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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그러니까 25천원짜리 수국이 발음하기도 힘든 독일식 이름을 가지고 우리 집에 들어오게 된 날은 알량한 만족감에 취해 죽은 듯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수국! 하면서 일어나 밤새 옥체 무탈하였는지 스윽 둘러본 뒤, 줄기 주변에 친 거미줄을 펜으로 돌돌 말아 대수롭지 않게 떼 주고는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비가 줄창 내리는 날이었기에 온종일 창가에 두어도 타 죽을 일은 없겠거니, 집에 있을 크눌프의 안녕에 안심하고 일했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바로 피시방을 갔다. 크눌프가 어떤 상태에 놓이고 있을지 전혀 모르는 채 말이다.

 

밤늦게 집에 돌아온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창밖에 가로등 빛 아래, 초연하게 어제 모습 그대로 있는 크눌프의 사진을 몇 장 찍어 만족스러운 하나를 두고 나머지는 지워버렸다.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내일은 휴무일이니 씻지 않고 자신과 타협해 침대에 누웠다.

눈뜬 오늘 아침은 지옥이었다. 휴대폰 알람마저 보채지 않는 아주 멋진 날이 될 수 있었겠지만, 세상은 역시 내게 친절하지 않다. 미력한 인간에게 개 같은 일들을 하나하나 보내주는 세상이 넌더리가 났다.

아직 따가울 정도는 되지 않는, 늦은 아침햇살을 맞으며 담배를 태울 생각으로 창가 앞에 섰는데 크눌프의 시든 잎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몸의 온갖 근육이 고장 나서 멎어버리는 감각을 느꼈다. 자세히 보니 시든 것뿐만 아니라 잎 끝이 갈색으로 변했고, 이파리 상태 또한 일자무식이 보아도 무언가 싱싱하지 않았다. 아마 고깃집에서 상추가 이렇게 나왔다면, 종업원을 불렀겠지.

만개했던 한쪽 줄기의 꽃무리에도 군데군데 시든 놈들이 보였다. 쭈그러들다 못해 구겨진 꽃들을 보며 시발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라고 혼자 작게 지껄였다.

 

내 손에 들어오면 뭐든 망가진다. 대부분이 그렇다.

전자제품이나 옷, 모자, 신발, 자잘한 소모품들에서부터 취미로 쓰던 낚싯대나 조율 안 된 기타 따위들. 더 나아가서는 깊지 않은 인간관계나 거창한 계획, 진지한 진로까지도.

아무래도 내가 무언가를 가꾼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게, 학창 시절에 버디버디 홈피를 꾸미거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운영한다거나, 친구 따라 시작한 블로그, 지금 하는 페이스북 또한 그랬다. 아름답게 꾸미고 가꾼다는 것에 금방 싫증을 느껴버린다. 간혹 흥미가 있어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마저 썩 잘 해내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냥 그런 것에 재능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게 오래 남아 있는 고마운 것들은 대부분 강한 자아가 있거나(혹은 있다고 믿거나) 내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뿐이었다. 크눌프를 데리고 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제발 이 수국도 그래 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항상 무언가 망가지고 부셔놓고 나서 후회한다. 이제는 내 방에 들어온 작은 수국 한 뿌리마저 시발 사라질 수 있다는 게 너무, 좀 굉장히 슬퍼졌다.

 

인간의 손으로, 것도 둔탁하기 그지없는 내 손으로 작고 여린 식물을 만진다는 게, 참 조심스럽고 스스로 위험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마른 안경 닦이로 이파리의 먼지를 쓸어내리는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행동은 무의식에서 나온 사죄였을 것이며 미안함의 방증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에서 으레 난 같은 식물을 마른 헝겊으로 닦는 행위를 보곤 했다. 권위 있는 군인이나, 지체 높은 재벌들이 보통 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을 그냥 본능적으로 따라 하는 내가 너무 우스워졌지만, 한동안 먼지를 닦아내는 데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갤에 사진을 찍어 물어보았다. 고마운 갤러들은 여러 조언을 해주고 나는 내내 그것을 검색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통풍이 중요하다는 의견에 아예 방충망 앞으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내가 가진 짧은 식견과 얕은 유튜브 질로 미루어 보았을 때, 타들어 간 것 같진 않았다. 크눌프의 품종은 노지에서도 잘 크는 성질이 있는 것 같았다.

제주도에 카페를 운영하는 멋진 노신사분이 참 많이 도와주었다. 화면 속의 그의 화원에는 형형색색의 수국이 만발해있었다. 우리 수국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힘껏 기뻤지만, 이내 자신이 없어져서 크눌프를 바라 보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크눌프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흰색 셔츠에 흰색 모자 흰색 마스크에, 톤온톤으로 멋들어진 회색 머리칼을 가진 중년의 미신사는 알고 보니 유명한 수국 장인이었다. 나는 그 영상을 정주행 때려버리고 필요한 부분을 텍스트문서에 정리했다. 내용은 수국의 분갈이 시점이나 분화, 월동, 가지치기까지 수국맘으로서의 기본적인 것을 총망라했다고 볼 수 있겠다. 나는 그것을 수국의 정석이라고 맘대로 이름 붙여 저장해 두었다.

 

시들어진 꽃을 떼어내도 된다는 갤러의 허락하에 나는 조심스레 꽃무리(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를 뒤적거려 시든 녀석의 목을 손가락으로 죄었다.

뚝 하는 소리가 공간을 찢어놓는 듯했다. 덜컥 겁이 났다. 여린 생명의 단말마가 손가락 끝에 맺혀있는 듯, 지독히 불쾌한 촉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의 팔꿈치를 잡아 반대 방향으로 꺾어버리는 것 같았다. 참 웃겼다. 마늘 올린 고기는 야무지게 상추에 싸서 먹었으면서. 가지를 칠 때 소독한 가위를 쓰라는 글에 오버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서랍에서 주섬주섬 작은 쪽 가위를 꺼내 불로 지지고, 살균제를 칙칙 뿌려 죽은 꽃을 잘라냈다.

 

갤러가 알려준 정보 중에 총채벌레라는 잡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무위키에서 그 녀석의 항목을 주욱 읽어냈지만, 크눌프에 붙어있거나 매복해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해충의 항목을 보다가 응애와 마주쳐 버리게 되었다.

그렇다. 그래, 그렇다 시발. 나는 이름마저 웃음이 나와버리는 그 새끼와 마주쳐버리고 만 것이다. 어제 아침에 대수롭지 않게 떼어 내준 거미줄, 그게 문제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그게 아니면 답이 될 수 없다. 사실 답을 도출해 낼 자신이 없다는 것도 맞는 답일 테지만.

식물의 갈변은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긴 힘들다고 알게 되었기 때문에 여러 문제 요인을 소거해 나갈 테지만, 집에 온 지 이틀 된 크눌프에 친 거미줄은 응애이 육시를 할 놈이 아닌 이상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크눌프를 샅샅이 뒤져보고 흰 A4용지를 대고 이파리를 툭툭 쳐보기도 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쳐다본 바로는 응애는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 눈엔 보이지 않은 것이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기에 나는 어머니가 오시는 대로 난황액이라는 요상한 마법의 시약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나눈 통화에 나는 좌절했다. 그랬다. 전에 못 보던 물받이 접시가 화분 밑에 깔려있었다. 어머니는 물을 주어 버리고 만 것이다. 게다가 나는 말라버린 크눌프를 보고 패닉에 빠져 물을 담뿍 주어버렸다. 제발 과습상태가 아니길 빈다. 나는 통화 말미에 어머니께 물을 주지 말라고 제발 내 거에 손 좀 대지 말라고 단단히 호통했다. 이건 엄마 잘못이 아닌데.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