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할리곤 트릴로지... 국내에는 드래곤 소드라는 이름으로 번역돼 나온 소설을 보면 페인 플린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그는 왕년에 잘나가던 기사고, 거의 기사도 화신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하지만 소설 시작 시점에서 그는 이미 기사단에서 추방 당하고, 이혼 당하고, 홀로 쓸쓸하고 외딴 숲속 오두막에서 늙어가며 덫 사냥으로 근근히 연명해 살아가는 상태다.


그렇게 된 이유는 누명을 썼기 때문. 페인 플린은 한참 쩔던 시절 강력한 그린 드래곤 버리디스를 패배시킨 적이 있다. 오만하고 간교한 드래곤 버리디스는 여러 마을들을 약탈하여 악명이 높았지만 누구도 감히 도전할 생각을 못했는데, 오직 플린만이 드래곤을 무찌르겠다고 나선 것. 이에 감동한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푼돈을 모아 마을 대장장이에게 주어 검을 만들었다.


당연히 전문 무기장인이 만든 게 아니라 검 자체는 투박했지만, 동네 사제가 축복을 내리자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모여서 성검이 됐다. 오로지 버리디스를 응징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검으로 플린은 자기 그리폰을 타고 버리디스와 전투를 벌여 드래곤에게 치명상을 입혔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간 드래곤은 플린에게 앙심을 품었음.


그린 드래곤답게 버리디스는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하자 마법으로 잘생긴 귀족 모습을 취한 후 플린 아내를 유혹하고, 기사단 동료들을 보물로 매수했음. 그리고 여기서부터 중요한데... 플린이 '항복한 오우거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즉각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여기에 아내와 동료가 증인으로 나섰고, 이 일로 인해 플린의 명예는 박살이 나 기사단 퇴출까지 당했다. 공작이 서거했을 때 시신을 훼손하기 위해 찾아온 괴물들을 며칠 밤낮을 새서 무찌르고, 드래곤을 패퇴시키고, 수많은 전설을 만든 기사가 오우거 항복 안 받아줬다고 쩌리가 된 것.


하도 주변 사람들에게 매도 당하자 플린은 멘탈이 나가서 '역시 내가 부덕한 탓에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은자가 되어 온갖 모멸을 감내하며 살게 됐다. 그래서 소설 시작 시점에는 대놓고 마을 주민들로부터도 '겁쟁이 플린' 같은 모욕을 당하며 살고 있다. 하도 당하다 보니 멘탈이 찌그러진 건진 몰라도 진짜 자기한테 잘못이 있다고 믿고 있음.


그런데 이렇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기사단 출신이며, 그 도덕성을 스스로 내재화했다는 플린이 1권 후반에 가면 좀 묘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을 습격한 오크 무리 중 하나를 포획해서 정보를 얻기 위해 단검으로 고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그는 기사 시절 여러 고문 방법을 터득했다는 언급까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식인괴물 항복 안 받아주는 건 추방 당할 정도의 죄지만, 고문은 허용된다는 말인가? 뭐 지금이야 Code of Conduct에 포함 안 됐나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게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