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대단지 사건

읽시 싫으신 분들을 위한 6줄 요약
1.서울의 무하가 주택 주민 10만명을
광주대단지(현 성남)으로 이주
2. 근데 가보니깐 시장도 없고 일자리도 없음.
3. 이런 개떡같은 상황에서 집값 고지서까지 날라옴.
4. 주민 폭동, 참외 트럭,지나가는 버스까지 다 털음 ㅋ
5. 정부 꼬리 내리고 성남시 승격,요구사항 무조건 수용
6. 이들 교통대책으로 내놓은게 8호선 계획.


박정희 정권 중반인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시절, 서울특별시의 무허가 빈민촌 정리 계획이 발단이 되었다. 이 계획은 일부는 무허가 주택을 현지 개량해서 양성화 시키고, 그 이외에는 새로운 주거지를 만들어 그쪽으로 이주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중 하나가
광주 (현 성남시) 대단지 였다.

그러나... 주민들이 주택단지에 도착해보니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10만명이 살 규모의 집들'만' 달랑 지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군사정권식 막무가내 이주 계획의 극치. 당연히 주변에 상권이나 업무시설이라고는 전무했다. 그나마 남쪽으로 내려가면 모란시장 정도가 있긴 했는데, 당시 모란시장은 정말 소규모 면소재지의 5일장일 뿐이었다. 당연히 10만 명이 이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뜨악할 만한 현실에 마주친 사람들이 충공깽 상태에서 미쳐 빠져나오기도 전에, 관할 행정 당국인 경기도청은 주민들에게 집값을 내라는 고지서를 발부했다. 그것도 처음 약속했던 가격의 최소 40배에서 최대 80배가 넘는 가격으로! 처음 토지대금은 평당 200원으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경기도에 의해 청구된 금액은 평당 8천원에서 1만 6천원이었다.

1971년 8월 3일 마침내 세금 고지서가 집집마다 날아들며 주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8월 10일 오전 10시 6만명이 넘는 인파가 성남출장소 앞에 집결하여 세금 감면, 분양가 인하, 공장과 상업 시설 설치, 취업 센터 설치, 구호 사업 등 정부가 애초 한 약속을 이행하거나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해달라고 요구하고, 당시 서울특별시장이었던 양택식과 면담을 시도했다.

그러나 서울시장이 약속되어 있던 면담을 씹어버리면서 면담 장소에 나타나지 않자, 마침내 분노가 폭발한 군중들은 봉기하여 주변 지역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상황에 진압을 위해 전투경찰순경 700여명을 투입했지만, 이미 분노할 대로 분노한 주민들은 전투경찰순경이고 타오르는 불이고 나발이고 뭐고 다 처발라버린 다음에 관리사무소, 파출소 등지에 방화하며 광주대단지 전역을 초토화하였다. 이와중에 버스 노선 하나 제대로 없는 이곳에서 차량만 모두 22대가 불탔다. 당시 전경과 주민들이 대치하던 중에 도로변에 참외 트럭이 지나가고 있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주민들은 일제히 참외 트럭에 달려들었다. 참외는 주민들이 달려든 동시에 한 트럭 분이 광속으로 전부 사라졌다. 이 정도면 그냥 치안 부재 상태에다가 헬게이트 오픈.

대단지 안을 초토화시킨 군중들은 다음 단계로 움직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대단지 주변을 지나가던 승용차, 택시, 버스들을 몸으로 가로막아 멈춰세운 뒤 탑승객들을 모조리 끌어내고 탈취하여 운송 수단을 확보한 뒤 서울로 진격하기 시작한 것.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이에 사건을 보고받은 정부는 내무부 차관과 경기도지사를 현장으로 파견해 이주민들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은 물론, 주민대표에게 정식 사과하고 이주민들의 화를 달랬으며, 8월 12일에 서울특별시장 양택식이 방송 담화를 통해 광주대단지(성남출장소)의 성남시 승격과 함께 주민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시민들이 자진 해산한 끝에 소요는 3일만에 최종 진정되었다.

출처 : 엔하위키


-구 역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