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시리즈 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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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빌딩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예나 지금이나 댄디류는 판본을 막론하고 전투가 플레이의 8할 정도는 차지하는 룰이고, 이는 패파 역시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전투에서 얼마나 활약을 잘하는지에 따라 캐릭터의 쓸모있음이 결정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데,


이 부분에 있어서 K의 캐릭터는 - 거의 확실히 단언하지만 - 폐급이었다. 상시플 최강 캐릭터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지만 최약을 꼽으면 누구나가 주저없이 K를 뽑을 수 있었을 정도로.


이유는 한 가지, K의 빌딩이 3레벨 (시작) 시점에서부터 11레벨 (끝) 시점까지 줄곧 "Focused Shot" 이라는 개쓰레기 재주를 기반으로 빌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재주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기본행동으로 한 발을 쏘는 대신 피해에 지능수정치를 붙여서 날리는 것인데,


성능 자체는 직업이 인베스티게이터(조사원 컨셉) 라 지능이 높은 K에게 잘 맞았지만, 문제는 사용이 기본 행동이라는 것이다.


패파 해본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대충 6~7레벨이 넘어가는 이점에서 이 룰은 "풀어택 싸움" 으로 변모한다. 마샬들간의 싸움은 누가 더 1회라도 더 많은 공회를 가져가는 데 촛점이 맞춰지게 되고, 전원에게 추가 공회를 부여하는 가속 마법은 OP 중에서도 최고의 씹OP 마법 취급을 받게 된다.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 행동으로 단 한대 딱콩 하고 때리는 K의 빌딩은 무기로 BFG라도 들고오지 않는 한 딜에 있어 열세를 면할 수 없었던 것. 난 저렙때만 쓰고 고렙때는 리트할 줄 알았는데 끝까지 쓰더라 ㅋㅋㅋ


게다가 인베스티게이터 자체가 스챌은 정말 오지게 잘해도 전투는 살짝 뒤떨어지는 감이 있어서 더더욱 이 단점이 돋보였다. 지능을 붙이면 기대 딜 10~15 정도는 나오고, 계획된 전투/타격을 병행하면 20~30까지도 나오지만 그러면 뭐하나? 옆에 있는 요정 궁수 M씨는 하나당 그 정도 피해의 화살을 라운드당 4발씩 날려대고 있거늘....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캐릭터, 건강이 8이었다. 혹시 패파 룰 모르는 사람을 위해 첨언하자면 일반인 평균 건강이 10이고, 보통 캐릭터 빌딩 할때 피통 때문에 일괄적으로 12~14 정도는 준다. 엘프라 종족 보너스 때문에 건강이 8로 깎였던 캐릭터는 있어도 인간 주제에 자의로 건강 덤프를 한 캐릭터는 우리 카페에서도 K의 캐릭터가 유일하다.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없을 듯.




아무튼 그렇게 전투적으로서는 동렙 캐릭터는 커녕 동렙 NPC만도 못한 성능을 자랑하던 K였지만,


의외로, 정말 의외로, 전투적인 활약이 없었냐 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NO" 다. 아니 오히려 내가 진행하던 조우에서는 다른 놈들 다 쓰러지거나 무력화됐는데 K 혼자 살아남아 막타를 치는 그림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내가 당장 애매하게 기억하는 것만 3번 정도.


이 놀라운 현상이 벌어진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점은 K가 "약했다" 라는 사실 그 자체다. 약했기 때문에 딱히 조우를 짜면서 별다른 견제를 넣지 않아도 되었고, 약했기 때문에 다른 PC들을 우선적으로 조졌으면 조졌지 K부터 공격하진 않았다. 말하자면 존재 그 자체로 어그로를 덜 끌었던 거다.


거기에 원거리라 어차피 공격을 덜 받는 입장이기도 했고, 놀랍게도 조건부 이탈 능력이 있어서 필드 전체를 휩쓰는 광역기에는 남들 이상으로 피해를 안 입었다. 인베 특유의 사후내성 보정 기능으로 내성류 효과에도 강했던 것은 덤. 진짜 절묘하게 "신경쓰면 못 죽일 건 없는데, 딱히 신경쓰지 않으면 횡사하지도 않는" 라인을 잘 오간 나머지 낮은 피통에도 불구하고 공격받는 상황 자체가 매우 적었던 것이다.


다음 두 번째 이유는 K의 무기가 다른 것도 아닌 "총" 이었다는 점에 있다. 패파에서 총은 이것저것 단점이 많지만 그 이상으로 존나 압도적인 장점이 하나 있는데, 상대의 장갑 (강철 갑옷이나 방패, 두꺼운 가죽) 을 완전히 무시하고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덕분에 명중률이 비약적으로 높기 때문에 K는 비록 가진게 딱콩딜 뿐이어도 거의 99%의 상황에서 그 딱콩딜을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보스의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가장 무서운 캐릭터였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다름아닌 K 자신의 기이한 연구능력이었다. 내 기억으로 분명 이 사람 패파 처음 하는 사람이었을 텐데, 대체 어디서 줏어들어왔는지 모를 기묘한 미번역 능력들을 속속 들고와 날 놀라게 하곤 했다. 기회공격으로 견제 방어 전부 다 하는 빌딩을 상대로 기회공격을 봉인하는 샷을 날린다든지... (결국 그 조우는 그대로 털렸다)


후반부엔 "배신 재주 (Betrayal Feats)" 라는 듣도보도 못한 목록에서 Friendly Fire 라는 재주를 골라와 썼는데, 이게 성능이 존나 골때렸다. +2 보너스를 받고 아군이 있는 칸을 통과하는 공격을 할 수 있는데, 만약 공격이 빗나가면 같은 공격이 그대로 아군에게 들어가버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격이 맞든 빗나가든 적은 이 공격 자체에 "너무 당황해서" 아군에게 기회 공격을 유발하게 된다.


다시 봐도 얼척이 터지는 성능이지만, 웃긴 건 이게 실제로 효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빗나가면 공격이 아군에게 들어간다는 단점은 총의 높은 명중률 때문에 그다지 단점이 안 되었다. 거의 항상 맞았으니까. 그리고 저 기회 공격을 유발하는 부분 때문에 아군이 바로 한대를 더 칠 수 있게 되고, 이는 실질적으로 K가 2회 공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효과를 주었다. 비록 남의 손을 빌리긴 하지만 기대 딜이 확 늘어난 것이다.


물론 성능이 좋은 거랑 RP로 어떻게 묘사되는지는 별개라서, 처음 저걸 썼을 땐 마스터고 다른 PL이고 전부 경악했다. 플레이 안에서 보면 그냥 갑자기 아군 등 뒤에 파고들더니 사선에 함께 넣고 쏘는 미친놈에 불과했으니... 처음 봤을 때 진짜 저 성능인게 안 믿겨져서 원문 가서 체크하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저 배신 재주와 함께, 후반부 K가 가장 많이 써먹었던 녀석이 바로 오늘의 주제인 "고블린 해골 폭탄(Goblin Skull Bomb)" 되시겠다.


이 아이템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원거리 접촉 공격으로 폭탄을 던져 상대를 맞추면 5d6 화염 피해를 입히고 반사 내성 DC 14를 굴려 몸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이 불 피해에 의해서든 첫 화염 피해에 의해서든 대상이 사망할 경우, 대상의 두개골을 그대로 새로운 고블린 해골 폭탄으로 변이시킨다. 말하자면 막타를 쳤을 경우 한정으로 재사용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이 아이템이 말만 "폭탄" 이지 실은 저주 아이템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 폭탄은 사실 실제로 터지는 게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강한 물리적 충격을 받아 깨졌을 때 자신과 가장 마지막으로 접촉한 대상에게 저주를 내려 5d6 피해를 입히는 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만약에 폭탄이 빗나가서 땅에 떨어져 박살날 경우 가장 마지막으로 만진 대상인 자기 자신이 저 5d6 피해를 고대로 입게 되는 것이다.


나쁘지 않은 앞뎀과 그에 수반되는 강력한 리스크, 그리고 막타를 치는 데 성공하면 그대로 상대의 두개골을 새로운 폭탄으로 만든다는 쌈마이한 경제성까지. 온몸에 B급 정서의 피가 철철 흐르는 K가 이런 핫한 아이템을 놓칠 리 없었다. 다행히 룰상 인베의 모든 능력이 고블린 폭탄에도 다 들어갔기에 그는 빠르게 이 아이템을 구비해 상시 벨트에 차놓고 다녔고, 단순 컨셉질이었던 요도랑 달리 정말로 유용한 단발 마격 필살기 느낌으로 플레이 막바지까지 써먹었다. (일반 총탄딜에 비해 기대딜이 +13 정도 높음)


그리고 이 시점에서부터 K에게는 요도로 업적스택 쌓는 기행남 이미지에 더해 마주친 적을 새로운 고블린 폭탄으로 변이시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미친 폭탄광 이미지까지 형성되었다. 조우를 개시하는 RP 대사가 "새로운 폭탄으로 만들어주지" 가 됐으니... 대체 누가 악당인지 모르겟다 ㄹㅇ


그리고 나는 몇몇 조우에서 꽤나 난해하면서 어찌 보면 철학적이까지 한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예를 들어 스웜에 저걸 던지면 폭탄이 나오냐 라든가, 아니면 안드로이드한테 저걸 던지면 먹히냐 라든가. 일단 PL 프렌들리하게 둘다 허용은 해줬지만...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2018년의 막바지를 장식할 새로운 메인스트림의 시기가 찾아왔다.


내가 돌린 상시플에선 대략 6~8주마다 한 번씩 영지 전체를 휘말려들게 하는 대사건을 개최하고, 나를 포함한 모든 마스터들이 총출동해 그걸 극복하게 하는 이벤트가 있다. 이걸 "메인스트림" 이라고 부르는데, 캠페인 종료시까지 총 8번 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였고 이번이 그 7번째였다.


7번째 메인스트림의 주제는 영지를 설립한 초대 영주의 귀환이었다. 그는 어떠한 약이나 신성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아내를 고치기 위해 북부에 있는 "시간의 샘" 을 찾아 떠난 후 그대로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랬던 그가 돌연 영지로 돌아온 것이다.


내막은 이랬다. 선대 영주는 시간의 샘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고 적절한 시련을 통과해 시간을 자유로이 다루는 힘을 얻는 데도 성공했지만, 정작 그 동굴이 마치 무릉도원처럼 내부와 외부의 시간 흐름이 달랐던 탓에 본인은 2개월만 지났다고 생각했던 게 밖에서 실제론 50년이 지나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그가 돌아왔을 땐 아내는 이미 예~전에 죽고 없고, 그의 손녀 (현 영주, PC캐릭터) 를 필두로 모르는 인물만이 영지에 가득한 상황이었다. 이에 절망한 그는 아내가 살아있는 세계를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내겠다고 결심하고 시간의 힘을 동원해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역사를 바꾸려 하니, 그로 인해 현세가 뒤죽박죽이 된 PC들이 그를 쫓아가 그의 계획을 저지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그리고 대략 2주에 걸쳐 여차저차 선행 세션들을 전부 격파하고, 마침내 최종 세션이 시작되었다. 이번에 동행하게 된 것은 메이거스/인퀴지터/블러드레이저와 우리의 인베스티게이터 K. 최종보스인 선대 영주는 자신이 지닌 시간의 힘을 120%로 끌어내 명중한 공격을 피하고, 빗나간 공격을 맞게 하고, 입은 상처를 회복해대는 신기를 부렸으며, 그 압도적인 힘 앞에 적폐 3 + 그다지 적폐는 아닌 1 의 조합은 전멸 위기에 처했다. 그렇게 이제 보스의 공격이 한 번만 제대로 들어가면 TPK가 실제로 이루어질 상황에서 그의 턴이 돌아왔는데...


선대 영주가 다루는 시간의 힘은 결코 만능이 아니었고, 전투 과정를 진행하며 무리하게 힘을 끌어낸 탓에 계속 과부하가 쌓여가고 있었다. 나는 이걸 "시간 폭주" 라는 능력으로 묘사를 했는데, 시간의 힘 사용 스택이 일정 이상 쌓이면 주변의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각종 랜덤 효과가 PC들 전원에게 부여되는 기믹을 짠 것이다. 이 랜덤 효과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공평하게 있어서 말 그대로 "폭주" 라는 느낌이 들도록 설계를 했던 것인데,


앞선 랜덤효과 굴림에서 하필 "지난 턴에 입은 피해를 그대로 다시 입음", "속도가 5피트로 하락" 따위가 걸려서 골골대던 K에게 갑자기 다음과 같은 효과가 걸렸다.



초대 영주 "브레니아":두근두근 폭주☆굴림
12. 정지 : 3 라운드간 시간 정지 효과



모든 효과들 중에서도 최고 대박 당첨인 시간정지 효과. 비록 패파 룰상 시간이 정지된 동안 직접 공격은 불가능하기에 뎀딜은 그다지 많이 넣을 수 없지만 저게 어딘가. 공격이 아니더라도 시간이 정지되어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쓰러진 아군에게 포션을 먹여줄수도 있고 풀어택각인 아군을 피신시켜줄수도 있으며 투명화 같은 버프를 걸 수도 있다. 무료 턴 3개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K의 선택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전황을 가만히 살펴보던 K가 말했다.



"저 영주한테 고블린 폭탄 던져도 됩니까?"


"네? 시간정지 중에는 공격을 비롯한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이 막히는데요."


"ㅇㅇ 근데 고블린 폭탄은 엄밀히 말하면 깨졌을 때 발동하잖아요? 그럼 폭탄을 맞춰서 당장 피해를 못 입히더라도 '접촉' 한 사실은 남으니까,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순간 피해가 한꺼번에 들어가겠지 싶어서."



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리있기가 일리시드 같은 말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보스의 남은 체력이 고블린폭탄 + 마지막 남은 라운드 레디액션 총탄을 합쳐도 다 깎기엔 모자란 수준이었다는 점인데.


내가 이 점을 지적하자 K가 대답했다.



"저 폭탄 하나 더 있음."



결국 나는 OK했다.


그렇게 세기에 남을 멋진 대스턴트가 시작되었다. 보스가 포효하며 아군을 휩쓸려 한 순간, 비틀거리던 K의 몸이 일순 흔들리더니 검은 해골 두 개가 그의 머리 위로 솟구쳤다. 동시에 날아온 해골은 그대로 선대 영주와 충돌해 검은 화염을 흩뿌렸고, 그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직 아슬아슬 기력이 남아있었던 (이 시점에서 HP가 1) 영주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마지막 발톱을 휘두르려고 했으나, 그 순간 멀리서 날아온 총탄 하나가 그의 가슴팍을 꿰뚫고 날개를 찢어 추락시켰다. 그렇게 시간을 지배하던 사상 최강의 반룡은 현재에서 온 한 올백머리 공무원의 손에 의해 쓰러졌다.


넘나 ㄱㅆㅅㅌㅊ인 장면이었고 모두가 멋지다며 박수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K는 어쩐지 살짝 아쉬운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K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폭탄 2개로 죽였으면 새 폭탄으로 만들어버리는 건데..."



보스가 총탄에 죽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기 주군의 눈앞에서 그녀의 할아버지의 두개골로 만든 폭탄을 던지는 보좌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테니까. 정말 굉장한 남자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