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띄워진 메르카토르 도법의 세계지도를 보며 사령관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전황은 좋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사령관의 책임은 아니었다. 책임이 있다면... 글쎄, 마땅히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적어도 인간 중에서는.
지금 상황은, 적어도 인간들이 뭔가를 해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우선은 파리의 상황부터 보고해주게."
그래도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완전히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우선 자신이 어떻게든 손쓸 수 있는 지역의 상황보고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예, 정확히 말하면 파리보다는 조금 더 북쪽 지역이긴 합니다만, 메카고질라가 센강은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숨어든 녀석이 여전히 센강에 움크리고 있는지는 확인되진 않습니다만..."
"파괴된 아르고 3호기의 복구는?"
"근 시일내에 완료될 가능성은 요원합니다. 그 전까지 메카고질라는 센 강 유역에서 감시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전쟁에서 유엔군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이것뿐이었다. 인류 공학 기술의 정점, 메카고질라의 투입. 전역의 발령과 동시에 킹 기도라의 지휘를 받는 괴수들이 전 세계 핵무기 시설을 파괴했기 때문에 인류는 이런 투박한 방식을 제외하고는 전황에 낄 수 있는 방법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 메카고질라마저도 제대로된 기도라의 군대와 맞붙으면 승산도 없었고, 인류의 편에 서준 다른 괴수들을 대신하여 프랑스 인근 해역에서 계속해서 유엔군을 골치아프게 하는 질라 2세를 상대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조차 없었다.
심지어 재질의 특성상 마땅한 기동력조차 갖추지 못했던 메카고질라는 아르고 함대 5기 모두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스스로 임무 수행지를 옮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중 한 대가 이미 질라의 방사열선에 맞고 격추된 지금, 실질적으로 인류가 수행할 수 있는 움직임은 거의 봉쇄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알래스카는 여전히 교착상탠가?"
사령관은 이번에는 전체 전황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예. 알래스카의 고지라와 킹 기도라는 여전히 한달째 대치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고지라는 서둘러 승부를 보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기도라의 움직임으로 봐서는 녀석의 목적은 고지라가 자신을 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묶어두려는 것 같습니다."
"우두머리를 제외하면 자신측 군대의 질이 더 우수하다는 거겠지. 호주 소식은 오늘 새벽에 급보로 전해들었네.결국은 바라곤과 가메라가 뚫렸다고 했나?"
"네. 스페이스 고지라의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방금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두 괴수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마침 두 괴수를 지원하기 위해 호주쪽으로 이동하던 안기라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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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생각난건데."
껄렁하게 생긴 흑발머리의 남자가 한창 이야기를 진행중이던 단발머리 여자의 말을 끊었다. 단발머리의 여자는 약간 기분나쁜 듯 남자를 째려보았다.
"뭔데?"
"안기라스 너, 그때 대체 바라곤하고 가메라는 어떻게 구해냈던거야? 근처에 스페이스 고지라가 있지 않았어?"
그의 물음에 옆에 앉아있던 거구의 사내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사실 잘 기억은 안나는데, 애초에 녀석이 나를 별로 신경쓰질 않았던 거 같아. 추가적인 싸움을 하면서까지 나를 뚫고 우리 셋의 숨통을 끊느니 호주 전역을 초토화시키는데 더 관심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럼 배트라, 궁금증이 풀렸으면 나 계속 얘기해도 될까?"
이야기를 하던 단발 여성이 손을 들어올리고 말했다. 배트라라고 불린 남자는 입맛을 쩝쩝이며 고개를 끄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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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괴수를 구해내 해골섬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해골섬의 킹콩은 여전히 관망중인건가?"
사령관이 약간은 안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특사로 간 것처럼 보였던 모스라의 설득은 거절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인팬트 섬이 집중포화를 받고 침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바라곤과 가메라를 받아준 걸로 봐서는 킹콩도 인류 측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스라라. 그래. 일본열도 쪽 전선은?"
"배트라와 모스라가 협동해서 카마기라스와 쿠몽가의 동아시아 진입을 저지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상 배트라 혼자 대치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모스라가 브라질에서 가이강을 격퇴하던 도중에 입은 상처를 아직 회복하지 못한 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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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 네가 그때 아무것도 안하고 지켜보기만 해서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내가 얘기하는데 또 끼어들면 네 입에다가 인분가루 뿌려버릴 거야."
"그거 너만 있는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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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스라의 존재만으로도 두 괴수는 2대 1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선뜻 배트라에게 먼저 싸움을 걸지 못하고 경계하는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령관은 왠지 더 이상의 보고를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오란테를 화산에 묶어두고 분화구쪽으로 유인하려던 것으로 보이던 라돈의 계책은 성공적이었는지, 모스라에게 패배한 이후 겨우 목숨을 건진 것으로 보였던 가이강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레기온, 메가기라스 등의 강적들을 견제하고 있는 아군 괴수들은 누구인지 등 알아두면 좋을 법한 상황들이 많았지만, 어차피 알아둬봤자 소용도 없을 것이라는 회의감이 앞섰다.
"...정리하자면, 호주가 초토화된 것을 제외한다면 지구는 지금 그럭저럭 견디고는 있는 셈이 되겠군."
"바로 그 호주가 문제입니다. 현재 전력에서 알래스카에 발이 묶여있을 수 밖에 없는 고지라를 제외한다면 스페이스 고지라를 상대할 수 있을 법한 괴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다른 괴수 여럿이 킹 기도라를 묶어두는 사이 고지라가 다른 괴수들을 처리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겠나?"
"그런 역할을 해줄만한 아군 괴수가 있는지 문제죠. 괴수들은 상당히 영리합니다. 전 세계를 무대로 전역을 벌이면서 그 정도 전략적 고려도 안 하고 움직이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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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안했잖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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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모스라는 고지라의 연락을 받고 배트라를 홀로 남겨둔 채 빠른 속도로 북쪽을 향해 비행했다. 작전에 따라 그녀가 킹 기도라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는 요원했지만, 이미 호주 전역을 쓸어버리고 뉴질랜드를 넘보고 있던 스페이스고지라는 고지라의 입장에서 도저히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가메라와 바라곤의 부상으로 큰 구멍이 뚫린 전력에서 다른 괴수를 차출할 수도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건 그 혼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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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네가 알래스카에서 혼자 며칠을 버텼지?"
"사흘. 하지만 고지라가 스페이스고지라를 제압하고 다시 북쪽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었어."
단발머리 여성은 참견쟁이 남자의 입을 막는 것을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맞아, 그리고 내가 카마기라스랑 쿠몽가 두 마리를 한꺼번에 제압하고 북쪽으로 합류하는 데도 충분한 시간이었지. 뭔가 내가 더 많은 일을 한 거 같지 않아?"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가이강이랑 킹 기도라를 연속으로 상대해보지 그랬어? 대체 그 벌레 두 마리 상대하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었다고 유난이야?"
"너도 벌레...였어, 모스라."
이번엔 덩치 큰 남자가 지적했다. 단발머리 여성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지금도 가끔은 그렇게 변할 수 잇어. 어쨌든, 그리고 그 뒤로 고지라는 알래스카에서 킹 기도라를 잡고 모든 걸 끝낼 작정으로 우리 모두를 북쪽으로 소환했지. 메카고질라를 거의 부술 기세로 공격하던 질라가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고는 킹 기도라를 배신하고 아군에 합류하면서 전황이 좀 펴기도 했고. 알래스카에서 고지라는 나보고는 후방으로 빠지라고 했고,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사실 날개가 반쯤 타버려서 어디로 갈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어..."
"그 뒤부터는 나도 잘 알아. 코앞에서 봤잖아. 전부를 소집하긴 했지만, 결국 주된 싸움은 고지라와 기도라 두 놈이서 했고, 둘이 바닷속으로 동귀어진 한 뒤로 더 이상 해골섬에 실질적인 위협이 없을 거라고 판단한 킹 콩이 전장에 합류하자 겁먹은 기도라의 조무래기 놈들이 모두 항복하면서 끝났지. 좋아, 그것까진 잘 알겠어."
"그런데?"
"근본적인 의문이 안풀렸잖아. 그 전쟁이 후로 대체 왜 우리가..."
배트라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간이 된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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