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012년 사이언(Scion)이라는 규칙으로 마스터링했던 장기 캠페인에서 있던 일이다.
*사이언은 화이트울프에서 만든 TRPG 규칙으로, PC는 겉보기엔 현대 배경의 일반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신화에 나오는 신의 직계 후손이라는 설정이다.
PC들은 처음에는 자기가 인간인 줄 알고 살아가다가, 부모를 만나 혈통과 능력을 각성한 뒤, 신들의 적인 타이탄과 싸우며 세상을 보호하는 것이 놀이의 기본 골자다.
PC들은 처음 각성했을 때는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영웅(Hero)이며, 위업을 쌓아 레전드 수치를 올리다 보면 반신(Demigod)이 되고, 나중에는 진짜 신(God)으로까지 올라가게 된다.
개중에 인도의 데바(Deva) 판테온, 파괴신 시바(Shiva) 신의 아들로 자기 PC를 만든 플레이어가 있었다.
당시 나는 각 PC들이 반신(Demigod)으로 각성하는 이벤트를 하나씩 다 준비해줄 생각이었다.
물론 신적인 캐릭터에 걸맞게 아주 멋지고 충격적인 연출이 되었으면 했었지.
그런데 알다시피 인도의 신들은 인격신이면서도 자주 다른 신과 개념적으로 융합되거나, 문자 그대로 변신해서 다른 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비슈누 신과 시바 신이 합체해서 하리-하라라는 신이 된다던지, 온화한 파르바티가 무시무시한 칼리나 검은 찬디로 변한다던지)
그런데 이 플레이어가 좋아하는 NPC가 하나 있었다. 마찬가지로 시바 신의 아들이고, 사실은 라이벌 포지션이었고, 그래서 PC에게 한 방 먹인 적도 있는데 이상하게 좋아하더라고...
그때만 해도 나는 사람의 마음이 부족...아니, NPC와의 관계에 감정이입을 많이 하는 플레이어를 많이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고 말았다.
바로 이 NPC를 희생시켜서 해당 PC를 반신으로 각성시키자는 것이었지.
하지만 그냥 희생시키면 시시할 거라고 생각해서 내딴에는 재미있고 독창적일 거라고 생각한 이벤트를 계획했다.
뉴욕 도심에 거대한 뱀을 닮은 브리트라의 화신을 출현시킨 뒤, 이 화신을 PC들이 때려잡는 과정에서 해당 PC와 NPC를 브리트라가 꿀꺽 삼키게 했다.
(원래 브리트라는 입 안에 약점이 있어서 신화에서도 거길 공격당해서 죽는다)
그 PC와 NPC가 삼켜진 뒤 녹으면서 신의 피가 흘러나와 브리트라의 뱃속에 있던 엄청난 양의 물을 전부 영약 암리타로 변화시켜서, 홍수가 나는 것을 막았다.
문제는 시체가 너무 단단해서 밖에서는 가르고 꺼낼 수가 없었고, 다른 PC가 둘을 꺼내러 뱃속으로 들어갔는데...
완전히 용해된 PC와 NPC가 암리타 안에서 다시 되살아나면서 한 명으로 변해서 합쳐지고, 반신이 되는 것이 이벤트의 결말이었다.
나는 세션이 끝난 뒤에 플레이어가 즐거워할 거라고 기대하면서 후담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플레이어는 매우 힘들어했다.
후담 때 재미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미심쩍어서 나중에 다시 물어보니 NPC가 그런 식으로 합체(?)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쉽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게다가 한동안 그 플레이어에게 말을 걸어도 자꾸 대화를 회피하는 것 같았다.
나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스포일러가 되어도 좋으니까 그 NPC를 이렇게 하고 싶다고 미리 물어봤어야 했던 것이다.
나중에 새로운 NPC를 내보내 그 플레이어를 낚아서 다시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해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저지른 실수가 사라지진 않았다. 참고로 그 플레이어는 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가끔씩 그 NPC 얘기를 꺼내곤 한다...
엥 이거 완전 아마데우스 아니냐?
슬프네요. 그런데 신격의 경우 여러가지 수단으로 부활하거나 다시 태어나기도 하니까, 신이 된 이후에 그 npc를 부활시키거나 재탄생시킬 수도 있지 않았어요?
felis// 음...정확히는 그 NPC와 PC가 아예 새로운 인물이 된 거라서 불가능했습니다.
lies>인도 신이니까 그 새로운 인물의 두 화신이라던가 뭐 그런 느낌으로... 플레이어가 별로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은 아니려나요.
이거 뭔가 BL물같은 느낌이 나는데....
felis// 반신까지는 그런 식으로 화신 만드는 건 불가능하고요. 신이 된 후에는 가능했는데 굳이 하려고 하진 않더라고요.
근데 PC정체성 사라지는 건 나도 좀 그럼. 만화 봉신연의에서 태공망이 왕천군이랑 합체할 때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음음, 죽은건 죽은 거라고 여겼나보네요.
114.207// 어떤 부분이?
125.128// 다행히 그 부분은 플레이어도 크게 마음에 두지 않은 듯.
이거 무용담이냐?
ㄴ무용담 같아 보이냐? 인사이트 판정 실패해서 플레이어 놓칠 뻔한 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