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꽤나 복잡했던 가정사 때문에 시골에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여동생과 함께 맡겨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때였을까요. 한창 도시에서만 살다가


시골에서 살게 된 저희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농사일을 돕는게 마냥 쉽지가 않았습니다.


밭에나가서 김도 매고, 과실나무 수확기가 찾아오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살구를 따고, 물앵두를 따고, 감을 따고...


학교에 갔다오면 농사짓는 것이 싫어 방학도 싫고, 주말도 싫다고 생각했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저희를 그곳에 맡겨두고도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어려웠던 아버지 어머니 때문에


저희 학비와 먹고자는 비용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농사일을 시키셨던 것이지만


어린 나이의 저와 여동생이 그런 것을 알 턱이 있었을까요. 그저 고된 농사일을 시키는 두 분이 미웠을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집 대청마루 옆 주춧돌 앞에 큰 화분 두 개를 놓으시더니 화분 위에


대나무를 얼기설기 엮어만든 사다리를 한 개씩 올리시더니 이렇게 말하시더군요.


'오늘부터 여기에는 수세미를 심을 거란다.'


그 말을 들은 저는 볼이 퉁퉁 부었습니다. 근처에서 과수원을 하시는 작은할아버지께서는


똑같은 대청마루 앞임에도 불구하고 포도를 심으셔서 매번 포도철이 되면 잘 익은 포도를 그득히 바구니에 담아


저희에게도 맛보라고 보내주시기도 했었는데 왜 할아버지께선 하필 맛도 없는 수세미를 심으셨을까요.


하지만 엄한 할아버지에게 감히 제가 대들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애지중지 수세미를 보살핀 할아버지의 정성 덕택인지 수세미는


대나무 사다리를 조금씩 조금식 타고 올라가 이내 꽃을 피우고, 팔뚝만한 수세미를 주렁주렁 매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 생겼습니다. 수세미의 넓고 즙 많은 잎을 노린 달팽이들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것이었지요.


이에 할아버지는 제게 '달팽이를 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을까?' 하고 넌지시 물었습니다.


아마 제가 '매일매일 열심히 잡으면 되겠죠' 라는 대답을 하길 바라시면서요.


하지만 매일 십리정도 되는 통학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것으로도 모자라, 농사일까지 돕는데 이골이 났던 저는


볼멘 목소리로 '달팽이가 소금을 싫어하니 소금을 뿌려버리면 되겠네요'라고 쏘아붙였습니다.


할아버지앞에서 무슨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에 할아버지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그래, 그렇다면 네가 한 번 책임지고 달팽이를 잡아보거라.'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주저없이 그날 저녁, 부엌 찬장에서 굵은 소금을 두 숟갈 퍼 내어


수세미가 심어진 화분에 한 숟갈씩 갖다 뿌려두었습니다. 제발 달팽이들이 소금에 겁먹어 사라지길 바라면서요.


하지만 문제는 그날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제가 자고 있는 사이에 아주 흠뻑 비가 와 버리고 만 것이었지요.





그냥 흙에도 소금을 뿌려도 식물이 고사하는건 금방일진대, 비까지 내려 뿌려놓았던 소금들이


살곰살곰 녹아 흙으로 스며들었으니 그 어떤 식물이 배겨내겠습니까. 이튿날부터 수세미는 잎이 노래지더니


이내 시들시들해지며 줄기마저 말라비틀어져 결국 그 해, 수세미는 총 15개정도만을 수확하는데서 끝이 났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께서는 소금을 뿌린 제게 혼을 내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다만, 수확한 수세미에서 씨앗을 거두어놓아 다음 해에 또 한번 수세미를 심어보자는 말씀 뿐이셨지요.


물론 그 말을 들은 저는 제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내년에도 또 지겨운 수세미를 심어야하는걸까? 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거둬놓은 씨앗을 없애버릴까? 하는 생각까지도 한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수세미를 심으셨던 이유를 아는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잦은 기침과 축농증으로 인해 추운 겨울만 되면 감기와 목통증을 달고 살던 제게, 할아버지께서


손수 수확한 수세미즙이 정말 좋은 효능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덕에 저는 그 해 겨울을 다른 때의 겨울보다 더 편안히 날 수 있었고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맛좋은


다른 과실들을 제쳐두고 굳이 수세미를 심으셨었는지 알 수 있었지요.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시골집에


쓸쓸히 귀퉁이가 닳아갈 수세미 화분은 아직도 그곳에 그대로 있을까요.


명년에도 한 번 다시 심어보자고 거둬놓았던 수세미 씨앗이 담긴 검정 봉지는


아마 곳간 한구석에서 누군가 자길 심어주길 고대하며 그대로 기다리고 있겠지요.


생전 걸려보지 않은 여름감기에 걸려 쿨룩이며 가만히 눈 감아보니, 


그때 그 수세미가 생각나 몇자 적어보고 다시 이불에 돌아누워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