교통망을 바꾸는 거대한 사업에 우선 일할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고, 그나마 한명의 전문가도 없이 어떻게 지하철을 놓겠냐는 것이었다.

훗날 부산의 관선·민선시장을 두루 거치면서 부산의 도시발전을 이끌던 중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안상영 씨와는 이때부터 친해졌다. 시간만 나면 찾아가서 지하철 공법이나 시공방법을 묻고, 밤이 늦도록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어로 된 ‘지하철 건설 핸드북’을 구해다 새벽 2∼3시까지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보통 건축·토목 전문가들이 쓴 책은 기술적인 것만 생각하고, 기술적인 부분만 나열하기 십상인데, 1천30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은 신호체계에서 관리운영, 기술까지 망라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면 직원들을 이끌고 나갈 수가 없잖아요. 죽어라고 공부해서 직원들을 가르치는 방법 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책으로 기본지식을 습득한 뒤로 실무를 익히기 위해 외국시찰을 나갔다. 프랑스, 독일, 스웨덴 기술자들을 주로 만났다. 오사카, 도쿄, 홍콩까지, 지하철이 있는 곳은 빠짐없이 돌았다. 프랑스 지하철은 그 형태가 다양했다. 좁은 지형을 감안하고, 오래된 도시 원형을 살려 심지어 길이 7m, 폭 1m50㎝에 불과한 전동차가 골목길을 지나가게 만든 것도 있었다. 곡선이 심한 곳에는 고무바퀴 전동차도 있었다. 어느 정도 감이 잡혀갔다. 이제 부산도 1호선 기본설계에, 차량의 규격, 차량의 크기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된듯 싶었다.

1979년 부산지하철 기획단이 출범했지만, 지하철이 뭔지 아는 직원은 한명도 없었다. 오로지 책을 읽고, 견학을 하며, 견문을 넓히고 지식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지하철 기공에 앞서 김무연 부산시장(오른쪽 서명하는 사람)이 영국 철강회사 브리티시스틸 사장과 지하철 건설용 강재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모습. 김 시장 옆 서류봉투를 앞에 둔 사람이 임원재 씨, 그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이재오 당시 부산지하철 기획단 설계계획과장이다.

“부산 전동차 크기를 서울에 맞추라니”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제1화 · 부산지하철 뚝심으로 뚫다 ⑤
 

“부산지하철 전동차 크기를 서울과 같은 규격으로 하라니요?”

“부산이 서울을 따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부산과 서울은 엄연히 인구가 다르고, 지형이 다릅니다. 차량 폭을 똑같이 하라는 말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습니다. 부산은 부산특성과 실정에 맞춰 해야겠습니다.”

전동차 규격을 놓고 정부와 부산, 부산과 서울업체간 한바탕 입씨름이 벌어졌다. 입씨름 정도가 아니었다. 국내굴지의 대형업체들은 외부 압력을 행사하며 로비를 벌였고, 정부 관련 부처는 상당 부분 업체와 뜻이 맞아 있었다. 1980년의 일이다.

부산지하철 전동차는 서울보다 폭이 좁고, 길이가 짧다. 업체로비를 받은 정부는 부산 전동차를 서울 규격에 맞출 것을 종용했지만, 부산은 부산인구와 지형특성에 맞추겠다며 버텨 결국 뜻을 관철시켰다. 사진은 부산지하철 1호선 개통에 앞서 가진 시승식 모습. 왼쪽 모자를 쓴 임원재 부산지하철 기획단장이 한 방송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지하철 건설을 위해 필요한 첫 단계는 토목공사 설계다. 토목공사 설계를 하려면 가장 먼저 전동차 규격과 전기공급 방식을 결정해야 했다.

상공부, 업체로비에 “서울 맞춰 표준화하자”
부산, “인구·특성 따라 하겠다” 끝내 버텨

“어느 날 상공부(지금의 건설교통부)에서 ‘차량규격 표준화회의’라는 것이 열렸습니다. 서울시 지하철본부장, 철도청 관계자, 국내굴지의 D, H그룹 관계자들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회의 명칭에서 보듯이 말이 회의지 이미 결론을 내놓고, 차량규격을 서울과 통일하는 쪽으로 몰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올라간 우리는 발끈했지요. 한바탕 고성이 오갔습니다.”

당시 부산지하철 기획단장 임원재 씨, 계획계장 조창국 씨, 설계계장 이재오 씨, 전기계장 윤종육 씨 등의 증언이다.

“세계 어느 도시도 그 도시 실정에 맞춥니다. ‘전동차 표준화’라는 말은 지금껏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하철이 발달한 프랑스는 노선에 따라서 전동차 길이와 폭을 만듭니다. 심지어 고무타이어도 씁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저희들 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부산은 부산대로 도시특성이 있으니, 부산특성에 맞춰야 하겠습니다.”

임 기획단장을 비롯한 부산 지하철 건설의 주역들은 이날 회의에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울의 전동차 규격은 폭 3m20㎝에 길이 20m다. 부산 전동차는 서울보다 폭이 40㎝ 작은 2m80㎝에 길이 역시 2m가 짧은 18m다. 그 이후 건설한 대구, 대전, 광주 등의 전동차 규격 역시 부산과 같다.

전동차의 크기는 장래 이용할 승차인구와 노선의 지형적 여건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상공부는 그런 부분을 무시하고 전동차를 만든 회사(메이커)를 내세워 서울과 같은 규격으로 결정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전문가라고는 없는 ‘부산촌놈’이라 생각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산촌놈’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전동차 규격 표준화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꼭 표준화를 하려면 주요 부품에 대해서 표준화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주요 부품을 표준화 해놓으면 언제라도 소모품을 바꿔 끼울 수 있지 않습니까? 전동차 규격을 표준화시키면 어쩌자는 겁니까? 아예 전동차를 통째로 바꾸자는 이야깁니까?”


서울 폭 3.2m·길이 20m 부산 2.8m·18m
부산 뜻 관철했지만 두고두고 ‘괘씸죄’ 곤욕

부산은 전동차 규격을 서울과 달리 해야 할 이유로 여러 가지를 더 내세웠다. 첫 번째가 공사비. 전동차 폭을 서울처럼 3m20㎝로 할 경우 토목공사비가 700억원이 더 들어간다는 점을 내세웠다. 700억원은 부산 전체 전동차 구매가격의 50%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돈을 정부가 지원하겠다면 3m20㎝로 할 용의가 있다고 대들었다. 또 하나는 인구. 서울은 당시 인구가 1천만명을 넘었지만 부산은 20년 뒤 예상인구가 480만명에 불과하니, 굳이 건설비를 낭비하면서까지 전동차 폭을 크게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또 지하철 노선의 지형여건이 서울보다 불리해 급경사, 급곡선이 많은 지점에도 정거장을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플랫폼과 전동차간 이격거리를 좁히려면 전동차 길이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관계자와 업체 대표들도 만만찮았다.

“상공부와 업체 관계자는 좁은 나라에서 전동차 규격이 도시마다 다르면 제작비도 많이 들고, 생산의 표준화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래서 또 맞받아 쳤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자동차는 왜 여러 가지냐? 길이와 폭을 똑같게 표준화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몇 시간에 걸친 논쟁과 논리 싸움 끝에 결국은 상공부가 부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산지하철 전동차의 폭을 2m80㎝, 길이를 18m로 만든 이야기다.

그날 ‘차량규격 표준화회의’에서 부산은 논리 싸움에서 이겨 뜻을 관철시켰지만 ‘괘씸죄’는 두고두고 치러야 했다. 이후 열린 정부감사 때마다 부산은 전동차 규격 문제를 빌미로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 요즘보다 행정이 다소 어둡고, 지방자치가 아닌 정부 일변도 체제에서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때 부산지하철의 전동차 규격은 잘 결정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다른 지방 도시들이 부산의 전동차 규격을 따라 했다는 것이 그날의 결정이 잘 된 것임을 입증해준다.

“염분 많은 부산에 철판 전동차라니”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제1화·부산지하철 뚝심으로 뚫다⑥
 

전동차 규격을 놓고 정부와 부산, 부산과 서울업체간 한바탕 벌어진 소동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부산지하철 전동차 크기를 서울과 같은 규격으로 하라는 정부와 서울지하철본부, 업체와의 압력을 논리싸움으로 이겨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남아있었다.

정부 관련 부처와 국내굴지 대형업체들은 ‘차량규격 표준화회의’에서 전동차의 재질, 전동차에 전기를 공급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무조건 서울을 따라 할 것을 종용했다. 말이 회의지 전동차 규격을 정해놓고, 재질과 전기공급 방식까지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서울과 통일하는 쪽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짐작컨대, 부산공무원들은 지하철에 대한 지식이 얕은 ‘촌놈’이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라 할 것이라 지레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미는 겁니다. 부산을 낮춰 봐도, 이렇게까지 낮춰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십년 앞을 내다보고 심사숙고하고, 여러 논의를 통해 내려야 할 중요한 결정을 무조건 따라라 하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1980년 당시 부산지하철 기획단장을 맡았던 임원재 씨, 계획계장 조창국 씨, 설계계장 이재오 씨, 전기계장 윤종육 씨 등의 기억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산지하철은 서울과 다른 것들이 여럿 있다. 업자 로비나 정부 압력에 굴하지 않고 부산특성과 실정에 맞춘 것들이다.

부산지하철 전동차는 국내 최초의 스테인리스 강판 소재로 만들었다. 업체로비를 받은 정부는 서울과 같은 철판 재질을 쓸 것을 종용했지만 \"부산은 염분이 많아 금방 녹이 슨다\"며 버텨 결국 뜻을 관철시켰다. 사진은 전동차 재질 결정에 앞서 1979년 임원재 당시 부산지하철 기획단장과 부산공무원들이 서울지하철 군자차량기지창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껍데기를 두고 한바탕 고성이 오갔습니다. 무조건 전동차 차체(외관 및 골조)는 철판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당한 명분도 없었습니다. 서울전동차 재질이 철판이니, 부산도 철판으로 해야 안전하다고 몰아세우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부산은 바다를 끼고 있습니다. 염분이 많을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철판은 금방 녹이 슬어 낭패를 볼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부산지하철 전동차를 철판으로 할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들이댔다.

“부산지하철 1호선은 바다와 접한 구간이 많다. 당연히 지하와 대기에는 염분이 많이 함유돼 있다. 특히나 중앙동∼서대신동 구간은 과거 해안 매립지역이다. 염분에 강하고, 내구성이 뛰어난 스테인리스 강판으로 해야겠다.”

그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정부와 업체 쪽에선 스테인리스는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스테인리스 다루는 기술이 낙후돼 있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몇 시간의 언쟁 끝에 부산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바다를 끼지 않은 서울도 15∼20년이면 껍데기가 녹이 슬어 전동차를 바꿔야 하는데, 부산은 금방 녹이 슬어 못쓰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부산지하철은 국내 최초 스테인리스 강판 전동차가 됐다. 표면에 산화피막이 안정돼 녹이 슬지 않고, 현대감각과 아름다움 측면에서 우수한 1.2㎜ 스테인리스 강판이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1980년대 당시 서울지하철 1∼4호선 및 한국철도공사 전동차에 사용한 2㎜ 일반 압연강판에 비해 부식이 되지 않아 유지보수가 간편하다. 내구연한도 크게 높다. 철판 전동차는 3∼5년 주기로 도장을 해야 한다. 번거로운데다 인력·예산 낭비가 만만찮다. 스테인리스는 녹슬 염려가 없는데다 차체가 가벼워 철판에 비해 10%가 넘는 전력 절감효과도 누리고 있다.

백지상태에서 시작한 부산지하철 건설이었지만, 선진 각국을 돌며 견학을 하고, 메모를 하며, 책을 통해 쌓은 지식은 이미 지하철 건설 경험이 있는 ‘서울사람들’을 앞서 있었던 것이다.

부산지하철이 서울과 다른 것은 또 있다. 전동차에 전기를 공급하는 장치다. 서울은 지하철 전동차가 지나가는 꼭대기에 설치한 전차선(전기공급 동선)이 천장에 붙은 고정식이다. ‘알루미늄 T바’ 밑에 동선을 붙여 전기를 공급한다. 그래서 이 동선은 늘 팽팽한 상태다.

부산의 전차선에는 알루미늄 T바가 없다. 한 가닥을 늘어뜨려서 사용한다. 팽팽하지 않고 빨랫줄처럼 유동적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여기에도 큰 차이가 있다.

서울은 고정식이기 때문에 전동차의 롤링에 관계없이 팽팽한 동선이 전기를 공급한다. 당연히 동선의 마모가 심하다. 반면 부산은 한 가닥을 늘어뜨려 사용하기 때문에 전동차의 롤링 상태에 따라 동선이 아래위로 출렁거린다. 마모가 훨씬 적을 수밖에 없다.

부산이 이 동선을 한번 갈아 끼우는 사이 서울은 무려 열 번, 교환횟수가 부산의 10배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사람들’은 “위험하다. 동선이 끊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며 끝까지 반대했지만, ‘부산사람들’은 끝내 뜻을 관철시켰다.

부산은 지하철 역사에도 서울을 능가하는 비밀이 숨어 있다. 전동차의 브레이크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전동 브레이크를 쓰는 것은 동일하지만 부산은 브레이크를 밟을 때 발생하는 전력을 재사용한다. 근처를 운행 중인 전차가 받아쓰던가, 역사에 필요한 전기로 쓸 수 있도록 시공했다. 이를 통해 부산은 1년에 23억원어치의 회생전력을 사용한다. 서울은 브레이크 발생전력을 태워서 버린다. 회생전기를 쓸 수 있는 시설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은 브레이크 발생전력을 태워 버리는 바람에 지하철 플랫폼이 엄청 덥지만, 부산은 그렇게 덥지 않다. 부산이 ‘일거양득’의 효과를 올리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부산지하철을 대견스러워하고, 자랑스러워해도 되지 않을까.

“서면로터리 부산 상징탑을 철거하라”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제1화·부산지하철 뚝심으로 뚫다⑦
 

1980년 10월 20일. 대망의 부산지하철 1호선 건설기공식이 지하철 서면 시공구간에서 열렸다. 부산으로선 대역사의 첫 삽을 뜨는 날이었다.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서면로터리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길 가던 행인들은 발걸음을 멈췄고, 가게를 하는 사람들은 가게 밖으로 목을 뺐다.

시민뿐만이 아니었다. 손재식 당시 부산시장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이 열일 제쳐두고 빠짐없이 참석했다. 시정자문위원, 평가교수단,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같은 ‘내가 낸데’ 기침께나 하는 사람은 다 모여 지하철 기공을 축하하고, 지하철시대를 염원했다. 언론들도 앞 다퉈 이를 대서특필했다.

“… 부산은 지형적으로 교통량이 주 간선도로인 중앙로에 62%나 집중되어 국제항으로 발돋움하는데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교통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지하철 기공이야말로 80년대를 맞아 풍요로운 항구도시 건설을 위한 일대 전기가 될 것입니다. 공사기간 중 6차선을 4차선으로 축소하여 버스 승용차만 운행하고, 그 외 차량통행을 제한함으로써 교통불편이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지하철 건설만이 교통난 해소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인식, 330만 부산시민은 하루빨리 지하철이 건설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

1980년 10월 20일자 부산시보에 실린 손재식 시장의 축사내용 중 일부다. 축사에서 당시 가장 큰 부산현안이 무엇이었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출퇴근시간만 되면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중앙로의 교통체증이 당시 부산으로선 첫손가락 꼽히는 고민이었다. 지하철만이 교통난을 근본적으로 풀어줄 묘책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공식이 있고, 열 달쯤이 흐른 1981년 초가을 특명이 떨어졌습니다. 서면로터리의 부산 상징탑을 들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부산지하철 기획단장을 맡았던 임원재 씨, 계획계장 조창국 씨, 설계계장 이재오 씨의 기억이다.

“부산지하철 1호선 터파기 공사를 위해 내려진 지상과제였지요. 부산 상징탑을 없애는 것이야 한 시간도 안 걸릴 간단하고 손쉬운 일일 터이지만, 문제는 시민 정서였습니다. 아무리 지하철 공사가 현안과제라고는 하나 그야말로 부산을 상징하는 탑이니 이를 깨부순다면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문제였고, 두 눈 부릅뜨고 이를 감시할 언론의 눈도 피해갈 수 없을 터였습니다.”

1981년 초가을 서면로터리의 부산 상징탑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하철 공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주저앉힌 것이다. 철거 전 회전식 서면로터리 모습이다.

부산 상징탑을 들어내야 한다는 고민은 사실 1년 전부터 시작됐다. 이미 기공식을 갖고 서면로터리를 중심으로 이쪽저쪽 땅파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정상 더 이상은 서면로터리 공사를 미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면로터리 한가운데에는 당시 부산 상징탑이 우뚝 서 있었다. 부산탑 위쪽은 부산이라는 머리글자를 상징하는 ‘ㅂ’자 모양을 형상화했고, 그 ‘ㅂ’자 상부에는 오륙도 형상을 가로로 본떠 넣었다. 부산탑 중앙에는 횃불을 든 남여 청동상을 설치, 부산의 영원한 번영과 부산사람의 발전을 기원했다. 시민정신을 모두 부산탑에 담았던 것이다.

지금 서면로터리는 회전식으로 돌아가는 로터리가 아니다. 신호를 받아서 가고자 하는 행선지로 방향을 잡는 ‘교차로’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 만해도 널찍한 화단을 뱅글뱅글 돌아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로 가야하는 신호등 없는 로터리였다.

난생 처음 부산을 찾는 객지 사람들은 이 부산탑을 보고, 비로소 말로만 듣던 부산의 중심 서면에 왔다는 것을 알았고, 고향에 돌아가서는 서면로터리에 우뚝 선 부산탑을 보고 왔다는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초보 운전자들은 로터리를 빠져나오지 못해 차를 몰고 한나절을 뱅글뱅글 돌다가 결국엔 어지러워서 짝 뻗었다는 좀 과장된 이야기도 더러 남아 있다.

서면에 교차로 형태의 로터리가 생긴 것은 1957년이다. 1957년은 부산이 처음으로 중·서·동·영도·부산진·동래 등 6개 구로 행정구역을 나눈 뜻 깊은 해다. 서면로터리에 부산 상징탑이 세워진 것은 6년쯤 뒤다. 부산시는 1962년 12월 서면로터리에 부산탑 공사를 시작, 이듬해인 1963년 12월 완공한다. 1963년은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한 해다. 부산탑은 직할시 승격을 기념하는 상징물로 오랜 세월 부산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쉽게 부산탑에 손을 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눈치 볼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었지요. 땅은 파야되고 난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로터리 안에는 국산 금잔디를 심었는데, 그 잔디가 참 좋았습니다. 몇날 며칠 잔디밭에 앉아 고민을 했습니다. 건설과, 총무과, 문화공보실 등에 혹 모를 언론보도를 걱정해 협조요청을 해봤지만, 모두 알아서 하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일단 기록을 남겨야겠다 싶어 사진을 찍어놓고, 일을 내기로 했습니다.”

부산 상징탑을 주저앉히는 데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크레인을 가져와서 아주 큰 추를 달았습니다. 그리곤 한방에 주저앉혔지요. 누가 볼까봐 10분도 안돼 재빨리 현장을 치웠습니다. ‘건설쟁이’들은 삭막하다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우리 건설 직원들도 가슴이 짠했습니다.”

예상 밖으로 시민이나 언론은 조용했다. 이렇게 해서 서면로터리의 부산탑은 1981년 초가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날 부산박물관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부산 상징탑의 조형물이 서 있다.

전두환 대통령 “전동차는 일본제로 하지”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제1화 · 부산지하철 뚝심으로 뚫다⑧
 
“각하,스웨덴이 기술적인 측면에서 일본을 능가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스웨덴 전동차 값이 일본보다 조금 비싸긴 해도 차관조건이나 이자율, 거치·상환기간 등을 고려하면 스웨덴과 계약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입니다.”

1983년 5월, 당시 부산지하철 기획단장 임원재 씨는 전두환 대통령 앞에서 부산지하철 전동차 도입을 위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최종호 부산시장과 임 단장, 두 사람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었다. 청와대 회의석상에는 중앙정보부장과 내무·재무·건설·경제기획원·교통부 등 5부 장관, 비서관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서슬 퍼런 5공 시절,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고 긴장감이 팽팽한 대통령 앞이었다.

대통령은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시작했다.

“뭐, 거 부산은 인구도 많지 않고, 멀리서 꼭 가져올 필요 있나? 일본 것 같다 쓰면 무슨 문제라도 있나? 서울지하철도 일본 걸 도입해 쓰는 것 같던데….”

대통령이 말문을 열자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장관들이 덩달아 거들고 나왔다.

“각하 말씀이 옳습니다. 일본도 기술이 좋고, 가까운 나라이니 멀리 유럽쪽 보다는 도입하기가 수월할 겁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대통령의 한마디에 거침없이 결정이 내려졌다. 더 이상 토를 달 분위기가 아니었다.

“네, 각하 말씀대로 일본 전동차를 들여오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각하, 전기·변전설비는 25%가량 에너지가 절약되는 시스템을 도입했으면 합니다.”

“그래? 그런 시스템이 있어? 그건 어느 나라야?”

“네, 각하. 스웨덴 것입니다. 에너지 절약효과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25%나 높고, 송전거리가 길어서 변전소를 드문드문 설치해도 됩니다. 토목공사비도 훨씬 적게 듭니다.”

전 대통령은 잠깐 뜸을 들이며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그러면, 그건 단장 소신대로 하시오” 하고 명쾌하게 결정을 내렸다.

부산지하철 전기·변전설비는 그렇게 해서 스웨덴 기술력으로 시공하게 되었다. 청와대를 나서는데, 최종호 시장이 임 단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니 이 사람아, 아무리 간이 커도 그렇지, 그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전기설비가 어떻고, 변전설비가 어떻고 쫑알쫑알 하노? 대통령 앞에서 그러는 사람 처음 봤다. 당신이 지금 나한테 결재 받는 줄 아나?”

1983년 5월 전두환 대통령은 부산지하철 전동차의 일본 도입 결정을 내렸다. 당초 부산은 기술력이 뛰어난 스웨덴 전동차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최종호 당시 부산시장(왼쪽에서 4번째), 임원재 부산지하철 기획단장(왼쪽)이 부산지하철 도입 강재들을 살펴보고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하철 전반에 대해 일본 것을 선호하는 풍토가 널리 퍼져 있었다. 서울지하철은 전동차에서부터 토목, 설비까지 모두 일본 것을 통째로 들여다 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한번 특정 나라의 것을 수용하면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 시스템으로 변경하는 것이 어려운 게 이쪽 분야 특성이기도 했다. 정부나 서울지하철본부, 철도청, 건설업계는 부산도 당연히 서울을 따라 일본 시스템을 고스란히 도입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임원재 씨의 이야기다.

“부산은 일본을 탈피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습니다. 일본과 유럽을 견학하고 공부하며, 기술력 측면에서 유럽 쪽이 일본을 훨씬 앞선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하철은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기 때문에 까딱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게 뻔합니다. 그래서 기술력에 대한 비교분석을 빈틈없이 하고 있었던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부산지하철은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도입이라거나, 서울지하철보다 월등히 낫다거나 하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우선 부산지하철은 브레이크 시스템이 서울과 다르다. 브레이크는 그야말로 긴급한 상황에서 제대로 말을 들어야 한다. 성능이 뛰어나야 하는 건 철칙이다. 부산지하철 전동차의 브레이크는 철도 브레이크로 가장 유명한 독일 ‘크노(knorr)’사의 제품을 선택했다.

전동차의 쿠션감을 결정짓는 스프링도 마찬가지다. 당시 서울지하철이나 철도는 일본제 코일 스프링을 사용했다. 부산은 영국제 ‘라바 샤브롱’사의 고무 스프링으로 시공했다. 코일 스프링보다 승차감이 훨씬 좋다. 지금은 서울지하철과 우리나라 철도가 모두 이 고무 스프링을 쓴다. 부산이 가장 먼저 도입해, 전국 전동차와 열차로 확산시킨 것이다.

“전동차의 자동제어장치도 부산과 서울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뒷날 왜 돈을 많이 들여서 시공했느냐고 정부의 특별감사도 받긴 했습니다만, 지금도 당시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부산지하철은 무인운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전동차 운전석에는 스위치 2개가 있다. 스위치 하나가 고장났을 때를 대비해 스위치 하나를 더 단 것이다. 기관사가 스위치를 작동하면 승객이 타고 내리는 전동차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힌다. 다음역까지 자동으로 운전하고, 정위치에 정차하며, 다시 객차의 출입문을 여닫는 시스템이다. 기관사가 전동차를 출발하며 파란 버튼만 누르면 출발 - 자동속도 - 최고속도 -감속 - 정위치 정차 - 전동차 출입문 개폐가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물론 수동으로도 얼마든지 운전을 할 수 있다. 서울지하철이나 철도는 당시 기관사가 이 모든 과정을 레버로 조작해야 하는 수동모드였다.

“부산지하철 정차지점은 승강장의 정위치에서 플러스 마이너스 30센티미터를 벗어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본 측에 이 조건을 충족시킬 것을 요구했더니, 도저히 자신들의 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그래서 압박을 했지요. 좋다, 그럼 다시 대통령 재가를 얻어 일본 전동차 도입결정을 취소하겠다고 말입니다. 결국엔 그 요구에 맞추겠다고 손을 들었지요. 일본사람들 기를 꺾으면서, 끝까지 우리 뜻을 관철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