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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져서, 세번째. 마지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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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숲의 바람을 가르고 도끼 한 자루고 풀숲으로 날아들었습니다. 푸드덕, 산새들이 날아올랐지만 뇌조 한마리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도끼는 그 몸통에 정통으로 박혀있었죠. 도끼를 던졌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시드그렉을 누군가 툭 치며 말했습니다.

“제대로 맞췄군!”

소렉 브라운바르트였습니다. 이제 150살이 넘은 그는 제법 경험 많은 순찰자라 할 수 있었죠. 재빨리 양팔을 뻗어 눈밭에 얼굴을 파묻는 일을 피한 시드그렉은 소렉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여기 있었구만. 찾았다네.”

“달리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성채에서 갑자기 온 샌님이 길이라도 잃었을까 걱정했지. 그래도 이제는 제법 산사람 티가 나는데.”

“난쟁이가 산 아니면 대체 또 어디 사람이래.”

“하, 자네가 처음 여기올 때만 해도 걱정했다네. 쉰도 안 된 애송이가 산 아래 동족을 셋이나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놨다 해서 왠 미친 놈이 오는가 싶었는데, 곱게 자란 얌전한 도련님이 와서 말야. 여기는 잘 어울릴 수 있나 싶었지.”

“분대장, 못 일어나는 건 하나 뿐이요. 때려눕힌 건 셋 맞지만…….”

“뭐, 그게 중요한가. 어차피 온건 온건데.”

소렉은 뇌조를 들어올리고 도끼를 뽑아 시드그렉에게 건냈습니다.

“여튼 말이야, 대장께서 순찰자 전원을 소집하셨네. 야영지로 가자고.”

둘이 함께 비탈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던 중, 눈 덮인 산 아래 질버휘겔의 입구가 시드그렉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성채로 내려가는 길 옆 호수가 얼어있었죠. 호수는 삼백년간 단 한 번도 얼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원인은 잘 알 수 없었지요. 호수 물에 뭔가 특별한 성분의 광석이 녹아있다거나, 호수 바닥에서 지하수가 솓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겨울은 달랐습니다. 너무도 혹독했기 때문일까요? 호수가 완전히 얼어버렸습니다. 시드그렉은 문득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삼백년 전, 마지막으로 호수가 얼어붙었을 때 나타났던 백색 고룡, 그하즈로크와 온 가족을 잃은 분노에 용의 파멸을 휘두르던 모우란. 결국 용의 파멸은 모우란 그 자신의 또다른 이름이 되었지요.


야영지에는 레인저들이 꽤나 많이 모여있었습니다. 아마 이 근방 레인저들은 다 불러모은 듯, 대략 여든명 정도 되는 수가 야영지 곳곳의 천막 근처에 둘러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로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죠. 그러다 시드그렉과 소렉을 보고서 중앙의 오두막 안쪽을 손짓했습니다.

둘이 오두막에 들어가자 그 안에는 순찰대장 타르가스, 그리고 그 앞에 누운 심하게 화상을 입은 드워프 광부가 있었습니다. 손과 발은 거의 숯이 되어있었죠. 잘 알지 못하는 얼굴을 보고, 시드그렉은 그가 2년 전 함머홀트가 멸망하며 질버휘겔로 넘어온 피난민이라 짐작했습니다

“어디서 데려온건가?”

“21번 갱도요.”

소렉이 광부를 간호하던 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21번 갱도는 산등성이를 따라 노천에 만들어진 신형 갱도였습니다. 함머홀트 피난민들과 함께 새로 개척한 곳으로, 순찰자의 감시탑이 있는 곳이기도 했죠.

“거기 순찰자들은?”

“모두…….”

“대체 뭔 일이야. 가스 사고라도 났던건가?”

“그게…….”

쿨럭이는 기침소리를 내며 누워있던 광부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장 깊은 갱도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새 광맥을 찾아 곡괭이를 휘두르던 중이었습니다. 이전에 룬 사제들이 측지했던 바로는……. 은맥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했거든요.”

광부는 기침 소리와 함께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갱도 안이 후끈 달아오르는게 아니겠습니까? 처음에는 가스 폭발이라도 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방화포를 뒤집어 썼읍죠…….”

“그래서?”

광부는 옆의 순찰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순찰자는 연고를 바르던 손을 치우고 그의 몸통을 소렉과 시드그렉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윽, 젠장.”

화상으로 인한 수포가 돋지 않은 부분에는 온통 눌어붙어 있는 천쪼가리가 가득했습니다. 소렉은 혀를 차며 이어 물어보았습니다.

“폭음이나……. 별 다른건 들리지 않았고?”

“전혀……. 게브네께 맹세코, 제가 곡괭이를 휘두르는 것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소렉은 잠자코 있던 타르가스에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대체 뭐였을까요?”

“가스 폭발이 아무리 크게 일어났다 해도, 갱도 바깥에 있는 초소가 완전히 전소되지는 않아.”

“산불일 가능성은 있습니까?”

“불은 갱도 내와 그 주변에만 집중적으로 발생했다가 꺼졌다. 산불이었다면 더 넓은 범위가 불에 탔겠지.”

“그럼……. 화산이라도 폭발한 걸까요?”

“이 일대 땅은 지진도, 화산 활동도 거의 관측되지 않아. 아마 그것도 아니겠지.”

“그럼 도대체 뭘까요?”

“나도……. 모르지.”

타르가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산의 봉우리 중 하나를 가리켰습니다. 산 머리에 걸렸던 흰 구름이 지나자, 그 봉우리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주 먼 거리에서도 잘 보일만큼 말이죠. 질버휘겔이었습니다.

“시드그렉, 너를 부른 이유가 바로 그거다. 성채로 가 이 사실을 전달하고 와라. 아무래도 처음부터 레인저였던 우리보다야 네가 낫겠지.”

“하지만 시드그렉은 죄를 저질러서 추방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건 아냐. 그저 홀드에서 거주하는 것이 잠시 금지되었을 뿐. 그래, 이 기회에 홀드로 돌아가 반가운 얼굴들을 보는 것도 괜찮을거다.”

타르가스는 탁자 위에 놓여진 여러 석판 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을 집어 시드그렉에게 건냈습니다.

“성채에서 하룻밤 머무름을 요청하는 서류다. 쓰는데 시간이 좀 걸렸으니 잃어버리지 마라. 서류 작성은 양식에 맞춰야 해서 예전 서류들 꺼내고 찾아보느라 골치 아팠는데 그걸 처음부터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

타르가스는 밖에 산양이 준비되어 있으니 타고 가라고 했습니다. 시드그렉이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타르가스가 문득 뭔가 생각난 것처럼 시드그렉을 멈춰 세웠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말야……. 서류를 보다 보니 한 삼백년 전 것에 적혀있던 이름이 기억에 남더군. 모우란 조른하르트. 가문 어른이시냐?”

시드그랙은 그 말에 잠깐 움찔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그냥, 뭐. 서류를 보다보니 순찰자 클랜은 아닌 사람이 있던데 마침 너도 그 가문이길래 궁금해져 물어봤다. 누구 척추를 접어서 너처럼 잠깐 왔었다더군. 우리야 성채 사정은 잘 모르는데, 전사 클랜이 참 혈기가 왕성한가 봐.”

“처음 듣는 이야긴데, 뭐…….”

시드그렉은 그랬을 수도 있으셨던 분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곤, 산양을 타러갔습니다.


산양은 얼어붙은 호수를 가로질러 질버휘겔으로 향했습니다. 멀리서 볼 때도 커다란 성문이었으나, 점점 다가가면 갈수록 그 크기가 커져갔죠. 성문 꼭대기를 보려다간 뒤로 고꾸라져 산양 등에서 떨어질 정도였습니다. 성문은 그저 클 뿐 아니라 그 겉에 부조가 새겨져 있었는데, 과거 은이 넘쳐났던 성채의 위용을 드러내는 듯 했습니다.

성채의 앞에는 전사 몇 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 홀로 커다란 망치를 든 이가 다가오는 시드그렉을 보고 팔을 뻗어 산양을 멈췄죠. 시드그렉은 등에 맨 석판을 꺼내 보였습니다.

“순찰자요. 전할 소식이 있어 왔소.”

“순찰자라고? 왠 일일까. 응? 잠깐!”

그 자가 투구를 벗고 얼굴을 보였습니다.

“이야, 이게 누구야! 극악무도한 범죄자 아냐! 그것도 하필 교대식 때, 가장 보안이 허술한 시간에!”

“거 참……. 혼자 장비가 달라서 뭔가 했더만 장손이었잖아!”

바로 울프그림 가문의 장남, 호그론 울프그림이었죠.

“그래서, 무슨 일이 있길래 순찰자가 왔을까? 위에 보여드려야 하는 서류라도 있나?”

“바로 맞췄군. 높으신 분들이 읽어야 하는 내용을 새긴 서류네. 하루 동안 보장되는 내 거주 보호 기간 또한 포함되어 있고.”

“그럼 바쁘겠군. 어서 가족들에게 돌아가봐야 할테니. 이제 교대식인데, 잘 아는 얼굴이 곧 나올걸세. 서류는 내가 들어가면서 전달하지.”

그렇게 말하는 호그론의 뒤쪽에서 그와 교대하기 위해 또 다른 전사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통일된 장비를 한 다른 전사들과 달리 호그론과 같이 선조의 무구를 갖춘, 낯익은 도끼를 한 손에 쥔 장손을 시드그렉은 못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로 토그란드였으니까요. 시드그렉은 당장 산양에서 내려 다가가려 했으나, 토그란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전우가 그러했듯 팔을 뻗어 동생을 막았습니다. 우선 교대식이 우선이라는 것이었죠.

난쟁이의 교대식은 엄숙했습니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의식은 아니었지만, 시드그렉은 그 시간이 순찰자로서 지낸 2년보다도 더욱 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호그론이 성문을 경계하는 동안 있었던 일을 토그란드에게 전달하고 석판을 챙겨 성채 내로 들어가자, 그 때서야 형은 동생을 바라보며 웃음지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벌써 5년이 지나버렸나?”

“내가 얼마나 잘하던지 하루나 휴가를 주더라고.”

“뭐야, 내 동생이 트롤이라도 잡은건가?”

“아, 가죽이 질겨서 도끼가 들어가질 않더라고. 그래서 나무를 위로 쓰러뜨려 머리통을 부쉈지.”

시드그렉은 허풍을 떨었습니다. 아무리 토그란드가 자신보다 나이도 경험도 많더라도, 성채 밖에 나가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 것은 시드그렉이었으니까요. 잠시 후 토그란드는 그만 시드그렉을 성채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자신은 성문을 지켜야 하고, 가족도 시드그렉을 봐야하니까요. 토그란드는 오랜만에 성채 안으로 들어가는 시드그렉에게 도끼를 흔들어 주었습니다.

시드그렉이 집으로 찾아가자, 그 앞에는 멜스란과 할그라프가 투계판을 벌여놓고 있었습니다.

“임마, 콜로서스! 힘 좀 써봐라!”

“골리아스! 뛰어라! 눈깔을 노려!”

“다녀왔습니다.”

시드그렉이 뒤에서 아버지에게 말하자, 둘은 돌아보더니 순간 얼어붙었습니다. 멜스란은 금새 정신을 차리곤 두 팔을 번쩍 들더니 시드그렉의 어깨에 올렸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멜스란의 눈에는 반가움이 가득했습니다.

“지는 놈 하나만 잡으려 했는데, 둘 다 잡아야겠구만!”

“아이고, 문제아가 돌아왔구나. 이 늙은이들 얼굴을 부수진 않겠지?”

할그라프는 둘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습니다. 멜스란은 싸우고 있던 두 닭의 모가지를 우악스럽게 움켜지더니 그대로 집 안으로,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를 뒤따라 집에 발을 들인 시드그렉에게 우당탕 하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습니다. 아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빠르게 뛰쳐나온 어머니였죠. 시드그렉은 어색히 인사했습니다.

“다녀왔어요.”

“어머, 어머머! 우리 아들이 밖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됐네. 누가 보면 난쟁이인지도 모르고 길쭉한 귀는 어디 숨겼냐 묻겠어! 고기는 좀 먹니? 숲에 있다고 풀만 먹고 사는건 아니고?”

“리스밀라, 그만 하시오! 벌을 받는다면 그 정도 고생은 해야지!”

부엌에서 멜스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직접 닭목을 비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난 뒤 시드그렉은 가문 사람들, 클랜의 일원들, 동년배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가족끼리 대화도, 형제끼리 서로의 무용담도 나눴지요. 피곤해진 시드그렉은 잠시 혼자 있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기 방으로 가려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계단을 올라 모우란의 방으로 향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방은 당신께서 계셨던 그대로 정갈히 정리되어 있었죠. 모포는 곱게 접혀 돌침대 위에 얹혀 있었고, 다른 쓰시던 물건도 그대로였습니다. 방 한 켠의 수정 장식장도, 그 안의 겨울 폭풍도 그대로였죠. 침대 옆 서랍장 안의 열쇠마저도 말입니다.

시드그렉은 열쇠를 꺼내 수정 장식장을 열어보았습니다. 장식장이 열리자 겨울 폭풍은 더욱 차갑고 시린 기운을 뿜어내었죠. 평생의 전우를 잃은 뒤 이제껏 고독히 홀로 남아 있었기에 그랬던 걸까요? 날에 새겨진 네 개의 룬이 뿜는 진동하는 소리가 방에 울려퍼졌습니다.

“때가 되면 꺼내주마. 할아버지가 휘두르시던 네가 만족할만큼 내가 훌륭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드그렉은 겨울 폭풍의 자루를 만지며 그리 말했습니다. 겨울 폭풍에 닿았던 손 끝에는 얕은 서리가 맺혀있었습니다. 다시금 모든 것을 원래 자리에 놓고 방을 나서기 직전, 시드그렉은 돌 침대 위에 무언가 흰 빛이 뭉쳐 일렁이는 듯한 모습이 보인 것만 같았습니다.


다음 날 마저 한나절을 집안에서 보낸 시드그렉은 그만 나설 채비를 했습니다. 산양에게 수레를 달고 맥주통을 가득 실었죠. 시드그렉은 가족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토그란드에게는 모조리 허풍이었다고 마지막으로 덧붙였습니다. 토그란드는 돌아왔을 때는 자기가 그 허풍보다 훨씬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리라 말했죠. 시드그렉은 산양의 고삐를 끌었습니다. 산양은 잠시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지만 움직였습니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습니다.

성벽 앞은 어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어제는 엄숙하고 진지했지만, 지금은 아주 불안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병사들이 관측을 위해 작은 구멍을 뚫어둔 성벽 앞에 모여 바깥을 바라보며 웅성대고 있었죠. 이를 본 시드그렉은 느낌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계단 난간에 산양의 고삐를 잠시 매어 두고, 시드그렉 또한 계단을 타고 성문 위로 올라 바깥을 바라보았습니다.

호수 너머에는 불타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순찰자 오두막이었죠. 주변의 천막도 함께 하나의 큰 불덩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시드그렉이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입을 벌린 그 순간,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성채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그 무거운 진동과 함께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졌죠. 성채 위에 얹혀진 산 봉우리에 무언가가 내려앉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뒤이어 거대한 화염 줄기가 얼어붙은 호수를 절반으로 쪼개버렸습니다. 마치 화염으로 된 거대한 창이 그 촉으로 종잇장을 찢어버린 듯한 모양이었죠. 모두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공황할 때, 바깥이 갑자기 밤이 된 것마냥 어두워졌습니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구멍으로 보이는 하늘을 모조리 가려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채를 지나쳐 날아간 뒤, 다시금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붉은 빛깔이 구멍을 가득채웠습니다.

“용이다!”

그제서야 병사들은 크게 외치며 징과 종을 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시드그렉은 덜덜 떨다가, 겨우 네 발로 기어 계단으로 향했습니다. 난간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성문에서는 무언가 아주 단단한 것으로 두드리는 소리와 긁는 소리가 났습니다. 용이 성문에 발톱을 가져다 댄 것입니다. 마치 고양이가 처음 본 것이 놀잇감으로 적당한지 가늠해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문 위에선 병사들이 노포를 쏘고 있었고, 그 아래선 전사들이 성문에 바윗돌과 나무둥치를 덧대고 있었습니다. 시드그렉은 이 상황을 성채 전체에 알려야 했습니다. 그는 순찰자였으니까요. 시드그렉은 계단에서 내려오자마자 묶어뒀던 산양의 고삐를 풀었습니다. 하지만 산양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바닥에 주저 앉아 벌벌 떨고만 있었죠. 시드그렉은 산양 허리 위에 올라타 힘껏 고삐를 당겼습니다.

그 순간, 성문 위를 불길이 휩쓸었습니다. 불길에 휩싸인 한 병사는 팔다리를 애처롭게 휘저었지만, 갑옷이 녹아 살같 위를 흐르자 곧 쓰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용의 아가리에서 뿜어져나오는 불에 밀려나간 노포가 시드그렉의 앞에 떨어졌습니다. 시드그렉은 산양을 버리고 팔다리를 미친듯이 휘저으며 뛰쳐나갔습니다. 앞에서 달려오던 전사 하나와 부딪힌 시드그렉은 자리에 주저앉아 토악질 했습니다. 욕지거리를 뱉어냈습니다. 현재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정말로 용이라고?

그 순간, 규칙적으로 철컥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시드그렉이 고개를 들자 그 앞에 있는 것은 수십명의 난쟁이들이었습니다. 아니, 그냥 난쟁이가 아닌, 장자들이었죠. 그 선봉에 선 것은 형 토그란드였습니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문의 갑주를 걸치고, 하나하나 선조의 손을 거친 장비를 쥔 그들. 그것은 가문의 장자의 의무였습니다. 모든 특혜와 온 가문의 존중을 받지만, 위협이 닥치면 자신의 가족과 형제가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희생하는 운명 말입니다. 이제 그들의 몫을 다 할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토그란드는 엎어져 있는 동생 앞에 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내 형제, 시드그렉.”

“……. 형.”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이제 네가 가족을 이끌어야 한다.”

토그란드는 시드그렉을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습니다.

“아버지께는 미안하다 전해드려.”

토그란드는 시드그렉의 등을 집 방향으로 밀치고, 다시금 진군하는 장자들에게 합류했습니다.

성문 정중앙에는 두꺼운 바윗돌이 태양과 같이 둥그런 형상으로 빛을 뿜으며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성문을 보강하기 위해 덧댄 금속들은 부글대며 끓는 소리를 내었죠. 토그란드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의 전우들, 형제들이여. 우리는 가문의 첫번째 자손이다.”

“선조들의 무구가 우리와 함께 있고, 그분들께서 우리를 지켜보시니!”

장자들은 그의 이야기 말에 구호를 외치며 답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운명이라면, 훌륭하게 마무리 해주자!”

“우리는 산맥의 암석과 같노라!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리라!”

용이 녹아내린 문짝을 두들기고 있었습니다. 장자들은 그 소리에 지지 않도록 방패를 두드렸습니다.

“조금 뒤면 선조께서 끝없는 고기와 술로 잔치를 배푸실테니, 그 전에 배라도 좀 꺼트려보자! 전당에 계신 영감탱이들, 술 없어 쩔쩔 매는 꼴을 한 번 보자!”

“장자는 숙이지 않는다! 굽어지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꺾이고, 부러지고, 깨어져서 죽으리라!”

곧 육중한 성문이 찢어졌지만,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조른하르트 집안에선 피난처로 향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리스밀라는 빵을 나눠주고, 멜스란은 도끼를 휘두르며 피난 행렬을 지휘중이었죠. 시드그렉을 보자, 멜스란은 잠시 도끼를 내리고 아들을 바라봤습니다.

“이리 오너라. 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순간이 왔구나.”

멜스란은 품에서 열쇠를 꺼냈습니다. 모우란의 열쇠였죠.

“중요한 걸 두고 갔더구나.”

멜스란이 리스밀라를 돌아보자, 리스밀라는 여러 빵 바구니 옆의 수레에 실린 겨울 폭풍을 가리켰습니다.

“이들의 지휘는 네게 맡기마. 나는 아버지만큼 강하지는 않다만, 이런 나라도 놈을 막으러 가야 하지 않겠느냐?”

멜스란은 그렇게 말하고 백은의 전당으로 달려갔습니다. 백은의 전당에서 성문으로 바로 통하는 길의 관문인 용의 단두대로, 성채의 심장부이자 300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용의 목을 썰어버린 곳으로요. 멜스란은 장남의 운명을 짐작한 듯, 중얼거렸습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시드그렉이 겨울 폭풍을 들어올리자, 겨울 폭풍은 시린 빛을 뿜으며 웅웅거렸습니다. 반가운 것인지, 근처에 용이 있는 것을 알기에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피난처에 가까워가자, 다른 클랜의 행렬 또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파르커스와 누른이 업혀가는 것을 보아, 저쪽 행렬은 기술자 클랜임이 분명했죠. 피난처가 광부 클랜의 거주지 근처였기에 광부 클랜은 이미 피난처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두 대피하자, 피난처의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겨울 폭풍의 빛이 피난처의 반대쪽, 용과의 전투가 벌어지는 홀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시드그렉은 그걸 보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시드그렉은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피난처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자신이 맡은 일은 피난 행렬의 지휘였을 뿐이니까요.

시드그렉이 그렇게 빠져나오자, 그 밖에는 그처럼 피신처로 가는 척 하면서 슬쩍 빠진 전사들이 몇 있었습니다. 각자 인사를 하고 다 알면서 남다니 제정신이 아니라며 서로를 농담삼아 가볍게 비웃었죠. 그들은 용이 있을 곳, 백은의 전당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백은의 전당의 모습은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악몽을 재단해내는 이가 있다면, 혼신의 힘을 다한 작품이었겠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타거나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 모습이 비치는 안구마저 그로부터 불어오는 열풍으로 인해 끓어오르는듯 했죠. 또한 수염은 바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끝에서 불티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난쟁이들은 점점 느력졌습니다. 피부가 녹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신은 강철 군화가 녹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쇳물이 바닥에 쩍쩍 달라붙었습니다. 겨울 폭풍을 든 시드그렉만이 앞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아가던 시드그렉의 눈에 마침내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도끼와 방패를 쥔 멜스란과 불을 뿜는 용과 싸우는 모습이었죠.

용이 꼬리를 휘두르자 멜스란은 이를 날렵히 뛰어넘고 용에게 달라붙었습니다. 용이 물러나면서 불을 뿜어내자 멜스란은 방패로 열기를 막아내며 굴러서 불길의 범위에서 벗어났죠. 용이 벌레를 쫓든 앞다리를 휘두르면 멜스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용의 품 쪽으로 회전해 피하며 도끼로 용의 팔을 갈랐죠. 상처는 꽤 깊어보였습니다. 용이 다른 쪽 앞다리로 지면을 내려찍자, 멜스란은 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며 충격을 반동 삼아 도약해 높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용의 가슴을 향해 추락하며 도끼를 찍어냈죠. 용은 잠시 움찔하며 고통의 신음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전투는 이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인상적이구나. 무기가 더 좋았더라면 치명상을 입혔을지도 모르겠거늘…….”

도끼를 쥔 채 가슴에 매달린 멜스란을, 용은 우악스럽게 움켜쥐어 으스러뜨렸습니다. 구겨진 멜스란을 벽으로 던지고, 용은 가슴에 박힌 도끼를 뽑아냈습니다. 비늘 한둘이 도끼가 뽑힘과 함께 후둑, 하며 떨어져나갔습니다. 용은 티끌만한 난쟁이 도끼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발톱을 튕겨 날려버렸습니다.

멜스란은 도끼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갈비뼈가 으스러진 채 필사적으로 그 방향으로 기어갔습니다. 두 걸음 정도로 가까웠지만, 거기까지 닿는데 걸리는 시간은 영겁과 같았습니다. 용은 발톱으로 바닥을 긁어 도끼를 저 멀리 날려버렸습니다. 그러곤 그 발을 슬며시 멜스란에게 뻗었죠.

용은 두 발톱으로 멜스란의 어깨를 짓누른 채, 그 가운데 발톱을 멜스란의 위로 들어올렸습니다. 마치 머리와 가슴 중 어디를 꿰뚫을까 고민하는 듯 했습니다. 용이 입을 열었습니다.

“용의 파멸이라 불리는 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그는 어디있나?”

“그는 죽었다. 내가 바로 그 아들이다!”

“아닙니다, 아버지! 이봐! 용의 파멸이 여기있다!”

시드그렉은 그렇게 외치며, 겨울 폭풍을 치켜들고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거리는……. 마치 멜스란과 도끼가 그러했듯, 닿을 수 없었습니다. 멜스란은 용의 발톱 아래 끼인 채 아들을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웅얼이다 곧 온 힘을 다해 용의 발톱을 잡고 들어올리기 시작했죠. 용은 시드그렉을 흘깃 보더니 무시하고 다시금 장난감에 집중했습니다.

멜스란이 용의 발톱을 높이 들자, 용은 그 속도 그대로 앞발을 들어올렸습니다. 멜스란은 천천히 발톱을 붙잡은 채 들어올려졌습니다.

“기대하게 했나? 미안하군. 장난이 심했어.”

용은 멜스란을 쥔 채 천장을 향해 숨결을 뿜어냈습니다. 불길의 장막이 천장에 드리우고, 주변의 잔해들을 부스러뜨리며 아래로 천천히 내려왔죠. 시드그렉은 용의 손아귀 속에서 불타 사라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노성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용이 점점 커질 뿐이었습니다. 닿지 못하는 영원과 같은 시간이 흐르고, 용은 질렸다는 듯 두 날개를 활짝 폈습니다.

무수한 상처와 흉터로 가득한 피막. 화염이 그 주인을 칭송하듯 피막 뒤로 이글거리며 빛을 비췄습니다. 용이 날개를 크게 펄럭이자, 불길의 장막은 휘몰아지는 바람을 타고 거대한 화염의 폭품이 되어 작렬하는 열기와 잔해를 흩뿌렸습니다. 시드그렉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불타 부스러진 잔해, 녹아내린 파편들 사이에서 시드그렉은 깨어났습니다. 온몸에는 물집과 상처가 가득했고, 수염과 머리칼은 대부분 타버렸지요.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겨울 폭풍은 그의 옆에서 녹았다 차갑게 식어 굳어버렸습니다. 그 머리에 새겨져 있던 룬은 약하게 빛을 뿜다가, 시드그렉이 깨어나 바라보자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서서히 빛을 잃었습니다.

시드그렉은 도대체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겨울 폭풍의 냉기 때문에? 조상의 가호 덕분에? 시드그렉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성채의 주민들이 피신한 피난처를 바라보았습니다. 피난처의 입구는 녹아있었습니다. 그 주변에는 잿더미와 까맣게 타버린 쇳조각만이 널려있었습니다. 그 배열된 방향으로 보아, 용암이 그 안으로 흘러들어간 것 같았죠.

시드그렉은 비척비척 걷다 발에 무언가가 걸려 넘어졌습니다. 용의 비늘을 갈라버렸던 아버지의 도끼였습니다. 시드그렉은 도끼를 들어올리고, 성채의 입구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박살난 성문 쪽에 쌓인 잔해 사이에는 하나 삐죽 튀어나온 것이 있었습니다. 도끼 자루였습니다.

시드그렉은 그것이 무언지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형의 도끼였으니까요. 잔해를 치워 도끼를 꺼내 들어보자, 도끼 끝에는 용의 비늘 조각과 끈적한 선혈이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시드그렉이 떠올려보면, 용의 움직임은 왠지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아마 토그란드가 용을 막기 위해 맞서던 마지막 순간, 필사의 힘으로 도끼를 휘둘러 그 발바닥에 상처를 입혔던 것이었던걸까요?

시드그렉은 주저않아 소리없이 오열했습니다. 용의 파멸, 모우란의 자손들은 모두 용과 맞서 싸우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용에게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습니다. 그저 시드그렉만이 그러지 못했죠. 만약 아버지가 겨울 폭풍을 들고 싸웠다면 용의 가슴을 심장째로 찢어버릴 수 있었을까요? 만약 할아버지가 형에게 겨울 폭풍을 물려주었다면 다리를 잃어 쓰러진 용의 머리를 이번에도 용의 단두대에서 썰어버릴 수 있었을까요?

그 때, 하늘에서 거센 비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너져버린 성문과 바위벽 사이로 빗물이 들어와 미처 꺼지지 않은 불길을 사그라뜨리고 쌓인 재를 씻어내 산의 깊은 곳으로 흘려보냈습니다. 시드그렉은 비를 맞으며 일어섰습니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 그저 연기만을 피워올리는 성채를 뒤로 하며, 산을 내려오는 그가 앞으로 무슨 일을 겪을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의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용의 파멸이 탄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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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날. 파티의 클레릭 플레이어 분이 그려주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