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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늦게 쓰다 보니 글이 많이 깁니다. 양해 바랍니다..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

초등학교 시절부터 저희 동 현관 옆 작은 흙밭에 이리저리 꽃나무를 심는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항상 향기가 좋은 꽃들이 피어있거나 간혹 장미가 만개해 있기도 했죠. 제 어린 나이에는 단지 내에 또래 아이들이 많아 유난히 식물들이 장난 거리가 되고는 했습니다. 꽃봉오리가 맺혀있는 동백꽃을 보면 툭 따다가 축구 연습을 한답시고 차고 다니기도 하고, 예쁜 꽃들은 죄다 따다가 꽃반지 꽃팔찌를 만들기도 했구요. 저도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깜짝 선물을 해준다며 손으로 눈을 살짝 가리고선 귀 언저리에다 하얀 국화를 꽂아준 기억도 나네요. 그만큼 우리 동네에는 꽃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은 현관 앞에 피어있는 장미를 빤히 바라보다가 향기를 맡아보았습니다. '향'이라는 매개체가 주는 감정은 아마도 그때 부터 생긴 것 같아요. 눈을 감고 꽃에 코를 맞대어 몇 번 숨을 들이쉬다가 눈을 떴는데 어느 순간 현관을 나서는 아주머니와 눈이 꼭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한껏 감성적인 행동을 하다가 들킨 게 부끄러웠는지 제 얼굴도 장미처럼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버렸죠. 아주머니는 조용히 웃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다가, 애써 키우는 나무가 아이들의 한편으론 잔인한 손장난에 다칠까 염려된다고 저에게 잘 지켜달라고 하셨습니다. 꽃송이 하나에도 서려 있는 깊은 정성과 사랑, 그 아름답게 핀 꽃 하나가 다시 사람에게 돌려줄 수 있는 행복을 느끼곤 식물도 생명이라는 걸 마음으로나마 느꼈어요. 그 후로는 친구들과 놀 때도 짐짓 호통을 치며 식물은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골목지킴이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순수한 그때 시절이 지금에도 참 그립네요.

시간은 제 갈 길을 너무도 잘 안다는 듯 쉬지 않고 앞으로 걸어갑니다. 한두 번의 사춘기,  친구와의 크고 작은 다툼, 몇 번의 떫고 쓴 고민의 시간과 나락의 감정들. 때론 담담히 이겨내기도, 때론 들추어 보는 것조차 무서워 마음 한 쪽에 자물쇠를 걸어놓았던 어리기만 했던 저도 어느덧 대학 생활이 끝나갑니다. 올해부턴 이른바 '취준생'이라는 적지 않은 압박에, 새해가 밝고서 이런저런 자격증, 어학 점수에 몰두하다 보니 벌써 3월이군요. 계획하던 자격증 시험이 뚜렷한 일정 없이 연기되고, 다른 친구들처럼 여러모로 심심하고 심란한 날들이 계속되는 그런 지금. 한편으론 언젠가는 봐야지 했던 영화도 챙겨보며 늦잠도 자고, 새벽에는 설거지도 도우며 여유롭기도 하지만 '취업', '학점' 같은 단어들이 생각날 때면 저도 모르게 한숨도 나오고 잠도 설치다 깨며 푹 마음이 놓이질 않기도 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나 홀로 떨어져 깊은 구덩이에 빠져, 누구도 날 도와주지 못할 것 같다는 그런 감정도 들구요.

어제는 새벽녘에 부모님이 출근하시기 전에 조용히 설거지를 끝내놓고, 온종일 집에만 있을 생각에 답답해 오랜만에 운동복을 꺼내입고 마스크를 끼고 집을 나왔습니다. 새벽이라 조금 추웠지만 걷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몸을 풀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틀고 가볍게 뛰었습니다. 오르막 한번, 내리막 한번, 평지 한 번. 또 오르막 한번, 내리막 한번, 평지 여러 번. 안경을 벗어들어 주머니에 넣고 속도를 높이며 뛰다 보니 마스크를 낀 채로는 도저히 숨이 안 쉬어지는 것 같아 턱 언저리로 내리고 뜀박질을 계속했습니다. 모퉁이에 설치되어있는 차량용 반사경으로 힐끗 본 제 키는 옛날에 비해 많이 커져 있습니다. 부스스한 파마머리에, 아빠나 입을 법한 운동복에 운동화며, 실감은 안 되지만 나도 나이를 먹는구나 생각도 하구요. 30분 동안 4킬로 정도를 뛰었다는 핸드폰 알람을 보며 약간의 뿌듯함을 느끼고 정말 오랜만에 숨차게 뛰어보는구나 생각했죠. 앞으로도 자주 달려야겠다 하는 다짐도 하면서 천천히 걸으며 숨을 고르다가 주머니 속 안경을 다시 썼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선명했나? 하는 쨍함과 함께 매해 이맘때만 맡을 수 있는 공기의 냄새, 약간의 설렘과 새 교복을 맞춰 입어야 할 것만 같은 감정을 음미하면서 팔도 벌려보고, 허리도 돌려보니 몸속이 환기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분이 참 좋았어요.

마무리 운동을 하며 듣던 노래가 끝나 이어폰을 정리하고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섰습니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고 계단에 들어서는데 강한 꽃내음이 순간 훅하고 느껴졌어요.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내가 우주에 홀로 떠다닌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는 그런 아찔함. 약간의 어지러움과 함께 숨을 짧게 들이마시며 어릴 적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던 현관 옆 작은 화단을 바라보니 새로 보는 꽃나무가 있더군요. 생긴 건 오밀조밀 작으면서도, 향만큼은 제 존재를 멀리도 알리고 있는 모습에 다분한 기특함을 느껴 검색해보니 서향나무라고 합니다. 상서로운 향, 서향.

한때의 기억은 잊혀 추억이 되지만, 추억은 가슴에 남아 삶의 지지대가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 들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 풍경 하나, 하늘 한켠을 이따금 기억해 낼 수 있다면. 또 누군가에게 나 자신이 그이의 기억과 추억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뚜렷한 감사를 느껴봅니다. 저는 다시 어릴 때의 저로 돌아가 눈을 감고, 꽃에 코를 맞대어 숨을 몇 번 들이마십니다. 향이 참 진합니다. 누군가 걸어올까, 귀를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구요.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나와 출근 준비를 하시는 부모님과 아침 인사를 나눴습니다. 오늘따라 제 목소리가 높습니다. 새로운 공기를 많이 마셔서인지, 늘 있던 자리의 추억을 오랜만에 마주한 덕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자리에 항상 있어 준 그 작은 흙밭처럼, 제 주변을 한결같이 지켜준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가시밭길로 걸어가는 길을 택하더라도 언제든 내 편이 되어주는 가족들, 그런 가족들과도 나누기 어려웠던 웃음과 울음을 함께한 절친들을 생각하며 압박붕대처럼 졸여오던 마음을 조금은 풀어봅니다. 난 해낼 수 있어, 라는 다짐보다 이 세상엔 늘 내 자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마음먹기.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다 보면 언젠가 작은 흙밭의 서향처럼 내 향을 멀리 퍼뜨릴 수 있다고 믿어보기. 서향의 다른 이름은 천리향이라고 합니다. 새벽녘에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천 리, 만 리까지 멀리 자신의 향을 퍼뜨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별이 깊은 새벽에, 모두가 행복한 꿈을 꾸길.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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