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조선의 상황은 문화 통치와 경제성장, 중일전쟁이라는 세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마침 30년대에 부임했던 조선 총독도 세 명이고 그들의 개성과 업적의 차이도 뚜렷한 까닭에 그들의 통치 방식을 살펴보는 것 만으로도 당시의 사회상과 변천사를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제3대, 5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
(3대; 1919년 8월~19274월, 5대; 1929년 8월~1931년 6월)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해 8월에 부임한 총독이다. 그 후로 8년간 집권하다(3대) 사직하는데 그 후임자인 4대 총독 야마나시 한조가 비리 저지르고 사임해서 그 뒤로 2년(5대) 을 더해 도합 10년 간 집권하게 된다.

그가 집권하는 동안 식민지 조선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사이토 총독이 전면에 내세운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첫째, 헌병 대신 보통 경찰이 치안을 담당했고 둘째, 조선어로 된 신문과 문예잡지가 출판되었으며 셋째, 조선인들의 참정권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실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찰의 수는 배로 늘어났으며, 항일 및 독립운동 세력을 검거하기 위해 사복 경찰과 특별 고등경찰(일제의 게슈타포)이 생겨났다. 둘째, 당시 일제는 언론의 자유가 없던 나라였고 이는 조선 언론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는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극에 달하게 되는데 정치에 대한 비판을 싣기 어려워진 신문들은 국정 홍보의 수단이 되거나 엽기 범죄, 가십기사로 지면을 채우기 시작한다. 대신 시와 소설 등의 문예 만큼은 이 시기에 눈부시게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셋째, 조선인들 에게도 참정권이 생겨났으나 이는 선거권을 줬다는 얘기가 아니다. 본토에서도 투표권은 남성들에게만 주어졌는데 식민지 국민들 따위에게 그런 기회가 돌아갈 리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참정권이란 몇몇 친일 파들에게만 형식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로 인해 조선은 대 친일파 시대가 열리고 말았다.

그렇게 1920년대가 지나가고 5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31년에 퇴임한다. 그 뒤 일본의 총리직을 역임하다 1936년 2.26 사건 당시 암살당했다. 총알을 무려 47발이나 맞았다고.

제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1931년 6월~1936년 8월)(그가 총독에 취임한지 석달만에 관동군은 독자적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람은 전전임자인 야마나시 한조가 싸지른 똥을 치우고 전임자인 사이토 마코토가 닦아 놓은 통치 기반을 바탕으로 조선의 경제성장을 일구어낸 총독이다.

그의 업적을 열거하자면 이렇다. 한조 청독을 거치고 해이해진 총독부의 근무기강을 바로잡고 행정조직을 효율적으로 개편했으며, 훗날 새마을 운동의 모티브가 되는 농촌 진흥 정책을 추진해 농업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지금의 북한 지역에 중화학 공업이 발전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북한의 대표적인 경제 특구 지역인 나진이 발전하게 된 것 또한 이 시기에 만주 철도의 종착역으로 설정되면서 부터였다.

문화적인 업적도 있다.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지정해 조선의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등을 지정했고, 이는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재 관리 체계에 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조선인 실력양성론자들이 벌인 문맹퇴치 운동이나 그 유명한 브나로드 운동에 대해서는 지원도 방해도 아닌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일제는 브나로드 운동에 대해 탐탁치않게 여기긴 했다. 때문에 이광수를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은 일제가 제시한 합법적인 틀 안에서 순응적인 태도로 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여기까지 보면 일제의 총독 치고는 꽤나 긍정적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농업생산량은 증가되었지만 충분치 않았고, 그나마도 대다수는 내지인과 군인들에게 돌아갔고 조선의 농민들의 몫은 턱없이 부족했다. 문맹에서 벗어난 이이들과 장정들은 징용당해 산업현장과 전선으로 끌려가 혹사당해야 했다. 또한 때맞춰 불어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실직자들의 구직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룸펜’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것도 이 시기였다. 우가키의 통치는 일제의 입장에서만 합리적이었을 뿐 식민 조선의 현실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총독은 다 같은 압제자들이지만, 거리를 두고 보면 우가키 가즈시게 만큼은 그나마 합리적이고 생각이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인의 사상 또한 군국주의보다는 자유주의에 가까웠고, 특히 일본 패망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군부 내 강경파와 군국주의자들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인물이었다. 일본의 패밍 원인을 군부를 비롯한 우익집단에서 찾는다면, 우가키가 실권을 잡았을 경우 일본의 식민 통치가 좀 더 길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 사람의 최후는 전후임자에 비하면 평온했다 할 수 있겠다. 정계 은퇴 후 척식대학 학장직을 역임하다 패전 후 퇴출 되었다. 전범재판에 회부되긴 했지만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그 뒤 전범에서 해금되어 정계에 재진출하지만 임기 도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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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 지로 편은 작성중이야.
중일전쟁 시작되고 한반도 전역이 탈탈 털리건 시점이라 눈물이 앞을 가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