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은 김재익 등의 경제관료를 중용하여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한편 한강의 기적을 거치며 급성장한 산업력과 자본력을 바탕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였다. 순전히 3저호황 덕분이다. 혹은 박정희가 해놓은거 퍼먹기만 했다는 등 전두환의 성과를 폄하하는 의견도 많으나, 사실 전두환 집권 초기때는 2차오일쇼크의 파동이 강하게 남아있어 오히려 유가가 비쌌고, 박정희가 남겨놓은 부작용이라 할 수 있는 심각한 스태그플레이션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3저 호황은 전두환 정권 후반기에 찾아왔고,[1] 이때의 혜택을 본격적으로 누린 것은 이른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리던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 초기의 일이다. 또한 한국의 주요 먹거리중 하나인 전자-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 전국 광(光)케이블 매설을 추진하여 훗날 IT산업의 기틀을 놓았다 평가된다.
전두환 정권의 경제성장률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높았다. 솔로우 모형 등에 따르면 보통 1인당 GDP가 증가할 경우 성장률은 하락하기 마련인데,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함으로서 이 추세를 대놓고 뒤엎었다. 수출초과, 경상수지 흑자의 성과를 모두 기록하였다. 또한 70년대 말의 스태그플레이션을 잘 극복한 것도 한몫했다.
우리나라는 이 시기에 오일쇼크 까지 겹치면서 물가가 유례없이 폭등했지만 81년 전두환정권이 출범 직후 21.4%에 달하던 물가상승률이 1년만에 7.2%로 줄었다. 동시에 무역흑자 기조 유지에 발맞춰 외환 보유고를 확대했다. 80년대 중반 미국과 일본의 플라자 합의로 인해서 일본 엔화가 폭등하여 한국산 제품의 수출 경쟁력이 강화되었다.
전두환은 경제 발전이야말로 정권에 대한 불만을 잠재울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쿠데타 성공 직후부터 경제 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1979년 12월 박봉환 경제과학심의회 사무국장에게 경제 과외를 받았고 이는 김재익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전두환 본인도 기본적인 경제적 식견을 갖추게 되었다.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후 김재익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발탁하여 그를 경제대통령이라 부르며 신임했다. 덕분에 하나회 출신 일색의 청와대에서도 김재익은 금융실명제 등을 주장하며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정권 초기 전두환은 김재익 등의 강력한 건의를 받아들여, 일부 반발을 무릎쓰고 강력한 물가안정책을 실시하여 2차 오일쇼크로 유발된 인플레이션을 때려잡고 경제를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전두환은 경제 정책에 관한한 정권의 단기적인 유불리를 떠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금융실명제였다. 김재익은 전두환 정권 초기에 금융실명제 실시를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놀랍게도 전두환은 이를 승인했다. 당내외의 거센 반발 때문에 금융실명제는 결국 좌초되었지만, 경제에 관한 한 놀라운 융통성을 보여준 전두환의 한 예를 보여준다.
전두환은 여러 분야에서 비전문가인 자신의 역량을 확실히 인지하고 유능한 관료들을 중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자기 능력을 과신해서 혼자서 다 하겠다고 설치다 내정도 말아먹고 경제나 국정 운영도 개판으로 해서 나라 말아먹는 독재자는 지구상에 널리고 널렸다. 또한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운영했음에도 하는 일이라고는 세금 헤쳐먹는 일밖에 없는 측근들을 최고 실세로 만들지도 않았다. 독재자였지만 적어도 누구랑 달리 사리분별은 명확히 할 수 있는 독재자였다.[2]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에는 박근혜에게 박근혜의 역량이 대단히 부족하기 때문에 정계에 진출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아버지를 욕보일 수도 있다는 식의 조언을 했으며, 유병언을 똥 보듯 멀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의문의 재평가를 받는 중. 사실 이전부터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기로 유명했으며 이 때문에 국정운영에 있어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전두환의 부정부패, 민주화와 자유를 밟아버리고 총칼로 시민들을 억누른 행적은 비난받아 마땅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국정 운영 자체만으로 보았을 때 경제제일주의라는 단순한 정책을 일관성있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알고 확실히 선을 그어 경제적 성공을 이룬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전두환 시기에는 가계저축률이 역대 최대인 20%로 올라갔고, 내수와 수출규모가 동시에 확대되었다.
1.물가안정화[, 정보화, 수입자유화,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물가 안정화 분야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1980년에 소비자 물가 상승율이 28%였던 것을 1982년에 7%로 줄여버리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83년부터는 아예 3.5%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이를 유지하게 된다. 경제 성장율 역시 80년에 -3.7% 였던 것을 1983년에 12%대로 올린 것을 기점으로, 이후 평균 10%대의 성장율을 기록한다.
- 3저호황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평이 있지만, 김재익이 물가를 안정시킨 시기는 3저호황이 오기 전이다.
- 세계 경제에 상당히 민감한 한국 경제 특성상 김재익 개인의 성과라고만 보기는 힘들지만, 어느정도 영향을 준것은 맞다. 게다가 초창기에는 세계 경제가 오히려 한국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80년 부터 오일쇼크가 끝나고 세계경제가 회복기였던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80~83년이 더 최악이였다!
당시 79년 미연준의장에 취임한 볼커는 스테그플레이션 잡는다고 미 연방금리를 18% !!! 까지 올렸다.
당시 여러 신흥국들이 디폴트를 맞이했으며 한국도 기업인들이 정부만 바라보면서 손가락 빨던 시절이였다.
80~83년에 미국 CNN FOX뉴스등에는 미국전역에서 미국인들이 고금리 때문에 파산자가 속출하여 시위를 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2. 이후 1980년대 중반은 전 세계 경제가 발전하던 일명 3저호황 시기. 한국도 이 흐름을 타서 경제가 어느정도 회복되는데, 이를 기회로 한 전두환 정부의 과잉 및 중복 투자를 정리하는 산업합리화 조치가 크게 기여했다
박정희정부의 정책 상당 부분을 자유경제에 맡기는 방식으로 개편이 이루어졌고, 성장 일변도의 박정희 정부와 달리 물가안정에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특히 중소기업 육성책이 그러하였는데, 1981년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수정함으로써 독과점화와 경제력집중에 대한 규제를 보강한 것, 즉 기업결합과 담합에 대한 제한, 계열사간 상호출자와 상호지급보증의 제한, 순자산액의 25% 타사 주식 보유 제한, 30대 재벌 여신한도규제 등이 그것이다. 한편, 인건비가 크게 올라간 1970년대 말 이후 외국 기업들이 동남아 지역의 더 가난한 나라로 떠나기 시작하였으며 80년대 말에 이르면 한국기업도 떠나가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전두환 정부는 "기술 혁신과 신기술개발투자를 촉진하고, 중소기업 및 부품공업을 발전시켜 대내외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비교우위산업을 육성"하는데 노력했다. 그결과 1980년 1,704달러를 기록한 1인당 GDP는 1989년에 5,737달러로 크게 올라갔고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고, 동서 화합과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민주화의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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