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rpg&no=111524&page=1
자. 먼저 말해둘게.
당시의 난 크툴루의 부름을 이미 '몇 번' 플레이해봤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CoC에 '입문'했었다고 말하긴 어려워
일단 룰북을 안 읽었거든.
플레이 횟수도 단편 세션 10번 미만. 중편 세션 1번.
전부 친구들이 하자고 해서 '뭐 가끔은 그런 것도 괜찮겠지'라는 식으로 놀았지.
세션 도중에 대충 플레이한 건 절대 아니었지만
CoC라는 룰 자체에 열정적으로 뛰어든 것도 역시 아니었다.
요컨대 간만 본 거.
그리고 이 CoC에 대한 나의 인상은...
조오오온나게 안 무섭다는 거였다
나 진짜 호러물에 약하거든?
어릴 적에 처키 인형만 봐도 으헝헝ㄹㅊㅈㄴ우머무서웦ㅠㅠㅠ 질질 짜던 아이였음.
지금도 사람들이랑 같이 호러 영화 보러 가면
'씨바 씨바 씨바 씨바' 이러면서 눈 꾹 감고
절대 스크린 쳐다보지 않는 개쫄보 상쫄보 씹쫄보가 바로 나임.
엑소시스트 같은 거도 무섭고 ㅅㅂ 주온이나 링도 무섭고 ㅅㅂ 애너벨인가 뭔가도 무섭고 ㅅㅂ 하여간
에너벨 보고 최소 4일은 내 방문 뒤쪽을 쳐다보지 못했음
방문 똑똑 거리는 소리나 나무바닥 밟히는 소리나 아씨ㅄㅄㅄㅂ
공포 영화 만드는 제작자들은 저주를 받아라!!
그러나 이런 개상씹쫄보인 나조차
크툴루의 부름은 진짜 하-나도 안 무서웠음
와! 기괴한 괴물이 나왔다?
처키의 살인미소 한 번이 더 무서움ㅇㅇ
이성도를 체크하시오?
어떻게 해야 하나도 안 무서운 이 상황에서 마치 PC가 정신공황에 빠질 것 같은 RP를 해야 할지 고민됨ㄹㅇ
요컨대... CoC를 플레이하면서 '공포'라는 감정에 몰입된 적이 전혀 없었어.
그리고 난 원래 CoC가 그런 건 줄 알았음.
원시적인 공포보다는 '공포 비슷한 분위기'를 즐기는 거구나 생각했지.
일종의 맛있는 잡탕이라고 해야 하나?
본격 추리물은 아니지만 추리물스러운 분위기를 한 스푼,
셜록 홈즈 같은 캐릭터들의 분위기를 한 스푼,
공포 영화 같은 분위기를 한 스푼,
세션에 따라서는 미국의 재즈 에이지 같은 분위기를 한 스푼.
그럼 그럭저럭 맛나잖아?
비록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니까 막 격렬히 싫어할 필요도 없었어.
다만, 어딘지 모르게 '인형놀이'를 하는 것 같다는 묘한? 미묘한? 뭔지 모를 느낌이 있어서 그게 조금 불호 요소이긴 했지.
그것도 심각한 불호 요소는 아니어서 친구들이 먹자고 하면 얼마든지 같이 먹었다.
그래서,
D '내가 마스터 맡을 테니까 우리 둘이서만이라도 세션 열까?'
나 '어 무슨 게임?'
D '크툴루. 콜 오브 크툴루.'
같이 하자는 게임이 CoC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자암깐 망설이긴 했으나
그 망설임이 길지는 않았어.
'까짓거 하지 뭐!'
그렇게 약속이 잡혔다.
요일은 토요일 정오.
플탐은 정해지지 않음.
장소는...
D '너만 괜찮다면 내가 사는 곳에서 하자.'
D의 집.
얘기를 들어보니 D는 가족들이랑 같이 살지 않고 혼자 자취하고 있었으며
(D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그닥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멀리 떨어져 있긴 해도 지하철 타면 환승 없이 한번에 쭉 갈 수 있는 곳이었음.
나는 스터디룸도 룸카페도 모텔도 아닌 집에서 놀자는 제안이 좀 생소했으나
'뭐 마스터를 맡아주신다니 적어도 편하신 곳으로 맞춰드리는 게 올바르지' 싶어서
별 생각없이 콜 했다.
나 '아... 시간이랑 장소는 다 괜찮은데. 혹시 내가 뭐 따로 준비해야 할 거 없어?'
D '준비?'
나 'ㅇㅇ 나 CoC는 별로 안 해봐서 잘 모름'
D '음, 그럼...'
하고 D가 이것저것 메세지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나는 토요일 일정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한켠으로 생각했음.
생각해보면 D가 나한테 마스터를 해주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또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집에 가서 세션을 하는 것도 처음이다.
다시 또 생각해보면, 오알이 아니라 티알로 맨투맨... 1:1 세션을 하는 것 또한 처음이다.
그리고 그런 생소한 경험들을, 지난 몇 개월 동안 친해졌다고는 하나, 사생활을 전혀 공유하지 않는 '번개팀의 팀원'과 하게 된 것이다.
'.......'
약간 불안해졌어.
만약 내가 미성년자이거나 여자라면 적당히 거절했을지도 몰라.
애당초 맨투맨 시나리오는 내 취향이 아니었어. 마스터와 지나치게 호흡을 깊이 가져가는 느낌이, 나 개인적으로는 좋지 않았거든.
TRPG는 어디까지나 '다 함께 노는 것'이었고,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부터 그랬던 것처럼 함께 노는 친구들은 '적당히 많은 편'이 제일 즐겁지.
두 사람만의 끈끈한 우정이라거나 그런 건 적어도 나의 취향은 아니었던 거임.
머릿속에 괜한 오만상들이 오가는 가운데 D는 나한테 계속해서 메세지를 보냈음.
D '딱히 준비해야 할 건 별로 없고... 주사위도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괜찮아.'
D '그런데 기왕 타이만 세션이니까 옷은 조금 신경 써줘서 입어주면 좋겠네.'
D '잘 차려입으라는 게 아니라, 네 PC의 직업에 어울리는 복장을 차려입으면 더 재밌을 듯.'
옷?
이 사람 옷도 잘 못 입으면서 왜 나한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정작 그때 내 뇌리를 장악한 걱정은 따로 있었음.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안 되니까 만약을 대비해 뭔가 장치를 해둬야 한다고.
그런 걱정을 하면서 나는 메세지를 적어 보냈다.
나 '그럼 XXX역에 내가 11시 30분까지 갈 테니 그때 역에서 만날까?'
자아.
내 생각은 이러했다.
만약 D가 나에게 뭔지 모를 해코지를 가하려 든다고 해보자.
하지만 만약 지하철역에서 우리 둘이 만난다면, D의 모습이 CCTV에 찍힐 거고
자기가 CCTV에 찍혔다는 사실을 D도 당연히 알고 있을 테니
진짜 만에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나한테 나쁜 짓을 저지를 가능성은 무척 낮아지겠지.
안 그래?
뭐 저런 쓸데없는 걱정까지 했냐고 턀갤러들은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난 티알판에선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는 게 맞다고 개인적으론 확신해.
정상적으로 보이는 친구가 갑자기 돌변해서 뭔 일을 벌이면 어? 그때 어쩔 거야? 누가 책임질 거야??
이 바닥에 뭔 별에별 사건이 다 있었는.... 사실 내가 개상씹쫄보라서 그럼 ㅈㅅ
암튼.
난 나 스스로도 참 과민반응하는구나 싶으면서도 지하철역에서 보내자고 말했고,
이에 대한 D의 대답을 기다렸다.
D는 당연하다는 듯 바로 답변을 줬던 거로 기억한다.
'11시 30분 X번 출구 ㅇㅋ?'
나는 안심했다.
역시 별일 없을 건데 괜히 과민반응한 거라고 자책하면서 답장했다.
'ㅇㅋ'
토요일 당일.
주말의 11시~12시엔 그럭저럭 지하철이 한산했다.
난 그때 광경이 비교적 또렷하게 떠오르는데, 아무렴 PL은 룰북을 읽을 필요가 적다지만
만약 전투가 벌어질 경우엔 괜히 룰 몰라서 버벅거리는 게 싫어서
스마트폰으로 크툴루 세계관의 무기들 데미지, 특히 총기류 데미지를 살펴보고 있었음.
지하철은 1시간이 넘도록 달렸고,
그동안 나는 신화생물이고 뭐고 총알을 아가리에 박으면 ㅅㅂ 이기지 못할 것도 아니다는 결론에 이르렀지.
CoC에 심취한 적 없는 사람답게 매우 실용적인 관점에서 세션을 준비했던 거시다.
내 복장은 와이셔츠에 넥타이.
왜냐면 PC의 직업으로 '기자'를 고르자고 결심했거든.
짬밥을 얼마 먹지 못해서 넥타이도 매고 다니고,
자기가 언제든 준비되어 있다는 걸 주변 동료+상사한테 알리기 위해
앞주머니에다 작은 메모장과 펜까지 넣었음.
판타지 세션은 복장 고르기가 참 어려운데
현대 배경은 RP에 맞게 차려입기 쉬워서 그건 좋구나 하고 생각했음.
이왕 본격적으로 RP하는 거, 아예 헤어스타일까지 맞추고 싶어서
일찍 일어나 머리까지 깎고 갔다.
기자한테 어울리는 헤어 스타일 따위가 있을 리 없지만
어쨌든 내 마음속에 '기자 같다' 싶은 머리를 골랐음.
안경도 쓸까 고민했는데 그건 살짝 에바 같아서 포기함.
즉, 마스터의 요구사항을 듣고 나 나름대로 그럭저럭 노력한 거지.
-이번 역은 XX, XX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XX쪽으로...
어느덧 약속한 역에 도착.
괜히 긴장되는 것도 같고 기대되는 것도 같은 기분.
부디 처음 맛보는 D의 마스터링이 훌륭하길 바라면서 X번 출구를 찾아 갔다.
'지금 도착했는데 어디?'
'X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음'
'바깥? 안쪽?'
'안쪽임'
'이상하다 나도 안쪽인데 어디 있음?'
'손 한번 흔들어보삼'
손 흔들었다.
그러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여기!' 하고 나를 불렀음.
돌아보자, 평소처럼 검은색 캐주얼 정장 차림을 한 D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때 D가 한 말이 이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와 어투, 특히 얼굴 표정은 확실하게 기억남.
D는 아마도 분명히 이렇게 말했음.
'야아'
'옷 잘 입고 왔네.'
'그럼 우리집에 갈까?'
여기까지.
기분 나면 다음도 이어서 쓰겠음ㅂㅂ
썰 끊는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게 잡네. 계속 ㄱㄱ
썰추
입문하게된 썰 전체가 크툴루 세션인거 아님?
추천박는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