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걍 낚시임

수많은 영상매체, 게임에서 주인공이 대면하는 최종 보스는 주인공의 여정과 함께한 관객 혹은 플레이어의 응축된 감정과 대면해야 하는 부담감을 안게 돼. 이는 최종 보스가 대면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과정이고, 그는 또한 응축된 감정에 걸맞은 고통 혹은 난이도를 주인공에게 제시해야 하는 과업도 가지고 있다는 거지. 즉, 주인공에게 부여된 고통스럽고 끔찍한 고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장치로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인데, 창작자들은 당연히 이러한 지위에 있는 '최종 보스'에게 그만한 매력을 부여하고자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왔어.


멀리는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가 그러하고, 가까이에는 어벤져스 시리즈의 '타노스'가 그러하지. 다스 베이더는 세 편의 영화에 걸쳐 황제의 무자비한 철권으로 주인공을 시시각각 압박했고, 직접 대면했을 때도 주인공을 뛰어넘는 강력한 무력으로 주인공과 시청자에게 압도적인 절망감을 선사했어. 그리고 사실은 주인공의 아빠였다는 경악스러운 스토리라인까지 갖게되자, 다스 베이더는 (실질적인) 최종 보스였던 황제를 뛰어넘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그의 최종 보스로서의 지위까지 위협할 정도로 스토리 상 비중이 급격히 상승했고 말이야.


타노스도 어벤져스 전원을 떡메치듯 두들기는 인상적인 액션만으로 '최종 보스'임을 입증했고, 거기에 걸맞은 상상초월한 야심과 사명감으로 무장했기에 어벤져스 일당이 시리즈 최종 보스로서 상대하기에 부족함 없는 악역이 되어주었어. 다만 턱주가리 디자인은 씨팔 좀...블루베리 머핀밖에 생각 안나잖아. 여튼 그런 존나 웃긴 얼굴을 하고도 시종일관 스크린을 압도한 타노스는 최종 보스가 가져야 하는 카리스마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었지.


이렇게 다스 베이더와 타노스는 최종 보스, 악역으로 기능했음에도 그들이 가진 매력은 그들이 시리즈가 끝난 후에도 끊임없이 회자되게 해주었어. '스타워즈 악역'하면 황제보다 다스베이더를 먼저 떠올리고(다스 베이더는 최종적으로 라이트사이드로 귀환했지만), '어벤져스 악역'하면 만다린이나 오베디아보다는 타노스를 먼저 떠올리곤 하잖아?


그래서 그런지, 수많은 TRPG의 마스터들, 아마추어 시나리오 라이터에 가까운 이들은 최종 보스에 걸맞은 매력을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 어떤 PC의 백그라운드로부터 기원한 최종 보스라든가, 결국엔 아군이 되는 최종 보스 등등 단순히 유니크 템 루팅 전 대가리를 깨야만 하는 장애물 취급으로 전락하지 않게 다양한 매력과 내러티브를 부여해주려고 하는거지. 그만한 상대를 상대해야만 하는 PC들의 위상도 덩달아 상승하고, 플레이어들의 마음가짐도 또한 날카롭게 벼려지니깐 말이야.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그런 매력적인 최종 보스에 약간 질리기 시작했어. 창작자들이 최종 보스에 부여한 매력들에 질렸다고 말하는게 좀 더 정확할지도 몰라. '사실은 착한 놈'이라든가, '사실은 주인공의 XX', '사실은..', '사실은...' 등등...


내가 영어도 모르던 아주 어릴 때 동전질을 거듭하며 대면한 오락실 게임의 최종보스의 대가리를 깰 때 느껴지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어려워졌다는 말이야. 그때도 물론 매력적인 최종보스를 위해 플레이 초반부터 복선을 깔아준다든가, 중간중간 최종 보스의 정체와 그가 가진 비화들에 대한 암시가 제시되었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모니터에 떠오르는 영단어 또한 처치해야할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았지. 어쨌든 최종보스 대가리를 깨면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어. 그놈이 사실은 어떤 놈이었는지 뭔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어. 그놈 대가리를 깨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고, 결국 그놈 대가리를 깨며 게임에서 이긴 것은 나니까.


요새는 TRPG를 하며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 (마스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장편 시나리오의 중간 보스몹의 정체도 플레이 중간중간 제시되었고, 그놈의 대가리를 인정사정없이 밟아 터뜨릴 경우 게임이 꽤나 험난하게 굴러갈 것이라 아마 설득하는 루트로 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 물론 지금 플레이를 즐기고 있기는 하지만,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더라. 그저 '대가리 깨는 것'에만 집중하던 때가 말이야. 매력적인 악역과 그에 얽힌 복잡미묘한 스토리를 풀어내가며 스토리에 흠뻑 물드는 것도 좋지만, 그저 대가리 깨고 밟아 터뜨리는 야만적이고 말초적인 즐거움에 집착하는 것도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 시트를 밥먹듯이 갈아대며 던전 파고들던 고대의 실러캔스들과 함께하던 시절 말이야.


요새 TRPG 판은 서사성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걸지도 모르겠어. 예전이라면 다소 기이하게 여겨진 1:1 플레이도 엄청나게 활성화되었고, 플레이 내내 요구 판정 횟수가 한 자리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내 기준에서 보면) 연극 대본과 유사한 시나리오도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지.


아 물론 그런 것들이 TRPG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야. 어원과 뜻도 불분명한 그런 단어에 어떤 권위를 부여할 생각은 없어. 그저 TRPG의 전체 판이 커져가면서, 내가 서 있던 영역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뿐이지. 상대적인 영역도 축소되고 있지만, 이 판을 떠나는 사람들도 생기는 만큼 내가 서 있는 영역은 점차 소멸하겠지.


새로운 TRPG의 조류가 잘못되었다는건 아니야. 요새 모눈종이에 던전 그려가며 게임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 요즘 같은 세상에 '위저드리'나 '울티마'를 하면서 '디비니티'나 '드래곤 에이지'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게임'을 하지 않는다고 욕하면 어떤 취급을 받겠어?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 뿐이지. 나도 그래. 지금와서 '얘들아 던전 크롤하자 너부터 죽어' 이런 소리 들어줄 사람 없는 것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그것도 꽤 재미있었어. 그냥 던전 들어가서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대가리 깨기 시작하고, 최종 보스까지 달리며 효율적인 대가리 깨기만을 연구하던 그 시절 말이야.


갑자기 신세한탄 글로 변화했는데 4줄 요약함


1. 최종보스에 매력 부여하기는 유구한 전통임


2. 근데 단순 대가리 깨기도 꽤 재밌음


3. 근데 요새 2번은 잘 안함


4. 그래서 요샌 둠만 함. 둠 이터널 나온대서 기분 좋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