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할 수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을 단념했다.
한국의 부실은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다. 메이지의 뛰어난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시 이미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탈 아론"으로도 유명한 그가 왜 조선을 단념했는지. 지금 이야말로 그 배경에있는 사상을 배워야한다. 문예 평론가 토미 오카 코이치로 씨가 해설한다.
이것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말이지만, 바로 현재의 한일 관계의 본질을 꿰뚤어 보고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후쿠자와는 결코 감정에 따르는「혐한」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항상 아시아 국가에 대한 멸시를 경계하고 타국과의 관계를 고려하고 일본의 국익에 이익되는 철저히 이성에 입각한 결정을 내릴것을 강조햇다.
나중에 끄는 유명한 '탈 아론'도 그러하다.
그는 서양 열강의 아시아 제국 주의적 침략에 대적하고, 메이지 유신에 의해 근대화의 길을 개척 한 일본 이야말로 중국이나 조선에 대하고 힘을 빌려
함께 연대하여 항해야한다고 생각했다 .
또한 아시아라는 말부터 중국 (청나라)과 조선을 같이 파악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 아시아 동포로서 청나라 한국의 종교 속 관계에서 탈피
시켜 일본처럼 개명 할 필요성을 설득 노력했다 이다.
이씨 조선의 구체제 (혈족과 문벌에 의한 지배) 상태로 조만간 청국과 러시아의 식민지가되었고,그것은 그대로 일본의 국난이되기 때문이다.
이씨 조선 말기의 이 부패한 절망적 인 국가를 변혁하려 한 개화파를 후쿠자와는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그 리더였다 불알 均ら 젊음을 개인
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지원을 아끼지도 않았다. 또한 조선에 게이오의 문하생을 파견하고 청나라 체제에 포함되는 것을 좋아하는 조선 왕
조의 '사대주의'의 변혁을 재촉했다.
또한 조선에 게이오의 문하생을 파견하여 청나라 체제에 포함되는 것을 좋아하는 조선 왕조의 '사대주의'의 변혁을 재촉했다.
청불전쟁이 발발하고 청나라군이 경성에서 퇴각한 것을 계기로 개화파가 쿠데타를 기도했으나(갑신사건 메이지 17년),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조
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은 결정적이 되었다.후쿠자와 안에 있던 일본의 조선 문명화 기대도 무너졌다.
일본에 10여 년간 망명한 김옥균도 메이지 27년 상하이에서 조선의 자객에게 암살당했고, 그 시신은 무참히 잘려져 온 나라에 표백되었다.후쿠자
와에게 탈아론을 쓰게 한 것도 조선의 개명파, 독립파 인사들에 대한 필사적인 지원이 모조리 그 고루한 중국 종속의 봉건체제로 인해 무산된 데 따른
것이다.
《우리 일본의 국토는 아시아의 동변에 있다 하더라도, 그 국민의 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를 벗어나 서양의 문명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에 불행
하다는 것은 인근에 나라이며, 하나를 중국이라 하고, 하나를 조선이라 한다》(<탈아론> 메이지 18년 3월 16일).
"이 근처에 있는 [두 나라]는, [그 고풍 구관에 연연하는 정은 백천년의 고와 다르지 않다… 교육을 논하면 유교주의라 하고, 학교의 교지는 인의예지라
칭하며, 하나보다 열에 이르기까지 겉모습의 허식만을 일삼고… 도덕마저 땅을 털고 잔각불렴치를 극한, 더욱 오만하여 자성의 염치함이 없는 자의
정을 일컫는다."
◆도전에 대한 절망과 초조함.
후쿠자와 문장의 열렬함은 조선 개화를 염원하던 그의 생각을 뒤엎는 분노였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문명화 자체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탈아론」의 첫머리에서도 「문명은 아직도 홍역의 유행병과 같다」라고 하여, 「유해한편의 유행병에 대해도 더욱 그 기세를 격하지 말
것」이라고 하여 문명화는 이해 상충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물론 후쿠자와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문명화에 성공한 일본을 올바른 선택으로 여기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서양문명의 물결이 이처럼 급속도로 높게 일어서는 동안 구태의연한 겉치레 허식을 버리지 않는 조선의 정체와 인민에 대한 절망과 초조
함을 분명히 밝힌 언론인의 자세다.
《좌하면 오늘의 꾀를 하되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다같이 아세아를 일으키니 유예가 없어야 하며 오히려 그 오를 벗어나 서양의 문
국과 진퇴를 같이 하고 그 지나 조선에 접하는 법도 이웃나라이기 때문에 특별한 해석에 미치지 못하고 바로 서양인이 이를 대하는 바람에 따라 처분
해야 할 뿐이다.악우를 가까이 하는 자는 다같이 악명을 면치 못한다.우리는 마음속으로 아세아 동방의 악우를 사절하는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국제사회에서 외교를 사절할 수는 없다. 문제는 '마음에서', 즉 일본은 유라시아·중화제국의 팽창 현실을 앞에 두고 이 세계사에 참
여할 수 있도록 어떠한 '사상'을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가이다.
한국에 관해서 말하자면 한일협정(1965년)으로 국교정상화를 이루고, 일본에서 한국에의 막대한 자금 제공도 있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경제부
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와 배상금,기술원조에 따른 일본에게 수혜를 받은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위안부문제와 전시징용공 등 '역사문제'를 계속 들먹이고 있다.그 국가
로서의 태도에 일본은 의연한 「처분」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후쿠자와가 말하는 바로 겉치레의 배신위약의 낭자삼매다.
이러한 「악우」에 대한 대처법을,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메이지 국가의 다극적인 외교 전략과 그 배후에 있던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근대 일본의
사상적 선구자들에게 잘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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