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 소개 : 블레이드 오브 아르카나 (브레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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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룰이야?


블레이드 오브 아르카나(이하 브레카나)는 일본 TRPG 출판사인 F.E.A.R사(메탈릭 가디언하고 아리안로드 낸 그 회사)에서 낸 중세풍 배경의 TRPG 룰이야. 1999년에 초판이 나온 뒤로 3판까지 계속 설정이 이어져 오다가, 작년(2015)년에 배경을 일신해서 100년 후라는 설정으로 4판(리인카네이션)이 나왔어.



브레카나의 배경


브레카나는 중세 유럽풍의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특히 주된 무대가 되는 것은 독일을 모델로 한 하이델란트라는 지방이고, 인간족이 중심이 되지만 엘프나 드워프, 오크나 늑대인간 등의 아인종도 나오고, 작품 고유의 아인종도 몇몇 등장해.



성흔자와 살육자


이 룰에서 PC들은 “성흔자”라는 존재로 플레이를 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신의 힘”을 일부 깃들인 사람들이야. 창세신화에 따르면 유일신이 만들어낸 종복으로서 (실마릴리온에서 일루바타르가 창조해낸 아이누와 비슷한 존재) 세계 창조를 도운 “아르카나”들이 어둠과의 싸움 끝에 산산히 부서져 전 세계에 흩어졌는데, 그 파편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절대 막아낼 수 없는 공격을 날리고, 죽은 사람조차 되살리는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돼. (그래서 이 룰의 이름이 블레이드 오브 아르카나, 아르카나의 검이야) 물론 성흔자의 수는 설정상 상당히 드물기 때문에 (PC들은 떼거리로 몰려다니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자기가 성흔자라는 것조차 모를 수도 있어.


하지만 성흔의 힘에 취한 나머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성흔의 수(3개, 과거-현재-미래를 의미함)를 넘어서 다른 성흔자를 죽이고 성흔을 빼앗는 악당들이 생겨나고, 이들을 “살육자”라고 불러. 성흔자의 사명은 이런 살육자들과 맞서 싸워서 성흔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모든 성흔이 하늘로 돌아가는 날이 오면 세계에는 다시금 구원이 찾아온다는 전설이 있어(실제로 하이델란트의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모두 그렇게 하늘로 돌아간 성흔이야).



전설이 살아 숨쉬는 땅


브레카나의 가장 큰 매력은 중세 유럽의 온갖 전설들을 한데 모았다는 점이야. 이 세계에는 실제로 악마와 정령들이 존재해. 애꾸눈 노인의 모습을 한 전쟁의 신은 비록 유일신교에 밀려 위세를 잃었지만, 아직도 밤하늘에는 그의 딸인 발키리(바르페, 백조인이라고 불러)들이 날아다니고, 천 개의 눈을 지닌 지옥의 공작은 미공자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마음에 든 귀부인의 영혼을 반지로 만들어 끼고 다녀. 어두운 숲에 혼자 들어가기라도 했다가는 늑대인간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지만, 운이 좋다면 샘물의 요정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 수도, 영원히 사는 엘프들의 숲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어.


그리고 중세 유럽에서 기사 로망스도 빼놓을 수 없지. 설정상 200년 전에 진교(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하이델란트를 통일한 전설적인 왕이 있는데, 아서왕 전설을 기본으로 해서 니벨룽겐의 반지나 롤랑의 노래 등의 기사문학을 한몸에 모아놓은 인물이야. 그는 발키리의 인도를 받아 잃어버렸던 조상의 성검을 되찾고, 용맹한 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을 만들어 통일 왕국을 만들었지만, 적수의 모략에 빠져 자신의 연인(바로 자신을 이끌어준 그 발키리야. 역키잡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지)이 아니라 다른 여자와 동침하게 돼. 그리고 결국은 그녀가 복수를 위해 몰고 온 오크의 군대와 맞서 싸우다가, 오크 대왕과 동귀어진하면서 전사하게 되지. 비록 그 대왕의 직계 혈통은 끊어졌지만, 지금도 하이델란트에는 그 시대의 자취가 수없이 많이 남아있어. 대왕이 오크 군대를 막기 위해 세운 방벽에는 지금도 병사들이 순찰을 서고 있고, 전설적인 기사들이 사용했던 무기가 지금도 귀족 가문에 가보로 전해지고 있어. 원탁의 위험한 자리는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어쩌면 PC가 바로 그 기사들의 영혼을 이어받은 전생자일지도 몰라(이 세계에서는 환생이 실제로 이루어져).


마지막으로, 브레카나 배경에서는 정치극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브레카나의 배경 시대는 대대로 왕국의 정통성이 무너지고 군웅들이 난립하는 혼란의 시대야. 한 배에서 난 형제가 서로 왕이 되기 위해서 칼날을 겨누고, 선제후들은 누구 편에 서는게 좋을지 저울질을 하면서 용병을 사들이고, 타락한 성직자들에게 피의 숙청을 내린 교황(3판 기준 18세의 소녀 교황)은 신교를 뿌리뽑고 정통 신앙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어. 게임으로 치자면 크루세이더 킹즈, 소설로 치자면 얼음과 불의 노래 같은 난장판이야.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이 세계에는 악마와 정령들이 실존해. 그걸 이 상황과 결합하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지. 1:10의 절대적인 열세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장군은 사실 마법의 체스판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몰라. 어쩌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기는 대신 지옥의 군세를 끌고 온 건지도 모르지. 이런 상황이니, 언젠가 기사왕이 다시 되살아나 성검을 손에 들고 하이델란트를 다시 통일하리라는 전설도 반드시 헛소리만은 아닐거야. 



몇몇 특이한 점


● 이 세계에서도 지구의 중세와 마찬가지로 유일신교(진교라고 불러)가 존재하지만, 재미있는 점이 몇 가지 있어. 일단은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12사도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모두 여자야(그래서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의 대부분은 여성이고, 사회 전반적으로도 여성 인권이 높아). 그리고 이미 개신교가 탄생해서 구교와 대립하면서 종교전쟁 같은 구도를 보이고 있고. 마지막으로는 기독교와는 다르게 윤회설이 진리이고 교회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는 거야.


● 이 세계의 문화나 기술수준은 전반적으로 중세와 비슷하지만, 판타지인만큼 현실과는 (마법을 제외하고도) 몇몇 차이점이 있어. 대표적인 게 연금술사들의 기술인데, 중세 배경에서 총을 만들어내어 사용할 수 있고, 증기선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크레아타라고 불리는 자동인형까지 만들어낼 수 있어. 뛰어난 연금술사가 만들어낸 크레아타는 진짜 사람이나 다름없이 말하고 움직일 수 있고(PC로도 사용할 수 있어. 즉 성흔자나 살육자도 될 수 있다는 거야), 그 중에는 알파고 뺨치는 지략을 가지고 국왕의 책사로 활약하는 크레아타도 존재해. 다만 이런 오파츠같은 기술력도 연금술사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특수한 기술을 가진 연금술사 본인들만 사용하는 것 같아.



브레카나의 룰


아르카나


앞에서 말했듯이, 브레카나에서 PC는 모두 3개의 성흔을 깃들인 성흔자야. 이 성흔의 종류는 아르카나의 수와 같은 22종류(타로카드의 메이저 아르카나의 수와 같지)이고, 각각이 하이델란트의 특정한 직업이나 계층 등을 대표해. 이를테면 0번(광대)에 대응하는 아르카나인 벤투스(Ventus)는 음유시인과 방랑자를 상징하는 아르카나이고, 4번(황제)에 대응하는 코로나(Corona)는 왕과 귀족 등의 지배계층을 상징하는 아르카나, 7번(전차)에 대응하는 아다마스(Adamas)는 기사를 상징하는 아르카나지.

브레카나의 캐릭터 제작은 이 아르카나 중 세 개를 골라서 과거-현재-미래로 배열하는 게 돼(같은 아르카나를 중복해서 선택해도 괜찮아). 예를 들어 <벤투스-아다마스-코로나> 라고 한다면, “유랑민으로 떠돌아다니던 부랑아(과거)가 우연한 기회에 기사로 서임받고(현재) 결국 한 지방의 영주가 된다(미래)” 라는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지. 

데이터적으로 본다면, 이 아르카나 배치에 따라서 캐릭터의 능력치(체격, 반사, 지성 등)이 결정되고, 취득할 수 있는 특기(스킬), 사용할 수 있는 기적(성흔의 힘을 사용한 초인적인 위업)도 결정돼. 예를 들어 기사인 아다마스는 체격이 높고, 방패를 사용하여 적을 막거나 말 위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특기를 주로 취득할 수 있으며, 성흔의 힘을 불러내어 어떤 공격이든 피해 없이 받아낼 수 있는 <절대방어>의 기적을 사용할 수 있어.



판정 방식


판정에는 d20을 사용해. 캐릭터는 <중무기><교섭><마술> 등의 다양한 기능이 갖추어져 있고, 각각에 연계된 능력치가 정해져 있어. 판정을 할 때에는 자신의 기능 레벨만큼의 d20을 굴려서 가장 낮은 눈을 선택하고, 그 눈이 능력치 이하면 판정에 성공한 것으로 봐.

<체력> 능력치가 15, <중무기> 기능이 3레벨인 캐릭터라면, 대검을 사용할 때 3d20을 굴리게 되지. (5, 12, 19)의 눈이 나왔다면 가장 낮은 5의 눈을 선택하고, 그 눈이 15 이하니까 성공.

이 판정에 추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기를 조합하면, 성공 기준이 되는 능력치를 낮추는 대신 다양한 효과를 받을 수 있고, 브레카나의 전투는 대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



희망과 존엄


비록 성흔자가 영웅이기는 하지만, 성흔은 인간이 다루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힘이기 때문에 남용하게 되면 인간성이 손상되어버려. 룰적으로는 존엄치(DP, Dignity Point)라는 것을 통해서 이걸 표현하고 있어. 존엄치는 <희망>이라는 능력치에 따라 최대 수치가 정해지고, 플레이 중에 다양한 방식으로 깎여. 한 씬을 끝내면 1d10이 깎이고, 특기를 사용하면 그 대가로 깎이고, 기적을 사용했다가 깎이기도 하고... 여튼 온갖 이유로 깎아대. 그리고 살육자를 처치하고 시나리오를 끝낸 이후에 존엄치가 0보다 아래라면, 그 PC는 살육자로 타락해버려. 성흔의 힘에 미쳐서 자신이 새로운 악당이 되어버리는 거지. (더블 크로스를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거야. 주사위 굴림이 망해서 자기 PC가 졈이 되어버리는 그 기분을.)



총평


브레카나의 장점


● 중세 분위기가 살아나는 배경 : 브레카나의 최대 장점은 “중세 배경으로 영웅 서사시를 그려낸다”는 목표에 잘 어울리는 배경이야. 앞에서 말했듯이 브레카나에는 중세 특유의 전설이 듬뿍 반영되어있고, 당대의 생활상이나 정치 구도 등도 제법 충실히 들어있어. 이상적인 군주를 모시고 왕국을 통일하는 전쟁물/에픽 판타지로도 즐길 수 있고, 어둠의 피조물들을 사냥하며 마신의 음모를 저지하는 다크 판타지로도 즐길 수 있어. 일본 룰 중에서는 가장 배경설정이 충실한 세계관에 속할 거야.


● 괜찮은 지원 : 20여년간 이어져온 시리즈인만큼 나름 설정이 많이 쌓여 있고, 3판 기준으로 서플도 여럿 있어. (4판은 발매된지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서플 하나, 리플레이 하나밖에 없어) 특히 <랜드 오브 더 길티>를 비롯해서 서플 곳곳에 수록된 “특수인과율”은 캐릭터가 전설적인 배경을 쉽게 취득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핸드아웃 같은 건데, 각 인과율 앞에 한 페이지씩 짧은 소설 같은 느낌으로 관련된 일화가 실려 있어. 읽는 재미도 쏠쏠하고, 배경 세계 파악이나 캐릭터 제작에도 큰 도움이 돼.


● 멋진 리플레이 : 리플레이가 3판은 2권, 4판은 1권 나와있는데, 특히 3판 리플레이는 둘 다 명작이야. “하이델란트 영웅담”은 브레카나에서 할 수 있는 기사도 플레이의 진수를 보여주고, “검십자의 기사”는 코우가인법첩의 구도를 브레카나로 옮겨서 재구성한 물건이야. 그 밖에 서플마다 5~6 세션 분량으로 구성된 에픽 시나리오가 수록되어있고, 전용 시나리오 북도 하나 있어(선 오브 다크니스). 시나리오 완성도는 명작은 아니지만 기본은 한다고 생각해.


● 아름다운 일러스트 : 맨 위쪽에도 있지만 브레카나의 삽화는 전반적으로 괜찮은 느낌이야. 다구치 쥰코(田口 順子)라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이전 시리즈부터 전담해서 그리고 있어. 애니풍이나 양키풍 일러스트에 질린 사람들한테는 플러스 요소가 될지도 모르겠네. (다만 NPC 소개 등의 삽화는 눈 크고 예쁜 애니메이션풍 삽화의 느낌이 짙게 느껴져. 다른 사람이 그린 것 같지는 않지만.)



브레카나의 단점


 밸런스 안맞는 룰 : 솔직히 말해서 브레카나가 갓룰이라고는 못하겠어. 22개나 되는 아르카나가 있다보니 밸런스가 잘 맞지 않아. 더군다나 3개의 아르카나를 조합하니까 이론상으로는 22*22*22가지의 조합법이 있지만, 정작 궁합이 잘 맞는 아르카나는 따로 있기 때문에 웬만한 예능감이 아니고서는 쓰던 아르카나만 쓰게 돼(아르도르-아다마스-디아볼루스의 “마검 든 중갑 기사”는 언제나 진리야). 그리고 주사위에서 낮은 눈 하나만을 취하는데, 보통 주력 기능이면 주사위를 4개정도 굴리게 되고, 크리티컬 범위를 높여주는 특기도 많으니까, 대가만 충분히 들이면 크리 공격을 크리로 방어하는 상황이 많아(브레카나는 방어측도 판정을 해). 다행히 이런 문제점들은 3판에서의 얘기고, 4판에서는 이런 점을 어느정도 개선했어. 


 범용성이 떨어지는 세계관 :  독특한 세계관을 사용하고 거기에 맞춰 룰을 구성하다보니까 그 이외의 플레이를 하기는 어려워. 룰의 기반이 되는 아르카나 자체가 세계관에 철저히 맞춰져 있기 때문에, 중세 유럽 기사물에서 벗어난 플레이를 하는 건 불가능할 정도야(가장 많이 벗어나본 게 위쳐식의 다크 판타지나, 비잔틴 제국풍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켐페인 정도였어. 사실상 같은 거지).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룰이 세계관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구입하기에 애매한 시기 : 솔직히 말해서 지금 브레카나를 구입하기는 조금 애매해. 위에서도 말했지만 4판이 발매된 게 작년 9월이었기 때문에, 4판은 지금 코어 룰북 이외에는 리플레이 한 권, 서플 한 권밖에 없어. 게다가 배경세계도 100년 후로 일신되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상상에 의지해야 하고. (그리고 3판이 2006년에 나온 이후 거의 10년간 우려먹은 경력을 볼 때, 서플이 그렇게 빨리, 많이 나와주는 라인업도 아냐) 그렇다고 지금 와서 3판을 하자니 절판된 책도 있고 좀 그렇지. 나야 3판 시절부터 해왔지만, 새로 입문하는 사람이라면 설정을 파기 위해 작정하고 3판 중고서적을 뒤져가면서 구할 각오를 하던가(일본 아마존에 다 올라와있어), 아니면 특수인과율을 비롯한 4판 서플이 쌓이면 구입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파르치팔><롤랑의 노래>같은 기사도 문학이나, <니벨룽겐의 반지><백조의 호수>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RPGer라면 (혹은 판타지 쌈싸먹는 중세 성인전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재밌게 즐길 수 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