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의 파킨슨 신부 생각났다ㅇㅇ 관점을 좀 바꿔보면 훌륭한 '멋있는 광신도'지. 어째서 그렇냐면 폴랩 설정에 대해 몇 가지 알아둬야 하는데
1)일단 이 소설 설정 상 아무도 누군가가 '이게 신의 뜻이다'라고 100% 장담 못함. 그 대신 이 소설에서는 역대 교황들이 저마다 1번씩 폭포를 거꾸로 흐르게 한다거나 은빛 피를 흘린다거나 하는 등의 기적을 일으킴으로써 간접적으로 교황이 정당한 신의 대리자임을 증명함. 참고로 현재 교황은 죽은 선대 교황을 부활시킨 적 있음
2)근데 현재 교황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이 소설에선 정교 분리가 잘 안 되어 있고, 현실 중세처럼 교황이 세속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함) 무고한 특정인을 암살할 계획을 세움. 나름 정당화할 만한 대의가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교황 씩이나 되서 무고한 사람을 암살하려 하는 건 심각한 죄악임
3)파킨슨 신부는 테리얼레이드라는 악명 높은 무법지대의 유일한 신부. 온갖 흉악 범죄자와 불한당들로 가득한 테리얼레이드에서 오직 신앙 하나로 교회 세우고 미사 집전하고 불량배들이 교회 불태우면 그거 혼자 다시 짓고 해가면서 버팀
4)악당들 상대로도 가능한 피 안 보고 해결하려고 하며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진짜 글러먹은 상대다 싶으면 죽인 적도 있다는 암시가 있음. 그 와중에 어느 정도 가치관도 변했고 그럭저럭 최소한의 운신은 가능할 정도로 악당들 사이에서도 나름 인정받게 됨. 객관적으로는 여전히 선인이지만 종교적으로는 문제 소지가 있음
5)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교황의 음모를 알고 '정당한 신의 대리자인 교황이 하는 일인데 일개 신부에 불과한 내가 막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고 미친듯이 고민하다가 결국 신의 뜻이 진짜 그런 건지 확인하기 위해 길을 나섦
자기 자신의 신앙이 더 중요한지 신앙의 형식과 절차가 더 중요한지에 대한 이 캐릭터의 고민은 작품 전체의 주제와도 관련이 있다. 현실에서야 당연히 형식이 덜 중요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형식과 절차를 통해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걸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무게감이 실리지.
rpg에서도 멋있는 광신도 캐릭터를 그럴싸하게 묘사하려면
1)기본적으로 상식적인 선에서의 정의와 선에 헌신할 것(그리고 그 캐릭터가 섬기는 신의 교리 역시도 일단은 비교적 공감 가능한 '선'에 가까울 것)
2)신앙을 핑계로 이교도를 고문한다거나 학살한다거나 하는 짓 가능하면 하지 말 것. 광신도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이런 거다 보니까 마스터로선 이런 이벤트 들이밀고 선택을 강요하고 싶어지기 쉬운데 그러면 멋이 없어짐
3)캐릭터의 광신성을 살리면서도 나름의 간지를 지켜주려면 이교도를 고문하느냐 마느냐 같은 거보다는 마스터가 신앙적 이상보다는 현실적인 조건이나 절차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교단의 입장을 제시하고는 상급자의 입으로 "지금까지 늘 이렇게 했지만 신께선 벌하지 않으셨다, 이 정도는 허용 범위 내란 증거다" 같은 대사 치면서 어려운 선택을 하게끔 하거나 타락한 동료 성직자 npc(현실로 치면 빤스목사 같은 작자)를 내보내 어떻게 대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는 이벤트 같은 게 있어야 함. 물론 좋은 플레이어라면 자신의 신앙이 교리나 교단의 룰보다 우선한다는 식으로 자기 pc를 움직이겠지. 그 과정에서 캐릭터가 소중하게 여기던 다른 무언가를 희생함으로써 광신성이 드러나는 거고.
결론:마스터와 플레이어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함
똥3의 티리엘도 그게 결과적으로 성역 세계의 인간들을 구하는 게 되었을 뿐 '정의에 대한 광신'에 찬 존재라고 볼 수 있지. 특히 짤방으로 유명한 '내가 바로 정의다!' 대사 같은 거 보통은 악당 광신도가 자주 치는 대사잖아.
티리엘은 진짜로 정의라는 미덕이 인격을 가진거 맞지 않나?
정의의 대천사가 정의를 위해 천사라는 정체성을 버린 셈이니 신념에 미친놈이라는 관점이 썩 틀리진 않는듯?
보충:마스터와 플레이어의 적극적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악 캐릭터를 pc로 운용하는 것과 비슷함. 캐릭터 자체만 보자면 트롤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조율에 따라선 플레이에 매력적인 긴장감을 불어넣는 갓캐가 될 수 있지. 너무 어렵게 생각할 건 없고,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고 소중히 여긴다고 꾸준히 어필해 왔던 다른 무언가를 결정적인 순간에 신앙을 위해 거리낌 없이 포기하는 것만 잘 해도 됨. 뒤집어 보자면 평소에 뽀 디 엠페라 입에 달고 다니기보단 평소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 평범한 캐릭터임을 어필하다가 그런 타이밍이 왔을 때 신앙을 위해 그걸 할 기회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 던지는 게 더 광신도다움.
예를 들자면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송가를 불러 신을 찬양하는 게 그 pc의 큰 즐거움이었는데 악마의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을 구하려면 악마에게 다른 뭔가를 내 줘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pc들이 고민하고 있는데 시크하게 단검을 뽑아 자기 혀를 잘라내 악마에게 내밀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웃어 보이면 멋있으면서도 섬뜩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