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image.php?id=39afd12feb&no=29bcc427b28b77a16fb3dab004c86b6fdc843afe757fec55b07106ec30f4c6e7cd9d1a4fa5bf4415efc301c07bb1893f85d80504c07f7d


2010년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옆집에 새로 이사온 가족이 인사할겸 우리집에서 저녁을 먹으러 방문을 하셨었는데

내 방을 둘러보시던 옆집 아버님이 코르크판에 걸려있는 철도사진 몇 장을 보면서 굉장히 신기해 하셨었음.

그러면서 택배열차의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보여달라고 하셨는데 "택배열차요? 그게 소화물차량이죠?" 라고 물으니 "어 그거맞지" ...

하드를 뒤적뒤적 하다가 꽤나 오래전인 2005년에 서울역에서 촬영한 소화물차량의 사진이 몇 장 있어서 보여드렸더니 감탄을 하시면서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버님께선 한때 가정생활비가 적자를 금치 못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매우 힘든 일이 있으셨다고 했다. 그래도 자신을 믿고 계속해서 따라주려는 사모님과 이제 갓난아기인 딸을 보니 이꾸려 나가시기를 다시 결심하셨다고... 아무튼 그런 애처로운 사연의 시절이 있으셨었는데 철도소화물 덕분에 가족을 먹여살렸고 지금 딸이 아무 걱정없이 편한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다시 자리를 마련해준 좋은 일자리 였다고 말씀을 하셨다.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지.

솔직히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22살이었던 나는 소화물 직원이 코레일 직영인지 택배업체 아웃소싱 직인지도 몰랐고, 택배업계에 아웃소싱이 즐비하다는 것 조차 모르던 나이였다.


아버님의 설명으론 당시 몇몇 유명한 출판업계의 인쇄를 도맡던 한국인쇄소라는 회사에서 근무를 하셨다고 했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작은 물류창고에서 근무를 하셨었는데, 각 주문자별로 책의 출판을 계약하면 계약 수량에 맞추어 인쇄 및 포장, 출하를 관리하시는 물류과장으로 근무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물량들을 찍어내던 컴페인이라는 기기가 원인도 모르게 불에 타 보관중이던 책들과 생산 대기열에 들어가있던 어마어마한 인쇄지가 모두 전소되었는데, 회사에서는 여러 인쇄창고를 두고 있는데 하필 최초의 화재사고가 이 작은 창고의 화재로 인해 좋지 못한 연혁이 만들어져버렸다고 한다. 회사는 계약업체간의 신뢰는 물론이고 보유하던 인쇄창고 중에서 물량이 잘 나가던 창고가 전소한 것에 큰 손해를 보자 당시 이 창고를 관리하던 최고관리자(소장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그리고 인쇄부터 출하까지 모든 실무를 관리하시던 물류과장이신 아버님을 상대로 법적으로 손해배상 청구를 벌여버렸고 결국 그 결과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빚덩이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그 회사가 얼마나 아버님에게 돈을 많이 주셨냐면 당시에 고급아파트라 불리던 대치동의 은마아파트를 아무 대출 없이 가족을 들여 살릴 정도의 수준이셨는데 하루 밤 사이에 빚덩이를 껴안게 되자 아파트도 넘어가게 되버리고 은평구의 반지하 빌라 한 가구를 소유하던 친척의 덕으로 겨우겨우 방이라도 얻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물류업계에서 창고를 하나 태워먹은 녀석으로 소장과 함께 낙인이 찍혀 여기저기 물류업계에선 취업도 절레절레 시켜주시지도 않았다. 이 상황을 어찌 직감적으로 알았는지 갓난아기였던 딸은 항상 울음을 터뜨렸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으셨던 아버님은 이대론 포기 할 수 없다며 공사판 현장이며, 공업사 막내사원이며 무엇이든 해보았지만 계속해서 따라오는 빚쟁이들이 일자리에서 조차 괴롭혀 제대로 된 직장 하나 구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아버님의 인생이 힘든 나날로 이어져 가는 것을 알았던 당시 대한통운의 모 상무는 아버님과 고등학교 동창이셨는데 아버님과는 차원이 틀릴 정도로 가정이 튼튼한 재벌과도 같은 집안의 자식이어서 젊은 나이에도 대기업 물류업계의 상무로 근무를 하고 계시던 것이 마냥 부러웠다고 했다. 

그 상무라는 동창께서 아버님을 대전으로 대려와 특채를 시켜주셨고 일단은 대전 물류센터에서 컨테이너 한 켠에서 생활을 하며 날이 되면 가족을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창고에서 일을 하고 생활을 하며 빚쟁이 들로부터 은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당시 대한통운에선 지금의 택배상하차 일용직처럼 관리가 되지 않는 허술한 인력관리체계는 허락을 하지 못했고 이 나쁜 상황은 동창이신 상무에게 까지 번지게 될 뻔한 아주 극심한 고통의 결말이 될 뻔 했다고 하셨다.

근데 거기서 또 어떻게 도움의 발이 닿은것이, 상무와 입사 동기이긴 하나 빽이 없어 진급을 하지 못한 분께서 상무의 이러한 소식을 듣고서 또 도움을 주셨다고 한다.

그 분은 철도소화물 쪽의 업무를 맡으셨고, 많이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철도소화물창고와 관련된 지분을 하나 둘씩 늘려가기 시작하시면서 아웃소싱이라는 거대한 꿈을 크게 가지고 계신 주주 회원분이 계셨다. 이 분의 꿈은 물류 하도급 업체를 차려 철도 소화물창고는 물론 향후 발전될 택배업계의 터미널에서 근무를 할 인력들을 대주는 그런 인력업체를 가지시는 것이 꿈이셨다고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그 분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였고 컨테이너 물류의 발전으로 차츰차츰 물량이 줄어드는 철도소화물 사업을 살릴 수 있는 금빛같은 해결책은 아니나 다를까 직영직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회사는 아웃소싱을 통해 노동을 희망하는 일용직 노동자 (아르바이트 쯤이라 보면 됨) 를 인력으로 사용하게 되면 비용도 절감하게 된다는게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서빙고 화물창에 일용직으로 당시 물가 기준으로 일당 8만 5천원으로 일을 하게 되셨는데 아무리 컨테이너 물류에 철도화물 물량이 빼앗긴다 하더라도 쉴틈 없을 정도로 도크에 차량이 주차되었고, 또한 지금의 택배와는 틀리게 당시 택배는 가정용 택배는 둘째치고 산업용 택배가 너무 많았고 굴삭기의 앞에 장착하는 소형 포크도 택배로 보낼 정도로 택배사가 물건을 가리지 않고 차량에 싣으셨다고 한다. 게다가 지금과 같이 자동레일이 개발되어있지가 않아 직접 들고 날라가면서 바닥에 짐을 쌓아 철도차량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쉬다가 또 철도차량이 들어오게 되면 쉴틈없이 차량을 꽉꽉 매웠다고 하셨다.

이렇게 하루 11시간~12시간을 근무하고 나면 서빙고 화물창의 지분을 100% 가지고 있던 회원 분께서 항상 빠트리지 않고 빵과 우유, 그리고 8만 5천원이 담긴 봉투와 함께 적힌 메모는 그에게 하루하루 이어지는 응원과도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빠지지 않는 일당과 응원으로 버티셨던 아버님은 4년쯤이 흐르니 유치원을 보내도 될 만큼 일당이 늘어나셨고 국가의 제도로 빚을 갚을 수 있는 자격조건에도 들어서 서서히 빚을 탕감하기 시작하셨는데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서빙고 화물창에 들어선 열차들은 어떠한 지연도 없이 정해진 시간 안에 상차와 하차가 이루어 졌다는 것이고 전국의 화물창 근무자 중 1등 일용직원을 특채하던 대한통운의 행사는 아버님에게 상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님은 그러한 대한통운의 특채를 받아 일용직 근로를 그만두고 정식 직원으로 고용이 되어 대전 센터로 발령을 받았는데 여기서 엄청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이 전에는 컨테이너 구석과 물류창고를 전전하며 월급을 받을까 말까 한, 생명연장이 주 목표였던 거지몰꼴 이였지. 

그러나 이제는 어느정도 몸이 갖추어진 물류 전문가로써의 모습을 회사가 인정했다는 생각에, 

그리고 생명연장이 아닌 사모님과 딸이 더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절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근무에 임하셨다고 한다.


대전에서 얼마간 근무를 하다가 인터넷 시대의 발달로 대한통운은 인터넷 쇼핑몰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고 여기서 아버님은 냉장물류를 담당하는 성남의 냉장창고로 재발령 받아 근무를 시작하셨는데 여기서 또 두 번째의 위기를 맞으셨다고 한다. 냉장기의 고장으로 인해 대부분의 수산물이 녹아버려 상했고 이는 회사의 전적인 손해로 이어졌는데 다행히 회사는 한국인쇄소만큼 작은 회사도 아니었고 이러한 작은 사고쯤이야 금방 커버를 칠 수 있을 정도의 자본력을 가지고 있던 대기업 이었기에 크게 인력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여기서 자신감을 잃으신 아버님은 왜 내팔자엔 항상 기계가 고장이냐는 그런 미스테리한 사건들이 머리 속을 지배하자 더 이상 근무를 하지 못하고 사직서를 쓰셨다고 한다.


사직서를 쓰고 나오니 십년 가까이 지난 시간은 아버님에겐 대한통운 뿐이었지만 여기 저기선 엄청난 변화과 자격증의 시대가 이어져 적응을 하지 못하셨고 결국 다시 철도화물창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예전과는 틀리게 철도화물창이 하도급 업체에 도맡아 투명적이고 체계적인 운영방법으로 물류가 돌아가게끔 시스템이 갖추어 져 있었고, 다행히도 이전 경력을 하도급 업체에 인정을 받아 이 전에 근무하던 서빙고 화물창의 화물반장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시고 근무를 다시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년마다 떨어지는 물량 감소는 결국 하도급 업체의 흑자를 보장하게 해주지 못해 아버님은 하도급 업체의 일방적인 퇴사통보를 받고 말았고 여기서 아버님은 기존에 근무하던 하도급 업체의 왼쪽 팔쯤 되는 다른 하도급 업체와 계약하여 다시 대전으로 내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3번째 내려온 대전은 이미 택배의 중심이 되었고 문평동엔 메인터미널, 읍내동엔 서브터미널이 자리를 잡히게 될 정도로 대한통운이 차량 택배소화물 사업을 꾸준히 성장시킨 결과라고 하셨다. 택배의 장이자 물류의 장인 대전을 발전시킨 것 또한 대한통운이고 이 곳에서 다시 근무를 하게 되자 이번만큼은 어떠한 일이 없겠지 하며 하도급 업체와 계약을 했는데 여기서 동창이었던 상무가 더 높은 직위로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동창의 지시로 하도급업체는 아버님을 일반 일용직이 아닌 중견관리자로 취직을 시켰고 아버님은 마지막 기회로 대한통운 문평허브터미널의 중견관리자로 일을 하며 자동물류화 체계와 기타 대한통운이 개발한 과학적인 물류시스템에 관련된 공부까지 꾸준히 하셨다고 한다.


그때당시 사진을 보시며 나에게 설명을 하시던 때, 아버님은 대전에서 중견관리자직을 그만 두고 경기도 이천에 의류만 담당하는 택배터미널의 지분을 처음엔 40% 인수하셨다가 차츰차츰 지분을 인수하셔서 그때 당시는 65% 정도의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항공화물운송에 관심이 많으셔 사업을 시작할 쯤이셨다.


내가 결혼식을 올린 날 그 아버님께서 화환을 보내주시고 찾아오셨는데 항공화물업체도 성공적으로 차리셨는지 업체 이름이 반듯하게 적힌 화환이 나에게는 굉장히 무엇인가 감동적인 스토리면서도 대한민국 아버지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시다는 것을 그 분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철도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는 단지 소화물 차량은 그냥 대차달린 철도 화물차량일 뿐인데 이 소화물차 안에서 땀흘리고 다쳐가던 일용직 근로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한 편으론 대기업이 노동직은 나몰라라 일용직을 굴리는 자세가 너무나 비참하다고 지금도 생각이 그렇게 든다.


한 때는 철도 소화물창에서 빵과 우유에 매일마다 감동을 받던 일용직 아저씨가

후엔 든든한 가정을 뒤로하고 링컨을 끌고다니며 의류물류창고와 항공화물업체 하나를 거느린다는 것을 생각하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구라아니고 실화다.. 어디 가서 얘기하면 다 구라라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