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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完成되는 경부고속철도20년간 無知와 싸워 40년 건설기술 앞당겼다
글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우리는 처음부터 고속철도 건설이 다가 아니었다. 독자기술을 갖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기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기술이전을 받기 위해 끝없이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 총 공사기간 20여 년, 총 사업비 20조7282억원 투입
⊙ 朴正熙 대통령, 서해안 지역의 로켓기지 근무자들 위해 고속철도 구상
⊙ ‘고속철도’는 ‘고철 덩어리’ 부실공사 파문으로 실추된 신뢰도 높이기
⊙ 대구-부산 구간 선로는 자갈 대신 시멘트 깔아
⊙ 총 공사기간 20여 년, 총 사업비 20조7282억원 투입
⊙ 朴正熙 대통령, 서해안 지역의 로켓기지 근무자들 위해 고속철도 구상
⊙ ‘고속철도’는 ‘고철 덩어리’ 부실공사 파문으로 실추된 신뢰도 높이기
⊙ 대구-부산 구간 선로는 자갈 대신 시멘트 깔아

경부고속철도(KTX) 2단계 사업인 대구-부산 구간(128.6km)이 완공돼 10월 28일 개통식을 갖고 11월 1일부터 운행에 들어간다. 1단계 사업인 서울-대구 구간이 2004년 1월에 개통된 이래 6년4개월 만이다. 그동안 대구-부산 구간은 기존선을 전철화해 운행해 왔다. 경부고속철도 전 구간(서울-광명 간 17.5km, 대전ㆍ대구 도심 구간 연장 40.9km 제외)이 전용선화됨에 따라 서울-부산 간 소요시간도 2시간40분에서 2시간18분으로 단축된다. 현재 공사 진행 중인 대전ㆍ대구 도심 구간까지 2014년 완공되면 2시간10분 만에 주파하게 된다. 서울과 부산이 그야말로 반나절 생활권이 되는 것이다.
경부고속철도 사업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총연장 417.5km에 이르는 구간에 시속 300km로 달리는 초고속 열차의 구조물과 시설물 및 시스템을 건설하는 작업이다. 그 규모 때문에 단군 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으로 일컬어져 왔다. 완공하기까지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총 사업비 20조7282억원이 투입됐다.
경부고속철도는 노선ㆍ설계 변경 논란, 차량 선정 의혹, 부실시공 파문 등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고속철도 건설 경험이 전무한 까닭에 수없는 시행착오와 그로 인한 혼선이 잦았다. 건설기간 동안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IMF(외환위기)가 닥치는 등 악재도 많았다. 급기야 김영삼(金泳三) 정권에서 김대중(金大中) 정권으로 교체되는 시기에는 백지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난관을 한국인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극복했다. 그 결과 일본(신칸센 1964년), 프랑스(테제베 1981년), 독일(이체 1991년), 스페인(아베 1992년)에 이어 세계 5번째 고속철도 보유국이 됐고, 이제는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독자개발기술을 보유한 선진국과 어깨를 견주는 철도 수출국이 됐다. 또한 현장에서 탄생한 토목공법과 건설기술은 대한민국 토목ㆍ건설 역사의 새 장(場)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부고속철도 전 구간 개통을 기념해 건설주역들을 만났다. 경부고속철도 건설에는 수많은 시공사와 협력업체가 참여했다. 토목 관계자들은 1단계 구간만 250여 개 시공사와 650여 개의 협력업체가 참여했고, 현장에 투입된 연인원이 1200여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했다. 기자는 좀 더 정확한 통계를 알기 위해 한국철도시설공단에 자료를 요청했으나 “참여한 업체와 인원이 셀 수 없이 많은데다 조직과 담당자가 여러 번 바뀌는 바람에 가지고 있는 기록이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1970년대 초부터 구상
‘땅 위를 달리는 비행기’ 고속철도 건설은 고도의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시속 300km에서 발생하는 풍압과 고주파 진동에도 끄떡없는 차량과 운행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까닭이다.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는 일본의 신칸센이다. 도쿄와 오사카를 잇는 신칸센은 당시 세계 최고 속도인 210km를 자랑하며 도쿄올림픽 개막을 10일 앞둔 1964년 10월에 개통,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은 이보다 40년이 뒤진 2004년에야 고속철도를 개통했지만, 사실 건설 논의는 이보다 훨씬 앞선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 국가 물류망의 기본 축인 경부고속도로의 수송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고속철도 건설이 추진됐다. 당시 철도청 시설국 건설과에 재직하며 노선을 검토했던 신종서(申鐘瑞) KRTC(구 한국철도기술공사) 회장의 말이다. “당시에는 노선이 서울-부산 간이 아니라 서울-대전 간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해안 지역에 있는 로켓기지 근무자들이 서울을 쉽게 왕래할 수 있도록 서울-대전 간 고속철도를 구상했습니다.”
고속철도 건설이 좀 더 구체화된 것은 서울올림픽이 5년여 앞으로 다가온 1983년 3월, 신 회장이 철도청 시설국 건설과장으로 있을 때다. 당시 철도청은 일본과 프랑스의 교통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 도입 타당성 조사를 실시했다. 정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신칸센을 개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일본을 상기시키며 고속철도 건설에 의욕을 보였으나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고속철도 건설이 재개된 것은 1987년 12월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사업 추진을 대선공약으로 내걸면서부터다. 노태우 정권은 1989년 7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본 계획을 발표했다. 철도청과 교통개발연구원이 주관 기관으로 선정됐고, 미국의 기술개발 회사인 루이스버저(Louis Berger)에 기술조사 및 기본 설계 용역을 주었다.
한 철도인의 先見之明
이 무렵 철도청 안에 고속철도건설기획실(후에 고속철도건설기획단으로 조직 변경)이 생겼고, 신종수 회장은 건설계획 담당관을 거쳐 건설국장을 지냈다. 고속철도 건설이 본격화된 1992년부터는 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설립된 고속철도건설공단에서 건설 본부장으로 근무했다. 신 회장은 고속철도 건설의 기틀을 다진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루이스버저에 기술조사와 기본 설계 용역을 준 것은 잘못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기술조사 및 기본 설계는 교통개발연구원이 맡았어요. 그런데 교통개발연구원은 그 일을 우리와 상의도 없이 미국의 루이스버저에 용역을 줬습니다. 국내업체에 주면 말들이 많은데다 객관적 검토가 필요해 일부러 해외업체를 끌어들인 것인데, 문제는 루이스버저가 고속철도를 운행하고 있는 독일이나 프랑스, 일본 회사가 아니라 고속철도가 없는 미국 회사라는 데 있었어요. 뭔가 자료가 나오고 배울 것이 있는 곳에 줘야 하는데 전혀 엉뚱한 회사에 일을 맡긴 것이죠. 이 때문에 교통개발연구원은 물론 루이스버저와도 마찰이 많았습니다.”
이미 발주가 끝난 뒤라 업체를 교체할 방법이 없었다. 기술조사와 기본 설계를 공단 건설본부와 루이스버저가 각자 따로 진행한 뒤 양쪽의 결과물을 조정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공단 측은 과거에 검토했던 서울-대전 간 자료를 토대로 기본 노선을 그려 나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로와 교차되는 지점이 대략 400개였고, 지나야 하는 하천도 그만큼 됐다. 1km마다 장애물이 하나씩 나타나는 셈이었다. 신 회장은 안전운행을 위해서는 선로를 일본처럼 고가(高架) 형태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 지형의 특징을 모르는 루이스버저는 고가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니 평면으로 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맞섰다. 루이스버저는 자신들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언론 플레이에 집중하는 한편 정치권까지 끌어들였다. 신 회장을 포함한 공단 측 입장이 난처해졌다. 교통개발연구원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고속철도는 후대의 안전이 담보된 생명선인데, 이대로 물러설 것인가. 그는 옷 벗을 각오를 하고 공단 이사장을 찾아갔다. 당시 공단 이사장은 대통령 경제비서관 출신의 김종구(金鍾球)씨가 맡고 있었다. 김 이사장은 실무진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김 이사장님은 저에게 늘 ‘정치적인 것은 내가 막을 테니 실무진은 최선을 다해 후손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을 강조하곤 했어요. 그런 이사장님께 찾아가 ‘제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도 좋으니 어느 쪽 판단이 옳은지 판가름할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세대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 사업이니 소신대로 하라’고 격려해 주더군요.”
그는 그 길로 루이스버저와 이들의 파트너인 국내업체 실무진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그들이 조사한 자료와 공단이 조사한 자료를 비교 검토해 가며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 지금부터 내가 한 말이 틀리면 틀리다, 맞으면 맞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답하시오. 그리고 두 달 정도 검토한 후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거든 당신들 사장 설득하고, 루이스버저 설득해서 다시는 이런 억지가 나오지 않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소.”
그들은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문제점을 지적하는 신 회장의 말에 수긍했고, 이후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시인했다.
경부고속철도의 최고속도는 300km지만 전용선은 시속 350km를 달리도록 설계돼 있다. 이 역시 신 회장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세계적으로 시속 500km가 넘는 고속철도가 개발되는 요즘이고 보니 50km의 여유를 두고 건설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지만 시공 당시에는 말들이 많았다. 속도에 비례하는 것이 선로 시스템 비용이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일제시대 건설된 철로를 아직도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도는 적어도 100년 앞을 내다보고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유를 두고 설계한 것”이라고 말했다.
용산역과 서울역은 하나로 통합했어야
기본 설계 당시 미국의 루이스버저에 자문한 국내 설계ㆍ감리 업체는 유신코퍼레이션(이하 유신)이다. 전긍렬(全兢烈) 회장은 “평지에 익숙한 루이스버저와 산악에 익숙한 우리의 기본 콘셉트가 달라 마찰이 많았다”고 말했다.
유신은 기본 설계 후 13, 14공구 실시 설계도 했다. 뜻밖에도 전 회장은 “경부고속철도는 실패했다”며 이런 얘기를 했다.
“1980년대 철도청이 서울-대전 간 고속철도 노선안을 검토할 때 일본의 신칸센 건설 당시 기사장(技師長)을 지낸 다키야마 마모루 박사를 초청해 고속철도 건설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신칸센 건설과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두 가지 당부 사항을 되풀이 강조했죠. 그 하나가 중간역의 수는 많을수록 유리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간역은 반드시 기존역세권을 통과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중간역을 역세권 내에 둬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유신은 1989년 정부가 주도하는 경부고속전철 기술조사 용역단에 참여해 다키야마 마모루 씨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반영하려 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일본은 도쿄-오사카 간 신칸센 중간역을 애초 4개에서 11개로 증설했다. 그러면서 수송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흑자 운행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기존 역세권을 통과하지 않는 중간역의 경우 환승객들에게는 여전히 불편하다. 이로 인해 여객 수요가 감소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전 회장의 말이다.
“1990년 정부가 공식 발표한 최종 노선 통과 지역의 중간역은 천안, 대전, 대구, 경주였습니다. 이 4개 중간역이 기존의 역세권을 통과하고 있는지,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중간역의 선형이 정거장 설계 조건에 부합할지 궁금하네요.”
철도 전문가들은 “고속철도는 일반 철도는 물론 지하철이나 버스 등 다른 교통편으로 쉽게 갈아탈 수 있는 교통 센터에 역사를 건설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말한다. 현재 운행 중인 고속철도 역사는 이 정석에서 어긋나는 곳이 많다. 당장 서울만 해도 경부선은 서울역에서, 호남선은 용산역에서 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에 대해 신종서 회장은 “도심 깊숙이 있는 서울역을 서울의 교통 센터로 만들고자 했으나 서울시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 어디나 친환경 교통수단인 철도를 중심으로 도시가 계획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도로를 중심으로 계획돼요. 철도가 들어오면 부동산값이 떨어지는 반면 도로가 들어오면 그 반대 효과가 나기 때문이죠. 서울시의 경우 ‘그렇지 않아도 서울역이 붐비는데 영호남 고속철도까지 들어오면 남대문 일대 교통이 마비된다’는 이유까지 덧씌워 역사 건설을 반대했죠. 용산역 이남이나 서울 밖에 건설하라며 도시계획과 교수들까지 나서서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광명역을 서울의 기점역으로 만든 겁니다. 이 점은 지금도 아쉬워요.”
1000명의 기술진이 프랑스로
기술 조사와 실시 설계 작업이 이뤄지고 있던 1991년 8월, 정부는 고속철도 차량 선정을 위한 제의 요청서를 일본의 신칸센, 프랑스의 테제베, 독일의 이체에 발송했다. 이때부터 3년여 동안 3사(社)의 치열한 수주 경쟁이 전개됐다. 모두 6차례에 걸쳐 차량 제조사로부터 수정 제의서를 받았을 정도였다.
이 시기 한국기계연구원에 근무하고 있던 최강윤(崔康潤) 박사는 이들 3사가 제출한 제안서 중 기술이전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구 평가하고 있었다. 이 과제는 과학기술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로 연구원에 위탁한 것이었다. 그의 동료들, 특히 전기 분야 연구원들은 독일 지멘스사의 이체를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이체가 가장 최신의 차였고, 유도 전동기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제베나 신칸센은 동기 전동기 방식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도 전동기 방식은 유지 보수가 간편할 뿐만 아니라 효율면에서도 우수하고 최첨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그의 얘기다.
“솔직히 제 개인적으로는 3사 모두 장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회사를 딱 꼬집어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그냥 각사가 보유하고 있는 기술의 장단점을 분석하는 것이 제 역할이어서 그럴 필요도 없었고요.”
신칸센은 한국의 지형이나 인구 밀도가 일본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로 유리했으나 민족 감정이 최대 단점으로 꼽혔고, 이를 상쇄할 만큼의 파격적인 조건도 없었다. 이 때문에 신칸센이 가장 먼저 탈락했다.
경부고속철도 사업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총연장 417.5km에 이르는 구간에 시속 300km로 달리는 초고속 열차의 구조물과 시설물 및 시스템을 건설하는 작업이다. 그 규모 때문에 단군 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으로 일컬어져 왔다. 완공하기까지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총 사업비 20조7282억원이 투입됐다.
경부고속철도는 노선ㆍ설계 변경 논란, 차량 선정 의혹, 부실시공 파문 등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고속철도 건설 경험이 전무한 까닭에 수없는 시행착오와 그로 인한 혼선이 잦았다. 건설기간 동안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IMF(외환위기)가 닥치는 등 악재도 많았다. 급기야 김영삼(金泳三) 정권에서 김대중(金大中) 정권으로 교체되는 시기에는 백지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난관을 한국인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극복했다. 그 결과 일본(신칸센 1964년), 프랑스(테제베 1981년), 독일(이체 1991년), 스페인(아베 1992년)에 이어 세계 5번째 고속철도 보유국이 됐고, 이제는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독자개발기술을 보유한 선진국과 어깨를 견주는 철도 수출국이 됐다. 또한 현장에서 탄생한 토목공법과 건설기술은 대한민국 토목ㆍ건설 역사의 새 장(場)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부고속철도 전 구간 개통을 기념해 건설주역들을 만났다. 경부고속철도 건설에는 수많은 시공사와 협력업체가 참여했다. 토목 관계자들은 1단계 구간만 250여 개 시공사와 650여 개의 협력업체가 참여했고, 현장에 투입된 연인원이 1200여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했다. 기자는 좀 더 정확한 통계를 알기 위해 한국철도시설공단에 자료를 요청했으나 “참여한 업체와 인원이 셀 수 없이 많은데다 조직과 담당자가 여러 번 바뀌는 바람에 가지고 있는 기록이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1970년대 초부터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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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고속철도의 서울 기점인 광명역. |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는 일본의 신칸센이다. 도쿄와 오사카를 잇는 신칸센은 당시 세계 최고 속도인 210km를 자랑하며 도쿄올림픽 개막을 10일 앞둔 1964년 10월에 개통,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은 이보다 40년이 뒤진 2004년에야 고속철도를 개통했지만, 사실 건설 논의는 이보다 훨씬 앞선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 국가 물류망의 기본 축인 경부고속도로의 수송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고속철도 건설이 추진됐다. 당시 철도청 시설국 건설과에 재직하며 노선을 검토했던 신종서(申鐘瑞) KRTC(구 한국철도기술공사) 회장의 말이다. “당시에는 노선이 서울-부산 간이 아니라 서울-대전 간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해안 지역에 있는 로켓기지 근무자들이 서울을 쉽게 왕래할 수 있도록 서울-대전 간 고속철도를 구상했습니다.”
고속철도 건설이 좀 더 구체화된 것은 서울올림픽이 5년여 앞으로 다가온 1983년 3월, 신 회장이 철도청 시설국 건설과장으로 있을 때다. 당시 철도청은 일본과 프랑스의 교통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 도입 타당성 조사를 실시했다. 정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신칸센을 개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일본을 상기시키며 고속철도 건설에 의욕을 보였으나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고속철도 건설이 재개된 것은 1987년 12월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사업 추진을 대선공약으로 내걸면서부터다. 노태우 정권은 1989년 7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본 계획을 발표했다. 철도청과 교통개발연구원이 주관 기관으로 선정됐고, 미국의 기술개발 회사인 루이스버저(Louis Berger)에 기술조사 및 기본 설계 용역을 주었다.
한 철도인의 先見之明
이 무렵 철도청 안에 고속철도건설기획실(후에 고속철도건설기획단으로 조직 변경)이 생겼고, 신종수 회장은 건설계획 담당관을 거쳐 건설국장을 지냈다. 고속철도 건설이 본격화된 1992년부터는 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설립된 고속철도건설공단에서 건설 본부장으로 근무했다. 신 회장은 고속철도 건설의 기틀을 다진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루이스버저에 기술조사와 기본 설계 용역을 준 것은 잘못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기술조사 및 기본 설계는 교통개발연구원이 맡았어요. 그런데 교통개발연구원은 그 일을 우리와 상의도 없이 미국의 루이스버저에 용역을 줬습니다. 국내업체에 주면 말들이 많은데다 객관적 검토가 필요해 일부러 해외업체를 끌어들인 것인데, 문제는 루이스버저가 고속철도를 운행하고 있는 독일이나 프랑스, 일본 회사가 아니라 고속철도가 없는 미국 회사라는 데 있었어요. 뭔가 자료가 나오고 배울 것이 있는 곳에 줘야 하는데 전혀 엉뚱한 회사에 일을 맡긴 것이죠. 이 때문에 교통개발연구원은 물론 루이스버저와도 마찰이 많았습니다.”
이미 발주가 끝난 뒤라 업체를 교체할 방법이 없었다. 기술조사와 기본 설계를 공단 건설본부와 루이스버저가 각자 따로 진행한 뒤 양쪽의 결과물을 조정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공단 측은 과거에 검토했던 서울-대전 간 자료를 토대로 기본 노선을 그려 나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로와 교차되는 지점이 대략 400개였고, 지나야 하는 하천도 그만큼 됐다. 1km마다 장애물이 하나씩 나타나는 셈이었다. 신 회장은 안전운행을 위해서는 선로를 일본처럼 고가(高架) 형태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 지형의 특징을 모르는 루이스버저는 고가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니 평면으로 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맞섰다. 루이스버저는 자신들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언론 플레이에 집중하는 한편 정치권까지 끌어들였다. 신 회장을 포함한 공단 측 입장이 난처해졌다. 교통개발연구원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고속철도는 후대의 안전이 담보된 생명선인데, 이대로 물러설 것인가. 그는 옷 벗을 각오를 하고 공단 이사장을 찾아갔다. 당시 공단 이사장은 대통령 경제비서관 출신의 김종구(金鍾球)씨가 맡고 있었다. 김 이사장은 실무진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김 이사장님은 저에게 늘 ‘정치적인 것은 내가 막을 테니 실무진은 최선을 다해 후손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을 강조하곤 했어요. 그런 이사장님께 찾아가 ‘제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도 좋으니 어느 쪽 판단이 옳은지 판가름할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세대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 사업이니 소신대로 하라’고 격려해 주더군요.”
그는 그 길로 루이스버저와 이들의 파트너인 국내업체 실무진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그들이 조사한 자료와 공단이 조사한 자료를 비교 검토해 가며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 지금부터 내가 한 말이 틀리면 틀리다, 맞으면 맞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답하시오. 그리고 두 달 정도 검토한 후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거든 당신들 사장 설득하고, 루이스버저 설득해서 다시는 이런 억지가 나오지 않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소.”
그들은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문제점을 지적하는 신 회장의 말에 수긍했고, 이후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시인했다.
경부고속철도의 최고속도는 300km지만 전용선은 시속 350km를 달리도록 설계돼 있다. 이 역시 신 회장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세계적으로 시속 500km가 넘는 고속철도가 개발되는 요즘이고 보니 50km의 여유를 두고 건설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지만 시공 당시에는 말들이 많았다. 속도에 비례하는 것이 선로 시스템 비용이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일제시대 건설된 철로를 아직도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도는 적어도 100년 앞을 내다보고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유를 두고 설계한 것”이라고 말했다.
용산역과 서울역은 하나로 통합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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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고속철도의 종점인 부산역. |
유신은 기본 설계 후 13, 14공구 실시 설계도 했다. 뜻밖에도 전 회장은 “경부고속철도는 실패했다”며 이런 얘기를 했다.
“1980년대 철도청이 서울-대전 간 고속철도 노선안을 검토할 때 일본의 신칸센 건설 당시 기사장(技師長)을 지낸 다키야마 마모루 박사를 초청해 고속철도 건설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신칸센 건설과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두 가지 당부 사항을 되풀이 강조했죠. 그 하나가 중간역의 수는 많을수록 유리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간역은 반드시 기존역세권을 통과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중간역을 역세권 내에 둬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유신은 1989년 정부가 주도하는 경부고속전철 기술조사 용역단에 참여해 다키야마 마모루 씨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반영하려 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일본은 도쿄-오사카 간 신칸센 중간역을 애초 4개에서 11개로 증설했다. 그러면서 수송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흑자 운행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기존 역세권을 통과하지 않는 중간역의 경우 환승객들에게는 여전히 불편하다. 이로 인해 여객 수요가 감소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전 회장의 말이다.
“1990년 정부가 공식 발표한 최종 노선 통과 지역의 중간역은 천안, 대전, 대구, 경주였습니다. 이 4개 중간역이 기존의 역세권을 통과하고 있는지,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중간역의 선형이 정거장 설계 조건에 부합할지 궁금하네요.”
철도 전문가들은 “고속철도는 일반 철도는 물론 지하철이나 버스 등 다른 교통편으로 쉽게 갈아탈 수 있는 교통 센터에 역사를 건설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말한다. 현재 운행 중인 고속철도 역사는 이 정석에서 어긋나는 곳이 많다. 당장 서울만 해도 경부선은 서울역에서, 호남선은 용산역에서 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에 대해 신종서 회장은 “도심 깊숙이 있는 서울역을 서울의 교통 센터로 만들고자 했으나 서울시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 어디나 친환경 교통수단인 철도를 중심으로 도시가 계획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도로를 중심으로 계획돼요. 철도가 들어오면 부동산값이 떨어지는 반면 도로가 들어오면 그 반대 효과가 나기 때문이죠. 서울시의 경우 ‘그렇지 않아도 서울역이 붐비는데 영호남 고속철도까지 들어오면 남대문 일대 교통이 마비된다’는 이유까지 덧씌워 역사 건설을 반대했죠. 용산역 이남이나 서울 밖에 건설하라며 도시계획과 교수들까지 나서서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광명역을 서울의 기점역으로 만든 겁니다. 이 점은 지금도 아쉬워요.”
1000명의 기술진이 프랑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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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선 문제를 놓고 회의하고 있는 고속철도건설공단 임원들. |
이 시기 한국기계연구원에 근무하고 있던 최강윤(崔康潤) 박사는 이들 3사가 제출한 제안서 중 기술이전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구 평가하고 있었다. 이 과제는 과학기술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로 연구원에 위탁한 것이었다. 그의 동료들, 특히 전기 분야 연구원들은 독일 지멘스사의 이체를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이체가 가장 최신의 차였고, 유도 전동기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제베나 신칸센은 동기 전동기 방식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도 전동기 방식은 유지 보수가 간편할 뿐만 아니라 효율면에서도 우수하고 최첨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그의 얘기다.
“솔직히 제 개인적으로는 3사 모두 장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회사를 딱 꼬집어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그냥 각사가 보유하고 있는 기술의 장단점을 분석하는 것이 제 역할이어서 그럴 필요도 없었고요.”
신칸센은 한국의 지형이나 인구 밀도가 일본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로 유리했으나 민족 감정이 최대 단점으로 꼽혔고, 이를 상쇄할 만큼의 파격적인 조건도 없었다. 이 때문에 신칸센이 가장 먼저 탈락했다.
요약
1. 박정희가 고속철도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민족의 역적 김재규 때문에 대한민국 고속철도의 역사가 30년 늦어짐.
2. 교통개발연구원이 고속철 경험이 없고 평지에 익숙한 엉뚱한 미국 회사에 용역을 맡겨 한국 상황에 맞지 않는 미국 평지식 노선을 설계함
3. 일본에서는 중간역을 많이 두되 중간역을 기존 역세권에 위치시켜서 수요를 늘리라는 아주 합리적인 조언을 하였으나, 묵살당함.
4. 일본의 지도를 받은 설계사인 유신은 서울역에 환승센터를 구축해 모든 열차를 집적시키려 하였으나, 미국식 자동차 위주 도시계획을 신봉하는 무리들에 의하여 일부 열차가 용산역으로 밀려나고 광명역이 생김.
5. 3개 국가의 제안서를 평가하던 (심지어 프랑스의 강점이라고 유언비어가 유포된 기술이전 분야를 평가하던) 실무자가 일본의 신칸센이 지형과 인구밀도가 한국과 유사해 가장 적합하였으나 국민 감정에 의해 탈락하였다고 증언함.
일본은 모든 중간역을 기존 도심에 짓고 최대한 대중교통과 연계하자는 아주 합리적인 조언을 하였으나, 자동차 중심의 미국의 학문적 식민지인 학계에서 평지에 적합하고 기존 도시를 벗어나는 미국식 계획을 함.
광명역, 오송역, 김천구미역, 신경주역, 울산역 등 KTX의 막장 접근성은 조센징들이 동양에 알맞은 신칸센을 선택하지 않고 인구밀도가 낮은 서양식 좆제베를 선택한 벌을 받고 있는것임










이거 병먹금 하면 되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