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유령이 턀갤을 떠돌았다. 서사룰 / 데이터룰이라는 유령이. 오늘의 뻘글은 그에 대한 이야기, 특히 데이터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무엇이 데이터룰인가?
'서사룰 빼고 나머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답변은 결국 서사룰이 뭐냐는 문제가 되서 뺑뺑이를 돌 게 뻔하니까 그냥 내 마음대로 턀갤에서 데이터룰로 통하는 룰들의 특성을 모아 정의하자면 턀갤에서 이야기하는 데이터룰은 이런 특징을 가지는 룰이 되겠다.
1. 플레이어 입장에서 읽어야 하는 분량이 상대적으로 많다.
2. 기-승-전-결이 정해진 시나리오 / 어드벤쳐를 사용한다.
3. 전투 인카운터 규칙의 구조가 별로 물렁해보이지 않는다.
4. 작중 상황에 대한 마스터의 결정권이 '서사룰'보다 크다.
그리고 이런 특징을 바탕으로 턀갤럼들 중 일부가 이런 룰들을 싫어하는 이유를 종합하자면 결국 두 가지,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읽을 게 많고 복잡하다 / 플레이어의 창의성이 억압받는 구조라는 생각이 든다 정도가 된다고 생각함. 문제는 전자는 개인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그렇다 쳐도 후자는 사실 특징 4번 정도를 제외하고는 '데이터룰'로 간주되는 룰들도 사실은 별로 그렇지 않은 예제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 '서사룰'로 간주되는 쪽에서 발휘되는 마스터의 결정권도 결코 작은 게 아님. 그 룰에 마스터가 있다면 말이지..... 없으면 0이니 적은 거 맞잖아?
헥스크롤(Hexcrawl)과 거시적 창의성
그러면 어떻게 '데이터룰'에서도 플레이어의 창의성을 보장할 수 있을까? 일단 캠페인 / 시나리오의 기-승-전-결로 요약할 수 있는 거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D&D 계열의 역사와 전통의 플레이 방식 중 하나인 헥스크롤(Hexcrawl)을 생각해 보자. 아래 짤에서 보다시피 헥스 단위로 구성된 대형 지도를 가지고, 모험가들이 대충 몇 마일짜리 헥스 단위로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별별 신기한 것들을 보거나 거기서 조우하는 적과 싸우는 것을 거듭하는 식으로 하나의 큰 목표만 주어져 있는 상태인 캠페인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이런 구성을 하면 목적지까지 어떤 경로로 갈 것인가 / 모험가들이 지나가는 헥스에서 뭐가 튀어나오냐 / 헥스의 환경 등의 "무작위적인" 요소에 캐릭터들의 배경 설정 등을 맞물리게 해서 얼마든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음. 예를 들어서 이번 헥스에서 만난 행상인에게서 PC 1의 가족이 산에 사는 사악한 식인 하플링들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 여행의 목적지로 직행하는 대신 바로 산에 쳐들어가 PC 1의 가족들을 구하고 다시 목적지로 향하기로 하는 쪽으로 파티의 진로가 바뀐다거나, 혹은 캠페인의 기존 목표 자체가 대체되는 큰 사건을 겪는다거나 그런 식으로 말이지. 단점은 이렇게 진행하다 보면 마스터가 매번 인카운터 짜기 등이 졸라게 귀찮다는 거고, 그런 마스터의 귀찮음을 덜어줄 수 있도록 기-승-전-결 등이 잘 짜여진 시나리오가 따로 나오고 있는 데 굳이 이렇게 해야 하나는 생각이 들 수가 있다는 거다. "이런 거 구판에서나 하는 거 아니냐"는 지적 같은 건 윗짤의 존재 자체로 부정되니까 무시하겠음. 물론 윗짤의 헥스 크롤은 기승전코알라먹이나 기승전던전폐사 등으로 이어지기 아주 쉽다는 건 별로 안 비밀이다.
물론 이런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헥스 크롤이 꼭 필요할 이유는 없다. CoC 플레이 하면서 PC들이 그냥 경찰에 신고한 다음 잊어버리면 되지 않냐는 생각해 본 놈들 있겠지? 근데 진짜로 그런 선택지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음. 물론 그런 선택지가 주어져 있지 않더라도 키퍼가 살짝 창의성을 발휘하면 - 경찰에 신고할 경우 그 이후부터는 미리 만들어 둔 경찰들로 플레이를 시키거나, 혹은 경찰들은 수색에 실패했다고 설명하고, 이제 그 자리를 빠져나온 '원래 탐사자들이 볼 예정이었던' 무엇인가가 탐사자들을 찾아오게 하거나 - 충분히 흥미로운 플레이를 진행할 수 있다. 다만 너희 마스터 / 키퍼는 그럴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준비해 놓기에는 너무 귀찮고 배고프고 다른 것을 하느냐 바쁠 뿐이다. 불만 있음 네가 마스터 / 키퍼를 하면 돼.
전투 인카운터와 미시적 창의성
한편 전투 인카운터의 경우, 이게 어느 정도 '전략적' 요소가 있는(혹은 그렇게 보이려는) 룰의 경우 그만큼 구성이 빡빡해진다. 그리고 그 빡빡함을 조율하는 것이 마스터의 몫인 거임.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rpg&no=107596같은 질문을 하게 됨. 인카운터 내에 존재한다고 제시되는 모든 것은 전략적 요소로 쓰일 여지가 있고, 때로는 그것을 어떻게 쓰냐가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마스터가 충분히 띨빵한 게 아니라면 지도의 광차는 단순히 폼으로 그려놓은 것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충분히 띨빵하다고 해도 곧 머리를 굴려서 뭔가 해석을 제시할 거고. 이런 룰에서는 뭔가를 내놓는다 = 그에 대한 마스터의 해석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거든.
특히 인카운터를 전략적으로 보이게 하고 싶은 룰의 경우는 더욱 그런 성향을 보인다. 물론 "기어가 너무 녹슬어서 안 움직이는데, 대신 광차 안에 사람 한 명 정도가 숨을 수는 있어요" / "네, 광차를 타면 다음 턴에 맵 끝까지 이동한 뒤 내릴 수 있어요. 대신 그 턴에는 그 외에의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광차는 다 썩어서 형태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등 뭐라고 미리 묘사하거나 플레이어의 제안에 답변할 지는 마스터의 마음이니 플레이어의 결정권이 별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만.
그리고 추가적으로 여기에 따르는 것이 상황에 대한 '판정' 요구다. 다만 판정을 뭘로 / 어떻게 하고 결과를 어떻게 묘사하냐는 것도 마스터의 재량이고, 이 과정에서 충분히 재미있게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국내에서 했던 모 펀딩에 나오는 모 NPC는 진짜 사람이 맞으면 죽는 살인 광선을 쓸 수 있음. 근데 PC들이 얘한테 덤빈다고 그냥 냅다 써 버리면 맞은 PC가 죽잖아? 일단 썼는 데 누가 죽는 게 아쉽다면 한 번 정도 자비를 베풀 수 있을 거임. "네놈의 행동이 무례하지만 솔직히 이번에는 좀 웃겼으니까 이번만은 살과 털을 분리하는 선으로 그쳐 주마. 대신 한 번만 더 하면 뼈와 살을 분리해 주겠노라"하면서 살인 광선으로 몸의 털(머리카락 포함)을 전부 영구제모해 PC가 뭉텅이로 머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머리카락들을 보게 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말이지. 이러면 충분히 흥미로운 게임을 진행할 수 있지만.... 이래저래 마스터 입장에서는 이런 창의성을 용인하고 대응해 주다보면 점점 더 귀찮은 상황으로 이어지기 쉬울 것 같은 것은 착각이다, 착각.
마스터의 결정권?
'데이터룰'의 마스터가 가지는 결정권이 강력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 다만 마스터가 있는 모든 룰은 사실 마스터가 결정권을 플레이어보다 한 단계 이상 높게 가지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이게 생각보다 큰 차이는 아님. 아니면 마스터가 왜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사실을 그냥 대놓고 보여주냐, 혹은 마스터가 있는 소위 '서사룰'에서 그러듯이 교묘하게 플레이어들의 결정권이 좀 더 강해보이도록 꾸며주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턀갤에서 서사룰의 대표격으로 간주되는 던-월의 마스터링 설명(https://sites.google.com/site/dungeonworldkr/home/6_gm)의 일부를 보도록 하자.
응 던전월드의 롤플레잉은 마스터가 정한 대로 흘러가는 그런 거 아니라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플레이어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정말로 잘 이해해 주는 것 같아보인다.
그러면서 플레이어의 행동을 예측하지 말고, 그에 대한 결과를 그냥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거라고 한다. 여기까지만 제시해 놓고 보면 아주 훌륭한.... 체리피킹이 된다고 생각함. 왜냐면 이 부분들 위에다 마스터의 미덕으로 또 다른 걸 전제해 놓았기 때문이다. 하긴 이러는 것도 체리피킹인가?
왜냐면 마스터는 미리 '준비한 / 생각해 둔 내용'이 있으며, 이것을 활용하는 것이 권장되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 결과를 "자기만 아는 내용"과 연계해서 그걸 전제로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결과를 제시하고, 그런 마스터 액션을 통해서 이 새퀴 생각대로 이야기의 흐름을 조율할 수 있기 때문이지! 예를 들어서 누가 짤과 같이 판정에 실수했더니 어디선가(2층 아래) 무시무시한 울부짖음이 들려오고, 결국 이 파티는 더 깊이 내려간다면 계속 더 크고 사나워지는 울부짖음을 듣다가 결국 층간 소음에 아주아주 화가 난 악마와 마주치게 될 운명이 암시됐다거나(물론 미리 전체적인 플롯을 정해놓는 게 아니니 파티가 만약 그냥 돌아간다면 악마가 꼭 따라서 올라오게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식으로 말이야. 물론 갑자기 악마가 2층 계단을 뛰어올라와서 파티를 공격하는 그런 일은 대개 액션의 강도를 저강도 -> 고강도로 높여가라는 제시를 통해서 지양하도록 유도하고 있으니 일반적으로는 안심해도 된다. 일반적으로는 말이야....
결론
요약하자면 갤에서도 이 떡밥이 돌 때마다 자주 이야기된 이야기였지만 '서사룰'을 '데이터룰'과 차별화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특성 대부분은 사실 '데이터룰'로 구분되는 룰이라도 마스터가 노력을 하면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다. 단지 마스터 입장에서는 굳이 그러기 귀찮고 복잡해지니까 / 경험이 부족한 마스터의 경우 그래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으니까 안 할 뿐이지. 그러므로 턀린이들은 혹시 그렇게 이것저것 팀원들에 맞추어서 신경을 써 주면서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마스터를 만난다면 플레이가 오래 갈 수 있도록 예의바르게 잘 대하도록 하자.
3줄 요약
서사룰과 데이터룰 구분은 개인적으로 별로 직관성이 없는 구분이라고 봄.
그래도 일단 분류할만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조금 해봤음.
서사룰의 특성 대부분은 사실 마스터가 귀찮아서 안 하려는 걸 시키는 거.
턀갤러들 데이터룰보단 서사룰 싫어하는 놈이 많지 않냐...아닌가 그냥 몇명이 목소리 컸던 건가
안 세어 봤으니 모르니까 걍 일부라고 퉁쳤음
여기놈들 말하는 기준이란 건 죄다 엿장수 맘대로니깐 뭐
제일 큰 차이는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장치를 제공하는가 아닌가 이거지. 단적인 예로 던월은 어떻게 판정하고 결과에따라 이래저래 하면 요래조래 이야기 만들라고 써있어. 룰이 좋은가 아닌가와는 별개로.. 근데 댄디나 겁스같은 그런게 거의 없다시피하지. 대신 댄디는 시나리오를 많이 내주니까 별문제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