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라는 진성 티알 덕후 친구가 있음
부랄친구나 다름없어서 편의상 개새끼라 칭하겠다
이 개새끼랑 한 달에 1번 정도 노는데
신기하게 장편이 아니라 단편이어도 개새끼가 짜오는 캐릭터는 묘하게 완성도가 높았음.
완성도가 높다고 해서 뭐 백스토리가 개쩐다든지 성격이 존나 특이하다든지
그런 게 아니라
이상하게 실감이 난다? 중심이 똑바로 잡혀 있어서 어색하지 않다?
아무튼 PL은 개새끼인 주제에 PC는 기묘하게 사람 같았음.
난 '얘가 RP를 잘하나보다' 정도로만 생각했지.
어느 날 뒷풀이 술자리에서 난 왜 너 같은 개새끼한테서 사람 새끼들이 태어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고
드물게도 개새끼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늘여놓기 시작했음.
개: 아. 그거. 내가 캐매할 때 조금 신경을 써서 그래.
음
캐매할 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어딨어?
난 참 당연한 소리를 시전하는구나 하는 눈깔로 개새끼를 쳐다봤지.
그러자 개새끼는 술을 마시며 좀 더 얘기했다.
개: 원래 나는 캐릭터의 생사에 되게 집착했어.
개: 무조건 내 캐릭터는 살려야 한다 뭐 그런 사람들 많잖아? 난 그런 성향이 좀 많이 심했달까.
개: 이거 때문에 플레이에 가끔 문제가 생기고 지장이 올 정도가 되니까 야 이거 가만 있으면 안 되겠구나 싶더라니까.
그건 공감해주지 못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 하지만 당연한 거 아냐? NPC의 생사에 심하게 집착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개: 플레이에 지장이 올 정도였다니까... 어쨌든.
개: 그래서 이런저런 스타일을 시도해보다가 한 가지 방법을 만들었어. 나만의 방법이랄까?
참고로 이놈은 어투에 랄까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개새끼가 아닐 수 없다.
개: 바로 그 캐릭터의 죽음을 미리 설정해두는 거야.
??
나: 뭔 소리야?
개: 그러니까, 보통 캐매할 때는 '캐릭터의 과거를 설정하시오' 같은 투잖아.
개: 근데 나는 캐릭터의 미래, 뭐 상세한 미래는 아니고, 이 캐릭터가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가'만 몰래 설정해두는 거지.
?
여전히 잘 감이 안 왔다.
개새끼는 자기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양서류를 보는 것처럼 날 꼬라봤다.
개: 하 씨바. 아니, 그러니까, 가령 오늘 플레이한 캐릭터는 '길거리에서 마차에 치여 죽는다'가 죽음의 설정이야.
개: 이 마차가 딱히 세계의 운명에 의해 등장하는 마차가 아니야. 그냥 마차. 그냥 길거리.
개: 평범하게 의뢰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지쳤고, 조금 더 많이 체력이 떨어져 있는데...
개: 꽈앙!
개: 그때 하필이면 전방을 전혀 주시하지 못한 마차와 부딪혀서 그대로 죽어버린 거지.
대화가 이 대목까지 이르자 나도 살짝 흠터레스팅을 느꼈다.
약간이지만 뭔가 그럴싸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 그러니까 개죽음을 당한다는 거네?
개: 그거지.
개: 당연히 캐릭터 본인은 전혀 몰라. 자기가 어이없이 교통사고로 뒈진다는 걸.
개: 얘가 아무리 놀랍게 의뢰를 완수해도, 그게 도시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해도, 아무튼 얘는 교통사고로 죽어.
개: 그걸 전혀 모른 채로 어느 날 마차에 치일 때까지 얘는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거지.
개: 난 이때 캐릭터가 죽는 장면을 조금 실감나게 상상하려 해.
개: 예를 들면 눈빛. 이 새끼가 길바닥에 내팽개쳐서 하늘을 바라볼 때, 죽기 일보 직전에, 어떤 눈빛을 하고 있을까?
개: 그럼 뭐랄까? 캐릭터의 과거는 약간 억지로 상상한다는 느낌이 들지만, 캐릭터가 죽는 장면은 억지로 상상한다는 기분이 안 들어.
개: 비교적 자연스럽게 상상이 돼.
개: 그럼 난 이 캐릭터가 손에 잡히는 거지.
개: 어떤 놈인지 알 거 같고, 어떻게 RP해야 이상하지 않은지 좀 알 거 같아.
개: 뭣보다 이 새끼가 어차피 어떤 식으로 뒈질 거라는 사실을 아니까, 캐릭터의 생사에 심각하게 집착하진 않게 되더라.
개: 오히려 퀘스트 도중에 죽으면 '그래도 교통사고보단 멋지네' 깔끔하게 납득할 수 있달까.
흠터.
아마도 이 팁 아닌 팁은, 개새끼가 PC의 죽음에 굉장히 집착했었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꺼내든 방법이었을 거다.
모두한테 먹히는 팁도 아닐 테고 어쩌면 RP하는데 지나치게 죽음에 초연하게 되어서 더 안 좋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개새끼한테는 유용한 팁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도 가끔은 캐릭터의 죽음을 미리 상상해봤고
그 때문인지 몰라도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풀이 아주 약간은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특히, 장편이 아니라 단편들에 쓰기 유용했다.
어쩌면 티알을 즐기는 사람마다 캐매에 집중하는 비밀팁들이 하나씩 있는 거 아닐까?
나는 인물의 인생이 바뀌는 계기(큰 사건)을 생각하고, 그것을 지금까지 어떻게 극복 혹은 보내왔는지(술로 허송세월을 보냈다거나) 생각하는데. 특이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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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툴루 입문썰도 빨리 써주세요.. 현기증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