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밥먹고 근력운동하고 왔더니 나도 모르게 일베갔다 사게로 운지했네?
왜? 라도가 그리 두렵더냐? 운마야? 이건 그냥 썰에 불과해. 난 지역비하 안했다. 그냥 개인적인 경험을 말한거 뿐이야.
내가 겪은 라도는 다 그랬다 그거지. 내가 라도 '전부' 가 그렇다는 말을 언제 했지?
내가 17년전의 기억을 더듬어 쓰려니 역시 몇 부분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쓰고 나서 등본 떼 보니 쓴 것과 다른 사실이 몇 가지 있더라.
1. 내 동생이 죽은 건 1996년도의 일이었다. 1998년이 아니고. 제적등본을 떼보고 알았다. 하긴 우리 아버지도 1999년가? 하면서 헷갈려 하시더라.
그리고 1994년엔 유치원을 다닌게 맞고 1995년엔 유치원을 안 다녔다. 그러니까 그냥 집에 있는 어린아이 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일이 일어난 건 1996년이 맞다. 그것에 맞게 수정했다. 내가 유치원에 다닌 기억과 그걸 당한 기억이 융합되어 있었나 보다. 나도 등본 보고 깨달았다.
2. 왼손으로 얻어맞으면 코가 왼쪽으로 휘는게 맞는데 쓰다가 헷갈렸다. 이 역시 수정했다.
3. 현대아파트 건축연도가 1998년이 아니고 1996년이라고 하던데 그건 나도 몰랐기 때문에 1998년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썼는데 누가 지적했더라. 난 그 동네 살질 않아서 정확한 건축연도는 몰랐다.
4. 그리고 배 과수원 이야기 했더니 과천이라면서 주작이라고 하던 새끼 있던데.
씨발 병신아 내가 1996년도에 성수대교 신축공사 짓는 현장에도 가봤다. 압구정동에도 가보고.
지금의 구현대와 신현대 사이에 200동 (몇차인지는 모르겠다.) 지어지기 전에 1996년도 까지 배과수원 있었다.
가서 내가 본 사람인데 주작이래요. 모르면 닥쳐. 내가 역사의 산 증인이야.
5. 압구정 정자는 내가 솔직히 기억이 잘 안나는데 그 동네 살았던 게 아니라서.
나무는 확실하게 있었다. 그러나 압구정 정자는 기억이 명확치 않다. 있었냐? 한명회 압구정 정자?
난 본 듯 해서 그리 쓴거다.
6. 난 바닥에서 잤다. 아기 침대만 있었다는 거지. 침대있다고 부자라고 한 새끼는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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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8년 서울올림픽때 태어났다. 1997년에 imf터졌을 당시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래 나 28대 아재다. 위에 짤 보이지?
꼬추 존나 잘 슨다. 쿠퍼액 짱짱 나온다.
부랄이 스는지는 도대체 왜 묻는 거냐? 병신이냐? 부랄도 스는 물건이냐?
부랄엔 주름 존나 짱짱해서 냉각효과 죽인다. 묻지마라. 이제.
정기적으로 똥꼬주변까지 왁싱해서 미용에도 애쓴다.
(이것도 묻는 새끼 있던데 왁싱샵 가봐라. 14만원에 해준다.)
그래도 꼬추스냐고 처물을 거냐?
아니 시발 28대에 꼬추도 안서면서 무슨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하겠다는 거야.
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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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구로공단' 이라고 불리던 서울의 외곽지역에서 태어났다. 난 판자집에 살아본 경험도 있다.
우리 아버지는 적당한 연령에 나를 가지셨는데 당시에는 백수였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판자집 사는 백수와 무슨 똥배짱으로 같이 살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90년대생 20대 게이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나 어렸을 당시 90년대 후반 imf시절엔 서울엔 판자집이 매우 흔했다.
심지어 서초구 강남구 분당에도 존나게 많았고 (지금의 송파구 문정동, 장지동, 수서역 아파트단지도 전부다 달동네였다.)
보광동 이태원 효창동 / 구로 개봉 온수 가리봉
신림 봉천 존나게 많았다. 그거 달동네 다 밀어버리고 아파트 지은거야.
제대로 생긴 집도 '아궁이' 있는 집 많았다. 연탄 온돌같은 소리하네.
다행히 어머니가 손재주가 있어 **으로 *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공무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무원이 아닌 것도 아닌 직장에 취직을 하였다.
아마도 어머니가 아버지 먹여살려서 취직시킨 것 같다.
당시에는 게이 니들도 알다시피 거의다 서울에 공장밖에 없었다. 의류공장에 공돌이들 말이다...
90년대 말야. 건설, 화학, 철강, 기계, 석유화학 업종이 대부분이었고, 대학나온 인재도 얼마 안되던 시절이라
기업에선 앞다퉈 학생들을 입도선매(立稻先賣)해서 데려갔다.
당시에는 화학, 화공, 기계공학과가 최고 인기 학과였다고 한다. (586세대때 말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좋은 직장에 취직을 못했다는 열등감이 있었다고 한다.
결과론적으론 90년대 말기 IMF 때 친구들은 모조리 떨려나는데 아버지 당신은 별 외풍없이 살아남았다면서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씀을 하시더라.
평생 굶어죽지 않을 만큼 보수 받고 정년퇴직하고 많지는 않지만 연금까지 나오니 뭐 그냥 그냥 ㅍㅌㅊ는 하는 인생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큰 돈 못 받는 공무원인 것도 아니고 공무원이 아닌 것도 아닌 직장에 취직해서 별 볼 일 없었는데
다행히 억척스러운 어머니가 장사로 우리 가계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그래서 다 쓰러져가는 10평도 안되는 거 같은 연립주택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당시 화장실변기가 쭈그려쏴 자세였는데 공동변소였다. 당연히 때 되면 분뇨수거차가 와서 퍼간다.
당시 내가 매일 가던 출근하던 장소는 근대화연쇄점 이라는 이름의 구멍가게였다. 연쇄점(連鎖店)은 지금의 체인점을 말한다.
2000년 초반까지 100원짜리 아이스크림 문방구 흔하게 있었다. 서주아이스주랑 200원짜리 쥬시쿨 얼려먹는게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온갖 불량식품은 구멍가게에서 다 팔았던 거 같다.
당시에는 화물용달트럭은 모조리 '포터 트럭이다. 니네 포터트럭 본 적 있냐?
내가 특히 왜 포터트럭이 기억이 나는가 하면 우리 어머니가 손재주가 좋아서 *을 만들기 위해선 종로 **시장에서 **을
매입해서 가져와야 했는데 당시 우리집에 차가 있었을 리 없고 그걸 전부 트럭에 실어서 집으로 보냈어야 했는데
그 포터트럭이 그걸 내가 매일 봤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것이다.
어쨌든 떼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억척스러운 그 시대 어머니 답게 우리집은 조금씩 살림이 나아졌고
당시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강남으로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 선견지명 ㅍㅌㅊ?)
강남에 갔더니 시발 이건 '공단' 지역보다 더 개그지더라. 난 그래서 우리집이 존나게 망했는 줄 알았다.
아 이젠 시발 농사를 지어야 하는구나. 아버지는 밭갈고 나는 새참을 날라야 하는 건 줄 알았다.
그 시절에 제대로 된 동화책이 어디 있어. 금도끼 은도끼 같은 전래동화책이나 몇 권 있었다.
동네 만화가게 가면 고 길창덕씨의 신판보물섬에 아주 날저무는 줄 몰랐을 시절인데. 그런 거나 읽고
강남이라는 시골에 갔더니 농사지어야 하는 줄 알았을 수 밖에. 진짜 모시삼베옷 입고 촌부가 소에 쟁기달고 밭갈고 있더라.
지금의 현대아파트 자리에는 배과수원이 넓게 있었다.
1996년 당시 뚝섬엔 요새 해운대 모냥으로 해수욕을 즐기듯 사람들이 여름에 백사장에 나와서 선탠을 하고 수영을 할 정도였다. (수질 ㅍㅌㅊ?)
상상이 안되지?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 손잡고 분식이랑 김밥싸서 간 기억이 난다. (당시 국가적으로 밀가루음식 쳐먹게 했었다.)
당시에 강남은 한강이 동네개울가같이 보이는 가운데 한명회가 썼다던 압구정 정자가 외로이 서있고
(있었는 지 없었는지 솔직히 잘 기억이 안난다.) 오래된 소나무가 서 있고
지금의 도곡동 근처까지 허허벌판 밭이었다. 난 거기서 개구리잡고 놀았다.
1996년도에 처음으로 그 밭 한가운데 MB가 이끌던 현대산업개발이 현대아파트를 건설했을 거다.
대치동같은 데는 제대로 된 도로조차도 없었다. 학동사거리 지금의 디자이너클럽엔 떡방아간이 있었다.
강남구 일원동은 땅값이 당시에 한 평에 1원이라는 별명을 얻어서 일원동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시절 강남에 와서 밭갈다 그 땅으로 졸부된 부동산졸부 스토리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부모님은 당시에 거기까진 머리가 돌아가지 않으셨던지 땅을 사놓을 생각은 못하셨던 것 같고,
우리 가족은 강남에 그냥 살았을 뿐이다. 처음으로 물내리면 똥내려가는 수세식 변소와 욕조가 있는 집에.
우리 어머니는 아직 어린 나와 갓 태어난 동생을 팽개치고 손재주를 이용한 장사를 한다고 밖에서 바쁘셨다.
내가 김성주회장같은 여걸을 보면 그 생각을 많이 하는데 집에 있으면 살림은 커녕 좀이 쑤셔서 밖에서 억척스럽게 일을 해야하는 그런 여걸들
우리 어머니 세대엔 참 많았던 것 같다. 우리 어머니의 경우는 자기 성취에 미친 양반이라 살림 육아 따위는 관심 자체가 없었다.
갓태어난 애를 젖만 떼자 바로 팽개치고 나갈 정도니. 우리 형제는 전부 남의 손에 컸다.
아버지도 산업화 시대의 역군까진 아니더라도 생업에 바빠 제대로 된 부모자식간의 대화를 거의 해본적이 없다.
부모와 대화를 터놓고 하게 된건 20년 가까이 지난 최근의 일이다.
자, 서론이 길었는데 본격적인 스토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살림 육아에 아무리 관심이 없다 한들, 그렇다고 살림 육아를 안 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그럼 당연히 누군가가 대신 해줘야 한다. 그걸 누가 했을까?
입주 가사도우미? 그런 멋들어진 말은 2010년대에나 만들어진 거고, 그 땐 식순이라고 했다.
(물론 식모라는 명칭도 있었지만 그건 나이 좀 있는 사람에게나 그리 불렀지 나이 어린 애들 식모는 식모라고 잘 안 불렀던 거 같다.)
우리집에 식순이가 있었다. 집이 부자라서 입주가정부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식순이가 있었다고 생각해라. 이게 왜 식순이냐면, 주워왔기 때문에 식순이다.
90년대를 거치면서 라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수도권으로 올라왔다. 그게 지금의 헬 오브 지옥 관악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중에는 전라도 시골에서 먹고살게 하나도 없어서 서울에서 건달 삐끼질하는 10대 애들도 많았다.
학교? 당시 지방에선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존나게 고학력이었다. 중학교 못 마친 사람도 흔했다.
그렇게 10대 여자애들도 서울에 올라와서 강남 영등포에서 유흥업소 나가거나 공장나가거나 대기업 비서로 들어갔었다.
물론 서울역에서 영등포역에서 삐끼질하고 소매치기 하는 년놈들 천지였지.
어머니가 어디 가서 그지꼴을 하고 있는 무작정 상경한 17살 짜리 구걸 소녀를 주워오신 것이다.
말 그대로 주워왔다. 당시 흔한 사람줍 ㅍㅌㅊ?
시발 이런 헬 오브 지옥을 천지개벽하신게 이명박대통령 각하다.
난 2002년 월드컵때 우리집에 mbc 채널 하나밖에 안나오는 삼성tv로 월드컵 4강 오른거 직접 보게 해준것만으로도 국가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또래 병신새끼들이 대부분 민주당빠다. 돌대가리 새끼들. 그 비참한 시대를 똑같이 살았으면서.
그래서 그걸 주워와서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말그대로 집에서 취사와 육아를 맡긴 것이다. 용돈까지 줘가며.
요새같은 염전노예 생각하면 곤란하다.
취직이라고 할 수 있는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받은 용돈을 시골집에 부쳤다고도 한다.
당시에는 우편으로 보내거나 우체국에서 급한 일은 우편으로 보내던 시절이었다.
들어봤냐? 전보? 당시 시골집에는 전화도 제대로 있는 집이 없었으니까.
우리 아버지는 공무원도 아닌, 그렇다고 공무원도 아닌 것도 아닌 직장에 출근하고
어머니는 그게 정말 가계를 위한 건지 자기성취를 위한 건지 모르겠을 일을 하러 나가버리고,
집에는 그 식순이년과 꼬마였던 나와 갓난쟁이 동생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식순이 년이 아버지 어머니가 나가기만 하면 무서운 얼굴로 돌변해서
세상에 모든 증오와 적의와 분노가 가득 서린 실눈의,
심술보와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뚱뚱한 17살 여자애의 얼굴을 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무서운 얼굴로 돌변해서 내 귀싸대기를 때리고 괴롭혔다.
귀싸대기를 때리면 붉은 자국이 남지 않냐고?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올 저녁시간엔 본래대로 돌아온다.
그래서 귀싸대기는 하루 한 대 였다.
귀싸대기를 때리고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온갖 청소를 날 시켰다. 어린 아이에게는 힘든 노동이었다.
하기 싫다고 말을 안 들으면 몸을 꼬집었다. 절대 겉으로 봐선 보이지 않을 부분만.
그리고 멍이 들지 않게 때렸다.
난 나대로 반항했다. 반항하면 물고문을 했다. 욕조에 찬물을 가득 받아 억지로 욕조에 처박아서
고개를 내밀면 쑥 집어넣고 내밀면 쑥 집어넣고
어린아이에게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을까 한 번 상상해보기 바란다. 코로 귀로 입으로 물이 들어오고 죽을 것 같은 공포.
난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매일같이 물고문을 당했다.
그게 괴롭히는데는 때리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그 식순이 년은 그렇게 한 듯 했다.
한참 울다가 히끅히끅 흐느낄 때까지 매일 매일 울었다.
"오늘도 한 번 혼나봐야 쓰겄제잉"
평생 잊을 수 없는 전라도 사투리다.
그 식순이년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부자에 대한 분노? 난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집은 맞벌이하는 보통 가정이었지 딱히 부자집도 아니었다.
스트레스 해소?
우리 부모님은 예의를 지키고 경우가 바른 분이었다. 주워온 애라고 천대하지도 않고 식구같이 대했던 기억이 난다.
난 잘못했다고 울면서 빌고 얻어맞고 물고문을 당하면서도 저녁에 부모님이 돌아오기만 하면 그걸 일러바쳤다. 개김성 ㅍㅌㅊ?
초창기만 해도 개김성이 있었다. 점점 공포와 폭력에 무디어져 갔지만.
저 누나가 날 꼬집고 때리고 물을 먹인다고 (당시에 물고문이라는 말을 몰랐다.)
우리 부모님은 경우가 바른 만큼 사람이 너무 좋았던 것 같다.
(방금전 아버지와 통화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더라.) 뭐랄까 사람을 금방 믿었다고 해야 하나.
집에서 밥해주는 누나가 그럴리가 있겠냐고 어린 아들의 말을 믿어주질 않았다.
하긴 상상이나 가는 짓이었겠냐.
더욱 놀라운 것은 부모님이 귀가하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상냥한 얼굴로 바뀌어
나에게도 갑자기 상냥하게 대한다.
난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를 매일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천사로 바뀐다. 어린 내가 얼마나 혼란이 왔을까 생각해보라.
정신병을 살짝 앓았던 것도 같다.
오히려 그걸 이용해서 **이가 집에만 있으니 답답한 가 보다고 하면서
" 제가 잘 데리고 놀아줄게요. 걱정마세요. "
라는 말을 밥먹듯이 했다. 지금 생각해도 토할 거 같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어김없이 귀싸대기
" 이새끼가 죽을라고 왜 엄마한테 일러바쳐. 오늘도 물좀 먹어보까잉? "
그리고 어김없이 이어지는 물고문.
당시 난 유치원을 아직 다니지 않고 집에 있는 그냥 어린 아이였다.
그냥 집앞에 놀이터에나 나가는. 놀이터에 나가면 또 맞을까봐 집에 들어가기가 싫으니까
늦게 들어갔다.
그러면 왜 늦게 왔냐고 또 고문을 당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런 생활이 무려 1년이나 반복되었다.
내가 청소년이 되고 나서 깨달았는데 그걸 아동학대라고 부르더구나.
어린 동생은 젖은 뗐지만 그래도 보살핌이 많이 필요한 어린아이였다.
침대에 그런 어린 아이를 던지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왜? 운다고 귀찮다고.
그럼에도 난 얻어맞고 또 물을 먹을까봐 부들부들 떠느라 잘못했다고 비느라 동생이 그런 학대를 당하는데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난 게다가 허약체질이라 아주 약한 어린 아이였다.
그러다 어느날은 내 코에 주먹이 탁 하고 잘못 맞았는데 코피가 멎지를 않는 것이었다.
과연 그건 그 식순이 년도 겁이 났는지 그날은 때리지 않고 내 코를 막아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코가 왼쪽으로 휘었는데 (그년은 왼손잡이였다.)
그 이후 1년이 넘게 한 번 코피가 흐르면 잘 멎지 않아서 고생을 했다.
코피가 한 번 나는데 수건이 한장 씨뻘겋게 다 적실 정도로 피가 흐른다면 넌 기분이 어떻겠냐.
난 이렇게 피를 흘리다 죽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 정말 많이 했다.
코피가 하도 멎지 않아서 솜에 바셀린을 잔뜩 발라 그걸 젓가락으로 전부 우겨넣어야 피가 겨우 멎곤 했다.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그게 튀어나오는데 그 때마다 가위로 잘라낸 기억이 난다.
비중각이 휘었다는 진단을 들은건 한참 나중의 이야기다.
부모님은 그런 생활이 1년이 되도록 끝까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 그럴리가 있겠느냐. 너 어린아이가 왜 거짓말을 하느냐. 저 착한 누나가 너한테 그럴 리가 없잖아. "
어머니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믿기에는 세상을 너무 선하게 봤던 것 같다.
그게 내가 그 오랜 세월동안 부모와 반목했던 이유였다.
내가 사업이 망하고 투자에 망하고 술이 꼴아서 부모와 그렇게 쌍욕을 하면서 싸움했던 이유도 바로 그거다.
" 아버지가 그 때 내 말을 믿어주기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 비뚤어지진 않았을 거요. "
그 천사와 악마의 얼굴. 그걸 잊을 거라 생각하나.
사람의 본성과 겉모습이 저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 난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게 라도인의 특성이라는 것도.
그러다 결국 사단이 났다.
내 기억에는 그 일을 겪은게 1998년이라고 생각하는데 더 정확한 것은 호적등본을 한 번 봐야 할 거 같다.
(떼보니 1996년 겨울이었다.)
보살핌과 관심과 케어가 필요한 어린 유아였던 내 동생이 어느날 돌연사를 해버리고 만다.
방에 들어갔더니 어느날 숨을 쉬지 않았다.
난 지금도 그 식순이년이 동생을 자주 침대에 던져서 그리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어린 유아는 계속 안아주고 만져주고 관심을 주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읽은 것은 한참 나중의 이야기다.
사인은 불명인 채로 결국 내 동생은 그렇게 죽었다.
그렇게 동생이 죽은 바로 그날 아침까지도 난 물고문을 당했다.
우리 부모님은 아무런 이유도 없는 돌연사로 아들을 하나 잃었고
그런데 더욱 골 때리는 일은 그 다음에 벌어진다.
며칠 뒤 그 식순이년은 우리집에서 천만원이나 되는 돈을 훔쳐서 사라졌다.
겨우 18살 (우리 집에 1년있었으니) 의 계집년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도 준 집의 아이를 괴롭히고
때리고 죽이기 까지 하더니 (난 그렇게 확신한다.) 결국 돈까지 훔쳐 달아났다.
1996년에 천만원이면 굉장한 돈이었다. 내가 얻어맞고 울다 지쳐 잠들면 온 집안을 다 뒤지고 다녔단 이야기다.
1996년엔 500원 짜리 지폐가 있었다. 그런거 본 적 없지?
돈까지 훔쳐 달아나자 부모님은 그제사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아들의 말이 다 진실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내 부모가 아들에게 어떻게 미안함을 표시했는지 난 그건 기억이 잘 안난다.
오직 기억나는 건 그 년의 얼굴과 괴롭히던 당시의 그 소름끼치는 행동들 뿐이다.
급거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그 년의 집이라고 하던 전라도의 시골에 찾아갔다.
경찰에 분명히 신고도 하였을 것인데 왜 못잡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시골집에 돈을 부칠 때 쓰던 주소와 봉투같은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도년 답게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지만 운좋게도 고향집에 우체국환을 보내던 주소와 봉투같은게 남아 있었다.
1996년 당시에 자가용도 없었던 부모님은 나까지 데리고 전라도 시골까지 어떻게 내려갔는지 난 그 과정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나 기억이 나는 건 굉장한 시골이었으며 엄청난 시간이 걸려 기차를 타고 내려서 버스도
택시도 없는 길을 걷고 걷고 또 걸어서 바다가 보이지 않는 시골집에 다달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다리가 아프다고 우는데도 배신감에 눈이 뒤집힌 부모님은 날 업어주지도 않고 계속 걸어갔다.
아들이 당한 학대보다 돈 천만원이 더 중했단 말인가.
그것 역시 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부모랑 반목했던 이유중 하나다.
왜 그렇게 걸어갔는지 몰랐는데 그 시골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외지인을 태워주지도 않아서
걸어갔다고 아버지가 방금 전화로 말해주셨다. 아 아버지 어머니랑은 20년 가까이는 다 되어서야 화해를 했다.
그리고 그 식순이년의 어미를 만났다.
그 전말은 잘 기억이 안나는데
딱 하나 기억 나는게 있다.
적반하장식으로
집나간 딸년이 훔쳐간 돈을 나보러 어쩌라고? 식이었다.
그래도 왔으니 집에 그 년이 보내온 돈이 있는데 그거라도 가져가고 다신 오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면서 어디 장독대 밑에 독 밑에서 꼬깃꼬깃한 3만원 끄내더니 우리앞에 던져주더라...
배째라 식이더라. 미안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그게 전라도였다.
난 전라도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 tv에서 전라도이야기만 나와도 피가 거꿀로 솟는다.
그리고 지금 약 20년 가까이가 지났는데 지금도 생생하게 어제 일같이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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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통수? 사기? 애교다 시발. 이런 일 라도한테 겪은 놈 있냐?
난 그 어린 나이에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 본성과 욕심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괴롭히고 (심지어는 그럴 즐기고) 죽이고 빼앗는 인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라도가 그렇더라.
그리고 사람의 인상과 관상을 자세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저 놈은 과연 어떤 본성을 지니고 있을까 가만히 경험과 감에 의해서 감정을 해본다.
그리고 그게 놀랍게도 85% 이상의 신뢰성을 보였다.
물론 그 이후로 수많은 라도인들을 만났다.
저 범주에서 벗어나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더군.
작게는 모략, 중상, 뒷담화에서 시작해서 (이건 대학시절)
몰염치, 약삭빠름, 재수없을 정도의 이기심. 이간질, 거짓말 (이것도 대학시절)
여기까지는 애교.
심하게는 사기, 사기를 쳐서 돈을 가져가고 안갚는 배째라,
돈 빌리고 안 갚는 먹튀,
더 심하게는 이쪽에서 보여준 호의를 이용하여 아예 이쪽의 재산을 전부다
삼키려고 하는 간악한 계교까지 (이건 최근)
온갖 케이스를 다 봤다.
나한테 답글다는 어느 라도가 그러더라.
일반적인 경우도 아닌데 일반화해서 ㅁㅈㅎ
모든 '호남사람' 이 다 그런 것도 아닌데 그런 것처럼 말해서 ㅁㅈㅎ
들리는 말로는 '안 그런' 사람도 있다더라.
내가 만난 라도는 100% 였다. 뭐 어쩌라고 병신아. 내가 만난 라도는 100% 였다는데.
니가 겪은 라도는 아니었나 보지. 그건 니 경우고.
내 경우는 아니라는데 우짜라고.
비교적 최근의 케이스는
강원도에 자그마한 건물에 세입자가 라도가 들어왔다.
이게 건물주가 서울에 있는 것을 이용하여
지가 건물주인 것처럼 행세하여 지가 물건을 부동산에 세놓고 지가 보증금을 챙기고
건물주에게는 지가 봉사하여 건물을 관리하고 청소하는 것처럼 속이던 라도도 있었다.
물론? 보증금 챙겨 달아났다.
이건 잡았다. 비교적 빠르게.
난 사람이 나에게 통수를 치거나 배신을 하더라도
그 케이스를 예상하여 역관광이 가능하게 미리 부터 움직이는 편이다.
통수? 안치면 좋지만 치더라도 그닥 데미지 없게 미리 대비를 하는 쪽에 가깝다.
소설이라고? 니 멋대로 생각해라.
내 증오는 변하지 않는다.
난 내 동생도 결국 내가 죽인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좀 더 반항하고 허약하지 않고 좀 더 강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거란 트라우마가 날 지배했다.
내가 근력운동과 주짓수와 종합격투기에 지금도 골몰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이다.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키기 위하여.
네 년은 꼭 찾아낸다.
물론 죽이진 않는다.
살아있는게 지옥인 삶으로 만들어주마.
읽설리
네다역+베
88년생? 68년생 아니냐?
네 다음 테이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