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도 짰고 준비도 완벽하다. 이제 대망의 첫 세션이다! 이번 글에서는 설명을 하고 예시를 붙이는 대신, 플레이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을 하나 하나 살펴보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살펴보겠음. 아, 그 전에 한 가지.
테이블 매너/안전
중요하니까 미리 강조하고 넘어가겠음. 제발 테이블 매너 지키셈.
테이블 매너가 뭔지는 굳이 써 줄 필요가 없을 거라고 봄. 좆같지 않은 사람이 되라는 걸 일일히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테이블 상에서의 안전에 대해 말하겠음. 트위터 쪽에서 많이 쓰는 용어긴 한데, 나도 심리적 안전도 안전이라고 보는 쪽이라서.
누구나 별로 다루고 싶지 않은 주제가 있음.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사람 앞에서 사고의 현장을 자세히 묘사하는 게 무례하다는 건 다 동의할 거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이를 가지고 있음.
여기서 "아니, TRPG에서 불편한 주제 좀 다룬다고 트리거 걸려서 뒤지기라도 함?" 이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어지간히 심하지 않는 이상 화제가 나오면 호흡곤란에 걸린다던가 플래시백을 겪는 케이스는 극소수겠지? 근데 테이블을 뜰 때 찜찜하고 논 거 같지도 않고 계속 곱씹게 되고 생각할 수록 짜증나고... 이게 심리적 안전의 개념임. "내가 겪고 싶지 않은 감정을 강제로 겪게 되는 것." 이렇게만 쓰면 또 쿨찐들이 "감정은 원래 통제할 수 없는 거고~ 다 그러고 사는 거고~ 이게 다 프로예민러 때문이고~" 라고 할까봐 덧붙이는데, 우리가 지금 조국과 대의를 위해서 감정을 억누르고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니잖아? 재밌자고 모인 건데 재미가 없게 하면 왜 모인 거임. 걍 집에서 롤이나 하지. 구체적으로 테이블에서 쓸 수 있는 안전핀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하고, 여기서는 시작하기 전에 다룰 주제와 나타날 수 있는 묘사, 폭력/성 관련 내용을 고지하고 합의를 보고, 플레이 중에서도 언제든지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라는 걸로 마치겠음.
마침내 테이블에 둘러앉은 A와 갑, 을, 병, 정은 플레이의 수위와 주제에 대해 합의를 마치고 게임을 시작한다. A는 준비해온 인트로를 읽으려 하지만, 병은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 것 같다며 캐릭터들 간 RP를 좀 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 갑, 을, 병, 정은 적절하게 캐릭터 RP와 자기소개를 시작하는데 큰 영양가는 없었고, 특히 병의 캐릭터 반예림의 (자칭) 도도한 츳코미 때문에 늘어졌다. 10분 후에야 갑, 을, 병, 정은 미술실 앞에 모이지만, 이번에는 을의 캐릭터 한민지가 흉측한 기운이라는 말에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며 자신에게 수상한 기운의 정체를 알아낼 요술이 있는지 시트를 뒤적거리기 시작한다(시트를 보면 알겠지만, 없다). 요술의 효과를 적어놓지 않아서 노트북을 켜고 룰북을 보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인트로, 인트로, 인트로!
1편에서 말했던 내용을 다시 강조하겠음. 시작 부분은 마스터가 TRPG 내에서 서술권을 독점하는 유일무이한 부분임. 이걸 낭비하지 말 것. n회차 세션이라면 기존까지 쌓아온 플레이가 있으니 뭘 할지가 비교적 명확하지만, 1회차에서는 무조건 강하게 가져가야 함. 플레이어들이 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냐고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는데, 정 그러면 이게 끝나고 간단하게 회상씬을 준다고 하거나, 단호하게 RP는 나중에도 할 수 있고, 상황 중에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셈. D&D는 그냥 "선제권 굴리세요!" 부터 외치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음. 그리고 위에서 나온 예시처럼 초보들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뭘 해야할 지 숙지하지 않은 상황이 있을 수 있으니, 마스터 입장에서도 캐릭터 시트를 파악해서 캐릭터가 뭘 할 수 있을지 알아두는 게 좋음. 아예 보조 핸드아웃을 배포하면 베스트지만, 노력이 많이 들겠지.
요술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을. 하지만 한민지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시트를 뚫어지게 보던 와중 문을 조사한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앞에서 A는 이 문에 딱 봐도 수상한 기운이 풍긴다는 것 외에는 정해놓지 않았기에 없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갑도 동조해서 신비 판정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기운을 풍기는지 조사하려고 그러고, 심지어 문의 물질적 구성요소까지 분석하려고 하는데...
의미 없는 선언은 넘겨라
손해보지 않겠다는 의지인지, 아니면 이걸 텍스트 어드벤처로 착각해서 모든 선택지는 한번씩 다 눌러봐야 하는 강박관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간혹 위와 같은 상황이 나온다. 이 때 쓸 수 있는 금언을 명심하자. "주사위는 성공과 실패 모두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때만 굴린다." 물론 이게 딱히 큰 도움이 되는 금언은 아니지만, 이런 시추에이션에 놓였으면 저 판정이 성공하든 안하든 달라질 건 없는 게 명백하니 굴림은 필요없다. 아니, 그냥 처음으로 조사를 시도하자마자 "딱히 특이할 점은 없고, 다른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 조사해도 특별한 특징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선언해 주자. 물론 준비되지 않은 조사/선언에도 즉흥적으로 대응해서 떡밥 살포/플롯 진전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기는 하지만, 이미 준비된 플롯이 있는 상황에서 그럴 필요는 없다.
겨우겨우 문을 열고 전투에 돌입한 상황. 방어가 8이나 되는 전투특화 김수정이 앞에 나서서 어그로를 끌고, 뒤에서 반예림이 제압사격을 걸며 어둑태생들을 몰아붙인다. 주사위 굴리는 법이나 의지력이나 위습 같은 자원 개념도 자연스럽게 숙지가 되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A, 그 때 맹금희가 송희정에게 달려들어서 붙잡기 판정을 한다고 선언한다. 갑의 선언은 아주 정당한 선언이기에 막을 명분이 없다.(뉴쨍은 디앤디에 비해서 그래플이 훨씬 유용하다) 문제는 A가 그래플 규칙을 숙지하지 않았다는 것. A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선언하면서 pdf를 뒤지기 시작하고, 시간이 끌리자 을과 병은 휴대폰을 힐끔거리기 시작한다...
속도 > 정확성
이상적인 상황에서 마스터는 모든 규칙을 숙지해서 플레이어들의 선언에 "하하! 그건 이 규칙을 적용하면 되겠군요!" 라고 말하겠지만, 솔직히 룰 파트만 100페이지에 달하는 룰북을 다 외울 수 있는 상황은 극히 드물다. 특히 모사형/게임주의적 규칙에 흔한 [부위 공격 명중 페널티 및 공격 시 효과]나 [은엄폐 기준 및 효과], 그리고 예시에서도 나온 모든 규칙에서 항상 악명 높은 [그래플링 규칙] 같이 표가 덕지덕지 붙은 경우 더더욱. 이런 건 미리 마스터 스크린에 붙여두거나, 룰북에 북마크를 해놓거나, 따로 적어두는 게 가장 좋지만,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는 없음. 이럴 경우(특히 룰북이 pdf라서 찾기 곤란할 경우) 그냥 쿨하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규칙을 적용하셈. 팀원들에게 룰이 잘 기억나지 않으니 이렇게 적용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다음부터는 제대로 찾아서 하겠다고 합의를 보는 것이 좋음. 물론 플레이어들이 속도보다 정확성을
원하면 어쩔 수 없지만, 몰입감과 템포를 위해서는 룰의 엄밀함을 희생해서라도 끊김없이 진행을 하는 쪽이 나은 편이 많음.
A는 그래플링 규칙을 찾았고, 희정과 금희는 뒤엉켜 땅바닥을 뒹군다. 어쨌든 공수 요술이 있는 금희는 희정을 땅바닥에 눕혀서 제압시켰고, 어둑태생들도 모두 처치된다. 문제는 PC들이 희정을 반성하라면서 그냥 묶어두고, 마도서를 찢어버린 후 다시 하굣길로 가기 시작했다는 것. 시작한 지 40분만에 플레이가 터질 위기에 처했다...
필요할 때는 메타적으로
자, 이런 경우는 특별히 답이 없지? 송희정이 자기 가정사를 떠들게 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솔직히 플레이어들이 너무 뻔한 심문 기회를 그냥 넘기고 간 건 심하게 예상외임. 송희정이 여기서 갑자기 니들이 뭘 알아! 하면서 말 많은 악당 모드에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여기서는 메타적으로 나가셈. 몇몇 마스터들, 특히 합의론이나 샌드박스를 어설프게 배운 마스터들은 플레이어들에게 직접 지시하는 게 레일로드 같다며 싫어하는데, 아니 레일로드 같아도 할 때는 해야지 어떻게 함. 플레이어들한테 대놓고 "혹시 얘한테 다른 질문 하실 거 없나요?" 라고 물어보게 하는 거 나쁜 거 아님.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직접 "여기서 심문을 하셔야 스토리 진행이 됩니다" 라고 하셈. 여기다 대고 TRPG의 자유도 운운하는 친구는 라그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주의할 것.
벌써부터 흔들리는 A의 마법소녀 세션, 그 이야기는 첫 세션(2)에서 계속된다!
2편은 폭파된 세션 정리를 다룰 것 같은 이유가 뭘까
어... 반쯤 정확함.
개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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