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의 첫 아파트였어. 햇빛에 바래버린 분홍색의 옛날 아파트
지금도 그 아파트에 살고 있어. 다만 허물고 재건축을 하고 새 아파트가 되었지. 그때 나는 어렸고 폰도 없었고 그래서 그때 사진은 하나도 없는 게 너무 아쉬워. 옛날 아파트이긴 했지만, 식물도 정말 정말 많았고 좋았거든. 지금 집이 더 깔끔하고 내부는 좋지만, 외부는 그때가 더 마음에 들어
가끔 그 아파트가 생각나. 기억으로만 말야. 그때 사진으로 설명은 못하고 말로만 해야 한다는 게 아쉽긴 해
난 5층에 살았어. 엘리베이터는 없었고 무지 힘들었지. 무언가 준비물을 두고 내려왔으면 다시 올라가는 건 지옥이야. 아래에서 엄마를 불렀지.
"엄마! 엄마! 나 공책 던져줘"
그러면 엄마는 비닐에 넣어서 묶은 후 사람 없나 보고 던져줬어. 다시 올라가기 싫은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었지. 아마 다른 집에서는 아침에 들리는 내 목소리를 듣곤 저 집 애 또 뭐 두고 나왔네 하지 않았을까 싶네
그럼 이제 등교를 시작하는데 아파트 건물에서 나오면 다섯 걸음 정도 걸으면 또 4개 밖에 없는 계단이 있었어. 계단 전에 왼쪽엔 단풍나무가 있고 오른쪽엔 목련이지
단풍나무는 아래에 씨앗이 있으면 주워가기도 하고 애기 단풍나무가 있으면 뽑기도 했어. 물론 그때의 나는 섬세하지 못해서 뿌리가 다쳐서 얼마 살지 못했지만 말야. 내가 두고 온 물건을 던져준 거도 약간 이 단풍나무에 스쳐서 떨어지게 던져줬어. 혹시나 너무 세게 떨어질까 봐
목련은 내가 정말 좋아했던 꽃이야. 하얀색 꽃이 너무 좋았어. 특유의 넓은 그 잎도 좋았어.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자주색 목련보다 흰 목련을 가장 좋아해. 눈처럼 하얀데 떨어져서 시간이 지나면 둘 다 지저분해지는 것도 같아서
가끔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건물에서 나와서 바로 왼쪽으로 가곤 했어. 길이라고 만들어 놓은 건 아니지만 하도 사람이 다녀서 잔디는 다 죽어있고 길 아닌 길이 된 그런 길이였지. 다만 1층 집 불빛 때문인지 벌레가 많이 꼬이나 봐? 그래서 거긴 가끔 거미줄이 있었어. 그걸 모르고 그냥 지나가다간... 거미줄에 파묻혀버리는 거지. 정말 싫었어
고등학생 때도 급식실로 가는 길에 목련 나무가 있어서 봄엔 걜 보는 게 취미였어. 대학생 때도 교내 목련 나무를 가장 좋아했는데 이젠 졸업해서 볼 일이 없네. 내가 사는 곳 근처에도 목련은 없어서 더 아쉬워
목련 나무쪽으로 걸어가면 내가 사는 아파트 건물의 모서리 부분이 보이고 아래로 쑥 내려갈 수 있어. 내가 사는 아파트보다 왼쪽에 있는 아파트가 있는 땅이 더 낮았거든. 내리막길이라 훅 내려다면 정말 재밌어
내려가기 전에 아파트 모서리에서 옆면으로 슥 가서 뒤로 가면 매실나무가 있어. 그래서 항상 거기서 매화를 볼수있었고 지금쯤이면 폈을 거야. 관리비엔 매실 나무 관리 비용이 있었고 간혹 뭘 뿌리는걸 볼 수 있었어. 식갤하면서 알게 된 게 그 매실 나무엔 종종 마이구미 같은 끈적이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난 원래 그런 줄 알았거든. 근데 이제와서 보니 깍지벌레 아닐까 싶어
꽃이 피고 열매가 생기면 매실나무 소유는 아파트 주민이라서 따서 설탕이랑 같이 매실청이라고 해야 하나? 이거도 만들었어. 그래서 그 아파트를 떠난 후로는 매실을 먹은 적 없어서 아쉬워
매실나무 옆에는 밭이 있었어. 그냥 작게 파나 그런거 키우는. 누구 소유인지 모르겠어. 거기 빈 땅에 해바라기를 하나 심을 적이 있는데 잘 자랐고 꽃은 비록 작았지만 피웠어. 그러고 며칠 후에 보니까 베어 있더라고
다시 내가 사는 건물 앞으로 와서 좀 걸은 다음에 계단으로 가서 옆을 보면 회양목이 있었어. 목련 나무 있는 쪽 회양목 그늘엔 자주 사랑초가 있었어
회양목엔 작은 거미가 집을 짓고 살아. 가끔 비가 올 때면 이쁜 구슬이 맺혀있곤 해. 가끔은 괴로필 때도 있었어
나와서 앞으로 가면 인도가 나오고 차도가 나오고 인도가 나와. 두 번째 인도를 밟고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동백나무가 있어. 이거도 무지 좋아했어. 겹동백도 아니고 흰동백도 아니고 무늬동백도 아니야. 그냥 빨간 꽃잎 몇 장에 노란색 암술 수술이 가장한 토종동백이야. 기름칠한 잎도 좋았어. 아직 피기 전의 동백 꽃봉우리를 잘라서 해체하기도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실내 동백 키우는 갤러들은 떨어질까 조심조심하고 그렇게 노력해서 꽃을 보는데 내가 막 따서 해체한 거 생각하면 미안해
동백나무를 지나 쭉 가면 쓰레기 버리는 곳이 있고 그 옆엔 식수대라고 해야 하나? 물 나오는 곳이 있어. 가끔 거기서 물풍선 만들고 그랬어. 근데 엄마가 물풍선을 사주지 않고 용돈도 없었거든. 엄마는 거기 지나가면 입구 부분 약간 구멍 나서 그냥 던져놓은 거 있거든? 수도꼭지에 넣다가 구멍 난 거 말야. 그거로 가끔 만들어주곤 했어
여기 반대편엔 주차장이 있어. 실내 주차장. 주차장 근처엔 식물이 심겨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배롱나무. 분홍색 한지를 꾸긴 듯한 그런 꽃이지. 그땐 이름을 몰랐어. 근데 지금 와서 보니 배롱나무였어. 배롱나무 특유의 매끈한 줄기도 좋아했어. 그리고 그 아래엔 잔디인데 만원을 주운 적도 있었어
배롱나무를 지나서 쭉 가면 우체국와 경찰서가 있어. 이제 아파트 단지에서 나온 거지. 근데 난 지금 등교하는 게 아니라 다시 들어갈 거야
다시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와서 아파트 안쪽으로 들어갈거야. 들어가면 이름 모를 나무가 심겨 있고 더 들어가면 벤치가 있어. 그 벤치 위엔 아마도 등나무가 심겨 있어. 등나무 열매를 따서 열고 그랬던 적이 있거든
앞으로 더 가면 놀이터야. 진짜 그 옛날 놀이터 있잖아. 미끄럼틀은 금속이라 여름엔 엄청 뜨거우며, 그네는 사람 손을 물고, 바닥엔 모래가 있고, 그 모래엔 비비탄이랑 작은 조개가 섞여 있는 그런 옛날 놀이터. 요즘은 본 적 없는 삥삥이 뺑뺑이라고 부르는 거도 있었어
놀이터 모래엔 그렇게나 애들이 뽑어버릴 텐데 맨날 보면 잡초가 나 있었어. 러너로 번식하는 잡초였어
그네를 타면 더 높이 올라가 저기 위에 있는 나뭇잎 차기가 목표였어
내가 사는 동네는 팀먹기할때 ' 팀 팀 팀먹기 합시다. 위" 이거야. 그러다가 언젠가 다른 동네가 잠시 갔던적이 있는데 무슨 주문을 외우는거야. 그때 알았지. 이게 지역마다 다르다는걸. 버스 색도 별 생각을 안 했거든? 그냥 여기는 초록, 파랑, 빨강이고 다른 지역도 같겠지 생각했는데 아닌거야. 그땐 꽤 충격이었어. 요즘은 처음 아는 지역 가면 버스 색부터 보는 편이야. 다른 지역에 왔다는 게 그제서야 실감이 나거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파트 사이와 사이에 벤치가 또 있어. 그렇다 보니 부모님을 거기에 나와서 대화하고 애들은 앞에서 놀고 그러더라고. 거기서 피구를 했는데 말야. 공이 클로버 쪽으로 날아간 거야. 내가 주워 오는데 그땐 여름이였거든. 공 위에 무언가가 있었고 공을 줍기 위해 손을 뻗었고 난 쏘였어. 벌이였지. 보통 벌에 쏘이면 침을 카드나 그런 거로 뽑잖아? 그냥 아파서 내가 스스로 뽑아버렸어. 이게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벌에 쏘인 경험이야
클로버도 정말 좋아했어. 반지도 만들기도 하고 화환도 만들었는데 요즘은 클로버에 벌레가 훨씬 많은 느낌. 아니면 어린 내가 벌레를 보지 못한 걸지도 몰라. 아파트에서도 근처 공원에서도 네잎클로버 찾으며 자주 다녔어. 잎이 다섯 개 있는 클로버도 봤고 일곱 잎을 가진 클로버도 봤어. 집에 어딘가 있을텐데 아쉽게 사진은 없네
아파트 안쪽으로 더더 들어가면 산수유나무가 있어. 가끔 따면서 놀곤 했어. 또 작은 사과가 열리는 나무도 있었어
더 들어가면 이젠 들어간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또 다른 놀이터가 나와. 내가 사는 단지는 큰 놀이터가 두 개거든. 그 놀이터의 존재는 처음에 말한 놀이터에서 어느 정도 놀다가 한참 후에 알았고 그건 마치... 신대륙 같은 느낌이야. 거기서 노는 애들은 처음에 그 놀이터에 있는 애들이 아니거든. 전부 다 모르는 애들이었고 놀이터 구조도 달랐어. 신기했지. 옆 단지는 작은 놀이터 하나에 큰 놀이터 하나고 다른 옆 단지는 큰 놀이터 하나였어. 내가 사는 단지는 큰 단지라서 큰 놀이터 두 개인 거고
큰 놀이터가 하나인 단지는 말이야. 좀 더 신비로운 느낌이였어. 식물이 좀 더 많고 정글 같은 느낌이였거든. 여기엔 매실나무가 없어. 대신 사과나무랑 배나무랑 다른 과실나무가 많이 있었어. 놀이터는 신기하게 생겼었고 거기 사는 애들이랑 논다고 가끔 놀러 갔어. 거기서 공벌레 잡으며 놀곤 했어.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여기긴 해. 그래도 같은 아파트지
작은 놀이터 하나에 큰 놀이터 하나인 곳은 잘 가지 않았어. 그래서 기억도 잘 나지 않아. 최근의 기억으로 말하자면 첫 당근을 그 단지 앞에서 한거
처음에 집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갔잖아. 오른쪽으로 쭉 가면 모과나무가 있어. 가끔 주워서 아빠차에 두기도 했지. 또 신기한 식물이 하나 있었어. 이름은 기억이 안 나. 잎은 낙엽 지고 떨어지면 잎맥만 남아서 굉장히 특이하고 이뻤어.
울타리에는 장미도 있었네.
목련, 동백, 산수유, 배롱... 지금도 많이 나왔지만 분명 그 아파트엔 더 많은 식물이 있었을 거야. 그저 내가 기억을 못하는거 겠지. 가끔은 내가 사는 지역명에 살았던 아파트 이름 검색하고 추억에 빠지곤 해
아쉽지만, 나무는 사진이 잘 없더라고. 나무 옮길 때 다시 심을 수 있도록 뿌리 안다치게 뽑을려면 돈이 더 많이 든다고 들었어. 그래서 어릴 때 본 나무들은 지금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
그래도 아직도 여전히 있었다면 지금처럼 별로 안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싶네
여기까지가 내 기억의 끝이야. 읽어줘서 고마워
좋은 글이다
ㅎㅎㅎㅎ 나도 초등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개나리, 목련, 흰꽃의 아카시아나무(아까시나무)들이 많이 기억나. 특히 진짜 아까시 나무는 너무 많아서 향에 취할정도였거든. 지금은 옛날 살던 동네가보면 흔적도 안남을전도로 다 베어졌지만.. 자주가는 놀이터가 반은 놀이기구로 반은 공터에 클로버 천국이었어서, 맨날 반지랑 팔찌만들고 놀았다 ㅎㅎㅎ히.. 지금은 그 공터도 시멘트 깔려있더라. 다들 하나씩 사라지는게 쓸쓸하긴 한데, 그래도 기억은 남아있으니까!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고 히히...
어릴 때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진짜 식물 다양하게 많았던거 같아!! 지금은 어른 되서 길거리를 잘 안봐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ㅠ
고니리 자슥 하루 한페이지 연재를 해야지 이렇게 올리면 못읽는다.
갤러 글 따라서 눈앞에 펼쳐지는 그동네 여행을 1인칭 시점으로 한거 같네 ㅎㅎ 목련을 벚꽃보다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공감추 누르고 감. 비록 봄비오고 때가 지면 땅바닥에 떨어진 똥묻은 배춧잎이 되지만….
맞아 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목련은 벚꽃이나 다른 꽃보다는 잘 없는거 같기도 해서 그런지 더 좋은거 같고 길 가다가 마주치면 기분도 더 좋아
공감공감 밤의 흐드러진 목련나무가 진짜 얼마나 예쁜지…지친 퇴근길에 넋놓고 쳐다봤던 적도 많아
너무 좋다 이런글… 포근하고 따뜻해지는 … - dc App
추억여행하는 기분이다.. 난 오히려 이사온곳이 산꼭대기라 풀을 더 볼수있어서 좋아 그전엔 식물이라곤 없었걸랑ㅠ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향수라니 몬가 서글프네
와 진짜 멋진 글이다 같이 추억의 동네 산책한 기분이야 나도 언제 옛동네 떠올리는 글 써보고싶다 글구 동백단이지만 괜차나 나두 어릴땐 동백은 촌스러! 개시러! 하면서 따기도 했어...
잘읽었어 정성글 고마워
와 첫짤 내 옛날 계정 프사였는데
무료이미지 사이트에서 찾은건데 ㄷㄷ
혹시 개포 주공 살았니. 내 어릴적 풍경 보는 기분이라 기분이 싱숭생숭하다ㅋ
나도 5층되는 빌라 살았었는데 소리 질러서 준비물 화단으로 투척하는거 추억돋는다 ㅋㅋ
갤러두 그랬어?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
일단 엘베 없다는데서 용적율이 매우 좋은 재개발물건이었다는 추론이 ㅎㅎ 울집 앞에 30년된 목련이 곧 피어날듯 나도 여기 재개발되면 많이 그리울것 같애 - dc App
재개발 하기 전에 사진 꼭 많이 찍어놔 ㅠ
아파트 조경수는 지은 시기따라 비슷비슷하죠 그래서 공감이 되네요 매화나무 목련나무 모과나무 동백나무 등등..ㅠㅠ 재건축은 이전 단지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려서 너무 아쉬워요. 하지만 제가 너무 감성적인건지.. 대부분은 집값 오르고 새아파트 되니까 좋아하지 저처럼 그리워하는 사람은 못봤어요 이 글에 약간 위안받고 가요
너무 좋은글이다. 식갤글이었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