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 내 데커가 잡혀간 썰


안녕 Chummer들아


이번 글에서는 지난 글에 전후사정을 좀 더 보충해서 써볼게.
분량상 딱딱하게 쓰는 거 이해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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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도우런에는 몇가지 종류의 데커가 있을까?

수치적인 작동 방식으로는 무궁무진하게 많은 종류의 데커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한 수치적인 차이점이나 선호하는 침투 방식과 같은 여러가지 곁가지를 쳐내고 나면 정보라는 본질이 남는다.

데커는 정보를 수집하는 아키타입이다.

이 정보를 수집하는 태도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비밀(Secrets)을 수집할 수도 있고, 기억(Memories)을 수집할 수도 있다.


비밀(Secrets)을 수집하는 데커는 대중매체에서 묘사되는 데커의 주류를 이룬다. 이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정보, 즉 비밀에 목말라있다.

한번 수집된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비밀을 찾아나선다.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다른 러너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아하는 더러운 진실, 의뢰인이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런의 진정한 목적처럼 아는 것 그 자체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비밀을 파헤친다.

타인과 관계할 때는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고 싶지 않아 본인을 어느정도 비밀에 감싸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일을 뛰는 방식을 잘 알려주지 않고, 때때로 임무 수행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를 숨기기도 한다. 이 때문에 비밀스러운 데커는 다른 러너와의 관계가 소원한 편이다. 섀도우런: 홍콩의 이소벨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는 데커가 다른 러너들을 지켜주려 하는 무의식적인 방어 기전이기도 하다. 인간 관계가 소원한 데커는 런 동료가 자신이 쫓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 한 동료의 세부 사항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데커가 붙잡히더라도 유출되는 세부 사항의 정도는 상당히 제한되는 편이다. 따라서 데커가 아는 비밀을 모르는 다른 러너들은 본인들이 도망치기만 한다면 데커가 붙잡히더라도 크게 피해를 입지 않는다. 서로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는 남남 관계를 유지하는 장점인 것이다.


기억(Memories)을 수집하는 데커는 비밀 뿐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매 순간의 기억을 정보로 간주하고 수집한다.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것 만큼이나 과거의 기억을 곱씹는 것도 중요하게 여긴다. 일기장을 녹음하거나, 자신이 뛴 런에서 기념품을 수집하고, 과거 런에서 벌어진 실수나 오류를 분석하는 것처럼 자신이 무언가를 했다는 정신적인 흔적을 남기고 수집한다.

타인과의 관계 역시 좋고 나쁜 기억으로 남으므로, 기억을 수집하는 데커는 타인과 활발한 교류를 하는 경향이 있다. 런에서 새로운 러너를 만나면 자신의 DNI 네트워크에 초대하고, 런 과정에서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고, 도청을 걱정하는 동료의 장비 회로를 뜯어 분석해주는 등, 매트릭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매트릭스 작업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쓸모있는 지인이 된다. 몇몇 지인들은 이 데커를 친구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데커에게 카리스마도 있다면 리더의 자리에 오르는 것 역시 가능하다. 섀도우런: 드래곤폴의 모니카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데커가 없어진 뒤에는 많은 부정적인 여파가 발생한다.

이 데커가 모니카처럼 현장에서 죽는다면 지인들에게는 큰 공백이 남는다. 지인들은 어찌어찌 데커 없이도 일을 처리할 수는 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게 된다.

최악의 상황은 데커가 생포당하는 것이다. 데커가 그동안 수집해온 모든 기억과 모든 인간 관계는 데커를 붙잡은 집단의 입장에서 소중한 비밀이다. 섀도우런은 마법과 현대가 공존하는 세상이다. 마법 중에는 살아있는 대상의 기억을 한치의 오차 없이 추출하는 주문(Mind Probe)도 개발되어있다. 데커가 붙잡힌 뒤 추출된 기억에 남은 모든 인물들은 그 집단에게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 집단의 입장에서 데커와 공범이 되거나, 책을 잡힐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난 4개월동안 사무라이 데커 라라비(Larrabee)를 알고 있던 40여명의 지인과 러너들에게 안타깝게도, 라라비는 기억을 수집하는 데커였다.




내가 다니는 한 상시플 서버의 스탭 두명은 플레이어 러너들을 죽이지 못해서 혈안이 났다.
그 중 한명은 러시아와 고차원적 보안 시스템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스탭이 2달 반만에 구인 포스팅을 했다. 물건 탈취 미션이었다.

나는 그래도 설마 제대로 된 러너들이 지원하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면서 구직 신청을 넣고 일하러 갔다.
그리고 일을 끝마치고 돌아와서 확정된 로스터를 봤다.

본인: 라라비(Larrabee), 인간 데커(해커) / 사이버 스트리트 사무라이
마우즈(Mowz): 드워프 탐색 메이지
크로노(Krono): 인간 사이버 스트리트 사무라이
A: 인간 맨손 근접전 / 수류탄 어뎁트
B: 인간 맨손 근접전 / 궁수 어뎁트

그렇다. 주력 기술로 맨손 근접전을 하는 선사시대 인간이 둘이나 모였던 것이었다. 게임의 배경은 분명 서기 2080년인데 왜 아직도 총을 안 쓰는 걸까?

이 시점에서 현실 약속이 생겼다고 얼버무리고 런을 미리 취소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아마 이해했을 것이다. B모 어뎁트는 평소 다른 플레이어들의 런을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런을 강행하기로 했다.


나는 이번 런에서 살아남으면 라라비가 근접전 어뎁트를 탓하면서 이기적으로 타락할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라라비는 같은 해커/데커를 해치지 않겠다는 신조(Code of Honor: Like a Boss)를 철저히 지키는 캐릭터였다. Like a Boss는 데커나 전자기기에게 매트릭스 행동으로 전자적인 피해를 입힐 때마다 영구적으로 경험치(카르마)를 잃어버리는 신조로, 말하자면 데커가 같은 데커와 매트릭스 내부에서 싸우지 못하도록 막는 구속구였다.

그동안 라라비는 적대적인 데커나 테크노맨서와 마주치면 총으로 쏘거나 숨는 두가지 선택지만 고를 수 있었다. 적 데커가 아군의 장비를 해킹하는 동안 라라비가 할 수 있었던 행동은 팀원의 장비를 수동적으로 보호해주거나, 팀원들에게 통신을 끄라고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이 신조를 충격 요법을 통해 깨뜨릴 수만 있으면, 그 뒤로 런을 3번만 더 뛰어서 필요한 카르마를 확보하면 자신이 그동안 피해야 했던 데커와 테크노맨서에게 직접 보복을 가할 수 있게 된다. 라라비에게 신세를 한번 진 사악한 NPC 테크노맨서도 라라비가 전투적 해킹법을 배우러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종의 자유를 얻는 것에 대한 댓가로 한두번의 런 실패는 충분히 감당할만했다. 적어도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라라비는 마우즈, 크로노와 구면이었고, 이전 런을 같이 성공적으로 끝마쳐본 경험이 있었다. 마우즈와 크로노는 라라비의 데킹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라라비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특히 온몸이 사이버웨어 덩어리인 크로노는 비슷하게 사이버웨어 덩어리인 라라비에게 어느정도 동질감을 느꼈고, 자신의 사이버아이가 해킹당할 때 라라비가 구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쩌면 셋이서 근접전 어뎁트 둘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헐크에게 누군가를 박살내라고 명령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간주했다.

마우즈는 이틀 전 런에서 어뎁트 B와 같은 팀이었다. 마우즈가 뛴 런은 탐정물에서 시작하여 병원 하나를 통째로 불태우는 막장 사태로 귀결되었다.

마우즈는 B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B가 지나치게 직설적인 해결 방법, 즉 전투만 고집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B도 마우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B는 마우즈를 정령과 버프 외에는 기여하는 바가 없는, 지나치게 수동적인 캐릭터로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병원을 불태운 것은 B가 아니라 포스 13급 불의 정령, 즉 수르트의 화신을 소환하고 통제권을 잃어버린 라그나 메이지였기 때문에 서로 실패한 원인 제공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일시적인 휴전을 했다. 이 라그나 메이지는 수트르를 빡치게 한 댓가로 나머지 모든 러너들에게 버림받고 도시를 영구적으로 떠났다.

A모 어뎁트는 이 난리통에 낀 뉴비 캐릭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불쌍한 인물일 것이다.

팀에게 런을 의뢰한 존슨은 탈취해야 할 물건의 크기, 찾을 주소, 배달 장소, 성공 보수만 알려주고 갔다. 주소지는 항구 곁에 있는 평범해보이는 창고였다.
무언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정보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물건이 언제 장소 밖으로 배달될지 알 수 없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A모 어뎁트와 B모 어뎁트는 창고를 당장 습격하자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라라비, 마우즈와 크로노가 둘을 제지하는 데 성공했다.

위의 팀 구성을 보면 알겠지만, 팀의 구성원 중에 카리스마가 높은 페이스는 없었다.
리더쉽 스킬이 가장 높은 것은 라라비였다. 자기계발서에서 읽어본 것이 전부였고 제대로 훈련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조금이라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데커가 리더를 겸하는 것은 좋은 팀 구성이 아니다. 일반적인 런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데커의 주된 역할은 런을 실행하기 전 탐색과 계획 과정을 통한 정보 수집과 가공이다. 정보를 바탕으로 팀의 페이스는 계획 회의를 주관하고, 나머지 팀원들이 의견을 내서 행동 순서와 상황별 대응 방침을 수립한다. 이 과정에서 정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데커의 의견은 상당히 중요하지만, 데커 혼자서 계획을 전부 짜지는 않는다. 각 팀원에게는 각자 전문 분야가 있고, 서로 놓치는 부분을 보완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크로노와 맨손 어뎁트 2명의 머릿속에는 전투만 있었고, 마우즈는 이번에도 마법적인 의견 외에는 수동적이었다.

결국 다들 데커만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데커가 멱살을 잡아야 했다.
창고의 건물 배치와 경비 체계를 정찰하는 과정은 라라비가 대부분 담당했다. 정찰을 쉽게 해주는 장비를 라라비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보 검색 과정은 라라비가 전부 담당했다. 컴퓨터 스킬이 있는 캐릭터는 팀의 데커인 라라비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창고에는 창고의 물류 정보를 담당하는 호스트(서버)가 있었다. 호스트에는 바그네르 그룹(Wagner Group)의 로고가 찍혀있었다.
밀리터리 쪽 지식이 약간 있었던 라라비는 이들이 러시아의 PMC 그룹 중에서 유독 막강하고 잔혹한 그룹임을 떠올리고 알렸다.

호스트의 방화벽과 보안 체계는 상당히 강력했고, 함부로 해킹을 시도하면 경비가 더욱 삼엄해질 판이었다. 그래서 라라비는 상대적으로 보안 능력이 떨어지는 카메라를 해킹하고 백도어로 삼아서 호스트에 침투하는 고전적인 해킹을 시도했다. 드론의 순찰 주기에 맞춰서 최적의 시간을 잡고, 목표 카메라와 반대쪽 카메라에 무력화 탄을 맞춰 시간을 벌고, 벽을 타서 높이 설치된 카메라에 접근하고, 나머지 카메라의 사각을 간신히 피해서 케이블을 연결했다. 벽돌벽을 타고 내려가다 떨어져 소리를 낼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도 크로노가 잡아주어서 별다른 소리 없이 착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가지고 있던 엣지 4점 중 절반인 2점을 소모했다.

카메라를 해킹한 뒤 백도어를 타고 들어가 VR로 바라본 바그네르 그룹의 호스트 내부는 호화로운 5성 호텔과도 같았다. 일반인이나 직원에게는 일하기 편한 곳이지만, 데커에게는 더더욱 주의해야 하는 장소였다. 오피스의 문을 열면 원하는 파일이 있을지, 아니면 블랙 IC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매트릭스 지각과 매트릭스 검색으로 쓸만한 파일을 찾아내는데는 성공했다. 창고에 담긴 물건의 목록과 간략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목표에 대한 정확한 묘사나 물류 운송 스케쥴은 정작 중요한 정보는 없었다. 목표를 제대로 찾지도 못했고, 계획을 짜는 데 필요한 타임라인도 확보하지 못했다. 해킹 과정에서 얻은 수확은 건물 내부에 있는 카메라와 보안 요원들의 배치를, 그리고 보안 요원들의 장비 현황(PMC 수준)을 알아낸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데커가 리더를 병행하는 상황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벽돌벽을 타고 오르내리고 호스트를 해킹하는 것은 그 자체로 런 과정의 절반을 차지하는 노동이었다. 그리고 그 노동의 여파로 엣지를 상당부분 소비한 라라비는 슬슬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타임라인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머지 팀원들에게 알리자 크로노, 어뎁트 A, 어뎁트 B는 즉시 정면 돌파를 할 것을 계속 주장했다. 결국 라라비는 팀원들의 의견에 따라 정면 돌파를 돕기로 결정했다. 라라비가 카메라를 마비탄으로 마비시켜 접근을 감춘 뒤 근접전 캐릭터들이 최대한 근접한 후 나머지 팀원들이 화력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창고의 외곽에는 마법적인 존재의 접근을 막는 마나 장벽(Mana Barrier)이 쳐져있었다. 어뎁트 2명이 마나 장벽을 안전하게 통과하려면 자신들의 어뎁트 파워(패시브 능력)를 일시적으로 해제하고, 장벽을 넘어간 뒤 다시 가동시켜야 했다. 그동안 이들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경비들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카메라가 마비된 틈을 타 장애물 사이로 숨어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어뎁트 A와 어뎁트 B는 중요한 사실을 알리는 것을 간과했다. 둘은 근접전 캐릭터임에도 은신(Sneaking) 스킬이 아예 없었다. 그리고 어뎁트 B의 신체 능력은 전적으로 어뎁트 파워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창고 건물 외부에 카메라가 깔려있는 상황에서 은신 12다이스를 굴려도 모자랄 판에 어뎁트 B는 은신을 급하게 2다이스밖에 굴릴 수 없었다. 그 결과...





크리티컬 글리치를 굴렸다. 엣지를 써서 글리치로 완화시킨 상황에서도 어뎁트 B는 발을 헛디뎌 나 여기 있소 하고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즉시 경비병들은 돌격소총을 연사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경비를 근거리에서 끌어와 급습했으면 모를까, 2턴에 걸쳐 이동할 거리 밖에서 돌격 소총을 쏘는 경비를 상대로 어뎁트 A와 B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때 라라비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경비병을 제압하는 데 걸리는 이상적인 시간, 건물 내부 정보를 바탕으로 물건을 찾는 데 걸리는 이상적인 시간, 물건을 준비된 차량까지 운송하는 데 걸릴 시간. 시작하자마자 들켜버린 이상 모든 것이 최소한의 시간 안에 이상적으로 해결된다고 해도 적의 2분 대기조 특수부대(HTR)가 오기 전까지 물건을 빼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싸움으로 부상당하고 엣지를 소진한 상태에서 2분 대기조와 또다시 싸운다? 자살 행위였다.


전투는 당연히 이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우즈는 다른 어뎁트와 마찬가지로 마나 장벽 안에 들어가느라 시간이 소비되어서 버프 마법과 소환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돌격 소총을 든 인원이 라라비와 크로노 둘 밖에 없고, 크로노는 자신이 의존하던 사이버아이가 적대적인 해킹 공격을 받아 제대로 싸움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라라비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무선 장비를 끄라고 제안하고, 뒤이어 후퇴하자고 무전을 넣는 것 밖에 없었다. 데커인 라라비만이 적을 제대로 제압하고 있는 상황이면 이미 망한 것이 아닌가. 라라비가 해킹 공격을 방어한 뒤 크로노는 무선 장비를 제안대로 껐지만, 바램과는 반대로 창고에 더욱 깊숙히 들어가기 시작했다.


난리통에 후퇴할 수 있었던 것은 라라비와 마우즈밖에 없었다. 크로노는 사이버 사무라이가 으레 그렇듯 돌격소총 세례를 버텨내며 싸우다 기절해 쓰러지고, 먼저 기절해있던 어뎁트 B는 파편 수류탄 찜질에 빈사 상태가 되고, 어뎁트 A는 상어 멘토 스피릿의 피를 갈망하는 충동에 휘말려 더 이상 후퇴할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라라비가 차의 시동을 켜고 코너를 돌았을 때 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속력으로 창고를 향해 접근하던 2분대기조의 방탄 SUV였다. SUV는 마우즈 쪽 측면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마우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라라비도 부상으로 기절하고 HP가 마지막 1칸만 남은 빈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생체 신호 모니터: 생체 신호 희박함.]

경비 데커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꺼두었던 시스템이 생체 신호 모니터의 신호를 받고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Fuchi Cyber-Ex 사이버덱, OS Rev 6.5663: 시스템 재부팅중...]
[세이비어 나노머신(Savior Nanites) 시스템: 나노머신 투입중...]
[자동 투여기: 넘(Numb) 각성제 투입.]
[사이버웨어 진단중... 중대한 손상 감지.]
[머큐리 코멧(Mercury Comet) 차량 진단중... 차량 구동계 완전 파손.]
[세이비어 나노머신 시스템: 응급처치 지혈 중...]
[생체 신호 모니터: 생체 신호 일부 회복. 중대한 과다 출혈 감지.]
[트랜시스 아발론 컴링크: 재부팅중... 재부팅 완료.]


라라비의 부상을 감지한 자동 약물 투여 시스템은 각성제와 지혈용 나노머신을 투입했다. 다행히도 나노머신이 제대로 작동하고 라라비의 HP를 대량으로 회복해준 덕분에 각성제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다. 일시적으로 정신을 차린 라라비는 연행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행동 하나를 얻었다. 마지막 행동은 자신을 조직원으로 스카웃하겠다고 제안한 일루시브 맨에게 다음 메세지를 보낸 것이었다.


"자동... 조난 신호... C3."
[트랜시스 아발론 컴링크: 메모리 덤프 개시. 덤프 결과를 신호에 첨부합니다...]

["안녕하신가요, 판옵테스 씨. 제가 런 과정에서 붙잡혔음을 알리기 위해 메세지를 보냅니다. 팀의 데커로써 팀원들을 위기 상황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했음을 알려드려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만약 저를 구출해주실 수 있으시다면 빚은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붙잡힌 상황에 관한 전후사정은 메세지의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라라비였습니다."]
[트랜시스 아발론 컴링크: 출고 상태로 포맷중...]



다시 기절하기 직전 라라비가 한 생각은 세가지였다.


아마도 크로노와 어뎁트 2명은 도망치는 라라비를 원망했을 것이다. 라라비도 언젠가 런 과정에서 싸우다가 도망치는 한 사무라이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그 사무라이의 심정이 드디어 이해가 갔다. 본인은 비록 무전을 넣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크로노와 같이 싸워 같이 후퇴하지는 않았다. 크로노가 살아남는다면 자신을 용서하기를 바랬다.


이번에도 라라비는 적의 데커에게 대응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무선 장비를 꺼야 했다. 이 열등감으로 인해 라라비가 엄수했던 Like a Boss 신조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OOC: 해당 런을 뛴 GM으로부터 라라비가 살아남는다면 신조를 여러개의 작은 부정적 퀄리티로 쪼갤 수 있다고 허가를 받았다.)


마지막 생각은 자신이 붙잡힘으로 인해 정체가 드러날 지인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라라비는 기억을 수집하는 데커였다. 기억의 대상이 된 지인들은 러시아 용병들에 의해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라라비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일루시브 맨을 통해 본인이 당했다는 사실이 지인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고, 이들이 자신들에게 해가 오기 전에 외양과 SIN을 바꾸고 정체를 감출 수 있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런은 TPK로 끝났다. 지난 TPK 기록은 4인 팀이었으므로, 5인 TPK는 서버 신기록이었다.


어뎁트 B는 자신의 캐릭터가 쓰러지자 일찌감치 게임을 껐다. 이후 은신 스킬이 있는 사무라이를 다시 만들어왔다.

어뎁트 A에게는 다른 캐릭터가 있었으므로 이후 그 캐릭터를 쓰기로 했다.

마우즈의 플레이어는 마우즈에게 애착이 많았는지 GM에게 불만을 표한 뒤 서버를 떠났다.

크로노의 플레이어와 나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기로 하고 자리를 떴다.


하루가 지난 뒤 다시 보이스 챗에 들어왔다. 그랬더니 다들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B1 (남): ""지난번 탈옥 런처럼 3개 이상의 팀이 동시에 런을 뛰는 건가?"

D1 (남): "어뎁트랑 크로노는 어쩌고?"

B2 (남): "크로노까지는 구할 의향이 있는데 어뎁트 둘은 위험 요소였잖아. 필요 없지."

B2 (남): "어, (나) 들어왔네. 그거 알아? 다들 라라비한테 신세 진 게 많았거든. 그래서 라라비 일병 구하기를 한다는데."

GM M(여): "내 캐릭터 2명 다 라라비랑 뛴 적이 있는데, 둘 다 투입해도 되나?"

GM K(남): "M, 런 한번에는 하나만 돌려."

D1 (남): "나도 시간대가 맞으면 끼워줘."


...


B2 (남): "그래, 아직 못 들었을테니까 다시 말하는데, 라라비를 구출하러 런을 뛰겠다는 플레이어가 한 20명쯤 된다는데?"

GM M(여): "내 캐릭터는 둘 다 죽으라고 만들어졌으니까 런 뛰어줄게. 공짜로."


...


GM 스탭 2: "정 그렇게 원하면 런을 기획해서 돌릴테니까 시간 좀 줘봐."


그렇다. 20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악명 높은 러시안들로부터 라라비를 구하기 위해 런을 뛰겠다는 게 아닌가.


라라비가 지인과 동료 러너들을 기억으로 수집한 것 처럼, 동료 러너들도 라라비를 기억으로 수집했던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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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데커 가이드나 탈옥 런 후일담을 올릴 볼 때까지 사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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