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이러했다.

우연히 시킨 랜덤 박스 속에 끼어 있던 화분을 채우기 위해,

화분은 왜 비어있어선 안되고 식물과 흙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스물 일곱이나 먹을 동안 면허증 쪼가리 두개랑 수료증 하나, 졸업장 하나가 생겨난 것 외에는 남은 게 없는,
그러면서도 기껏 채워낸 것 조차 비워내고 다른 걸 채우려 하는 내실이 없는 나 자신을 투영해 본 걸지도 모른다.

그저 비어있어도 되는가 하는 불안감에 뭐든 허겁지겁 채우려 했던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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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처음 들인 건 7월 하순.
키우기 쉽고 광량이 적게 필요한 식물을 수소문해
칼라데아 아마그리스라는 생소한 이름의 식물을 찾아냈다.

당근마켓에서 식물을 분양받아 내 안에 채워넣은 이후로
식물은 무관심할 때보다 더욱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시간이 켜켜히 쌓이자, 그 변화는 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기억력이 나쁜 식집사는 때론 카메라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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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다섯 장이었던 아마그리스는 무려 여섯개의 잎이 새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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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발 시계초는 한 달도 안되는 시간동안 두 개의 새 잎을 냈다.
아래쪽의 작은 잎들은 온실 밖의 환경이 힘들었던 건지 말라서 떨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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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야짤아재님께 받은 등나무는 새 잎을 준비하고 있다.
(걱정했는데 식물등 빛이 너무 모자라지는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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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프리칸 바이올렛인 리시스트라타에 맺혀있던 꽃봉오리는 피어났다가 시들었다.

물론 변화가 반드시 좋은 쪽이라는 보장은 없다.

내가 잘 키워보겠다고 마음먹었던 아데니움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잎을 후두둑 떨구더니 죽어버렸고,

당근마켓에서 사온 프라이덱은 과습으로 물러버렸다.

응애로 인한 증상인줄 모르고 다른 처치만 해주다 바이올렛 두 포기를 망치기도 했다.

항상 모든 식물의 행위가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다. 뿌리를 깊게 뻗었지만 분갈이를 하며 허망히 잘리기도 하고, 꽃을 피우기도 전에 꽃대 째로 손질당하기도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잘 키워보겠다고 관심을 주고 돌보겠다고 손길을 더해도 오히려 식물이 죽어나가기도 한다. 비단 식물을 키우는 일 뿐일까. 내가 이루어 낸 성취에 누군가 무임승차를 하기도 하고, 내가 시험 전날 밤새 공부했던 족보를 전부 탈족해 시험장에서 멘붕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때로는 이루어낸 일을 정당히 평가받지 못하고 모함당하기도 한다.

식물은 그래도 낙담하지 않고, 다시 뿌리를 내고 잎을 올린다.
물론 낙담하게 할 뇌 조차 없는 게 식물이지만, 식물에게는 주변의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동물과는 다른 어떠한 방법이 있다.
그리고 모든 일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인간은 그저 그들의 꾸준함을 보고 무언가를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의 뿌리와 줄기를 잘라낸 지금의 나는 왜 이렇게 결실이 없음에 조급한 것인가.
시간이 쌓이지 않은 설익은 조급함만 가지고는 어떠한 변화도 일으킬 수 없음을 앎에도, 마치 아무 이유 없이도 따라오는 그림자마냥 불안함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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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키우는 일은 하나의 수양이다.
조급함을 버리는 법,
관심을 가지되 무관심하는 법,
사람의 시간을 식물의 속도에 맞추어 가는 법,
그리고 차분히 식물이 사람을 뒤따라오기를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공부는 의학도 그림도 아닌,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절대로 깔끔해질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 식물존도 두달간의 시간이 지나니 얼추 정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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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미바 렉.

다이소 3단 슬림 선반 두개를 사서 조립해 만들었다.
겨울 되면 비닐 씌워서 온실로 만들어줄까...

겨울에 이사갈 생각인데 문뜩 내가 잘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 아무튼 5평 이하의 원룸 치고는 꽤 경관이 깔끔해져서 자랑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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